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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율곡의 도학정치

물러서는 퇴계 vs 나아가는 율곡 그 접점에 리더십의 길 있다

한형조 | 109호 (2012년 7월 Issue 2)



1. ‘
이름 그대로한사코 물러나는 퇴계

1567년 명종이 죽고 십대의 소년 왕 선조가 즉위했다. 선조는 서울에 머물던 퇴계 노인에게 무너진 교육을 세우고 타락한 풍속을 바로잡아 달라는 뜻에서 예조판서를 맡겼다. 그러나 퇴계는 한사코 사양했다. “나는 내 집 도산(陶山)으로 가려네.” 그러자 안팎으로 비난이 거세게 일었다. 어째 자기 일신의 안일만 도모하느냐는 안타까움에다, 산속에만 박혀 있겠다니 무슨 산새[山禽]냐는 힐난까지 무성했다. 그를 존경한 철학 논객 기대승조차 퇴계 어르신이 진퇴(進退)에 있어,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과연 올바른 대의(大義)를 따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섭섭함을 표했다.

 

당시 이조좌랑이었던 서른 초반의 젊은 율곡은 퇴계의 소매를 붙들고 간곡히 만류했다. 명종 재위 시 외척 윤원형의 득세와 함께 불어닥친 을사사화의 칼바람과 권력의 전횡, 그 앞에 무참히 꺾인 선비들(士林)의 기상을 북돋우고 무너진 풍속을 일으킬 정신적 지주는 오직 퇴계 당신뿐이라는 것이었다.

 

“할 일은 많고 어려움이 산적한 이때, 물러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십니다.”

 

“도리는 아니지, 그렇지만 몸은 늙고 병든데다 무엇보다 나는 그릇이 아니야.”

 

“시무(時務)야 능력 있는 사람들이 처리할 일이고 어르신은 경연(經延)에서 조정의 원칙과 규범을 잡아주시기만 해도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아니야, 내 재주로는 이익이 남에 미치지 못하고 내 몸에 절망만 더해질거야.”

 

마침내 퇴계는 도산으로 퇴거해버렸다. 사림과 조정의 낙망은 컸다. 이듬해에도 율곡은 간곡한 편지를 올렸으나 퇴계는 못 들은 척했다. 다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를 통해 자신의 충정을 전했을 뿐 그 후 몇 번의 서울 나들이가 있었지만 종내 산림에서 문을 닫고 지냈다.


 

2. 늘 나아가는 율곡

1583년 율곡은 죽기 1년 전, 병마와 싸우면서도 병조판서를 맡았다. 그해 겨울 북방에 여진족들이 군사를 몰고 변방을 어지럽혔다. 북도병사(北道兵使) 이제신이 북방의 효율적 방위책 20여 개 조를 진언하자 선조는 이를 검토해보라고 조정에 보냈다. 모두들 어찌할 줄을 몰랐다. 군사에 대한 식견이 없었던 것이다. 당대의 문장이요, 천재라는 유성룡도 붓만 끄적거릴 뿐 종내 초안을 잡지 못했다. 박순이 나서서 병조판서를 불러 의논해보자 하니 모두들 그게 좋겠다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율곡이 들어와 붓을 잡으면서 모두들 의견을 개진하면 요약 정돈하겠다고 했으나 아무도 입을 떼는 사람이 없었다. 율곡은 이제 신의 건의를 조목조목 차례로 따지면서 가부를 결정, 바로 초안을 잡아 내려갔다. 일은 금방 끝났다. 그 초안을 돌려 보면서 아무도 말이 없었고 한 글자의 수정 없이 그대로 임금에게 전해졌다. 선조는 한눈에 율곡의 작품임을 알아보았다. 박순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누가 율곡을 뜻은 크고 재주는 소활하다고 했는가. 그 재주를 써보지도 않고 어떻게 함부로들 평하는가. 내가 그 시행하고 조처하는 것을 보니 지극히 어려운 난제라도 조용히 밀고나가는 것이 구름이 허공을 건너가는 듯 흔적이 없으니 참으로 희귀한 자질이다.”

이듬해 겨울, 율곡의 병이 깊어졌다. 북방의 순무(巡撫)를 맡은 서익이 부임인사차 찾아오자 방략의 조언을 해줘야겠다면서 일어났다. 모두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붓을 잡을 힘이 없어 아우에게 받아 적게 했다. <육조방략여서어사익(六條方略與徐御使益)>,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글이 됐다. 다 불러주고 난 후 극도의 피로로 혼절했다.

 

3. 성숙한 인격에서 건전한 판단력이 나온다

퇴계가 학자형이라면 율곡은 관료형이다. 그러했기에 퇴계는 주변의 권고와 기대에도 불구하고 한사코물러나고자했고 율곡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한사코 관직에나아가뜻을 펴고자 했다.

둘이 서로 다른 길을 간 데는 현실 정치적 환경도 크게 작용했다. 퇴계는 연산군 이래 지속된 사화(士禍)의 암울한 시대 속을 살았다. 문정왕후와 외척 윤원형이 선비들을 탄압하고 권력을 독점했던 그 시절에 퇴계는 형을 억울하게 형장(刑杖) 아래 잃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를 지내온 사람이 정치에 희망을 가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율곡은 달랐다. 명종이 죽고, 직계가 아닌 선조가 왕위에 올랐고, 새 임금은 이전과는 다른 청신한 정치를 하고 싶어 선비들을 중용했다. 앞에서 율곡이 퇴계를 향해시대가 달라졌다고 말한 속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퇴계는 물러나고자 했다. 왜 그랬을까. 유성룡 등 제자들은 선조가 퇴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권신들의 전횡이 여전했기에뜻을 펼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나는 퇴계 자신의 술회를 존중한다. 실제 그는 너무 나이가 들었고,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결정적인 것은 정치보다 학문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는(退)’를 다짐하며 이렇게 읊었다.

 

“몸이 물러나니(退) 내 분수에 적합한데 공부가 뒤처졌으니(退) 그게 걱정이다. (身退安愚分, 學退憂暮境)”

 

선조의 곁을 떠나면서 퇴계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남겼다. “군주를 성자로 만들기 위한 열 개의 그림이다. 오래된 유학의 이념을 따라 퇴계는 군주가 자신의 사적 욕망과 관심을 탈피하지 않으면 올바른 정치가 이뤄질 수 없다는 생각에 철저했다. <성학십도>는 바로 그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자기 성찰과 훈련을 담고 있다. 선조는 퇴계의 충고를 따라 이 그림들을 병풍으로 만들어 일상의 거처에 두고, 또 작은 책 한 질은 따로 만들어 들추어 볼 수 있도록 했다.

  

유교의 중심은 심학(心學)이다. 그것은 마음의 계발을 위한 훈련을 담고 있다. 관건은 편견과 에고라는자신의 좁은 감옥을 벗어나는 연습이다. 그런데 그것은자신을 희생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공동체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왈, ‘진정 자신을 위한 학문(爲己之學)’이라 부른다. 퇴계는 이 훈련에 평생을 몰두했다.

 

이 훈련은 몸과 마음의 두 부면을 동시에 다스려야 한다. 일관된 중심은()’이다. 이것은 안으로는 ①“자신의 내부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시선이자 밖으로는 ②“사물과 사람에 대한 공경” ③“일에 임하는 성실을 포괄하고 있다.

 

지금 도산서당에는 퇴계 자신의 글씨로 된 현판이 몇 가지 걸려 있다. 그중 하나가무불경(毋不敬)’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이 경(), 경건함을 유지한다는 다짐을 담고 있다. 그 경이 종교적 경건과 닮았다는 것을 누구나 쉬이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퇴계는 일상에서, 어디서나 넘실거리는 초월적 중심과의 대면을 의식했다.

 

그렇지만 선조가 그 책을 통해 인격을 완성하고 성현이 된 것 같지는 않다. <성학십도>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현실 정치가가 도달하기에는 너무 높은 곳이어서 선조는 그 책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책은 또한 너무 압축적이어서 거기 담긴 내용을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선조가 책을 경연에서 강의하도록 했을 때 다들 손사래를 쳤다.

 

“퇴계 같은 학자가 평생에 걸쳐 터득한 이치를 담은 책을 우리가 어떻게 쉽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 정치가들은 퇴계의 철학이 종교적 명상에서는 몰라도정치의 현실적 지평에서는 너무우활하고 비현실적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럴까.

 


4. 퇴계, 물러남을 통한 정치
 
퇴계는 자신이 물러나는 것을 단순히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또 하나의 정치적 선택으로 알아주기를 바랐다. 출세와 영달을 위해 정치에 뛰어드는 부나비들에게 그러지 말기를, 정치란 남을 위해 기여하고 봉사하는 숭고한 성직임을 일깨우고자 했다. 당시는 지금보다 더 권력의 무게가 컸다. 권력이 곧 명예와 재물을 몰고 왔고 타인의 행복과 사회의 질서에 더 큰 영향을 직접적으로 행사하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퇴계는 자신이 물러남으로써 그 타락한 세상에 한 바탕 맑고 청신한 바람을 불어넣고 싶어 했다.

 

퇴계는 스스로를초야(草野)의 우생(愚生)’이라고 불렀다. 어리석다는 말의 의미는 양면적이다. ①하나는, “보장된 부귀영화를 사양하고 초야에 몸을 묻은 것으로 이때어리석음은 자부심이다. 그는 늘 자신의 이 어리석은 행동이 명리(名利)를 위해 환로(宦路)에 뛰어드는 부박(浮薄)한 사풍(士風)을 되돌리는 모범이 되기를 바랐다. ②또 다른 하나는 퇴계가 실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함을 자인한 것이다. 퇴계는 임금이 부를 때마다 예의 그허명(虛名)만 났지 경제(經濟)를 감당할 재주가 없다고 미안해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부르는 임금과 그의 출사를 고대하는 조야를 향해모기더러 태산을 짊어지라면 할 수 있겠습니까(使蚊强負山, 應無令終畢)”라며 한사코 사양했다.

 

퇴계의물러남은 역설적으로 그의 카리스마를 만들었다. 이것이 인간사의 역설인지도 모른다. ‘나아가려하면 막히고, ‘물러나고자하면 열린다! 학인들은 그의주변으로 몰렸고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그 품에서 자랐다. 스스로 고백하듯 그의 관료 재임시절, 특별한 일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부임시절 거쳤던 주민들의 평가는 이랬다.

“역대 수령 중 가장 유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재임했던 시절이 가장 평안했다.”

 

5. 율곡, 도학 정치의 꿈

율곡은 퇴계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정치는 그의 운명이라 그는 한사코나아가고자했다. 그 역시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외쳤다. 그렇지만 그것은인격 완성 이후에 정치를 말한다기보다정치 속에서 인격은 발현되고 성숙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발상은 그의 독특한 주기(主氣)의 철학 속에 담겨 있다. 주리의명상철학과는 달리 주기 철학은 개인과 사회를 분리하지 않고 명상을 정치 안에 통합한다.

 

“인간은 이미 관계 속에 있다. 인간은 기()의 관계망, 그 네트워크 속에서 기()를 발현하면서 살고 있으므로 고립된 영역은 없고 그리하여 관계란 존재의 운명이다!”

 

부연하자면 한 개인은 좁게는 가정에서 사회, 나아가 국가와 천지우주에 이르기까지 서로 영향과 신호를 주고받고 있으므로 타자적 기()에 대해서, 그리고 전체의 기()의 질서와 창조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런 발상을 시인 정현종은 이렇게 읊은 적이 있다.

 

“내가 벤치에서 숲속으로 돌 하나를 던졌다. 나는 우주의 균형이 바뀌는 소리를 들었다.” 내 표정과 몸짓 하나, 그리고 행동 하나가 타자의 기와 바이러스처럼 감염되고 전 우주의 기()의 네트워크를 나비효과처럼 일거에 바꾸어 놓는다. 이 전체적 연관의 사고에서, 퇴계처럼 물러날 공간은 없다. 율곡은 그래서 정치를 운명처럼 알았다. 한 개인은 이미 정치에 참여하고 있고 그 유위(有爲)를 통해 사회조직의 구조, 생산과 소비의 구조, 권력의 배분의 구조, 규범과 법전의 구조를 합리화해 나가는 소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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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은 선조에게 을사 위훈(僞勳)의 삭제부터 건백(建白)했다. 당시의 재상 동고 이준경이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신원해주는 선에서 절충하고 미래를 위해 나아가자고 권할 때 율곡은 그때 한 일도 없이 괜히 공신록에 올라 있는 사람들의 관작부터 깎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관료 가운데 여기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싫어도 올라간 사람도 많았고 그중에는 자기 분야에서 유능한 재능을 펴보려는 사람도 많았다.

 

한 시대의 기풍은 한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상황성을 갖는다. 그것을 예전 말로는 시()라 했고 이즈음 말로는 네트워크라고 한다. 그런데 그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한 바탕 위에서 필요한 개선과 조정을 해나가는 대신 율곡은 과거를 다시금 원점에서 바로세우고자 했다. 율곡은 산적한 시무(時務)를 제쳐 두고 과거의 일에, 명분(名分)을 바로잡는 데 매달렸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율곡은 개혁에 필요한 원로와 고관들의 협력을 얻지 못했다. 개혁의 최종 책임자인 선조의 마음을 얻어 내지도 못했다.

 

처음에 젊은 선조는 분명한 개혁의지를 갖고 노련한 원로들을 거침없이 비판해나가는 신진 율곡에게 대단한 매력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는 율곡의 개혁론이 지향하는 목표가 현실정치가 도달할 수 없는 요순의 이상 정치 근처에 가 있음을 알고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율곡의 기준은 선조에게 마음 깊은 콤플렉스를 심어줬을 것이다. 그 반대급부로 선조는 율곡을 자주 지나친 이상주의자로 시니컬하게 평가했다.

 

율곡이 구상한 것은 도학(道學) 정치라 불리는, 이를테면 사회적 네트워크의 철저한 도덕화였다! 그것은 일찌기 삼대(三代) 이래 누구도 실현해보지 못한 유교의 영원한 꿈이었다. 율곡은작은 평화를 건설한 후덕(厚德)의 군주로 평가받는 한()의 문제(文帝)까지 현실에 타협하고 자기만족에 빠진 무책임한 정치지도자로 평가했다. 보통 수준의 젊은 선조가 율곡의 기준과 엄격성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누가 다음과 같이 대놓고 말하는 신하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

“만일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나라를 다스리기에 부족한 그릇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상감보다 어질고 유능한 사람에게 전권을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若自度才不足以治國, 則必得賢於己者而任之可也. <經延日記>)

율곡의 인물평은 각박하기로 유명하다. “율곡 안하(眼下)에 무완인(無完人)”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다. 정치가 조정과 협상의 기술이라면 사람들의 결점을 끌어안고 그들의 이기적 욕망을 존중해 주어야 하는데 율곡은 사람들의 장점보다 단점이 더 크게 눈에 들어온 듯하다.

 

 
율곡의 개혁은 벽에 부닥쳤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근본 이유가 정치에서 성학(
聖學)을 요구한 데 있다면 지나칠까. 적나라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이전투구의 정치 현장에서 어떤 정치가가 자신의 사적 욕망을 완전히 지우고 완벽한 공적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그는 유능한 정치가가 되기보다 마음 좋은 시골 훈장이 될 공산이 크지 않을까.

 

누구도 성자라고 자신할 수 없는 사람들이 편을 갈라저쪽은 소인, 나는 군자로 이름붙이고 서로 손가락질하며 피 튀기며 싸움으로써 정치는 실종되고 고질인 붕당을 확산시켰다. 물론 율곡 자신은 이미 갈라질 조짐을 보이는 동인과 서인 사이를 중재하려고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관 속에 이미 그 뿌리가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듯하다.

 

6. 뜻은 높게, 현실은 점진적으로

그래도 이 평가는 지나친 바가 있다. 위의도학적 이상주의는 율곡만의 것이 아니라유교의 일반적 지향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노론에 비하면 율곡은 상대적으로 매우 유연하고 현실적인 정치가였다.

 

그는 예()의 질서를 이상으로 하고 요순의 세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지만 늘를 의식하고 있었다. 즉 이상정치를 단숨에 성취하겠다는 조급증에 매몰되지 않고, 혹은 구호로 외쳐 권위를 얻으려 하지 않고 점진적 회복과 실무적 접근에 누구보다 능했고 철저했다. 그런 점에서 유연하다.

 

그는작은 안정과 평화(少康)’부터 도모하고자 했다. 엘리트의 자기훈련을 가혹하게 요구했지만 백성들에게 갑자기 주문하지는 않았다. 의식이 우선이고 교육과 교화는 다음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한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한때 조정에서 향약(鄕約)의 실시를 의논한 적이 있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시행을 주장하자 율곡은 의외로 불가하다고 외쳤다. 허엽이 율곡에게 항의했다.

“어째 향약을 정지하라고 권했소?”

“의식이 족해야 예의를 아는 것이오.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백성들에게 억지로 예를 행하게 할 수 없소.”

허엽이 탄식했다. “제도가 오르고 내림에 운명이 있구나.”

율곡이 물었다. “공의 생각에는 민생이 아무리 곤란해도 향약만 행하면 과연 백성을 교화시켜 좋은 풍속을 이루며 정치가 태평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소?”

“그렇소.”

“공은 그럼 향약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있소?”

“주상의 명령이 없어 못했소.”

“집안 다스리는 데 주상의 명령까지 기다릴 것이 뭐 있소?” 그러면서 덧붙였다. “예전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도 예속을 이루는 일이 있었기는 하오. 지금 부자간이 비록 지친이라 하지만 아들의 얼고 굶주림을 생각지 않고 날마다 매질로 학문을 권한다면 반드시 서로 헤어지고 말 것인데 하물며 백성들끼리야….”

허엽이 말했다. “지금 세상 사람이 착한 이는 많고 착하지 않은 이는 적으니 향약을 실시할 수 있소.”

하니 율곡이 웃으며 말했다. “공은 마음이 착하여 다만 사람의 착한 것만 보았으나 나는 착하지 못한 것이 많이 보이니 필시 내 마음이 착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오. 다만 전에몸소 가르치면 좇되 말로만 가르치면 시비만 한다했으니 향약이 시비가 안 되겠소?”

허엽은 화를 내며 율곡에게 대죄하고 새로 논의를 하자 했으나 율곡은내 잘못을 알지 못하니 대죄 못 하겠다고 했다. 이에 허엽이 개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栗谷, <石潭日記>, 卷之上, 萬曆二年甲戌.)

율곡의주기는 이상을 높이 잡았으되 실용적이고 유연했다. 그는 인간의 현실을 존중하고 거기 필요한 현실적 개혁을 밀고 나갔다. 이에 비해 17∼18세기의주기는 세상의 변화와 시무를 알지 못하고 개혁과 변화에 소극적이면서 옛 예()의 보수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7. 유교적 경영의 세 코드

퇴계와 율곡을 합치면 유교적 인격 혹은 리더십의 대강이 나온다. 옛적 정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걸치는 모든 것을 의미했으니 회사나 비즈니스를 포함한 전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1) 성숙한 인격 크리슈나무르티는우리 모두는 세상의 악과 비참, 부정과 재난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갈파했다. 우리 속의 불건전한 정념과 편견들이 외화된 것이 TV 속의 풍경들 아닌가. 그런 점에서 세상을 구하고 싶다면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유교는 그준비에 일생을 바쳐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상사나 고위직이, 관계에 있어 우위에 점하고 있는 사람이 이덕성을 갖추지 않는다면 모임이나 조직은 공통된 목표를 향해 전진하지 못한다.

 

당태종을 굴욕시킨 고구려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은 지도층의 분열 때문이다. 율곡이 퇴계에게 말한 대로관건은 정치적 유능함이 아니라그 사람(其人)’의 존재 자체이다”. 즉 퇴계 같은 인물이그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그 무위(無爲)의 효과가 정치 전체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퇴계는 후배 정치인들에게 늘 조언했다. 희사(喜事), 일 벌리기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이다.

 

2) 목표와 이상은 높아야 한다 율곡이 힘과 이익의 현실주의에만 철저했던 이는 아니다. 그는 여전히 유교 이상주의자였다. 그는패도의 공렬(功烈)어둔 밤에 잠시 빛나는 불빛 같은 것이라서 영원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하지는 못하므로 그를 위해서는 더 큰 비전과 도덕적 이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만일 그 비전을 가슴에 품지 않는다면 어디다 손을 둘지 모를 것이고 정책의 방향을 잡기도 어려울 것이다. 요즘 말로는비전이 뚜렷하고가치가 공유돼야만 회사든 국가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3) 성취는 점진적으로 간다 다만 그 성취는 현실의 여건을 고려해야 하고 점진적 단계를 밟아야 실효를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다산 정약용 또한 관료들에게 일을기필(期必)’하는 것을 크게 경계했다.

“만약 급히 다그치고 시원하게 하여 예전 정사를 일체 뒤집어서 마치 큰 추위 뒤에 따뜻한 봄이 온 것처럼 자처하여 혁혁한 명예를 취하려는 자는 그 덕이 경박하고, 또한 그 뒷감당을 잘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약 솥을 뒤엎듯이 일을 처리하면 당장은 시원할지 모르나 장기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산은 개혁의 목적은 다만제 뜻을 펴는 데있는 것이 아니라백성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것임을 기억하라고 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새로운 시책의 효과는 늦게 나타나고 기대는 성급하므로 아무리 좋은 개선도 저항과 불만에 부닥치게 마련이라고 했다. ,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병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점진과 기다림의 과정이다.

 

이 원리를 일찍이 공자가 설파한 적이 있다.

 

위나라에 간 공자는 곁에 있던 염유에게인구가 많다고 감탄한 적이 있다. 염유가 물었다. “이제 뭘 해야 합니까.”

“경제적 안정을 시켜 주어야지.”

“그런 다음에는요?”

“교육을 시켜야 한다.”

(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富之. 曰旣富矣, 又何加焉. 曰敎之.)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붓다의 치명적 농담(2011)> <허접한 꽃들의 축제(2011)> <왜 조선유학인가(2008)> <조선유학의 거장들(2008)> <왜 동양철학인가(200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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