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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7

어정쩡함은 친구를 만들지도, 적을 없애지도 못한다

김상근 | 104호 (2012년 5월 Issue 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마키아벨리가 시간을 끌면서 당부아즈 추기경과 협상을 벌였던 프랑스의 블루아성 입구. 
전면 파사드에 루이 12세의 기마상이 보인다.


시간이라는 좋은 약

두 집단 간의 충돌과 갈등이 평행선을 이루면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전체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줄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마키아벨리는 이럴 때 시간을 끌면서 결정을 늦추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판단했다. 두 집단 간의 충돌과 갈등이 평행선을 이루면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전체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준다면 결정을 미루고 시간을 끌라는 조언이다. 그는 <로마사 논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라는 좋은 약을 쓰기만 하면 병독(病毒)의 진행이 늦춰지고 결국 타고난 병독의 수명이 다하면 저절로 그 고통은 사라지게 마련이다.”1

 

이해 집단 사이의 충돌과 갈등이 팽팽한 평행선을 이루며 사회적 긴장감이 최고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요즈음 마키아벨리의 조언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시간이라는 마법사에게 충돌과 갈등의 해결사 역할을 맡기는 것이 옳은 지도자의 선택일까?

 

꼬여가는 피사 문제와 프랑스 용병대

마키아벨리는 100% 확실한 해결책이 없을 때는 시간을 끄는 것이 상책이라고 믿었다. 갈등의 비등점이 계속 끓어올라 폭발의 위험 수위까지 올라갔다면 어느 한쪽을 선택해 다른 한쪽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보다 판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나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생애 최초의 해외 출장 업무였던 프랑스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런 지혜를 깨닫게 된다. 특히 당신이 약자(弱子)의 위치에 있다면 시간 끌기가 더욱 효과를 발휘한다. 너무 강력한 강자와 맞붙게 됐을 때 운명을 걸고 단번에 승부를 겨루는 건곤일척(乾坤一擲)보다는 시간을 끌면서 다른 기회를 엿보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 더 지혜로운 선택이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프랑스로 첫 해외 출장을 떠나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프랑스의 국왕 루이 12(1462-1515) 1499 911, 밀라노 왕국을 무력으로 점령해 버렸다. 이탈리아 북부지방이 외적(外敵) 프랑스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이탈리아반도 내에서 외국 군대가 승전보를 올리자 피렌체는 화들짝 놀라 급히 친선 사절단을 밀라노로 보냈다. 피렌체는 자국의 방어를 위해서라도 프랑스 군대의 군사력이 필요했다. 승전을 축하하는 아부의 제스처를 잠시 취한 다음 피렌체 대표단은 프랑스와 용병 계약을 체결했다. 반란을 일으킨 피사를 점령해 주는 조건으로 5만 듀카트라는 거액을 주기로 했다.

 

용병 계약을 맺은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드 보몽(Hugh de Beaumont) 장군을 지휘관으로 앞세워 군대를 남하(南下)시켰다. 5000명으로 구성된 용병 부대는 대부분 스위스 출신 군인들이 주력부대를 이뤘다. 그러나 파르마시를 출발한 프랑스의 용병 부대는 피사로 바로 진격하지 않고 볼로냐, 미란돌라, 코레조, 카르피 등을 돌아다니면서 무력시위만 했고 피사 주변에 도착해서는 인근 도시 루카(Lucca) 등지를 돌아다니며 소란만 피워댔다. 원래 용병이란 게 그런 것이다. 대규모 전쟁은 피하면서 개인적인 실익을 챙기는 것이 용병들의 일반적인 태도였다. 피렌체는 프랑스 용병 부대의 피사 공격을 독려하기 위해 루카 델리 알비치와 잔바티스타 리돌피를 군사 고문으로 파견했다. 이 두 명의 고문단을 보좌한 사람이 바로 마키아벨리다. 피렌체의 군사 고문단과 마키아벨리는 프랑스의 드 보몽 장군에게 빨리 계약조건대로 피사를 점령하라고 요구했다. 마침내 프랑스 용병 부대는 피사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본진을 성채 안으로 보낼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드 보몽 장군은 승리를 눈앞에 두고 부대를 갑자기 밀라노로 철수시켜 버린다(1500 79). 피렌체의 군사 고문단 대표였던 알비치와 리돌피는 아연실색한다. 마키아벨리는 보고서를 쓰면서 프랑스의 태도에 욕설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

 

병력 철수를 결정한 지휘관은 루이 12세 본인이었다. 밀라노 방어를 위해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루이 12세는 피사 점령에 든 비용 5만 듀카트를 이미 수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로 38000금화를 더 요구했다. 뻔뻔스럽게도 부대의 철수비용까지 요구한 것이다. 만약 추가 대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피렌체와의 외교를 단절하겠다고 통보했다. 자체적으로 군대를 보유하지 않았던 피렌체로서는 프랑스와의 외교단절은 곧 국가의 존위가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하는 것과 같았다. 프랑스 군대가 없으면 피사 점령은 고사하고 피렌체 자체의 방어도 위험해진다. 피렌체 행정부는 이 다급한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키아벨리를 프랑스로 파견했다. 가뜩이나 용병 제도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던 마키아벨리로서는 프랑스 용병과 관련된 업무가 불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키아벨리의 보고서 여러 곳에서 프랑스 왕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넘쳐난다. 마키아벨리의 눈에 비친 프랑스 왕은신의를 지키지 않는 인간의 화신이었다.2

 

첫 번째 프랑스 사절 임무

마키아벨리는 1500 7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프랑스에서 첫 해외 출장 업무를 수행했다. 피렌체 명문가 출신의 프란체스코 델라 카사(Francesco della Casa)가 전권대사로 임명됐고 마키아벨리는 그를 수행하는 부사(副使)로 파견됐다.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에 그는 부친상을 당했다(510). 그러나 국가의 중대사를 책임진 마키아벨리는 변변한 장례식을 치를 만한 시간조차 없었고 부친의 시신은 산타크로체 성당에 서둘러 묻혔다. 알프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국경선을 넘어 루이 12세가 체류하고 있다던 리용에 도착(7 26)했지만 왕은 이미 그 도시를 떠나고 없었다. 피렌체 행정부가 마키아벨리 일행에게가능한 한 말에서 내리지 말고 빨리 이동하라고 지시할 만큼 화급을 다투고 있었다. 당시 루이 12세는 프랑스를 엄습한 흑사병을 피해 도시를 순회 통치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 일행도 왕의 이동 경로를 따라 계속 이동해야만 했다. 그래도 명색이 한 국가의 외교 대표부로서 복장이나 숙소에 격조를 갖추다 보니 경비 지출이 만만치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특유의 위트와 푸념을 섞어가며 출장비를 인상해달라는 보고서를 피렌체로 보냈다.

 

 

 

 

마이카벨리가 방문했던 프랑스 블루아성 앞에서 노상연극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마키아벨리 시대의 복장을 착용한 배우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인간관계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1500 87, 드디어 네베(Nevez)에서 루앙(Rouen)의 추기경 겸 프랑스의 국가 재상이었던 조르주 당부아즈(Georges d’Amboise)를 만나게 됐다. 당부아즈는 외교 전략의 일환으로 외국에서 온 대사를 의도적으로 홀대했다. 상대방을 조급하게 만들어 외교적으로 우월한 협상의 고지를 선점하는 전략이다. 당부아즈는 시간 끌기의 명수였다. 루이 12세가 계속 거처를 옮기고 있기 때문에 피렌체 문제를 상의할 수 있는 알현의 기회가 없다면서 마키아벨리 일행에게 계속해서 대기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루이 12세는 곧 네베를 떠나 몽타흐쥐(Montargis), 멜륑(Melung) 등으로 계속 이동했고 9월 중순에는 블루아(Blois)로 거처를 옮겼다. 마키아벨리 일행은 루이 12세를 만나지도 못하고 계속 끌려다니는 딱한 신세에 처해 있었다.

 

프란체스코 델라 카사는 914일에 대사직을 사퇴해 버린다. 당부아즈의 외교 전략에 말려들었는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파리로 떠나버린 것이다. 결국 마키아벨리 혼자 남아 프랑스의 노회한 재상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 젊은 피렌체의 외교관 마키아벨리는 당부아즈의 전략이 시간 끌면서 김을 빼는 작전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자신도시간 끌기로 맞대응하기로 했다. 마키아벨리는 용병료 지급을 독촉하는 당부아즈에게 자신은 그런 권한이 없으며 피렌체에서 대사가 임명됐고 곧 해결책을 가지고 프랑스로 올 것이라며 시간을 끌었다. 제한된 일정 안에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외교관의 부담감을 이용하려 들었던 당부아즈는 오히려 더 느긋하게 시간 끌기 작전을 구사하는 마키아벨리의 배짱에 밀리기 시작했다. 당부아즈는 마키아벨리의 외교 전략에 말려들어당신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그 대사란 작자가 여기 도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 죽고 말거야라고 푸념만 할 뿐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시간 끌기에 지친 당부아즈는 결국 용병료를 1만 듀카트만 받는 것으로 종결하고 나머지 추가분은 적절한 때에 분할해 받는다는 협정서에 조인을 했다. 이것은 마키아벨리의 외교적 승리였다. 나머지 추가분은 사실 줘도 그만이고 안 줘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상대방 국가의 외교관으로 파견돼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마키아벨리는시간이라는 좋은 약을 쓰면서 병독의 진행을 늦추는협상의 기술을 터득한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1501 114일 피렌체로 귀환했을 때 그의 손에는 새로 확정된 프랑스와 피렌체 간의 동맹 결의서가 들려 있었다. 그 동맹 결의서에는만약 피렌체가 외국군대의 침략을 받으면 프랑스 군대가 의무적으로 출동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혹을 떼러가서 혹만 떼고 온 것이 아니라 건강보험까지 공짜로 들고 돌아온 것이다.

 

시간을 끄는 것과 우유부단함의 차이

마키아벨리는 첫 번째 해외 출장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교훈이었다. 갈등과 분쟁은 피할 수 없는 우리들의 현실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원하는 것보다 욕구하는 것이 더 크기 때문이며 서로 다투는 이해 당사자들은 각각 다른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갈등과 분쟁의 원인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관찰은 이러했다.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힘보다 욕구하는 힘이 언제나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만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것 외에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어떤 사람들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서로 반목해 싸움이 일어난다.”3

 

갈등과 분쟁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물론 마키아벨리가 루이 12세의 프랑스 궁정에서 한 것처럼 시간을 끄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갈등과 분쟁이 일어났을 때 한쪽을 선택해 파국적인 결말에 도달하는 것보다 시간을 끌면서 다음 기회를 엿보는 것도 썩 나쁜 생각은 아니다. 당신이 약자의 위치에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프랑스보다 피렌체가 약체였고,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시간을 끌었던 것처럼. 그러나 여기서 유념할 부분이 있다. 시간을 끄는 것은 절대로 우유부단(優柔不斷)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유부단함은 한쪽을 선택해 파국으로 가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마키아벨리가 시간 끌기를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제시했다고 해서 이것을 우유부단함으로 잘못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다. 마키아벨리는 번개와 같은 단호함과 과감한 실행력이야말로 갈등을 종결시키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봤다. 기회가 왔을 때는, 특히 당신이 강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더욱 더 단호하고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

 

루이 12세의 실책

마키아벨리 사상의 독창성은 개방적인 태도에서 나왔다. 지혜와 교훈을 얻기 위해서라면 적과 아군의 구별이 없다. 적에게서라도 배울 것이 있다면 편견 없이 그 지혜를 관찰하고 교훈을 얻었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에 체류했던 6개월 동안 루이 12세가 가진 지도자의 덕목을 면밀히 관찰했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가 소문과는 달리 우유부단한 성격의 지도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냉정한 판단력과 단호한 추진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전체를 차지할 수 있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프랑스가 밀라노 왕국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밀라노의 경쟁 국가였던 베네치아가 프랑스의 공격을 묵인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평원을 차지한 프랑스는 여세를 몰아 이탈리아 중부의 로마냐(Romagna) 지방을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피렌체 공화국의 경우 프랑스의 군대에 목을 매고 있는 상태이니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냥 군대를 끌고 가서 깃발만 꼽기만 하면 이탈리아 반도의 절반을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는 이 정도로 절대 강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루이 12세는 강자의 덕목인 단호함을 멀리하고 오히려 시간 끌기를 전략으로 삼는 실책을 범했다. 눈앞에서 심각한 갈등과 분쟁이 불거지자 루이 12세는 실책을 범하게 된다. 마키아벨리의 생애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 그 심각한 갈등이란 무엇이었을까?

 

 

 

악명 높았던 보르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초상화. 바티칸 박물관 소장.

보르자 교황의 야심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그 갈등의 갈림길도 로마에서 시작됐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바로 그 갈등의 원인이었다. 흔히보르자 교황으로 불리는 알렉산데르 6(1492-1503년 재위)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지도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속명(俗名)이 로드리고 보르자(Rodrigo Borgia)였던 알렉산데르 6세는 공개적으로 엄청난 양의 뇌물을 뿌려 교황 자리를 차지했다. 자신의 교황 취임을 반대하던 아스카니오 스포르차(Ascanio Sforza)를 매수하기 위해 로드리고 보르자는 네 마리의 노새에 금화를 가득 담아 바쳤고 이때 금화를 인출당했던 스파노치(Spannocchi)은행은 지급 불능 상태에 빠져 부도가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알렉산데르 6세가 교황 자리에 오르자 어느 추기경은이제 우리는 늑대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그가 우리를 다 잡아먹게 될 것이다라고 한탄할 정도였다.4

 

알렉산데르 6세는 늑대 정도가 아니었다. 괴물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는 공개적으로 처첩(妻妾)을 거느렸고 지면(紙面)에 옮기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극도로 타락한 성적인 취향을 가졌으며 이탈리아 전체를 통치하는 전제군주가 되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자신의 세속 왕국을 세우려고 했다. 이탈리아 중부지역인 로마냐(Romagna) 지방은 전통적으로 교황권에 순종적이었던 소국(小國)으로 이뤄져 있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이 로마냐 지방을 아예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어 아들에게 군주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었기 때문에 군대를 동원해 이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교황군대의 북상(北上)은 프랑스 루이 12세의 남하 정책과 충돌하면서 심각한 이탈리아 내부의 정치적 갈등으로 번졌다.

 

마키아벨리는 루이 12세가 판세를 잘못 읽었다고 평가했다. 베네치아의 지지를 받고 밀라노를 정벌한 여세를 몰아 계속 공세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데 루이 12세는 뜬금없이 시간 끌기 작전을 선택한다. 당시 로마냐의 소국들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팽창 정책에 겁을 먹고 있었다. 교황군과 싸우는 것은 그들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죄를 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성문을 열고 프랑스 군대에게 항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루이 12세는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눈치를 보면서 시간을 끄는 바람에 쉽게 이탈리아를 정복할 수 있었던 호기를 놓친 것이다.

 

반복되는 지도자의 실책

우유부단함의 실책으로 이탈리아 정복의 기회를 놓친 루이 12세의 초상화.

왜 루이 12세는 알렉산데르 6세의 눈치를 본 것일까? 시오노 나나미는 이를 프랑스인 특유의 신앙심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교황에게 대적하는 행위는 신앙심 깊은 프랑스인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심이 아니라 욕심과 공포심의 문제였다. 루이 12세는 이탈리아를 정복하겠다는 욕심과 교황군이 가진 의외의 전투력에 대한 공포심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냉철한 판단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욕심과 공포심 사이에 노출돼 있는 지도자는 결국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어정쩡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욕심도 충족시키고 공포심도 극복하기 위해 판단을 뒤로 미뤘다. 그래서 그는 시간을 끌면서 교황의 눈치를 보게 됐고 결국 교황의 로마냐 지방 정복을 지원하겠다는 엉뚱한 결정을 내려버렸다.

 

번개와 같은 단호함과 과감한 실행력을 상실한 지도자는 항상 적과 동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아노미 상태로 조직을 이끌게 마련이다. 마키아벨리는 교황의 로마냐 지방 공략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한 루이 12세에 대해거의 단독으로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게 됐는데도 불구하고 귀찮게도 상대를 끌어들인 격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5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루이 12세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승리를 목전에 두고 피사 공격을 중단했던 프랑스 군대의 판단 착오 때문에 그는 6개월 동안 고된 해외 출장을 하게 됐다. 프랑스에 와서 그 나라의 지도자가 갈등의 순간에 내리는 결정의 패턴을 보니 그것은 단순히 피사에서만 일어났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최고의 위치에 있는 지도자는 너무나 쉽게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은 감히 그 잘못을 지적할 만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 지도자들의 잘못된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3장에서 자신이 당부아즈 추기경과 나눈 대화를 이렇게 소개한다.

 

“알렉산데르 교황의 아들 발렌티노 공작(체사레 보르자)이 로마냐 지방을 점령했을 당시 나는 루앙의 추기경(당부아즈)과 낭트에서 대화를 나눈 일이 있다. 그때 루앙의 추기경은 이탈리아인은 전쟁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하기에 나는 프랑스인은 정치를 모른다고 반박하고 만일 그들이 정치를 알았다면 로마 교회 세력이 그렇게 커지도록 두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6

 

마키아벨리의 지혜에서 우리는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신이 갈등국면에 처해 있는 약자(弱子)라면 시간을 끌어야 한다. 만약 반대로 당신이 판세를 쥐고 있는 강자(强者)라면 번개와 같은 단호함과 과감한 실행력으로 그 갈등을 종결시켜야 한다.

 

가장 나쁜 지도자는 어떤 지도자일까? 마키아벨리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지도자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다.7 탁월한 지도자는 시간 끌기와 우유부단함을 혼동하지 않는다. 시간을 끌어야 할 때는 엉뚱한 결정으로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반대로 단호해야 할 때에는 시간을 끌면서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는 지도자가 너무 많다. 모름지기 지도자라면 마키아벨리의 명언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정쩡한 조치로는 친구를 만들지도, 적을 섬멸하지도 못한다(quae neque amicos parat, neque inimicos tollit).”8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15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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