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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 朝鮮 : 광무개혁

리더의 혁신 아닌, ‘리더를 위한 혁신’의 한계

김준태 | 230호 (2017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1897년 대한제국 설립을 선포하며 황제로 등극한 고종은 야심 차게 ‘광무개혁’을 추진한다. ‘대한국국제’라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제국이 중국과의 사대관계에서 벗어난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했다.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한편 민간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고 서구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국정 전반에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했다. 광무개혁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광무개혁이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대한제국의 태생적인 한계에서 찾을 수 있다. 개혁의 목적이 황제권 강화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배 권력을 강화하는 데 급급했던 개혁은 외부 위협에 사전 대비하지 못했으며 개혁을 주도해야 할 참모진도 키워내지 못한 채 좌절했다. 과감한 혁신을 추진할 때 현대의 리더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
례다.



편집자주

조선에서 왕이 한 말과 행동은 거의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록 중 비즈니스 리더들이 특히 주목해봐야 할 것은 바로 어떤 정책이 발의되고 토론돼 결정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왕과 마찬가지로 기업을 이끄는 리더들 역시 고민하고 판단하며 결정을 내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해당 정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면밀히 성공과 실패의 요인들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정통한 연구자인 김준태 작가가 연재하는 ‘Case Study 朝鮮’에서 현대 비즈니스에 주는 교훈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짐의 덕이 부족하여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하늘이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워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와 백성들, 군사들과 상인들이 대궐 앞에 몰려와 한목소리로 호소하며 황제의 칭호를 받으라고 청하니, 짐이 누차 사양하였지만 끝내 사양할 수 없게 되어 9월17일(양력 10월12일) 백악산 남쪽에서 하늘과 땅에 고유하는 제사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는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올해를 광무(光武) 원년으로 삼았으며 왕후 민씨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중략>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敎化)를 펼쳐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 하니 천하에 선포하여 모두가 들어 알게 하라.”1

1897년 10월13일, 고종은 조선의 국호를 대한(大韓)2 으로 바꾸고 자신이 황제가 됐음을 내외에 선포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과의 오랜 사대조공(事大朝貢) 관계를 끝내고 자주독립국이 됐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중국 중심의 책봉 체제에서 벗어나 서구 중심의 만국공법(萬國公法) 체제3 로 편입한 것이다.4

그런데 왜 굳이 황제의 제국이 돼야 했던 것일까? 그것이 그렇게도 시급한 일이었을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임금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외국공사관으로 피신해 있어야 했던 나라5 다. 2년 전에는 대궐을 침범한 외국군의 손에 국모를 잃었다.6 이런 나라가 내실을 다지고 국력을 키우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비용을 써가며 황제즉위식을 올리고 겉으로 자주국임을 내세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까? <독립신문>의 논설도 ‘대황제가 계셔야 자주독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왕국이라도 황국과 같이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지금 조선에 제일 요긴한 일은 자주독립의 권리를 남에게 잃지 않는 것’7 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동아시아의 전통질서에서 왕은 황제(천자)의 신하이기 때문에 조선의 군주가 청나라의 ‘황제’, 일본의 ‘천황’과 대등한 지위에 서려면 그 역시 황제가 돼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주장이다. ‘왕의 나라’는 번국(藩國), 즉 황제에게 예속된 제후의 나라라는 것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박힌 인식이었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칭제(稱帝)’는 필요한 일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더 시급한 일이 무엇이겠냐는 것이다. 겉으로 제국이 되고 황제가 되는 것보다는 부국강병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 마련이 선행됐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조치가 당시 주한 외교사절들의 비웃음을 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본의 변리공사 가토 마스오가 자국 외무성에 보낸 전문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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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서 본 공사관에 (고종의 황제 즉위에 대한) 의견을 여러 번 묻고 다른 외교사절들에 대한 알선을 부탁한 바 본관이 왕래 방문할 때마다 각국 사절의 의향을 살폈는데 대부분 이것을 논할 만한 가치가 없다며 냉정하게 평가하고, 심지어는 광망(狂妄)한8 행위로 여기는 형세였습니다. 이에 본관은 조선 국왕의 문의에 대해 먼저 각국 사신의 의향과 태도를 전하고 ‘각국에서 승인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 행하는 것은 무익하며 쓸데없이 남의 치소(嗤笑)9 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정치를 잘하도록 힘쓰면서 국력의 발달을 기다려 서서히 행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아직 시기가 빠르다고 간곡히 권고했습니다. <중략> 그럼에도 조선 국왕은 결국 이를 결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10

일본이 조선이 황제국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황제 칭호를 가장 먼저 인정한 바 있는데11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에 따르면 일본은 독립국의 군주를 가리키는 의전용어로 단 하나의 표현 ‘코테이(皇帝)’를 사용해 왔다. 하와이의 옛 왕도 그렇게 불렀고 오직 조선의 국왕만 지금까지 황제로 불리지 못했을 뿐이다.12 일본에 ‘황제’는 외국 국가원수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이므로 고종을 황제로 부르는 것 또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위의 일본공사의 발언은 조선에 나와 있는 외교 사절들의 반응을 사실에 가깝게 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일은 이미 벌어졌고 고종은 황제가 됐다. 국호를 바꾸고 자주독립국으로서 세계 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이상 이제 그에 걸맞은 혁신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은 7년여에 걸쳐 국정 전반의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른바 ‘광무개혁(光武改革)’이 그것이다. 이 기간은 삼국간섭(三國干涉)13 등으로 인해 일본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든 때로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새 나라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가 선포됐다.14 고종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나라의 제도를 반포하여 보임으로써 정치와 군권(君權)이 어떠한가를 명백히 해야 한다. 그런 후에야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법을 준수하여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할 수 있다”며 ‘국제’를 제정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대한국국제’이다. 그런데 모두 9조로 구성돼 있는 이 국제는 황제권의 절대화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조에서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정치(專制政治)”를 내세웠고 3조에서는 “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4조에서는 황제의 권한과 권위를 침해하는 자는 “행했건, 행하지 않았건 막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규정했으며 5조에서는 황제의 군통수권과 계엄권을 명시했다. 6조에는 법률제정과 반포, 집행의 명령권을 황제에게 뒀으며 7∼9조에서는 나라의 인사권과 행정권, 외교권은 모두 황제에게 있다고 명시했다. 이는 강력한 힘을 갖는 황제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난국을 돌파해 가겠다는 의도가 있었겠지만 내각의 역할과 백성의 인권 및 재산권 보호 등을 천명한 갑오개혁의 <홍범14조>에서 크게 후퇴한 것이다. 입헌군주, 의회제도, 민중의 권리 등 발전된 정치제도에 대한 비전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하다못해 군주의 자기규제와 백성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하는 전통적 유교이념조차 모두 배제됐다. 구성원들에 대한 관심은 어디에도 없고 오직 황제권의 수호와 절대화를 통해 지배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방어적이고 수구적인 태도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와 같은 입장은 군사제도 개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국가안보라는 본연의 목적보다는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부대 양성과 체제 유지에 치중했다. 군사력 증강과 지휘체계 정비 역시 군대의 역량을 효율적으로 강화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황제가 군대를 효과적으로 장악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뒀다. 그러다보니 국가 예산의 40% 가까이를 국방비에 투입했으면서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 밖에 대한제국 정부는 양전(量田)과 지계(地契)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는 ‘양전’과 토지문서를 발급하는 ‘지계’는 외국인의 토지 침탈을 방지하고 민간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며, 이를 국가가 종합적으로 관리하겠다는 목적 아래 시행된 것이다. 세원(稅源)을 명확히 함으로써 세수를 늘리고 지세(地稅)를 정비하겠다는 이유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금융제도를 개혁하고 철도, 광산, 해운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해 그 개발과 해당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관영 공장을 설립해 상공업의 진흥을 시도했다. 모두 근대적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들이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일정 부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지만 이내 한계에 부딪힌다. 그 이유는 첫째, 중장기적인 비전이 제시되지 않았고 정책운용이 일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밀한 연구나 준비 없이 그저 서양의 것을 모방해 한 번 시행해 보는 식의 아마추어적인 대응이 계속됐다. 둘째, 정치제도나 군사제도와 마찬가지로 경제제도 역시 황실이 중심이 되고 황실재정 증대에 목표를 뒀다. 그러다보니 재정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지 못했으며 국내 산업 육성과 재정 지출 절약, 상업 발전, 국민소득 증대를 위한 노력에도 소홀했다.

다음으로 대한제국은 외세의 침탈에 맞서 근대화를 이루고 국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과 인재 양성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갑오개혁 당시 신학문을 위주로 했던 교육 기조가 대한제국에 들어서 동도서기(東道西器), 구본신참(舊本新參)으로 바뀌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는 전통 유교이념의 토대 위에 서양의 문물과 학문을 수용하겠다는 의미였다. 본질을 바꾸지 않은 채 기교만 습득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고종은 “공자의 도에 더욱 매진하라”며 전국에 유학(儒學)을 장려하는 조서를 내리고 성균관 교육을 강화하라고 명령했는데15 같은 날 서양의 신학문, 산업 전문기술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라는 조령(詔令)도 내린다.

“나라에 학교를 설치하는 것은 인재를 양성하여 지식과 견문을 넓히고 더욱 전진하게 함으로써 만물의 도리를 알고 일을 처리하여 성공시키며, 기물의 사용을 편리하게 하여 재물을 풍부하게 하는 기초로 삼자는 것이다. 현재 세계 각국의 기세가 나날이 상승하여 당할 자가 없을 만큼 부강해지는 것이 어찌 다른 데 원인이 있겠는가? 이치에 맞는 학문에 종사하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며, 정밀한 지식을 더욱 정밀하게 하고 기묘한 기계를 날이 갈수록 더 새롭게 만들어 가는 데 지나지 않는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이보다 앞서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인재가 외국보다 크게 못 하지 않은데 다만 일상적인 교육이 없기 때문에 인민의 식견이 열리지 못하고 농상(農商)의 공업(功業)이 진흥하지 못하여 백성의 삶이 날로 쇠락하고 나라의 재정도 갈수록 궁해가고 있다. 그런데 새로 설치한 학교는 겨우 형식을 갖추는 데 그치고 교육의 방도에는 어두워 5, 6년 동안 조금도 진전된 성과가 없다. 상공(商工)학교의 경우 더욱 급선무라 할 수 있으나 지난해에 명령을 내렸는데도 아직도 개설하지 못하고 있다. 대체 이와 같이 질질 끌어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개탄할 노릇이다.”16

고종은 서로 다른 학문을 함께 진흥시키라는 의미에서 정신문명과 물질문명, 인문학과 실용기술을 병진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은 서로 이질적인 사유 구조와 세계관을 가진 것으로 조화를 이루기 힘든 관계였다. 더욱이 달라진 환경 적응에 실패한 기존의 문화와 생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아니 그것을 더욱 강화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것은 애당초 잘못된 판단이었다.



결국 ‘광무개혁’은 자주독립국으로서 대한제국의 위상을 확립하고 근대화를 이루겠다는 목표를 완수하지 못한 채 좌초하게 된다. 물론 광무개혁 실패의 제1 원인은 외부 환경, 즉 일본에 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이 한반도 침탈을 다시 시작하면서 대한제국의 독자적인 개혁노력을 방해하고 무산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 변수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1875년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이래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을미사변 같은 주요 사건마다 일본은 조선에 계속 개입했고 침략 야욕을 보였다. 삼국 간섭으로 잠시 약화되기는 했지만 일본의 행태는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여기에 미리 대비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의 재침탈을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외부 환경의 압력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설령 사태의 전개를 막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비하고자 노력했다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것과는 크게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광무개혁이 실패하게 된 또 다른 원인은 개혁의 방법을 잘못 설정한 데 있다. 광무개혁은 황권과 국권을 동일시해 황실을 보호하는 데 집중하고 황제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했다. 이로써 나라를 지키고 난국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릇 과거와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리면 기존 프로세스와 가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법이다. 조선은 열강의 침탈과 서구 과학기술문명의 전파라는 이제껏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도전을 받았다. 하지만 지배층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함으로써 과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절대주의 시대 서양의 계몽군주들처럼 변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인식한 황제가 비전을 제시하고 강력한 개혁을 선도했다면 대한제국의 황제권 강화도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황제의 인식이 과거와 변함이 없고 지배층의 사고가 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권력을 강화하는 것은 곧 기존 논리와 방식을 더욱 고수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한제국의 헌법 ‘대한국국제’에 제시된 새 국가의 비전이 오로지 황제의 강력한 통치권뿐이라는 점은 이 나라의 빈약한 상상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17

아울러 전문 인력이 부족한 점, 개혁 주도 세력이 구축되지 않은 점, 개혁이 일관성 있게 추진되지 못한 점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변화에 대응하려면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역량을 갖춘 인력이 필요하다. 광무개혁의 사례에서는 이전까지 한국인들이 접한 적이 없는 국제관계와 통상법, 영어와 러시아어 같은 외국어 능력이 중요했다. 또 서양의학, 과학기술 같은 실용학문과 철도, 전화, 전기, 광산채굴 같은 새로운 분야의 전문지식을 갖춘 인재가 필요했다. 이와 같은 역량을 갖춘 인력이 공급돼야 외국의 손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인 혁신에 나설 수가 있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학교를 세우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재정을 제대로 투입하지 못해 원하던 만큼의 결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가의 재정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교육이 우선순위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개혁 주도 세력이 구축되지 않은 점도 문제였다. 김옥균, 유길준, 박영효 같은 급진개화파와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같은 온건개화파가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18 대한제국 정부 안에는 서구문명을 잘 이해하고 개혁을 이끌어갈 수 있는 전략과 능력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 혁신은 리더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 훌륭한 리더뿐 아니라 그를 보좌해 비전을 창출하고 구성원들에게 그 비전을 전파하며, 세부적인 기획을 세우고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앞장설 수 있는 참모진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한제국에는 그러한 역할을 할 만한 강력한 개혁지도부가 없었다. 나라의 개화와 근대화를 선도하기는커녕 세계질서의 변화와 문명사적 전환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갖추지 못했고,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신하도 찾기 힘들었다. 이런 여건에서 추진된 개혁은 성공하기 어렵다. 개혁이 일관성 있게 추진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광무개혁은 혁신의 성공 조건을 반면교사로 보여준다. 광무개혁이 좌절된 이유는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실패가 중첩됐기 때문이다. 일본이라는 강력한 외부 리스크에 대응하지 못했고, 내부에서는 혁신의 방향을 잘못 설정했으며, 리더십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외부 리스크는 예측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 내부적으로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역량을 개발하지 못했다. 과거 방식을 탈피하지 못했고 혁신을 주도할 선도 세력이 부재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리더의 권한 강화가 혁신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하지 않고, 그 자체가 혁신의 목적이 돼버렸다는 데 있다. 리더의 강한 힘은 혁신의 촉진제가 돼 미래를 예측하고 구성원들을 코칭하며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광무개혁의 리더십은 그 반대가 되면서 혁신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과감한 혁신을 추구하는 오늘날 CEO들도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
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 ‘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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