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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77억 명의 인구, 77억 개의 젠더

김현진 | 306호 (2020년 10월 Issue 1)
DBR의 ‘찐 팬’들이라면 모두 아시겠지만 DBR 제작진은 HBR(하버드비즈니스리뷰) 한국어판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HBR 콘텐츠를 접하면서 기자들은 미국의 지식인들이 젠더 이슈와 관련해 사회와 나누는 고민의 깊이와 담론의 수준에 놀라곤 합니다. 올 초에는 ‘트랜스젠더 친화적 회사 만들기’란 주제까지 등장했는데 조직 내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기업의 디테일한 배려를 촉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한편 HBR는 2014년부터 매년 말, 글로벌 기업 CEO들의 경영 실적, 사회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Best-Performing CEO’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으레 영광의 얼굴이 실리리라 예상한 11-12월 호 미국판 HBR의 에디터 레터에는 이런 내용이 실릴 예정이라고 미국 제작진이 알려왔습니다. “랭킹에 오른 대부분의 CEO가 백인 남성이기에 다양성 부족 현상이 빚어지는 현실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올해는 리스트를 게재하지 않기로 했다.”

여성 및 유색 인종에게 여전히 ‘유리 천장’이 드리워진 현재 상황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기업들에 보내는 항의인 셈입니다.

오늘날 이처럼 성차별, 비존중을 바탕으로 한 젠더 이슈는 인종차별과 더불어 사회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해로운 불씨’로 꼽힙니다. 특히 최근엔 조직 내 성폭력 사건 관리를 넘어 애초에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게 막을 수 있는 리더급 여성의 등용 및 육성, 조화로운 조직문화 조성 등으로 관심의 폭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특히 2017년 우버의 성희롱 내부 고발자가 촉발한 ‘미투’운동 이후 직장 내 성폭력 이슈는 이제 ‘하필 우리 회사에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이 아니라 마치 전염병처럼 회사가 철저히 예방하고 대처해야 하는 리스크가 됐습니다. 기업의 존재 의미라고도 할 수 있는 경영 성과에도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속속 입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폭력 등 윤리적 흠결이 드러나면 기업의 청렴도 평판에 악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기업의 생산성, 투자에 모두 큰 타격을 미친다는 사실은 최신 연구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수합병 시장에선 인수 대상 기업의 경영진이나 간부급 직원들이 성희롱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는지를 기업 가치 지표로까지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조직 내 다양성 확보나 인권 보호라는 대의(大義)에서뿐 아니라 재무적 손실을 막는 현실적인 이유를 위해서도 젠더 이슈 관리에 고삐를 죌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텍사스대 알링턴 교수진은 성희롱을 전염병에 비유해 공공 보건 모델에 기초한 3단계 접근법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풀면, 1단계에서 감지된 리스크의 ‘씨앗’(직장 내에 특정 성의 비율이 현저히 높음)과 2단계에서의 ‘새싹’(언어적 성희롱 정도는 허용됨)을 조기에 발견해 솎아내면 실제 3단계(극단적인 성폭력 사건 등)로의 확산을 예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조직 내 성폭력 이슈를 전염병처럼 적극적인 예방 및 진압 대상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면서 ‘젠더 중립성(Gender Neutrality)’의 중요성도 제기됩니다. 흔히 알려진 ‘젠더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이 젠더 이슈에 유난하게 반응하는 ‘프로 불편러’ 여성들의 예민한 역린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있다면서, 젠더 중립성은 고정된 성별 역할 구분에 반대하며 궁극적으로 양성이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그대로의 자아를 만끽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 모든 개념은 젠더적 정의(Gender Justice)를 지향하게 합니다.

인간 개개인의 개성을 살리는 ‘초개인화’ 키워드에 맞춰 제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간의 구분은 남녀 두 집단이 아닌, 세계 인구수에 맞춘 77억 개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이번 스페셜 리포트 기고문에 공감이 갑니다. 77억 개의 집단은 ‘차별’이 아닌 ‘차별화’를 낳으며 다양성에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이번 호 마감 시기에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으로 활약하면서 남녀 모두 성별에 의한 차별을 받지 않게 하는 굵직한 판결들을 이끌어 낸 결과, ‘젠더 영웅’으로 존경받아온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영면했습니다. 쉽기도 어렵기도 한 ‘존중’이란 가치를 우리 조직 내에도 이식하려고 노력한다면 누구나 작은 영웅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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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편집장•경영학박사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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