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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거울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 첫 ‘로마의 거울’이 되다

김상근 | 154호 (2014년 6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플루타르코스가 저서 <영웅전>에서 미래 로마 지도자들에게군주의 거울로 제시한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다. 로마시대의군주의 거울아테네의 영광(de gloria Atheniensium)’이었던 셈이다. 아테네라는 거울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 아테네의 영웅을 바라보면서 로마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게다가 플루타르코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철학자의 아테네를 소개한 게 아니라 결단의 행동력과 지혜의 혜안을 가졌던 영웅의 모습을 제시했다. 앎보다는 삶을, 감정보다는 냉철한 이성적 판단을, 숙고하는 삶(Vita contemplativa)보다는 행동하는 삶(Vita activa)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편집자주

고전에는 현대 지성인들이 되새겨야 할 내용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메디치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과 마키아벨리 연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군주의 거울을 연재합니다. 인문학 고전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깊은 통찰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요즘 같은 총체적 난관의 시대를 일러아포리아(aporia)’라는 상태에 봉착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는 최소 1200개의 섬으로 이뤄진 해양 국가였기 때문에 예로부터 뱃사람과 항해에 대한 개념과 기술이 발달했지요. 그리스의 뱃사람들은 배가 좌초돼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했을 때를아포리아(aporia) 상태라고 불렀습니다. 위기의 단계보다 더 심각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를 말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도 그런 아포리아 상태에 봉착했다는 한탄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어떤 특단의 방법을 동원해도 사태가 해결될 것 같지 않는 절망감이 우리 모두를 우울의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어찌 우리만 이런 절망을 느꼈겠습니까?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분위기가 꼭 이랬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던 신성로마제국의 명성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던 그 무렵, 비엔나에서는 절망의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됐지요. 실력은 뛰어났지만 유대인이란 이유 때문에 교수 임용을 거부당했던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이야기를 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희망이 사라진 곳에 꿈을 통한 욕구의 충족만이 충동처럼 솟구쳐 오르기 마련이지요. 천재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탄식의 노래를 발표(1880)한 곳도 비엔나였습니다. 그 시대의 암울을 직시했던 또 다른 천재 예술가가 비엔나에 있었습니다. 바로키스란 작품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입니다. 많은 분들이 클림트를 몽환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로 알고 계십니다만 사실 그는 세기말의 아포리아 상태에 봉착해 있던 비엔나의 위기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했던 탁월한 예술가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기존 시스템에 저항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고전주의적인 그림을 최고로 치던 당대 예술가들의 고리타분한 생각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던 인물이었지요. 클림트는 이런 혁신적인 생각을 하던 일단의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새로운 예술 저항 운동을 시작합니다. 세기말의 위기감이 절정에 달하던 1897년에 그는 이른바비엔나 분리파(Wiener Sezession)’ 운동을 시작하게 됐지요. 로마시대의군주의 거울에 대한 글을 기대했는데 웬 뜬금없는 비엔나와 클림트 타령이냐고 나무라실 것 같아 간단히 비엔나 분리파의 첫 번째 전시회 포스터만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운동의 초대 회장이었던 클림트가 문제의 포스터를 직접 그렸는데, 여기서 오늘 우리가 주목하게 될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등장합니다.

 

1897년에 시작된 비엔나 분리파 운동의 첫 번째 전시회 포스터. 클림트의 작품으로 상단에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르고 있는 테세우스의 역동적인 모습이 보인다.

 

잘 아시다시피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건국 영웅입니다. 아테네를 건국한 시조(始祖)이고, 클림트의 포스터에 역동적으로 묘사돼 있는 것처럼 크레타 섬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영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국력이 미약했던 초기 아테네는 크레타 미노스 왕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는데 9년마다 소년 7명과 소녀 7명을 크레타 미로 속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에게 바쳐야만 하는 노예 같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만 테세우스는 이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직접 크레타로 가게 됐고, 그곳의 공주였던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미로 안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일러주지요. 결국 실타래를 풀면서 미로 속으로 들어갔던 테세우스는 괴물과 용감히 싸워 승리를 거둡니다. 클림트는 세기말의 암울한 기운이 감돌던 비엔나에서분리파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포스터에 담았습니다. 테세우스처럼 용감하게 괴물을 무찔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숨어 있던 미노타우로스를 때려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클림트가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옛 시대(그리스)의 이야기로 돌아갔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고 미래의 진보를 앞당기기 위해 테세우스라는 옛 시대의 이야기로 돌아갔던 클림트의 선택은, 우리가 옛 시대의군주의 거울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것과 정확하게 닮아 있습니다.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를 봐야 합니다.

 

로마시대의 플루타르코스는 왜 그리스의 영웅에 대해 썼을까?

우리가 로마의군주의 거울교재로 선택한 첫 번째 책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입니다. 기원후 46년경에 태어나 120년에 임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플루타르코스는 로마 오현제(五賢帝) 중의 한 사람이었던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98∼117년 재위) <영웅전>을 집필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시대의 역사가였다는 말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분명히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출신은 그리스였습니다. 그의 고향은 유명한 아폴로 신전이 있는 델포이에서 약 30㎞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 카이로네이아(Chaeronea)입니다. 놀랍게도 그의 직업은 역사가나 전문 학자가 아니라 델포이 신전의 사제였습니다. 그는 생애 마지막 30년을 델포이에서 사제로 일했는데 마지막 20년 동안은 집필에 전념했고, 우리가 함께 읽게 될 <영웅전>도 그때 쓴 책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로마 오현제중에서 두 번째 황제였던 트라야누스 시대와 세 번째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시대(117∼138년 재위) 말기에 걸쳐서 활동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을 집필할 당시 로마제국은 다키아(지금의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와 페르시아 정벌을 위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최고 전성기였지요. 로마제국이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을 때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의 한 산골짜기에서  <영웅전>을 집필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추구해야 할 탁월함(Arete)은 무적이며 영광스러운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이름 높은 가치의 추구에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적이며 영광스러운모습을 로마의 건국 영웅 로물루스가 보여줬다면아름답고 이름 높은덕목은 아테네의 테세우스가 모범을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로마 사회의 공직에 나설 젊은이들을 위해서 이 책을 썼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직에 있는 로마 원로원이나 집정관도 염두에 뒀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최고 전성기에 영웅의 모습을 제시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준비하겠다는 의도였을 겁니다. 전성기에 도달하면 곧 쇠락의 국면이 찾아오기 마련이지요. 새가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는 것은 곧 하강을 의미하는 것이고, 대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간다는 것은 결국 뿌리가 낮은 땅 밑으로 기어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로마제국이 영광의 정점에 있을 때 플루타르코스는 새로운 영웅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미래의 로마 지도자들에게군주의 거울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테세우스였습니다. 장차 로마제국의 지도자가 될 젊은이들에게 그는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를 제일 먼저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로마시대의군주의 거울아테네의 영광(de gloria Atheniensium)’이었습니다. 아테네는 로마의 거울이란 뜻이었지요. 아테네라는 거울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 아테네의 영웅을 바라보면서 로마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걸출한 철학자를 배출한 곳입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이런 철학자들을군주의 거울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아테네는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크세노폰 같은 현자들의 지혜가 살아 숨 쉬던 곳이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던 문학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이런 문학자들의 아테네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결단의 행동력과 지혜의 혜안을 가졌던 영웅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앎보다는 삶을, 감정보다는 냉철한 이성적 판단을, 숙고하는 삶(Vita contemplativa)보다는 행동하는 삶(Vita activa)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은 사실비교 열전(Bioi paralleloi)’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기원후 100년경의 시점에서 두 명의 영웅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글을 써내려갔습니다. 아테네의 영웅과 로마의 영웅을 대칭적으로 비교하고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했습니다. 먼저 그리스와 로마의 건국자인 테세우스와 로물루스의 비교를 시작으로 입법자인 리쿠르고스(그리스)와 누마(로마), 탁월한 장수의 모범을 보여줬던 테미스토클레스(그리스)와 카밀루스(로마), 풍운아였던 알렉산드로스(그리스)와 카이사르(로마) 등을 병렬적으로 비교 분석하는 방식입니다. 요즈음 한국의 인문학계에서도 동서양을 비교하는 연구 방식이 주목을 끌고 있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이미 그 시대에 이런 비교의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왜 굳이 이런 서술 방식을 선택했을까요?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지금보다는 옛 시대를 그리워하는 일반적인 경향을 반영한 것일까요? 로마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리스(아테네) 시대의 영웅들을 비교하면서 보여주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 첫 부분에서 아테네를아름답고 이름 높은(lovely and famous)’ 도시로 소개합니다. 반면 로마는무적이며 영광스러운(invincible and glorious)’ 도시로 그 특징을 소개하지요. 그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 로마제국이 다키아와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써 세계만방에무적이며 영광스러운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제국이 간직해야 또 다른 덕목을 보여줍니다. 바로아름답고 이름 높은덕목을 추구하던 그리스의 영웅들입니다. 로마제국이 추구해야 할 탁월함(Arete)은 무적이며 영광스러운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이름 높은 가치의 추구에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적이며 영광스러운모습을 로마의 건국 영웅 로물루스가 보여줬다면아름답고 이름 높은덕목은 아테네의 테세우스가 모범을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지요. 내가 승리의 환호성을 올릴 때 나 때문에 전쟁에서 진 사람은 눈물을 삼키는 법입니다. 나의 기쁨은 다른 사람의 슬픔에 바탕을 두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진짜 영웅은무적이며 영광스러운모습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아름답고 이름 높은모습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플루타르코스는 테세우스의 어떤 모습에서아름답고 이름 높은덕목을 로마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을까요?

 

 

카노바테세우스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소장

 

‘아름답고 이름 높은테세우스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Aegeus)의 아들이었습니다. 자식을 간절히 바랐던 아버지가 델포이의 무녀(巫女)로부터 신탁을 받아 점지했던 아들이었습니다. 태생의 비밀스러운 부분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겨 놓은 은밀한 징표를 통해서 더 강화됐습니다. 장성한 후에 바위 밑에 숨겨 놓은 칼과 가죽신을 찾아오면 아들임을 확인하겠다고 약속하고 아버지는 아테네로 떠나 버렸습니다. 장성한 테세우스는 무거운 바위를 가뿐히 들어 올리고 아버지가 아들의 징표로 감춰뒀던 칼과 가죽신을 찾아냅니다. 어머니 아이트라(Aethra)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있는 아테네로 가라고 하면서 뱃길을 이용하라고 말합니다. 아이트라와 테세우스가 살고 있던 트로이젠(Troezen)은 아테네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던 펠로폰네소스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뱃길로 가면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편한 길을 버리고 험한 육로를 선택합니다. 테세우스는 지금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을 따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도와 괴물이 득실대던 육로를 따라 온갖 시련을 참고 견디면서 한걸음 한걸음,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아테네로 갑니다. 명성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어 갈 때아름답고 이름 높은명성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테세우스는 편한 길을 버리고 힘든 여정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헤라클레스는 스파르타의 영웅이었습니다. 아테네의 영웅이 스파르타의 영웅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을 능가하는 시련을 극복해 냅니다. 스파르타에 헤라클레스가 있었다면 아테네에는 테세우스가 있었습니다.

 

아테네에서 아버지의 환대를 받은 테세우스는 그동안 아테네 사람들을 괴롭혀 왔던 괴물들을 차례로 물리칩니다. 마라톤의 황소도 일격을 가해 제압하고, 그 유명한 크레타 섬의 미노타우로스를 단숨에 제거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아테네의 지도자가 됩니다.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와의 사랑은 두고두고 아테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러브스토리가 됐지요. 물론 승전에 따른 희생도 있었습니다. 아들의 무사귀환을 학수고대하던 아버지 아이게우스는 테세우스가 실수로 무사귀환을 알리는 돛을 달지 않아 절망 속에서 바닷물로 몸을 던졌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이름은 에게 해라는 이름으로 남았고, 드디어 테세우스는 왕위를 이어받게 됩니다.

 

<영웅전> 첫 장면에서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를 소개하고 있는 플루타르코스는 아테네의 건국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테세우스는앗티케 전역의 사람들을 한 도시 내에 살게했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의 이름을아테네로 붙였습니다. 테세우스는 개방적인 지도자였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도시를 더 크게 확장하고자 했던 테세우스는 모든 이들을 동등한 자격으로 도시에 초청했다. ‘모든 이여, 이리로 오라는 말은 테세우스가 다양한 조건을 지닌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 이뤄진 민족을 수립하며 한 말이라고 한다.” (25)

 

다른 민족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테세우스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좁고 힘든 길을 걸어 아테네에 도착했고 크레타와 마라톤의 괴물을 물리치고 나라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평화 공존의 아테네 시대를 열었던 테세우스는 지도자의 귀감이 됐습니다. 정말로 테세우스는 아테네에 나타난 헤라클레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어떤 이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홀로 여러 훌륭한 업적을 이룩했으니보라! 또 다른 헤라클레스가 나타났다!’는 말은 테세우스를 두고 하는 말로 통용됐다고 한다.” (29)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의 첫 번째 주인공 테세우스의 생애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스퀴로스 섬에 갔다가 사고로 죽은 테세우스의 시신을 아테네 도심으로 가져와 매장했다는 이야기 끝에 이런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테세우스는 죽고 난 다음에도 아테네인들의 영웅으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말아름답고 이름 높은(lovely and famous)’ 영웅이었습니다.

 

“테세우스는 도심 한가운데 묻혀 있고 그의 무덤은 도망친 노예나 힘 있는 자들이 두려운 신분 천한 이들의 안식처이자 피난처가 됐다. 이는 테세우스가 생전에 이러한 이들을 돕고 응원했으며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의 탄원을 기꺼이 받아줬기 때문이다.” (36)

 

‘무적이며 영광스러운로물루스

플루타르코스는 테세우스의 짝으로 로마의 영웅 로물루스를 소개합니다. 둘을 비교한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란 뜻이지요. 로마제국의 속국, 그리스에 살고 있던 플루타르코스는 곤경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로마제국의 영웅과 그리스 시대의 영웅을 비교하는 작업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나치게 그리스(아테네)의 영웅을 치켜세운다면 로마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플루타르코스는 아주 정교한 방식으로 아테네의 테세우스와 로마의 로물루스를 비교합니다. 두 사람 다 신화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존재이고 각각 아테네와 로마를 건국했다는 공통점에 주목하면서 두 사람을 조심스럽게 비교합니다. 테세우스가아름답고 이름 높은덕목을 추구했다면 반대로 로물루스는무적이며 영광스러운덕목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건국자로 칭송받고 있는 로물루스는로마라는 제국명의 기원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있다는 것을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의 앞부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트로이의 유민들이 처음 라티움 지역에 도착했을 때 고향으로 돌아갈 배를 불태워 버리자고 주장했던 용감한 여성의 이름이로마라는 설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정설(定說)은 역시 그리스 학자들의 기록을 참고하면 된다고 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조국 그리스를 치켜세웁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전설은 플루타르코스가 정설이라고 인정했던 그리스 학자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아이네아스(Aeneas)의 후손이었던 누미토르(Numitor)와 아물리우스(Amulius) 형제 사이의 갈등 때문에 실비아(Silvia)라는 누미토르의 딸이 군신(軍神) 마르스에 의해 임신을 하게 되고 실비아가 낳은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테베레 강에 버려진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강물에 떠내려 온 쌍둥이 형제를 늑대가 젖을 물리고, 농부(돼지치기)가 두 아이를 키웠다는 그 유명한 이야기 말입니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로물루스와 레무스로마 캄피돌리오 박물관 소장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를 복종이 아니라 명령을 내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6). 동생 레무스와 신생 국가의 위치를 정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동생을 사소한 문제로 살해해 버리는 폭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선의의 경쟁을 하기보다는 아예 경쟁 자체를 분쇄해 버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줬습니다. 국가를 건설한 지 네 달쯤 지났을 때 사비니족 여인들을 겁탈하는 사건도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물루스는 델포이의 신탁에 의존해 이런 강압적인 정책을 취했는데 그 문제의 신탁은 로마는 전쟁을 자양분으로 삼아 팽창할 것이며 가장 크고 위대한 도시가 될 것이다(14)였습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의 첫 부분, 즉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에 대한 영웅 이야기를 펼치면서 로마가가장 크고 위대한 도시가 될 것이라는 오래된 신탁을 언급한 것은 자기 시대의 로마가 실제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기원후 2세기 초에 로마는 세계를 제패한 대제국으로 성장했고 제국의 영토는 사상 최대로 확장됐습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로물루스의 이런 힘에 의한 확장, 상대방을 제압함으로써 제국의 팽창을 시도하는 로마의 제국주의 정책과 리더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합니다. 그래서 로마의 영웅 로물루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자주 내리고 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로물루스를 모든 민족에게 위협적인 존재(16)”였다고 평가합니다. 로물루스는 사비니 왕 아크론(Acron)을 결투로 제압하고 그의 갑옷을 빼앗아버립니다. 결국 사비니와 주변 국가들은 로마에 항복하고 도시를 넘겨줍니다. 그때까지 로마인들은 그리스식의 둥근 방패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사비니 족을 복속시킨 다음부터 긴 사각형 방패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21). 로마인들보다 키가 컸던 이탈리아 지역의 원주민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전신을 보호할 수 있는 긴 방패가 유리했습니다. 신장이 큰 원주민들이 위에서 도끼로 내리찍었을 때 둥근 방패로 머리를 방어하면 상체가 적에게 노출되기 때문에 그리스 형의 둥근 방패는 약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대가 사각형 방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로마가 점차 호전적인 집단으로 변해 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로물루스의 이런 힘에 의한 확장,

상대방을 제압함으로써 제국의 팽창을 시도하는 로마의 제국주의 정책과 리더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합니다. 그래서 로마의 영웅 로물루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자주 내리고 있습니다.

 

사비니족과의 평화협정은사비니 여인의 겁탈사건 때 납치돼 로마에 살게 된 사비니 여인들의 호소 때문에 맺어졌습니다. 남편은 로마인이었고 아버지는 사비니인이었던 그 여인들은 전투 현장에 뛰어들어 눈물을 흘리며 평화를 호소했고, 결국 로마와 사비니는 공동 왕을 둬 2명이 함께 통치하는 정체(政體)를 선택했습니다. 호전적이던 두 나라에 평화가 찾아 온 것 같았지만 얼마쯤 세월이 지난 후에 사비니의 공동 왕이었던 타티우스(Tatius)가 백주대낮에 살해를 당하게 됩니다. 로마의 공동 왕이었던 로물루스는 암살자들의 범행을 눈감아 주었고 눈엣가시 같았던 타티우스가 제거된 것을 오히려 기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로물루스는 무려 6000명을 죽이고 인근 카메리아를 차지했으며, 에트루리아(이탈리아 중부 지역 원주민)를 제압하기 위해 베이이와 피데나이를 침공합니다. 로물루스는 용맹함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줬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순발력을 가진 영웅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25). 그러나 그는 그 군사적 탁월함과 성공 때문에 쇠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로물루스의 쇠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행운 덕분에 권력과 명예를 거머쥔 거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업적에 도취돼 좀 더 거만한 태도를 취했으며 대중적이던 기존의 방식을 군주의 방식으로 바꾸었다.” (26)

 

플루타르코스는 로물루스의 최후에 대해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다고 밝히면서도불카누스 신전에서 회동했던 원로원들이 로물루스를 덮쳐 죽인 뒤 시신을 토막 낸 다음 각각 한 토막씩 옷에 숨겨 가져갔다고 추측한다는 소문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라는 암시를 남겨 놓아 후대의 사람들에게 교훈을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포리아는 어떻게 극복되는가?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아포리아 상태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여실한 증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 봉착해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잘 살아보자는 일념 하나로 식민지 통치와 내전의 상처를 극복하고 세계가 놀랄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룩해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DBR 독자들이 바로 그 역사의 주인공들이셨습니다. 여러분과 같은 비즈니스맨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우리나라의 건국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방식, 아니 지금의베이비 붐 세대 ‘386세대는 로물루스의 방식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지 모릅니다. 우리는 로물루스식으로무적이며 영광스러운(Invincible and glorious)’ 덕목을 최고 가치로 내세우면서 앞만 보고 줄기차게 달려왔습니다. 경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야만 했고 전투에서는 반드시 적을 제압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한계에 도달하게 되는데 로물루스처럼자신의 업적에 도취돼 거만한 태도를 취하게되기 때문입니다. 성공에 도취돼 초심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쇄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지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쪽 같은 우리 아이들을 차가운 바다에 수장시킨 나쁜 선박 회사의 실제 경영주의 모습에서 우리는 로물루스의 모습을 봅니다.

 

아포리아 상태는무지의 자각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내가 지금까지 잘못 알았구나!”란 깨달음이지요. 이런 아포리아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로물루스의 방식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반성하고 테세우스와 같이아름답고 이름 높은덕목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테세우스를 극구 칭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그가 그리스 사람이었고 테세우스가 아테네의 건국자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테세우스는어떤 이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홀로 여러 훌륭한 업적을 이룩했으니보라! 또 다른 헤라클레스가 나타났다!’는 칭찬을 들었던 영웅이었습니다. DBR 독자 여러분도, 테세우스처럼아름답고 이름 높은덕목을 추구하셔서 아포리아 상태에 빠져 있는 우리 시대에보라! 또 다른 헤라클레스가 나타났다!’는 칭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20여 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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