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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도 빛난 히딩크 리더십

최성욱 | 14호 (2008년 8월 Issue 1)
“모스크바에서 아침에 수돗물을 틀면 10분 이상 갈색 물이 쏟아진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나는 2012년까지 러시아 축구 재건을 위한 대표팀 총감독으로 일할 것이다.”
 
거스 히딩크 러시아 대표팀 감독이 2006년 10월 러시아 생활을 시작했을 때 네덜란드 축구 전문지 ‘풋발 인터내셔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히딩크 감독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전에 러시아로 건너와 제대로 성공한 지도자나 축구선수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문제투성이인 열악한 생활 환경에 추운 날씨, 자존심 강한 러시아인들의 심한 텃세까지….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인내와 노력으로 러시아에서 보낸 1년 8개월의 시간은 그가 러시아 축구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이루는 데 충분했다. 그는 2008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약체로 평가받던 러시아 팀을 일약 4강에 올려놓으며 또다시 전 세계 축구팬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러시아는 비록 준결승전에서 우승팀 스페인에 패해 아쉽게 결승 진출이 좌절되긴 했지만 그가 맨땅에서 일궈낸 유럽선수권대회 4강 달성은 신화로 불리기에 충분하다.
 
무명의 팀 변신시키는 ‘히딩크 매직’
러시아 대표팀엔 그 ‘흔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뛰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다. 당연히 모든 러시아 선수는 유로 2008과 같은 큰 국제무대에서 뛴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히딩크 감독이 무명의 팀을 세계의 정상권으로 올려놓은 것은 이번이 꼭 네 번째다. 먼저 그는 2002 월드컵에서 한국팀을 4강에 올려놓았다. 그 후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가 에인트호벤을 리그 우승으로 이끈 데 이어 2004년엔 챔피언스리그 4강에 오르게 했다. 이듬해 호주 사령탑에 오른 그는 호주의 월드컵 예선 통과를 이끌어 냈고, 본선 무대에서도 호주를 16강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번 유로 2008에서 러시아를 이끌고 다시 한 번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축구 감독으로서 한 번도 하기 힘든 이 같은 기적 같은 일을 네 번이나, 그것도 시행착오 없이 연속으로 달성한 것을 보면 절로 ‘마법’이란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감독 한 명이 11명이 뛰는 팀을 저토록 바꿔놓을 수 있을까. 그 답은 리더십(leadership)에 있다.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을 잘 뜯어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리더가 어떻게 준비하고 팀을 이끌어야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모범답안처럼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축구 등 스포츠에서 기업 경영의 시사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활발하다. 기업도 크게 보면 하나의 ‘팀’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히딩크 리더십은 오늘날의 기업 경영자와 관리자에게도 다음과 같은 여러 시사점을 전해 준다.
 
모험과 도전의 리더십
변화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는 자는 살아남기 힘들다. 시시각각 변화를 거듭하는 글로벌 시대에 과거의 영광만 곱씹은 채 현실에 안주한다면 더 이상 경쟁력은 없다. 이것은 기업에나, 축구 감독에게나 마찬가지이다.
 
히딩크 감독이 러시아를 택한 것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러시아행를 택하기 이전에 이미 충분한 부와 명예를 얻었다. 한국대표팀·네덜란드클럽·호주대표팀을 거치며 두둑한 연봉과 성과급을 챙겼다. 당시 이미 나이도 예순이나 됐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러시아에서 실패한다면 그 이전에 쌓은 명예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현실 안주보다 모험과 도전을 택한 것이다.
 
러시아는 축구인의 무덤과도 같은 곳. 수많은 스타급 선수와 지도자가 오고갔지만 대부분 적응에 실패한 채 중도포기하고 귀국했다. 게다가 러시아 축구계는 텃세가 심하기로 유명하다. 외국인에게 국가대표 감독직을 내준 것은 히딩크 감독이 처음이었다. 이런 것을 모를 리 없는 히딩크였다. 하지만 그는 할 수 있다는 확신과 신념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히딩크 감독은 다시 한 번 큰일을 해냈다.
 
히딩크 감독은 자신은 물론 팀 운영에 있어서도 도전과 모험, 원대한 목표를 중시한다. 그는 한국에서 대표팀을 지휘할 때 일부 나태한 선수들을 향해 “작은 성공에 만족하고 만다”라고 질책했다. 또 2002 월드컵 때 16강 진출에 만족해하는 한국선수들과 국민을 향해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며 8강, 나아가 4강까지 노리고 있다는 야심을 내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의 도전적 목표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 주는 사례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목표(stretch goal)를 추구해야 혁신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기업 경영의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준다.

인재를 알아보는 리더십
요즘 기업 경영의 화두는 인재 확보다. ‘Talent is key(인재가 열쇠다)’라는 명제는 21세기 기업의 생존 전략에 최우선적인 화두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히딩크 감독이 보여 준 인재 발굴과 적절한 활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먼저 자신의 색깔에 맞는 축구를 구사하기 위해 어떤 선수가 필요한 지를 고민한다. 즉 대중의 인기나 유명세가 아니라 자신의 축구 스타일에 맞는 선수를 발탁, 중용한다는 뜻이다. 이는 기업이 단순히 뛰어난 인재가 아니라 자기 기업의 전략과 방향성에 맞는 인재를 뽑아 쓰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히딩크 감독은 또 인재의 재능을 알아보고 육성했다. 그의 뛰어난 인재 발굴 안목은 이번 유로 2008에서도 활짝 꽃을 피웠다. 로만 파블류첸코와 안드레이 아르샤빈을 포함해 유로 2008 출전 선수 가운데 유럽의 빅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은 큰 대회에 적합한 선수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 준다.
 
그리스·스웨덴·네덜란드와의 3게임에서 연속골을 터뜨린 파블류첸코는 히딩크 감독이 이번 대회를 통해 빚어낸 작품이다. 히딩크 감독은 예선이나 평가전에서 부진했던 파블류첸코의 잠재력을 믿고 공격수로 중용, 중요한 순간에 빛을 발하게 했다. 또 네덜란드전 1골1도움으로 승리를 이끈 아르샤빈도 히딩크 감독을 만나 재능이 만개한 선수다.
 
2002 월드컵 때도 히딩크 감독은 축구기자들이 “실수도 많고 패스미스도 많다”고 지적하는 김남일을 “월드컵처럼 큰 무대에서 유럽 선수들에게 통하는 터프한 스타일을 지녔다”며 기용했다. 결국 김남일은 서구의 장신 선수들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으며 ‘진공청소기’란 닉네임처럼 자신의 역할을 100% 수행, 한국팀의 4강 진출에 큰 밑거름이 됐다.
 
스타 길들이기와 팀 하나로 만들기
축구는 단체경기이며 조직력의 스포츠다. 야구나 농구처럼 일부 선수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11명 전원의 유기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 때문에 일부 스타플레이어의 튀는 플레이는 잠깐 빛을 발할지언정 전체적으로 팀엔 마이너스이다. 이것은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스타급 인재가 중요하긴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보통 직원들이 최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업의 성과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히딩크 감독은 유로 2008 본선 엔트리를 구성하면서 지역예선에서 최다 골을 넣은 알렉산드르 케르자코프를 과감히 뺐다. 불화설이 제기되긴 했지만 히딩크 감독은 팀 차원에서 융화를 깨뜨릴 소지가 있는 선수를 굳이 데려갈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케르자코프는 기량은 좋지만 정신력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스타의식이 철저히 배제된 러시아는 결국 걸출한 스타플레이어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팀플레이로 승승장구를 거듭할 수 있었다.
 
칭찬 리더십, 기강 확립은 확실하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얘기가 있다. 리더로서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칭찬은 팀원들의 사기를 북돋게 한다. 하지만 이렇게 돈도 안 드는 립서비스인 칭찬에 게으른 사람도 꽤 많다.
 
이런 면에서 히딩크 감독의 칭찬 리더십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칭찬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영리한’ 지도자다. 특히 선수들과의 대외적인 소통 창구이기도 한 언론매체를 이용한 칭찬에 능하다.
 
히딩크 감독은 공개석상에서 선수들을 비난하는 일이 거의 없다. 경기에 졌을 때도 패배를 특정 선수에게 돌리지 않는다. 정 비판하고 싶다면 두루뭉술하게 표현한다. 반면에 칭찬에는 무척 관대하다. 그는 항상 “잘 싸워준 우리 선수들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다닌다. 이번 대회 8강 티켓을 거머쥔 뒤에도 “선수들의 발전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어차피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선수들의 귀에 곧바로 들어간다는 것까지 모두 계산한, 치밀한 칭찬 화법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선수들의 정신적 해이나 ‘기본’을 지키지 않는 행위는 냉엄하게 다뤄 팀의 기강을 잡는다. 이번 유로 2008에서는 스페인과의 첫 번째 경기에서 1-4로 대패하자 “이런 식이라면 경기할 필요도 없다.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빼내 상대에게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선수들을 채찍질해 팀 분위기를 바꿨다. 중앙 수비수인 세르게이 이그나셰비치는 대표팀 소집에 늦게 나타났다 “지각생은 필요 없다”는 감독의 불호령에 집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히딩크 감독에게 사죄를 하고서야 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동기부여
지도자로서 히딩크 감독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선수 개개인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데 있다. 2002 월드컵 때 선수로서 히딩크 감독과 호흡을 맞춘 홍명보 현 올림픽대표팀 코치가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여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히딩크 감독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말할 정도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선수 입장에서 생각하고, 적절한 동기를 부여하고, 목표를 공유하는 것이다.

홍 코치는 “보통 지도자들은 선수의 잠재력과 투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윽박지르는 방법을 많이 쓰는데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고 감독과 선수가 동일 목표를 공유하게끔 만든다”고 말했다. 즉 리더로서 권위의식만 내세우지 않고 직접 선수에게 다가가 선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배를 탔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또 홍 코치는 2002 월드컵 첫 경기인 폴란드전을 하루 앞두고 히딩크 감독이 선수들을 한 명씩 불러 “너는 세계 최상팀 체력 수준보다 결코 떨어지지 않으니 충분히 해낼 수 있다”며 어깨를 두드려 줬다고 회고했다. 당시 선수였던 홍 코치는 네 차례 월드컵 출전 가운데 가장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고 한다. 빅매치에 대한 선수들의 부담감을 털어내고, 선수들의 집중력을 높여 팀을 하나로 만들어내는 히딩크식 전략이었던 셈이다.
 
확신이 있으면 행동하는 추진력
히딩크 감독의 또 다른 강점 중 하나는 본인의 확신이 있으면 밀어붙인다는 점이다. 이번 대회에서도 그의 추진력은 놀라웠다. 유로 2008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퇴장 당해 본선 2경기 출장정지를 받은 안드레이 아르샤빈을 과감히 엔트리에 포함시킨 것이다. 당신이 감독이라면 3경기 만에 끝날지도 모를 대회에서 초반 2경기에 못 나오는 선수를 쉽게 데려가겠는가? 그것도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확신이 있었고, 곧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결과는 대박. 아르샤빈은 8강 티켓이 걸린 스웨덴과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첫 출전해 골을 넣었고, 네덜란드전에서도 1골1도움을 기록하며 러시아를 4강으로 이끌었다.
 
스스로 더 노력
아무리 사람을 잘 뽑을 줄 알고 다룰 수 있더라도 본인에게 뛰어난 식견과 지식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측면에서 히딩크 감독을 단지 사람이나 잘 뽑아 잘 다루고, 언론플레이나 잘하는 사람으로 평하는 것은 그를 평가 절하하는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야말로 진정으로 노력하는 지도자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홍 코치는 “히딩크 감독의 해박한 전술이론과 전략은 타인을 압도한다”고 치켜세웠다. 히딩크 감독은 실제로 자신이 맡은 팀을 철저히 분석하기 위해 잠자는 시간 4∼5시간을 빼고는 분석관과 함께 전력을 분석하고, 지난 경기들을 하나하나 다시 본다고 한다. 이렇게 꼼꼼하게 선수들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지적하는데 수긍하지 않을 선수가 없다. 아랫사람을 잘 다루려면 윗사람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을 히딩크 감독은 몸소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히딩크 리더십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능력이다. 히딩크 감독은 원칙과 룰을 정해 놓고 이것을 ‘실천’했다. 그리고 스스로 더 많은 노력을 했다. 그라운드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그는 수많은 시간을 혼자 고민하고 공부했다. 이런 숨은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그의 결과물들은 항상 빛이 날 수밖에 없었다.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선수의 이름값에 연연하지 않는 냉정한 선수 기용, 개인보다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그의 원칙은 선수들로 하여금 잠재력을 최대로 이끌어냈다.
 
유로 2008 네덜란드와의 8강전 직후 승리의 일등공신인 아르샤빈은 인터뷰에서 “1명의 네덜란드인(히딩크 감독)이 11명의 출중한 네덜란드인을 꺾었다”며 히딩크 감독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했다. 강요하지 않아도, 권위의식을 내세우지 않아도, 스스로 권위를 찾는 히딩크 감독의 마력과도 같은 리더십을 잘 읽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처럼 축구의 히딩크 리더십은 오늘날 기업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에게도 좋은 본보기를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스포츠조선과 스포츠투데이에서 스포츠 전문기자로 일했으며, 2005년 야후코리아에 입사해 현재 뉴스팀장을 맡고 있다. 고려대 서어서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미국 포틀랜드주립대에서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스포츠를 읽어라>, <미국이 감추고 싶은 비밀 50가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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