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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ons from Classic - 베토벤과 그의 시대 下

청력 잃은 베토벤, 당당함으로 시대를 휘젓다

김혜옥 | 111호 (2012년 8월 Issue 2)




“한때 내가 가장 완벽하다고 인정받았던 청각이, 이제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 되고 말았어.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해야 할 때에 위축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말 몸서리치고 가슴 아픈 일이지…. 내 가장 친한 친구들, 슈밋 박사와 리히노프스키 공()에게 가장 미안하고 고맙다고 전해주게. 그리고 너희들(동생 칼과 조카 요한) 중 누군가가 그들에게 받은 선물을 꼭 간직해 주기를.”

-1802,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보내는 유서

 

베토벤에게 서른 살이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시기였다. 우선 교향곡 3번을 구상하면서 기존 작품과 차별화된 실험을 감행하려던 때였다. 또 친구들(후원자들)의 신의와 후원도 매우 두터워서 그들의 힘을 빌려 여러 독주회와 협연을 하고 권위 있는 연주자로 인정받는 시절이기도 했다. 위의 유서를 쓰기 불과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가장 화려한 젊음을 보내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권위 있는 음악 비평지인 <비엔나 음악 신문(Wien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여태껏 들어보지 못했던 가장 아름다운 콘서트라며 1800 42일 베토벤이 직접 지휘했던 교향곡 1번 연주를 극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곧 가혹한 운명이 닥쳤다. 명석한 두뇌와 절대음감으로 인정받았던 작곡가가 이유를 알 수 없이 청력을 잃은 것이다. 티니투스(Tinnitus)라고도 알려진 이 질병은 26살이던 1796년부터 베토벤을 괴롭혔다. 처음에는 메니에르 병처럼 귀가 잘 들리지 않거나 이명 현상이 발생하는 듯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대화나 음악 감상도 어려워졌다. 청력 장애가 점점 심해지자 극도로 예민해진 작곡가는 주변 사람들과 자주 다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의 생애를 연구하는 이들은 그가 청력을 잃고 난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을 시작하게 됐다고 평가한다. 유서를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새로운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나가게 됐다. 당대 지식인들의 호의에 기생하는 명사가 아니라 당당하게 운명과 맞설 수 있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어느 소설가가 자신의 삶을시대와의 불화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베토벤의 삶도 격동의 시대에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밝히는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부터 그를 상징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소나타열정을 비롯해서 피아노 협주곡황제’, 교향곡 5운명같은 강인하고 장엄한 작품들 역시 이 시기에 나왔다. 시대의 변화를 읽은 베토벤의 새로운 예술적 선언이었다. 절망의 끝에 다다랐던 예술가가 본격적인 자신의 의견(opinion)을 세상에 밝히게 된 원동력은 무엇이고, 그가 지향했던 가치는 어떤 것이었을까?

 

객관적 통찰로 위기를 정면돌파

전략 연구자인 로버트 미첼(Robert Michell)과 그의 동료들은 경영자가 전략적 일관성(consistency)을 갖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은 메타인지능력(Metacognition)과 환경역동성(Environmental Dynamism)에 대한 인식이라고 지적한다. 지나간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위치와 환경 변화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흔히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리는 리더들은이라는 경험적인 요소와 기존의 성공 공식에 의해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인들과의 관계, 그리고 환경을 통찰할 수 있는 이들은 예상치 못한 위기에도 강한 정면 돌파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1

 

베토벤 역시도 객관적인 성찰이 가능했던 사람이었다.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돌아온 그는 열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재개한다. 구시대의 귀족이었던 친구들이허락해주는 연주를 하는 것보다는자기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작품이 더욱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1802년부터 1813년까지의 베토벤은 교향곡 3번부터 8번에 이르는 굵직한 작품들을 써내려 갔다. 예전에 작곡했던 피아노 소나타 시리즈에 이어합창 환상곡(Choral Fantasy. Op. 80)’ 같은 실험적인 작품들을 양산해내기도 했다. 1805년 이후부터는 리히노프스키 공을 비롯한 살롱 후원자들에 대한 의존도 역시 점점 줄어갔다. 그의 수입은 점점 후원자들의 프로젝트 일환으로 조성된 기금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출판한 작품의 인세를 중심으로 채워지게 된다. 친구들에게 항상음악가는 작품을 통해 충분히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며 세상과 직접 소통하며 적극적인 전략을 모색할 것을 강조하던 베토벤이었다. 당대 지식인들이 구호로 외치던유러피언 정신을 그는 당당하게 비즈니스 모델로 입증해 냈다.런던과 파리, 그리고 베를린과 비엔나와 같은 굵직한 문화 중심지마다 각각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던 지적 재산권 규정을 간파하고 국제적인 규모로 작품을 출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2

 

베토벤은 시대의 변화를 주도 면밀하게 읽어 냈다. 자신의 친구였던 브렌타노나 실러가 그러했던 것처럼 지식인이 자유롭게 의견(opinion)과 문화 코드(cultural code)를 창출하고 대중이 편안하게 공감할 수 있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의 가능성에 점점 빠져들게 됐다. 이것은 후원자들과위대한 천재의 모습을 논하던 20대와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인간의 자유와 이상이 갖는 가치를 찬양한 교향곡 9합창의 구상 역시 이 무렵부터 진행돼 왔다고 음악사가들은 해석하고 있다.

 

작곡가에게 음과 선율, 그리고 곡의 구조를 형상화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청력이 상실돼 간다는 것은 최대의 위기였다. 특히 작곡가가 작품을 생산(production)하는 것뿐만 아니라 후원자와 대중들 앞에서 공개 연주를 하는 것이 일상화된 경제 시스템에서는 다른 신체 부위가 불편하게 된 것보다 더욱 강한 고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자신에게 찾아 온 어두운 운명을 비극적으로 해석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몸보다 더욱 가파른 속도로 변화해 가는 시대의 양상에 주목했다. 흔히 클래식 음악이 낭만주의로 가는 가교가 열렸다고 평가하는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다.

 

인간관계를 되돌아보다

1803년부터 1810년까지 베토벤은 모든 문화인 중에 가장 바쁜 사람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를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데에 한계가 생겼다. 우선 청력 상실로 직접 연주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피아노 협주곡 협연을 하다가 망치거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다가 소절을 놓치는 것이 다반사였다. 결국 1806년 이후부터 베토벤은 직접 공연에서 작품을 선보이기보다는곡을 만드는작곡가로서의 역할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그는 이전보다 더욱 깊은 만남을 통해 사람들을 접하고 의견을 공유하려고 애썼다. 뿔처럼 생긴 호른을 보청기처럼 사용해 듣다가 그조차도 시원치 않자 필담을 통해 상대방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게 됐다. 비록 예전처럼 쾌활한 모드로 깔끔한 화술을 구사할 수는 없었지만 작품에 대한 식견과 통찰을 나누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은 많았다. 이제 관계는 예전의 귀족 친구들과 프로젝트를 모색하는 하나의사건또는단계에 머무르기보다는 자아를 형성하는 데에 영향을 주는과정으로 인식하게 됐다. 관계를 자산으로 해 대외적인 역량을 쌓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에너지를 갖게 하는 원동력으로 보게 된 것이다. 결국 중장년기가 되면서 베토벤은 관계를사회학이 아니라심리학의 차원에서 접근하게 된 셈이다.

 

베토벤보다 20살이 많았던 작곡가이자 건반악기 연주자인 클레멘티(Clementi)와의 만남이 대표적이다. 클레멘티는 자신이 작곡한 작품의 모티브나 조성의 구현 방식을 모듈(Module)화된 방식으로 만들었다. 베토벤 역시 제자들에게 반드시 클레멘티 소나타를 공부하도록 하는가 하면 그에게 직접 권유 받아피아노 환상곡(op.77)’이나합창 환상곡(Op.80)’처럼 실험적인 시도를 감행하기도 했다. 또 클레멘티는 예술가인 동시에 런던의 대표적인 출판업자 중 하나였다. 따라서 베토벤의 건반악곡 중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클레멘티 사를 통해 활발하게 영국에서도 유통될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추기경과의 인연 또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베토벤은 추기경이 10대 후반의 어린 왕자였던 시기부터 음악교사로서 피아노와 작곡법을 지도했다. 합스부르크 추기경은 베토벤에게 매우 특별했던 제자이자 친구, 때로는 선생님으로 평가받았다. 나폴레옹 군대가 오스트리아 지역으로 진군하자 추기경을 비롯한 왕실 일가는 비엔나를 잠시 떠나야 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자신의 가장 돈독한 친구에게 베토벤은고별(피아노 소나타 26)’이라는 곡을 바쳤다. 재미있는 것은 그는 그가 바쳤던 대부분의 곡들을 헌정자의 실제 연주로 듣고자 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대공(Archduke)’이라는 피아노 3중주곡을 비롯해 14곡의 작품이 합스부르크 추기경의 시연을 위해 씌어졌다. 베토벤에게 추기경은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창작을 자극하는 기폭제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인간관계들이 어떤 변화를 가져다준 것일까? 우선 자신의 삶에 타인이라는 존재가 크게 자리잡을 만큼 심적인 여유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30세 이전까지의 베토벤은 완벽하게 짜인 삶을 사는 천재 작곡가였다. 항상 준비된 자세로 연주를 기획하고 자신의 후원자들이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가치에 보답하기 위해 애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청력을 잃어가고 그 스스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야 하는 시기가 되자 자원과 가치를 교환하던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웠다. 끊임없는 연주 시연과 작곡가의 변()을 통한 설득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제 베토벤은 계획된 비즈니스 마인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완성되지 않은 모습의 여유와 정감, 그리고 근본적인 정체성(identity)에 호소하게 됐다.

 

경영학자 제임스 마치(James March)도 비슷한 요지를 자신의 저서에서 남긴 바 있다. 조직이나 개인의 변화는고도로 계산된(managerial calculation)’ 방책의 결과가 아니라 오랫동안 맥락화되고 내재된 특성들이 더욱 강하게 작용한 산물이라는 것이다.3 이제 베토벤은 진정으로 위대한 천재는 예술가를 신화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인격(personality)과 영혼(soul)으로만들어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 메이나드 솔로몬을 비롯해 그를 연구하는 음악학자들은 베토벤의 30대를 정리하면서격정과 좌절에 가득 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낭만 작곡가로 변화되기 시작한 시절로 평가한다.

 

 

 

 

과거의 자신에서 차별화하는 창의성

1805년부터 베토벤의 음악은 자신만의 설명을 달게 되면서 점점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해 갔다. 특히 일생에 유일하게 작곡한 오페라였던피델리오가 그랬다. 당시 유럽의 정치사에서 보여주듯 모든 갈등의 핵심은 인물들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베토벤의 지론이었다. 이를 음악극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성악적인 스킬의 변화가 필요했다. 베토벤은 자신이 원하는 커다란 작품의 스케일을 떠받치기 위해 성악가들이 독자적인 요소로 기능하기를 원했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작곡가의 주관과 관습에 맡겨졌던 표현들을 실제 무대 효과와 소리로 관중이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800년대 초반이 되자 사람들은 인기 있는 작곡가나 지휘자, 기악 연주자뿐만 아니라 극에서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는 성악가에게 새로운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카테고리(Category)를 인정받은 이들은 오페라뿐만 아니라 가곡, 오라토리오, 미사와 같은 다양한 장르에서 자신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성악가들의 흥행을 정확하게 관측했던 베토벤의피델리오는 낭만 시대의 분위기를 선도하는 음악극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45세였던 1815년 이후부터 베토벤은 점차 대중적인 음악 시장에서 잊혀가는 존재가 됐다. 성악가의 표현과 스케일을 강조하던 트렌드는 이제 이태리 오페라로 그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제 사람들은 베토벤이 아니라 롯시니라는 새로운 인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 비극을 다양한 무대 효과와 시나리오로 적절하게 안배하면서 연주자의 재량권을 극대화한 이태리 오페라가 인기를 끌게 되었다.

 

베토벤은 유행에서 멀어진 것을좌절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길을 자유롭게 걸어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받아들였다. 베토벤의 전기작가인 쉰들러의 견해에 따르면 40대 중후반의 베토벤은 거의구도자또는초월한 사람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우선 물리적인 성공과 실패의 향배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 단순히 대중이 흥미를 가질 만한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는 자신의 관점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조직이론 연구자인 로렌조 비치는창의성(creativity)’의 개념에 대해 기존의 이론과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거시적인 역사를 통찰해 보면 가장 혁신적인 프로젝트나 콘텐츠들은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과거의 자신과 차별화된다. 과거의 성공 경험이나 궤적을 오늘에 투영하지 않는 자세다. 두 번째로 동시대의 인물들과 괄목할 만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어려운 과제다. 환경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증명받지 못한 예술가나 조직은 창의성을 평가받기 전에 사멸해 버릴 위험이 크다.4

 

베토벤에게 가장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두 가지 과제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미사 C 장조로도 알려진 장엄 미사(Missa Solemnis)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인본주의자에 가까웠던 그는 평소 교회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살았다. 그러나 자신을 아끼는 합스부르크 추기경이 젊은 교계의 지도자였던 탓에 그를 위한 작품을 써야겠다는 동기가 있었다. 또 그 자신에게는 초창기 하이든의 영향과 피아노 소곡을 중심으로 한 기본 구상에 충실했던 경향에서 벗어나 전무후무한 규모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동원하려는 시도였다. 과거 작곡가들이 교회에 소속돼 부과된 의무를 다했던 것과 달리 베토벤은 가장숭고한음악의 프로토타입(prototype)을 제시하고자 미사곡을 작곡했다. 인류애와 자유를 신봉했던 베토벤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기독교와 구원의 메시지를 빌려장엄미의 개념을 청중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과제는 교향곡 9번이었다. 실러의 시환희의 송가를 읽고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발전시켰다고 알려진 이 작품은 거의 반평생 준비된 역작이었다. 교향곡을 절대적인 기악 음악의 표본으로 생각했던 당시의 관념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다. 마지막 4악장의 합창과 솔로,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표현하기 위해 1, 2, 3악장의 긴장을 조성했다. 당시 잡지의 비평가들은이것이 오페라인가? 아니면 오라토리오인가, 그렇다고 교향곡이라고만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며 놀람을 표시했다. 교향곡합창은 오래 전부터 시행 착오를 거쳐 준비된 작품이었다. 피아노와 플루트,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합창부가 함께하는합창 환상곡의 부분적인 성공을 통해 시장에서 검증됐던 구상인 셈이다. 10여 년의 세월 동안 대중으로부터 잊혀지다시피했던 그는 동시대와 작품들과 전략적 거리(strategic distance)를 조절할 수 있는 명인(名人)으로 다시 자리매김했다.

 

노년과 최후

베토벤의 노년은내우외환(內憂外患)’이었다. 시장의 선호가 바뀌면서 출판사들로부터 얻어지는 인세 수입이 줄어갔다. 합스부르크 추기경을 비롯해 그를 지지하던 오스트리아 왕실도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독자적인 브랜드 가치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속도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중의 수요는 복잡하게 변해갔다. 대중들은 롯시니를 비롯한 이태리 작곡가들의 오페라처럼 치정과 복수에 얽힌 드라마를 원했다. 한편 지역별로 자국어로 된 작품을 선호하는 보수적인 분위기도 있었다. 나폴레옹이 몰고 온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셈이다. 유럽 전체의 보편 정신을 이야기하던 경향은 어느덧 국민국가주의로 바뀌게 됐다.

 

 

 

베토벤 역시도 1824년 이후부터는 거의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할 정도로 심신이 쇠약해 졌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 등장하는 조카는 작은아버지의 권위를 이용해 사고를 치고 다니기 일쑤였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에도 실패했다. 일평생 결혼한 경험이 없는 그는 여러 귀족 여인들과의 연애를 행복하게 마무리 짓지 못하고 긴 세월을 히스테리 증상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했다.

 

1827년에 일생을 마감하자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인 모두가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베토벤의 장례 행렬을 그린 삽화도 남아 있다. 관을 운구하는 이들은 당대의 명사와 지식인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젊은 슈베르트도 동참했다는 설이 있다. 독일인들의 조직 기억(organizational memory)에 남은 사상가가 된 것이다. 후대의 베르디(Verdy)나 푸치니의 예를 제외하면 음악가의 장례로서는 최대의 국민적인 열기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베토벤을 신화화된 인물로 논하거나 괴팍한 낭만 예술가의 전형으로 해석해 왔다. 청력 장애로 음악인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게 된 것도 그를 영웅이나 초인적 인간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 그의 성공은 오랜 세월 갈고 닦아 온 내공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전략적 직관(strategic intuition)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가진 것이 없었던 20대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고민했던 성실한 예술가였다. 그리고 빠른 시간 안에 비엔나와 문화계를 주름잡는 오피니언 리더로 성장했다. 핵심 역량인 청력과 감식력에 장애가 생기자 과감하게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는 통찰력도 갖췄다. 역동적이고 혼란스런 시기를 살고 있었던 것은 본인뿐만이 아님을 깨닫고 당당하게자유와 이상을 위한 예술을 외친다. 물론 이것이 흔들림 없이 가능했던 이면에는 따뜻한 사람들과의 교제와 지지가 있었다. 창의성(creativity)이 사회적 지지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다.

 

천재들의 삶은 계량화하고 일반화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궤적은 많은 이들이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체계화된 자기 진단의 결과로 다져져 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 그리고 어떤 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예술가의 명민함. 그것이 바로 베토벤이라는 남자가 위대하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베토벤 중후기의 대표적 작품들

합창 환상곡

Choral Fantasy, in C minor, op. 80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마우리치오 폴리니 피아노, 빈 시립극장 합창단, 빈 필하모닉. 도이치 그라모폰.

이탈리아인으로 런던에 정착한 클레멘티는 성공한 건반악기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다. 한참 여행 중이었던 그는 베토벤을 만나 기악 음악의 정수와 합창 음악의 표현을 결합한 작품을 선보일 것을 권유한다. 청력 장애 이후로 내면이 피폐해 있었던데다가 여러 번의 연주 실패로 슬럼프에 빠졌던 베토벤은 과감하게 독주자, 성악 독창자, 그리고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교창(함께 노래 부르며 상호작용하는) 구조로 연주하는 듯한 작품을 구상해 냈다. 1810년 이 작품이 완성되자 베토벤은 후일 작곡하게 될 교향곡합창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고 알려진다. 카라얀에 이어 교향곡 해석의 1인자로 손꼽히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직접 빈 필하모닉과 합창단을 지휘했다. 피아니스트인 폴리니는 베토벤 못지않게 리버럴리즘적인 정치사상을 가진 이로 유명하다. 섬세한 피아니즘과 박력 있는 오케스트레이션이 결합된 해석으로 호평받고 있는 음반이다.

 

교향곡 9합창

지휘 로저 노링턴, 솔로이스트 패트릭 파워, 사라 파커, 런던 클래시컬 플레이어즈 & 쉬츠 합창단

2005. Virgin Classics.

베토벤은 거의 30년에 걸쳐 교향곡합창의 스케치를 고치고 다듬었다. 곡은 죽기 3년 전인 1824 10월에야 작곡가 자신이 참관한 자리에서 연주될 수 있었다. 슈판치히 4중주단의 멤버이자 바이올린 선생이었던 이그나츠 슈판치히와 후배였던 움라우프가 실질적인 지휘를 맡아 곡을 이끌어 갔다. 실질적으로 혼돈 속에서 하나의 빛이 형성되는 모습은 후일 브루크너를 비롯한 낭만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줬다. 그리고 실제로교향곡 9과 같은 방식으로 곡의 분위기를 이끌고 갔던 이들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지휘자 로저 노링턴 경은 바로크 시대와 고전 시대의 작품들을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음반도 당시의 음향과 조음 구조를 고려해 당대 악기를 사용해 연주된 것을 녹음했다.

 

오페라피델리오

지휘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취리히 오페라하우스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요나스 카우프만, 카밀라 밀룬트 등

피델리오는 프랑스 대혁명기에 구금됐던 혁명운동가 플로레스탄과 그를 구출하기 위해 남장해 잠입했던 레오노레의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희극을 중심으로 한 오페라 부파를 지나치게 자극적이라고 봤던 베토벤은 그가 지향하던 자유주의 정치사상을 음악극으로 만들려고 했다. 1805년 작품이 완성됐을 때에는 프랑스군이 비엔나를 점령하고 있어서 거의 프랑스 장교들을 청중으로 공연을 진행했다. 관람하는 이들은 독어 공연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음악의 장대한 스케일에 놀랐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극장 측은 이 작품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고쳐달라고 베토벤에게 제안했고 그것을 금방 수락할 수 없었던 작곡가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교정해 두 번의 재초연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바로크 음악 전문 지휘자인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최근 들어 고전/낭만 시대의 오케스트라와도 종종 협연하고 있다. 고음악 연주자의 섬세한 작품 해석과 현대 악기로 연주되는 합주단, 그리고 솔로이스트들의 웅장한 표현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음반이다.

 

 

김혜옥 연세대 음악대학 합창지휘전공 교수 hokimbangeunice@gmail.com

천영준 연세대 창조경영센터 선임연구원 taisama@naver.com

김혜옥 교수는 줄리어드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학사 및 석사, 웨스트민스터콰이어 칼리지에서 교회음악 및 합창지휘 석사, 맨해튼 음대에서 같은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레건 바흐 페스티벌, 한국합창제 등을 통해 전문 연구자 및 세미나 강사로 활동해 왔다. 현재는 연세대 음악대학 교수 겸 연세 콘서트 콰이어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다. 2010년 스페인 문화부 주최 국제하바네라콩쿠르에서 최고 지휘자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천영준 선임연구원은 연세대 경영학과 및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정보산업공학과 석사 과정에서 비즈니스 모델 개발 및 경영 전략을 연구했다. 현재 연세대 기술경영협동과정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연세대 창조경영센터에서 협업적 혁신(Collective Innovation) 및 소셜 컴퓨팅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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