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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

“부자여, 내 재능을 사라” 군주론은 생계형 사냥꾼이 쓴 이력서!

김상근 | 118호 (2012년 12월 Issue 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단테와 마키아벨리, 공통의 모진 운명

“처참할 때,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1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단테의 <신곡>은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영혼이 지옥과 연옥을 지나 천국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다루고 있다. 고향에서 추방당한 단테의 불행했던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단테는 두 번째 지옥의 방에서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진 프란체스카와 파올로를 만나게 된다. 고통 속에 있던 프란체스카는 단테에게처참할 때,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고 고백한다. 사실 이 말은 단테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조국 피렌체에서 추방돼 타국을 떠돌아다니던 단테는 고향에서의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마음에 큰 고통을 겪었다. 단테의 이 고통은 지금 산탄드레아의 시골집에서 절치부심하고 있던 마키아벨리의 심정이기도 했다.

 

피렌체의 고위 공직자로 지낼 무렵, 마키아벨리는 꿈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없다는 사실을 마키아벨리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다. 피렌체 외교관의 신분으로 프랑스를 네 번씩이나 방문했고 체사레 보르자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이탈리아 정벌에 함께 동행했던 시절도 있었다. 교황 선거가 열릴 때는 바티칸에서 가톨릭교회의 수장이 선출되는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당당히 협상을 벌이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행복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시골집에서밥이나 축내고있는 한심한 신세가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에 사로 잡혀 <군주론>을 썼다. 따라서 <군주론>은 조심해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군주론>의 작가 마키아벨리야말로 진짜 여우이기 때문이다. 그는 피렌체로 돌아가기 위해서 여우처럼능숙하게 분장할 줄 알아야 하며 감쪽같이 위장도 해야 하고 때로는 뻔뻔스러워져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살아남기 위해 쓴 책에는 여우의 기만술이 가득하다. 위장술을 부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속아서는 안 된다. <군주론>의 불편한 진실은 계속 이어진다.

 

 

왜 체사레 보르자가 영웅인가?

<군주론>을 오독(誤讀)하고 있는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를 이상적인 군주의 모델로 보았다고 단언한다. 타인에게 자신의 속셈을 절대로 읽히지 않는 영악함은 여우를 닮았고 자신을 배반했던 장군들을 일시에 죽여 버리는 단호함에서 사자의 사나움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적인 권력자는 체사레 보르자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군주론>에서 체사레 보르자가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델로 제시된 것은 그가 교황의 혈족이기 때문이다. <군주론> 1차 독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체사레 보르자처럼 교황의 혈족이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의도적으로 체사레 보르자를 띄웠던 것이다.2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가 교황 알렉산데르 6(1492-1503년 재위)였던 것처럼 로렌초 데 메디치의 작은 아버지가 바로 교황 레오 10(1513-1521)였다. ‘교황의 아들이 영웅이 될 뻔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당신도 교황의 조카가 아닙니까? 당신이야말로 진짜 이탈리아의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나만 불러 주십시오. 당신을 이 시대의 진정한 체사레 보르자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군주론>에서 체사레 보르자를 영웅의 모델로 제시했던 것이다.

 

 

<군주론>은 신흥 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군주가 취해야 할 행동 양식과 정치적 판단을 가르치고 있는 책이다. 이 교훈은 체사레 보르자가 로마냐 지방을 차지하고 마키아벨리의 표현대로무법천지였던 로마냐 지방에서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작업(Nation building)’을 관찰하고 얻은 것이다. 체사레가 처해 있던 상황은 지금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가 피렌체에서 처해 있는 상황과 같다. 피렌체 공화정이 붕괴되면서 힘의 공백이 발생했고 메디치가문의 사람들은 이 혼란을 진정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즉각 혼란의 현장으로 들어가 군주의 위엄을 보이라고 조언했다. 필요하다면 악한 군주라는 인상을 줘도 좋다고 말했다. 혼란을 방치해 피렌체 시민들이 더 큰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면 군주는 따끔한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고 조언했고 그 이상적인 모델이 바로 당신과 같은 교황의 혈족, 체사레 보르자라고 강조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마지막 부분(26)에서 체사레 보르자를 시대의 영웅으로 칭찬한다. 마키아벨리의 눈에 비친 당시의 이탈리아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가 더 참혹한 고생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어둠이 짙을수록 밤하늘의 은하수가 빛나고, 시대가 암울할수록 영웅의 존재가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난세가 체사레 보르자와 같은 영웅을 탄생시킨다.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일, 자기 편을 늘리는 일, 힘이나 지혜를 부려 승리하는 일, 대중으로부터 사랑받으면서 동시에 두려워하게 하는 일, 병사들에게 명령을 따르도록 하면서도 존경받는 일,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섬멸하는 일, 낡은 제도를 새로운 방법으로 개혁하는 일, 엄격하면서도 정중하고 관대하면서도 활달한 처세, 충성스럽지 않은 군대를 해산하고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는 일, 상대방 국가의 왕과 친교를 맺고 자기에게 존경심을 갖도록 하는 일, 해를 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일, 이상의 모든 사항이 새로운 (타인의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자의) 군주국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면 발렌티노 공작(체사레 보르자)의 정책만큼 생생한 사례는 없을 것이다.”4

 

이 부분에서 다시여우마키아벨리가 조용히 등장한다. 이렇게 위대한 영웅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체사레 보르자도 몰락하고 말았다. 여우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체사레 보르자보다 더 뛰어난 영웅의 이름을 열거한다. <군주론>에서 제시되고 있는 진정한 영웅이자군주의 진정한 모델은 모세, 키루스, 로물루스, 테세우스이다. 모세(Moses)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대인의 지도자, 키루스(Cyrus)는 바빌로니아를 물리치고 페르시아제국을 만든 황제5 ,로물루스(Romulus)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로마를 건국(기원전 753)한 전설의 영웅, 테세우스(Theseus)는 크레타 섬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아테네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그런데 이 영웅들은 모두 종교적 인물이거나 상상 속의 신화적 존재이다. 왜 마키아벨리는 역사적 실체였던 체사레 보르자의 실패를 아쉬워하면서 상상 속의 존재들을 군주의 이상적 모델로 추천했을까? 이 부분이 바로 마키아벨리가 여우인 이유를 밝혀준다. <군주론>의 이상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영웅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군주란 실현 불가능한 현실이란 것이다. 아니, 마키아벨리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군주론>의 모델은 체사레 보르자가 아니다. 영웅은 신화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진정한 군주는 바로 나 자신이다. , 마키아벨리야말로 진정한 군주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등장하는 마키아벨리즘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권력을 유지하려는 군주는 선하기만 해도 안 되고 악인이 되는 법도 알아야 하며, 또한 그 태도를 때에 따라 행사할 줄도, 중지할 줄도 알아야 한다.”6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이런 편법의 정당화를 흔히마키아벨리즘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현대적 정치공학의 출발점으로 보면서 자연스럽게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창시자로 몰아간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아래와 같은 치명적인 반박을 피해갈 수 없다. 이것은 마키아벨리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즘이라고 불려서는 안 된다. 마키아벨리보다 무려 2000년 전에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기원전 424-348)이 이런 주장을 이미 펼쳤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즘은 플라톤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테네의 마키아벨리인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그 밖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 허용될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그 나라의 통치자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 합당하겠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누구든 그런 것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7

 

플라톤은 마키아벨리보다 먼저 군주가 거짓말을 사용해서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플라톤에게 거짓말은 의사들이 사용하는 치료약과 같다. 그 약의 투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의사들의 권리이자 의무다. 플라톤에게 통치자는 병을 다스리는 의사와 같아서 환자의 상태에 따라서 전문가적인 처방을 내려야 하고 환자가 필요할 경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다.

 

 

<군주론> <로마사 논고>의 차이

마키아벨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모두 당혹해 하는 사실이 있다. <군주론> <로마사 논고>에 나타난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이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군주론>에서는 군주정을 이상적인 정체(政體)로 보면서 정치사상을 펼치고 있는 반면 <로마사 논고>에서는 공화정을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앞의 책이 군주의 덕목을 찬미한 것이라면 뒤의 책은 시민정신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Prince)를 인간의 이상적인 모델로 보고 무지한 일반 시민들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돼야 한다고 보고 있는가? <군주론>만 본다면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같은 저자가 쓴 <로마사 논고>에서는 전혀 다른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대중만큼 변하기 쉽고 경박한 것이 없다고 말했던 다른 역사가들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이 보장되는 것에 따라 수시로 입장을 바꾸는 경박한 대중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그런 경박함은 군주에게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쉽게 마음을 바꾸는 것이나 경박한 행동의 습성은대중에게나 군주에게나 똑같이 갖춰지는 천성이기 때문이다.8 그는대중의 목소리는 신의 소리와 같다는 속담을 인용하면서대중은 군주보다도 훨씬 은의에 돈독하고 총명함과 부동심에 대해서도 군주보다 훨씬 신중하며 변덕도 적고 정직하다고 옹호하면서 자신이 쓴 <군주론>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9

 

마키아벨리에게 중요한 것은 군주가 더 이상적인 인간형이냐, 아니면 시민이 더 고상한 존재냐가 아니다. 군주제든, 시민과 대중이 주인이 되는 공화정이든, 모든 제도는 강력하고 정의로운 국법에 의해 통치돼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었다. 군주와 시민의 우열을 넘어서는 강력한 법 집행이야말로 이탈리아와 피렌체를 선진 조국으로 이끌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세상을 원망하지 말고, 여우가 되라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책을 읽을 독자가 누군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메디치 가문이 산탄드레아의 시골집에 유폐돼 있던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독자이자 구원자가 될 메디치 가문을 위해 그들을 찬양하는 구절을 빠트리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후반부에서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를 극구 찬양한다.

 

“이리하여 교황 레오 10세는 오늘날과 같은 강력한 교회 국가를 가지게 됐다. 다른 교황(알렉산드르 6세와 율리우스 2)들은 무력에 의해 교회를 다스렸더라도 이 교황은 어질고 옳은 마음과 덕성으로 국가를 더욱 번영케 하고 모든 이의 존경을 받길 바랐다.”10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메디치 가문의 부름은 산탄드레아에 당도하지 않았다. 쪼들린 살림 때문에 가장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시골 농부들은 마키아벨리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막 대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고전 몇 권을 벗 삼아 읽으며 때를 기다렸지만 메디치 가문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당시 마키아벨리의 삶은 어땠을까? 로마에 있던 친구 베토리에게 쓴 1513 1210일자 편지에 그의 근황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숲을 나와서는 약수터에 들렀다가 새를 잡는 곳으로 간다네. 나는 책을 한 권씩 끼고 다니는데 단테나 페트라르카, 아니면 그보다는 조금 아래의 시인들 책이지. 왜 티불루스나 오비디우스 등과 같은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나는 그들의 감미로운 감정을 느낀다네. 그리고 나의 감정과 사랑도 되새겨보지. 그 다음엔 길로 나와 술집에 들르지. 그곳에서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쪽 소식을 묻기도 하고 이런 저런 온갖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의 잡다한 풍취와 다양한 생각들을 접하게 된다네. 그러다보면 식사시간이 오고 나는 가족들과 함께 이 초라한 시골집과 보잘것없는 땅뙈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배를 채운다네. 식사를 마친 다음 다시 그 술집으로 가지. 그곳엔 나를 반길 사람들이 있지. 보통은 푸줏간 집 한 사람, 방앗간 집 한 사람, 그리고 가마 굽는 일을 하는 사람 둘이 그들이라네. 나는 이들과 어울려 카드를 딱딱 소리 나게 집어던지며 카드놀이를 한다네. 이 와중에 수없이 오가는 말다툼과 욕설들판돈으로 건 몇 푼 되지 않는 돈 때문에 종종 드잡이판을 벌이는 통에 멀리 산 카시아노에서도 싸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라네. 이 기생충 같은 인간들 틈에 끼어 곰팡내 나는 머리 냄새를 맡으며 나는 내가 처한 불운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려고 한다네. 운명의 여신이 나를 이렇게 짓밟고 있지만 나중에 그녀가 스스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네.”

 

 

마키아벨리는 숲 속에서 새를 잡거나 동네 술집에서 푼돈을 걸고 도박을 하면서 인고의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운명의 여신이 나를 이렇게 짓밟고 있지만 언젠가는 스스로 후회하게 될 것이라며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메디치가문이 불러 준다면 피렌체에서돌을 나르는 일을 시킨다고 해도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할 만큼 그의 기다림은 애절했다.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나는 이 메디치 군주들이 나를 써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네. 설사 돌 나르는 일부터 시킨다고 해도 상관없네. 어쨌든 내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다름 아닌 내 탓이기 때문일세. 그들이 내 책(군주론)을 읽게 된다면 내가 국정술 연구에 바친 지난 15년을 결코 잠과 놀이만으로 헛되이 보내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러고 다른 사람들의 노고를 길잡이 삼아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의 봉사를 받는 데야 그 누군들 기쁘지 않겠는가? 그들이 나의 진실됨을 의심할 필요는 없네. 나는 지금까지 줄곧 진실된 길을 걸어왔고 그것을 이제 와서 새삼 깨뜨릴 생각은 없네. 나처럼 43년간이나 진실되고 바른 삶을 살아온 사람은 결코 본성을 바꿀 수가 없는 법이지.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이 바로 내가 진실되고 바르다는 증거가 아니고 뭔가?”11

 

그러나 메디치가문은 마키아벨리를 부르지 않았다. <군주론>을 헌정받았던 로렌초 데 메디치는 마키아벨리의 책을 읽지도 않았다. () 정부의 핵심 관료가 보낸 포트폴리오는 아마 로렌초의 책상에 오르기도 전에 검열을 당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메디치가문으로부터 부름이 없자 마키아벨리는 분노에 가까운 실망감에 빠져들었다. 경험과 통찰력에서 아무도 날 따를 수 없는데 도대체 어디서 통치의 지혜를 얻겠단 말인가? 왜 세상은 나를 몰라주는가?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 품었던 희망을 접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다른 책을 쓰기로 결심을 한다. 이 책이 바로 <로마사 논고>. 그는 이 책의 앞부분에 이렇게 썼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내 말을 믿지 않는다.”12

 

 

세상살이가 팍팍하기만 하다. 위기는 전() 지구적이고 위기극복을 위한 출구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나이 오십을 겨우 넘겼는데 회사는 구조조정의 당위성을 설득하려 든다. 차오는 뱃살에 신경이 쓰여 마음만은 홀쭉하다고 핑계를 대 보지만 아무도 웃지 않는다. 결혼했다는 것이 무슨 죄목이라도 되는 양그래서 여자들은 안 돼라는 언어폭력의 칼자루가 여직원의 사무실을 난자한다. 대한민국에서 아줌마는사회적 부담을 설명하는 동의어다. 그렇다고 청년들은 무사한 나라인가? 그렇지 않다.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이 더 이상 신선하게 들리지 않는다. 죽도록 공부해서 대학 왔는데 고졸 채용을 늘리겠다는 기업체의 최근 동향은 한국의 대학 교육이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 어떻게 할 것인가? ‘더러운 세상을 향해 침 뱉기 대회를 했다면 마키아벨리는 아마 그 대회의 제일 앞줄에 섰을 것이다. ‘더러운 세상을 향해서 욕설하기 대회를 했다면 마키아벨리는 금메달감이었을 것이다. ‘더러운 세상을 등지기로 했다면 마키아벨리는 죽을 때까지 면벽(面壁)의 수도승이 됐을 것이며 인도의 구루를 무색케 할 묵언수행자(?言修行者)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더러운 세상에 침을 뱉지도, 욕설을 퍼붓지도, 그 세상을 끝내 등지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여우가 됐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완벽하게 속인 것이다. 교묘하고 치밀하게. <군주론>은 여우 마키아벨리가 메디치라는 여우를 잡기 위해 설치한 기만의 덫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산탄드레아에서 <군주론>을 집필하는 동안 낮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고 찬거리라도 마련하기 위해서 새()를 잡으려 다녔다. 숲 속에서 사냥을 한 것이 아니다. 사냥은 당시 비싼 총기를 소유하고 있거나 숲 속의 동물을 한쪽으로 몰수 있는 수십 마리의 개를 가진 부자들이나 하는 호사(好事)였다. 마키아벨리는 생계형 사냥꾼이었다. 바구니를 엎어 놓고 입구를 약간 벌린 다음 몇 개의 새 모이를 던져 놓고 그 안에 새가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원시적인 사냥도구를 사용했다. 말이 새 사냥이지 그것은 한 끼를 때우기 위해서 가난한 농부들이 하는 비참한 생활의 일부였다. 마키아벨리는 바구니를 들고 산탄드레아의 숲으로 들어가면서도 기가 죽지 않았다. 비록 지금 작은 바구니를 들고 숲으로 들어가지만 나는 한 시대와 영웅을 잡을 만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의기양양했다. 숲을 날아다니던 새 몇 마리가 엎어놓은 바구니 주변으로 모여들면 마키아벨리는 납작 엎드려 숨을 죽였을 것이다. 그리곤 다가오는 새들에게 이렇게 속삭이지 않았을까?

 

“그래, 이리오렴! 이놈들아, 내가 던져준 먹이를 물어보란 말이야! 그럼 내가 얼른 잡아먹어 줄게, 이 메디치 같은 놈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15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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