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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여진정벌-잊혀진 전쟁, 잊혀진 교훈

임용한 | 15호 (2008년 8월 Issue 2)
영화 중에는 특공대나 특수부대의 활약상을 그린 전쟁영화가 많다. 대규모 전쟁영화는 예산이 많이 들고 촬영도 어렵지만, 소규모 부대나 특수부대 용사들의 얘기는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병사들의 용기와 두려움, 헌신과 갈등을 세밀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적진을 뚫고 수행하는 병사들, 고립된 요새에서 끝까지 싸워 승리하는 용사들은 할리우드에서 좋아하는 극적인 영웅담의 소재가 된다. 물론 우리나라 전쟁사에도 세계적인 전쟁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일화들이 있다. 단지 잘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져있을 뿐이다. 이런 전쟁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에 소수의 무사들이 함경산맥의 좁은 골짜기를 조심스럽게 헤쳐 나가고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지금의 함북 길주 동남쪽에 자리한 웅주성으로 연락문서와 약재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웅주성을 통하는 도로는 여진족이 차단한 지 오래였다. 유일한 길은 해상보급로였지만 그리 안전하지 않았으며 기후 탓에 연락이 두절될 때가 많았다. 이로 인해 작은 배로 찔끔찔끔 보급을 유지하되 급한 연락이나 비상용품의 수송은 이들과 같은 소수의 특수부대원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고려군은 여러 개의 성에 분산되어 있었으며, 이 성들을 연결하는 도로는 여진족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였다. 여진족은 평소에는 소부대를 이용하여 보급부대를 습격하고 성을 고립시키다가 병력이 모이면 적당한 성을 골라 공격하는 전술을 썼다. 이렇게 싸워온 게 벌써 2년째였다. 고려군은 성들을 악착같이 사수하고 있었지만 식량과 보급품이 부족했으며, 반복되는 전투와 질병으로 전투력이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지형 파악 잘못한 고려군의 사투
고려군이 이토록 어려운 전쟁을 하게 된 이유는 함북 지역의 지형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함경도 해안지방에서 개마고원과 백두산을 넘어 간도 지방으로 들어가는 루트는 험한 산악지대인 데다 중간에 도시마저 없어 대규모 군대의 이동이 어려울 것이라고 고려군은 판단했다. 따라서 함경도 해안선을 따라 북진해 함경산맥과 마천령산맥이 교차하는 지점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마천령산맥을 향해 종대로 성을 쌓아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사실 백두산 북쪽은 지형이 갑자기 바뀌어 완만한 고원에 평야가 펼쳐져 있었고 도시도 있어 군대가 개마고원을 지나긴 어렵지 않았다.
 
여진족의 대부대가 이 길을 따라 내려와 고려군의 측면으로 침투했다. 고려군의 방어선은 좌향좌를 해야 했다. 함경도 해안선의 좁은 외길을 따라 종대로 배치한 종심 깊은 방어선이 갑자기 종잇장처럼 얇은 일렬횡대의 방어선이 됐다. 게다가 바로 뒤는 동해바다여서 후방 보급선도, 퇴로도 없는 배수진이었다. 함흥에서 길주까지 연결하는 한 줄의 선이 방어선이자 보급로가 됐다. 단지 불안정한 해상보급로를 간간이 운영할 뿐이었다. 한마디로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고려는 이미 이 방어선에 9성을 쌓았고, 정착지를 형성하기 위해 일반 주민까지 이주시켜 놓은 상태였다. 고려군은 버티기로 결정하고 2년을 싸웠다.
 
진정 어려운 싸움이었다. 여진족이 게릴라전을 시도할 때 고려의 장수들은 끊임없이 성과 성 사이의 도로를 순찰하며 통로를 확보했다. 보급이 불충분하니 성에 갇힌 병사들은 굶주림과 병으로 고통 받았다. 부자(父子)가 함께 참전해 서로 다른 성에 주둔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친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도 아들은 약을 보낼 수도 가볼 수도 없었다. 마침내 참다못한 막내아들이 연락병을 따라 포위를 뚫고 들어가 부친의 임종을 지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여진족은 하나의 성이라도 함락시키기를 바랐다. 성이 함락되면 대학살극이 벌어질 테고, 충격을 받은 고려군이 9성을 포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로 웅주성과 길주성에서 몇 차례의 격전이 벌어졌다. 2선, 3선의 기지가 전혀 없어 한 성이 공격을 받아도 다른 성이 지원을 해 줄 수가 없었다. 도와주기는커녕 서로 연락조차 끊겨 공격을 받는 줄도 몰랐다. 구원을 받으려면 고려의 국경 안으로 돌아가 구원부대를 이끌고 와야 했다. 성의 위험을 알리고 구원병을 데려오기 위해서 몇 명의 용사들이 여진족의 포위망을 뚫고 나갔다. 그들이 연락에 성공했다고 해서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여진족은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지원부대가 지나가는 길에 몇 겹의 매복과 차단진지를 설정했다. 여진족은 지원부대의 도착을 늦추기 위하여 지연작전으로 나왔고, 고려군의 철갑으로 무장한 기병인 철기들은 시간을 맞추기 위해 돌격과 돌파를 반복했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지원부대가 도착하거나 성벽이 뚫리는 순간 날이 저무는 덕에 기적적으로 함락을 면하는 극적인 상황들이 반복됐다.
 
여진 정벌은 실패한 전쟁이 아니다
2년 뒤에 고려군은 9성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하지만 여진 정벌은 결코 실패한 전쟁이 아니었다. 이들은 단 하나의 성도 잃지 않았으며, 목숨을 건 투쟁 속에서 위기에 빠진 동료들을 구했다. 고려군의 투쟁은 우리나라 전쟁사에서 가장 영웅적이고 감동적인 전투였다. 또 고려군의 전투력에 놀라고 감동한 여진족은 안전한 철수 보장을 요구했다. 여진족은 나중에 금나라를 세우고 중국으로 쳐들어갈 때도 고려와는 끝까지 평화관계를 유지했다. 이 지역은 훗날 조선 세종 때 함경도 지역을 회복하고 4군 6진을 개척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동안 우리 역사는 이 전쟁을 실패라고 단정해 왔다. 애써 차지한 9성 일대의 영토를 사대주의에 물든 나약한 문관들이 포기했다고 비난한 것이다. 이는 잘못된 결론이다. 고려시대에는 과거에 장원급제한 인물이 바로 국경의 부대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을 정도로 문신과 무신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전문 무장도 있었지만 문관과 무장을 겸임하는 사람도 많았다. 여진 정벌에 활약한 주요 지휘관과 장수들 중에도 문신이 상당히 많았다. 여진 정벌은 잘못된 정보로 인해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국제 교류와 무역이 활발하지 않아 고려가 여진족의 땅이나 정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 게 원인이라면 원인이다.
 
우리 역사가 여진 정벌에 대해 이런 잘못된 평가를 내리고, 용사들의 감동적인 전투를 잊은 이유는 사건의 결과만을 보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나약한 문신론’은 당장의 서운한 감정을 위로하고 희생양을 찾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직 운영에서 가장 나쁜 방법이다. 희생양을 찾는 방식은 도덕적으로도 비난받을 일이지만, 더 나쁜 것은 현상의 본질을 외면함으로써 진정한 교훈을 놓치고 왜곡시킨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더 큰 실패와 희생을 낳는다.
 
투혼의 원동력은 자긍심과 솔선수범
여진 정벌에서 고려군이 보여 준 투혼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철저한 준비와 훈련을 들 수 있다. 1103년 고려군은 함북과 간도 지방에 걸쳐 살고 있던 여진족이 완안부를 중심으로 단합하기 시작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고려는 과거 거란족의 결집을 수수방관하다가 거란의 침공이라는 혹독한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던 터여서 이번에는 신속하게 대응했다. 1104년 고려는 여진을 공격하지만 어이없게도 패배하고 만다. 그러자 고려군은 ‘특별한 무사들의 부대’란 뜻의 별무반이라는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고 연중 내내 강훈련을 시켰다.
 
고려군은 훈련을 통해 병사들의 실력을 키우는 동시에 소속 부대에 대한 일체감과 자긍심을 불어 넣었다. 전쟁에서는 자기 부대에 대한 소속감과 자긍심을 지닌 엘리트 부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공정하고 냉철한 이성으로 보면 그 자긍심이라는 것이 유치하기 짝이 없고, 다른 집단에 대한 터무니없는 멸시가 수반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진 정벌뿐 아니라 어떠한 전쟁사를 봐도 이런 부대의 활약은 놀랄 만하다.
 
지휘관과 지배층의 솔선수범도 빼놓을 수 없다. 고려는 여진전쟁의 중요성을 깨닫고 관료 자제들도 예외 없이 철저하게 징집했다. 그래도 여진 정벌에 종군한 지휘관과 장교들을 보면 명문가 자제보다 신흥가문 출신 인물이 많다. 이것은 선발이 공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들이 출세가 보장된 환경에서 편안하게 지내온 명문가 자제들과 달리 자기계발과 성장에 대한 강한 욕구와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최고 지휘관인 윤관만 해도 나중에는 고려와 조선의 최고 명문가가 되지만 당시에는 신진 가문이었다. 부사령관인 오연총도 마찬가지다. 동기와 능력을 지닌 장수들은 곳곳에서 창의적인 기지와 능력을 발휘하고, 병사들의 신뢰를 얻었다. 포위전과 구출작전에서 보여 준 병사들의 헌신과 용기는 이렇게 형성된 일체감의 소산이었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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