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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서 배우는 소통경영

“자유로운 토론 許하라” 경청의 달인 세종

김기섭 | 153호 (2014년 5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세종은 신하들과 토론을 즐겼다. 임금과 신하가 책을 읽고 국정운영을 토론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에 월 평균 6번이나 참석했다. 그는 국정운영과 관련해서 매서운 비판과 질책을 해달라고 신하들에게 청하기도 했다. 소통과 관련해서 세종에게 배워야 할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세종은 왕의 국정운영 스타일 등 신하들이 자신에게 불편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할 때도 이를 거부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또 신하들에게는 어떤 의견이든 제시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기업에서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CEO가 언로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또 직원들이 자신의 생각을 쉽게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직원의 창의성이 발현되고 이를 발판으로 기업이 성장하려면 자유롭게 소통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집단적 지혜를 모으는 방법으로 토론만한 것이 있을까? 아시다시피 토론은 상대가 있고, 상대의 동의를 얻고 반박을 받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때 진리는 없으며 절대적인 진리라도 회의의 대상이다. 이런 점이 토론의 묘미다. 토론은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의 상징이다. 지위와 나이에 관계없이 상대가 도덕적 인격을 갖췄다고 여기고 토론한다. 그래서 토론 과정에서 흥분하거나 인신공격을 하면 감점을 받거나 제지를 당한다. 토론의 정신을 위배했기 때문이다. 물론 토론이 유익해도 조직에서 의사결정을 내릴 때마다 사용할 수는 없다. 시간이 걸리고 번거롭다. 또 국내 조직문화는 토론에 익숙하지 않다. 마음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개인이 단독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보다 집단의 의사결정이 훨씬 효율적이다. 다양한 정보를 얻고 다각도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중요한 프로젝트일수록 더 긴요한 게 토론이다. <유토피아>를 쓴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인이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 ‘3일 토론이라는 제도를 활용한다고 했다. 정책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 3일 동안 토론하고 이후 결정한다. 3일이라는 시간의 여과장치를 통해 정책의 불량률을 낮추고 구성원을 합의하도록 만들어서 수용도와 응집력을 높인다는 게 유토피아인의 아이디어다.

 

 

세종은 경연의 모범생 6회 참석

토론을 국정운영에 적극 도입한 임금이 조선의 4대 왕인 세종이다. 신하들은 그를토론을 즐긴[樂於討論] 군주라고 불렀다. 얼마나 토론을 자주 했으면 이런 말이 나왔을까? 세종은 임금과 신하들이 책을 읽고 국정운영을 토론하는 경연(經筵) 1900여 회나 참석했다. 월평균 6회가량이다. 한마디로 경연의 모범생이다. <세종실록>은 역대 임금의 실록보다 분량이 많다. 분량이 많은 이유는 세종 재임기간이 32년이나 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전회의에서 신하들과 토론하고 의사를 결정한 내용이 <세종실록>에 상세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종실록>은 경영인들이 반드시 살펴봐야 할 필독서다.

 

세종의 어전회의는 조선의 역대 임금들과는 많이 다르다. 거리낌 없는 말이 오가며 직설적이고 자유롭다. 세종 7 128일의 <세종실록> 기사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가뭄과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한 처지에 빠지자 세종은 의정부와 육조의 여러 신하들에게허물은 실로 과인(寡人)에게 있으니 재앙이 올 징조가 아닌지 두렵다며 간언(諫言)을 청한다. 여기에서 간언은 매서운 비판과 질책을 뜻한다. 세종은비록 태평한 시대에도 대신(大臣)은 오히려 임금의 옷을 붙잡고 강력하게 간언(諫言)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하물며 무사하고 평안한 이때에 아직 과감(果敢)한 말로 면전에서 쟁간(爭諫)하는 자가 없고 심지어 말하는 것이 매우 절실 강직하지 않다. 어째서 지금 사람은 옛사람 같지 못한가라고 한탄하며 신하들의 자유로운 비판과 대안을 촉구했다.

 

세종은 큰 재앙을 당할 때마다 모든 책임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에 대해부끄럽다고 말했고 자신의 실책과 정치의 잘못을 지적해달고 주문한다. 특히 사안이 절실하면 할수록 물러서지 말고 강직하게 끝까지 뜻을 관철하라고 엄중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세종의 마음가짐은 즉위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은 신하들과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 한다고 겸손하게 말한 뒤좌의정·우의정과 이조·병조의 당상관(堂上官)과 함께 의논해 벼슬을 제수[同議除授]하겠다고 밝혔다. 국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하지 않고 의논하겠다는 협치(協治), 청정(聽政)을 선언했다.

 

다섯 달 뒤 세종의듣는 정치를 잘 볼 수 있는 장면이 연출된다. 바로 세종 1 111일에 열린 토론이다. 이날은 새해를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왕과 대신들이 편전에서 정사를 논의한 뒤 자연스럽게 술자리를 가졌다. 술잔이 여러 순배 돌자 중국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온 노대신 참찬 김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젊은 임금을 향해 넌지시 자신의 뜻을 전하는 형식이었지만 은근히 마음을 떠보는 수작일 수도 있다. 또 그는 젊은 임금에게 한 수를 가르치려는 마음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하께서 국정을 운영하려면 중국 황제의 법도를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뜬금없는 김점의 말을 들은 세종은 말뜻을 헤아리고 있었다. 세종시대에서미스터 쓴소리로 유명한 예조판서 허조가중국의 법은 본받을 것도 있지만 본받지 못할 것도 있다며 점잖게, 그러나 뼈 있는 말로 반박했다. 김점은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황제의 판결을 예로 들면서황제가 직접 죄수를 끌어내 자세하게 심문하는 것을 봤다며 전하께서도 본받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허조가 문제를 제기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해당 업무를 맡아보는 관청을 두는 이유는 각각의 직무를 분담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임금이 직접 죄수를 결제하고 크고 작은 국가 일을 가리지 않고 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허조와 김점은 어전이라는 사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토론의 수위를 높였다. 김점은 온갖 정사를 임금이 친히 통찰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 역할을 신하에게 맡기는 것은 부당하다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어지는 허조의 반박 또한 예사롭지 않다.

 

“전하께서는 어진 신하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재를 얻으면 편안해야 합니다. 또 직임을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이 있으면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전하께서 대신을 선택해 육조의 장을 삼은 이상 책임을 지워 성취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지 몸소 자잘한 일에 관여해 신하가 해야 할 일까지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김점은 또다시 중국 황제의 사례를 들면서 주장을 펼쳤다. 그는중국 황제는 위엄과 용단이 측량할 길이 없을 정도로 놀라웠다 “6부의 장관이 정사를 아뢰다 착오가 생기면 즉시 금의(錦衣)의 위관(衛官)을 시켜 모자를 벗기고 끌어내린다며 서슬 퍼런 중국 황제의 위엄을 역설했다.

 

세종은 불편한 토론주제임에도 묵묵히 들었다. 두 신하가왕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서로 치고받는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적잖이 불편했을 텐데도 말을 일절 섞지 않았다.

 

허조는 신하를 쓰는 바른 원칙을 제시하며 냉정하게 반박했다. “대신을 우대하고 작은 허물을 포용하는 것은 임금의 넓은 도량입니다. 하물며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대신을 욕보이고 조금도 두남두지 않는 것은 부당합니다.” 김점은 권위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또다시 설파했다. “시왕(時王)의 제도는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제는 불교를 존중하고 깊이 믿습니다. 중국의 신하들은명칭가곡(名稱歌曲)’을 외우고 읽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들 중에는 어찌 이단이라고 배척하는 선비가 없겠습니까마는 다만 황제의 뜻을 본받기 위해서 따릅니다.” 김점은 그렇기 때문에 조선도 이를 따르는 것이 순리라는 것이다. 김점의 주장에 허조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불교를 존중하고 믿는 것은 제왕의 성덕이 아닙니다. 당연히 취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의 논쟁은 여기서 끝났다. 흥미로운 점은 절대 지존인 임금 앞에서 두 사람이 벌인 토론방식이다. 이들이 논쟁을 벌인 주제는 왕의 국정운영 스타일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것이다. 주제로만 본다면 망령되고 불경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은 자신의 정치 스타일을 논하는 자리가 불편하거나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애송이 임금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아닌지 몹시 괘씸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세종은 토론에 개입하지 않고 끝까지 경청했다. 그리고는 토론의 승자로 허조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사관은김점은 발언할 적마다 지루하고 번거로우며, 노기를 얼굴에 띄었는데, 허조는 서서히 반박하되, 낯빛이 화평하고 말이 간략했다. 임금은 허조를 옳게 여기고 김점을 그르게 여겼다고 적었다.

 

세종의다사리정신에서 지혜 얻어야

토론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필자는 왜 세종이 위대한 임금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세종은 불편한 토론주제임에도 묵묵히 들었다. 두 신하가왕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며 서로 치고받는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적잖이 불편했을 텐데도 말을 일절 섞지 않았다. 끝까지 경청했다.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을 만도 하지만 참았다. 자신의 주장이 강한 사람일수록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은 대단한 인내가 필요하다. 조직에서 토론이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CEO가 말을 독점하는 것이 원인일 때가 적지 않다. 말을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가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직원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기 어렵고 몇 번이나마 의견을 냈다가 무참하게 깨진 경험을 하면 아예 입을 닫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둘째, 세종은 신하들이 어떤 의견이든 모두 말하게 했다. 김점은 중국 황제처럼 하는 것이 대세라고 주장했다. 허조는 무조건 중국처럼 하기보다는 주체적으로 우리의 방식을 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조의 주장은 신하의 신분으로 말하기에는 강도가 조금 센 편이다. 그는 임금이 몸소 자잘한 일에 관여해서 신하가 해야 할 일까지 하는 것은 옳지 않다거나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고 대신을 욕보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임금에게 대놓고 하는 말은 아니라도 세종은 어색하고 겸연쩍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자신의 견해를 모두 말할 때까지 기다려준 세종의다사리 정신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다사리는다 사뢰게 하고 그렇게 해서 다 살게 한다는 뜻으로 독립운동가 안재홍 선생이 한 말이다. 세종의 뛰어난 업적은 어찌 보면 신하들에게 다사리를 할 수 있도록 자유롭고 창의적인 토론 분위기를 만든 데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조직과 기업에서 수평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토론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정작 토론이 잘 이뤄진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이유는 무엇일까? 신하들이 할 말을 다 하고 묵묵히 끝까지 들어주는 세종과 같은 리더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세종의 다사리 정신과 경험을 배워야 할 것이다.

 

김기섭 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 youlight3@hanmail.net

필자는 경희대에서 전략커뮤니케이션 전공으로 언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해군리더십센터 자문위원을 맡고 있으며 인문학 읽기, 리더십 등을 주제로 여러 기관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세종시대 어전회의의 의사결정과 소통의 역할> <이순신의 소통리더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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