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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4

포퓰리스트 사보나롤라, 권력의 속성을 드러내다

김상근 | 96호 (2012년 1월 Issue 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광기의 탄생

비극의 씨앗은 1494년에 뿌려졌다. 피렌체에 몰려든 짙은 먹구름을 막기에는 토스카나 지방의 구릉이 낮기만 했다. 차가운 칼바람이 불던 그해 겨울, 메디치 가문은 갑자기 몰락했고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대포를 앞세우고 피렌체를 점령했다. 외국 군대의 침공 앞에서 자존심 강한 피렌체 시민들은 굴욕을 당했다. 마키아벨리는 샤를 8세가 피렌체를 공격했던 무기는 분필 한 자루였다고 냉소적으로 회고한 바 있다.1 프랑스 군대는 피렌체에 입성(入城)하면서 병사들이 묵을 집 대문에 분필로 숙박 예정 표시를 하는 것으로 점령을 끝내버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피렌체가 프랑스 군대의 약탈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겁에 질린 피렌체 행정부는 피사에 주둔하고 있던 샤를 8세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말이 사절단이지 항복을 선언하기 위한 시민 대표였다. 1494 119, 삭풍이 몰아치던 피사 평야의 주둔지에 6 명의 피렌체 사절단이 도착했다. 그중의 한 명은 검은 사제복을 입은 도메니코회 소속 수도사였다. 이름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 출신은 페라라.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그는 적국의 왕 샤를 8세에게 이렇게 큰소리로 외쳤다.

 

“왕이시여! 당신은 하느님의 종으로 이탈리아에 오신 것입니다. 당신의 도래를 우리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왕이시여! 하느님의 뜻을 잘 받드시기 바랍니다! 승리가 당신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고 지금부터 내 말을 경청하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피렌체는 죄인의 소굴이지만 아직 하느님의 종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므로선한 자들을 보호하셔야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종으로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피렌체의선한 자들을 보호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샤를 8세는 이 뜬금없는 수도사의 설교에 감동을 받았고 피렌체는 약탈을 피할 수 있었으며 피사 평원의 수도사는 피렌체를 구한 영웅이 됐다. 사보나롤라는 갑자기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피렌체 공화정의 실세로 떠올랐다. 아마추어 정치가가 등장한 것이다. 요즘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포퓰리즘(Populism)의 전형적인 모습이 15세기 말 피렌체에서 재현됐다. 피렌체 시민들은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예언자라고 믿기 시작했다. “프로페타(예언자)! 프로페타!” 사보나롤라가 지나갈 때 사람들은 뒤에서 그를 프로페타로 부르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부터 4, 1494년부터 1498년까지 피렌체는 산 마르코 수도원 원장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와 함께 광기의 시대를 맞게 된다. 마키아벨리가 25살부터 29살 때까지 기간에 해당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결정되는 20대 후반을 사보나롤라와 함께 보낸 것이다. 사보나롤라 사태를 지켜보던 20대 후반의 마키아벨리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종교는 사회 유지를 위한 유용한 도구인가? 왜 사람은 권력을 잡으면 변하게 되는가? 이리저리 휩쓸리며 손바닥 뒤집듯이 자기 입장을 바꾸는 대중의 판단을 신뢰할 수 있는가? 인기를 누리던 사보나롤라는 왜 하루아침에 몰락했는가? 사보나롤라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사보나롤라가 열광적으로 설교하는 장면. 루드비히 폰 랑게만텔(Ludwig von Langemantel)의 1881년 작품으로 현재 미국의 보나벤투르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사보나롤라의 등장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1452년 페라라에서 태어났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외지(外地) 사람이다. 자기 조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진 피렌체 시민 사이에서 외지인이 신권(神權)정치의 권력을 휘둘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종교적 내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a)의 추천을 받아들인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1488년에 피렌체를 처음 방문했고 1490 6월부터는 메디치 가문이 건축한 산 마르코(San Marco) 수도원에서 거주했다.

 

산 마르코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된 사보나롤라는 명 설교자로 이름을 날렸다. 파격적인 내용과 직설적인 표현으로 그의 설교는 피렌체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교황청의 타락과 피렌체 시민들의 향락에 물든 삶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1492, 그는 피렌체에 하느님의 징벌이 내릴 것이라 예언했는데 그 예언은 2년 뒤 샤를 8세의 피렌체 침공으로 현실화됐다. 사보나롤라는 파국을 예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막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피렌체 시민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신정(神政)정치의 막후 실세로 떠오른 사보나롤라는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6(1431∼1503)에 대한 비난의 수위를 높여갔다. 사실 알렉산데르 6세는 사보나롤라의 비판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이 됐던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1475∼1507)의 생부(生父)였다. 교황이 아들을 뒀다는 사실만으로도 알렉산데르 6세의 타락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피렌체의 수도원 원장이 공개적으로 비난을 퍼붓자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사보나롤라에 대한 파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피렌체의 상황은 진정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497 27, 사육제의 마지막 날이었던 그날 피렌체 도심의 시뇨리아광장에는 높이 18m와 둘레가 72m나 되는 거대한사치품의 산이 쌓여졌다. 사육제와 무도회에 사용됐던 가면 트럼프와 같은 도박 도구들,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담고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 작품, 로마시대의 이교(異敎)적인 주제의 조각, 점성술 책 등이 피라미드처럼 수북이 쌓였다. 향락적인 피렌체의 문화를 성토하던 사보나롤라의 지시에 따라허영의 화형식(Bonfire of the Vanities)’이 열린 것이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사치품과 이교도의 상징들이 이글거리는 화염 속에서 사라져 갈 때 피렌체의 모든 성당은 일제히 타종을 하며 이 거룩한 시간을 기념했다. 피렌체 시민들은 프로페타 사보나롤라를 바라보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피렌체 시민들은 사보나롤라에 대한 교황의 파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황청은 1498 3, 파문의 강도를 더 높여 피렌체 시민들을 압박하게 된다. 사보나롤라의 신병을 로마로 인계하지 않으면 로마와 나폴리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피렌체 시민들의 재산을 누구든지 강탈해도 좋다는 강경책이었다. 이 조치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자기 재산을 모두 빼앗길 수 있다는 교황청의 발표에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했던 말, “인간이란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일은 곧 잊을 수 있어도 자기 재산의 손실은 여간해서 잊지 못한다가 여지없이 맞아 떨어졌다.2 종교적 신념보다 자기 재산이 더 중요함을 깨달은 피렌체 시민들은 그동안 보여 왔던 사보나롤라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다. 피렌체에 4년간 몰아닥쳤던 종교적 열광주의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산 마르코 수도원 성당에 전시돼 있는 사보나롤라의 동상.

사보나롤라, 불의 심판을 받다

사보나롤라의 행운(포르투나)이 다해가던 1498 327, 산 마르코 수도원과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서 한 설교자가 사보나롤라에 대한 공개 도전장을 던졌다. 누가 진짜 하느님의 예언자인지 가리기 위해불의 심판을 받자는 것이다.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 길을 만들고 그곳을 걸어서 무사히 통과하는 사람이 진짜 하느님의 예언자일 것이기 때문에 사보나롤라에게불의 심판에 나서라고 요구한 것이다. 만약 사보나롤라가 불 속으로 걸어가도 화상을 입지 않으면 그를 진짜 예언자로 모실 것을 약속하면서 자신도 심판을 받기 위해 그 불 속으로 걸어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인문주의와 르네상스 정신이라는 근대적 사고의 기틀을 제공했던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가 갑자기 중세 암흑의 시대로 돌아간 것이다. 천성적으로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좋아하던 피렌체 시민들은 이 갑작스러운 시대정신의 회귀에 열광했다. 르네상스에서 다시 중세로! 아름다움의 극상을 추구하던 피렌체의 예술가들과 인간 정신의 부활을 주장하던 탁월한 인문학자들도 이 모순과 무지의 축제에 동참했다. 실제로 15세기 후반의 피렌체 화단을 대표하던 보티첼리(1445∼1510)와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던 인문학자들이 사보나롤라 때문에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 벌어졌다. 피렌체 일반 시민들은 두 수도회 간에 벌어질 목숨을 건불의 심판에 열광했다. 메디치 가문의 과두정치를 몰아내고 완벽한 공화정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던 피렌체의 시민의식은불의 심판이 주는 오락적 요소 앞에서 사라져갔다. 시민들은 사보나롤라를 지지하는 피아뇨니(Piagnoni)파와 반대하는 아라비아티(Arrabbiati)파로 나눠 하루 속히불의 심판을 개최해야 한다면서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들은 시뇨리아 정청으로 몰려가서불의 심판을 열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쪽은 기적을 믿었고 한쪽은 사보나롤라의 죽음을 기대했다.

 

1498 47, ‘불의 심판이 열린 날. 시뇨리아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 가운데불의 심판을 위한 무대가 설치됐다. 벽돌로 무대 하단을 만들고 약 30m쯤 되는 장작더미로불의 길이 만들어졌다. 산 마르코 수도원과 사보나롤라를 대표하는 도메니코(Domenico Buonvicini) 수도사와 산타 크로체 성당을 대표하는 론디넬리(Giuliano Rondinelli) 수도사가불의 심판을 받기 위해 심판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른 아침부터 몰려든 피렌체 시민들은 숨을 죽이며 행사를 기다렸다.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두 수도사가 모두 불에 타 죽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는 시각은 정오로 정해 놓았다. 기다리다 지친 일부 시민들은 경비병의 감시를 피해 몰래 장작에 불을 붙이려다 쫓겨나기도 했다.

 

드디어 론디넬리와 도메니코 수도사가 불의 제단 앞으로 걸어 나왔고 시민들은 환호를 질렀다. 어떤 이들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적을 바라던 그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대표하던 론디넬리가불의 심판을 받을 수 없다며 무대 아래로 퇴장해 버렸다. 상대편 도메니코 수도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교리에 어긋난다며불의 심판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두 수도회 측은 이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 말싸움을 벌였고 결국 시뇨리아 행정부 대표의 중재를 받기 위해 두 수도사는 정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흘렀다. 수도사들은 몇 시간 만에 잠깐 밖으로 나와 자기편 수도회 대표들과 귓속말로 무엇인가를 상의한 다음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을 몇 차례 반복했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시뇨리아광장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점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기대심에 하루 종일 서서 기다리던 시민들이 서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오후 다섯시쯤 됐을 때 갑자기 피렌체 하늘에서 빗방울을 떨어졌다. 토스카나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봄의 소낙비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사보나롤라 측 수도사들이 벌떡 일어나 외치기 시작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이것은 하느님의 계시다! 하느님은 이불의 심판을 원하지 않으신다!” 이 말 한마디가 사보나롤라를 몰락시켰고 그를 비극적인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 외침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그를 반대하던 아라비아티파뿐만 아니라 지지하던 피아뇨니파의 얼굴들이 일그러졌고 사보나롤라를 향해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 사기꾼! 저 놈은 프로페타가 아니라 사기꾼이야! 처음부터 불로 뛰어들 자신이 없었던 거야!”


봄의 소낙비가 내리던 피렌체에 폭동의 열기가 몰려왔다. 그동안 사보나롤라를 쫓아다니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의 눈에 분노의 핏발이 서려 있었다. 배신감에 사로잡힌 피렌체 시민들은 돌을 주워들었다.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대피하던 사보나롤라의 일행에게 그 돌이 휙휙 날아갔다. 결국 그는 체포돼 바르젤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훗날 마키아벨리가 고문을 당하게 되는 같은 장소다. 사보나롤라에게도 마키아벨리가 받게 될 똑같은 고문이 가해졌다. 팔을 뒤로 묶어서 천장까지 들어 올렸다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날개꺾기(strappado)’ 고문이다. 우리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여섯 번이나 그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고통을 견디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단 2번의 날개꺾기를 당하고 난 뒤 자발적으로 자신의 죄를 줄줄 읊어대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은 프로페타가 아니며 하느님이 직접 나타나서 계시한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었다고 자백해 버렸다.

 

1498 5 23, 시뇨리아광장의 한복판에서 도메니코와 실베스트리 수도사와 함께 사보나롤라는 화형을 당해 죽었다. 지난 4년 동안 그토록 열광적으로 그를 따르던 피렌체 시민들은 그의 화형식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래도 도메니코와 실베스트리 수도사는 불에 타 죽어가면서주여를 외쳐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사보나롤라는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면서 죽어갔다. 피렌체 시민들은 다시 한번 배신감을 느꼈다. 이렇게 해서 15세기의 끝자락 4년 동안, 그러니까 마키아벨리가 20대 후반의 청년기를 보내고 있을 동안 피렌체에 몰아닥쳤던 사보나롤라의 종교적 광기는 종지부를 찍었다. 지금도 피렌체 시뇨리아광장에 가면 사보나롤라가 화형을 당했던 자리에 기념 동판이 조용히 놓여 있다.

 

마키아벨리의 관찰

사보나롤라가 시뇨리아광장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져 버린 지 정확하게 5일이 지난 후 29살의 한 청년이 아직도 화형식의 흔적이 남아 있던 광장을 지나 시뇨리아 정청으로 첫 출근을 했다. 바로 피렌체 공화국의 제2서기장으로 임명된 마키아벨리다. 익살과 재치가 넘치던 그는 가끔씩 이렇게 장난삼아 외쳤다고 한다. “비켜라, , 마키아벨리가 납신다!” 마키아벨리는 5일 전에 화형당한 광장의 사보나롤라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마추어는 비켜라. 여기 진정한 프로가 납신다! 하수(下手)는 비켜라. 여기 상수(上手)가 나가신다! 사보나롤라의 광기가 피렌체를 몰아칠 동안 마키아벨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페라라 출신의 예언자를 따라다니며 눈물을 흘렸을까? 아니면 그를 화형에 처하라고 고함을 치던 군중 속에 있었을까? 1498 39일 마키아벨리가 쓴 편지가 남아 있다. 로마 주재 피렌체 대사였던 리카르도 베키에게 보낸 비공식 문서였다. 그는 사보나롤라가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나 먹힐 법한 협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설교로 우매한 시민들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마키아벨리의 냉철한 분석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더 이상 이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적(피렌체의 귀족 상류층)들은 이미 사보나롤라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시민들 중 일부에게 독재자니, 악당이니 하는 비난의 말을 삼가고 있지요. 대신 그는 교황에게 모든 비난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교황에게만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인물이라며 교황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쓴 시기는 마키아벨리가 공직에 임명되기 전이다. 평범한 시민이었던 마키아벨리가 로마 주재 대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도 특별하거니와 사보나롤라, 피렌체 시민들, 피렌체 상류층, 교황이라는 각각의 이해 집단에 대한 정확하고 예리한 평가를 엿볼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마키아벨리는 종교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성당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거나 고해 성사를 바쳤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진짜 천국에 가고 싶다면다시 말하자면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우선 지옥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큰소리치던 마키아벨리였다.3 그래도 죽기 전에 종부성사(終傅聖事, Extrema Unctio, 죽음을 앞 둔 신자가 받는 성사)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는데 최근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그것도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의 종교적 광기를 매우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로마 주재 피렌체 대사에게 보낸 비공식 서한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를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포퓰리스트로 봤다. 그렇지만 냉정한 시각을 유지한다고 해서 무관심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경청했고, 그 내용을 분석했으며, 사보나롤라가 갑자기 부상하고 또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진지하게 따져 물었다.

 

 

산 마르코 수도원 전경.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시민들의 폭동을 대비해서 수도원 안으로 무기를 반입했다가 역풍을 맞게 된다. 평화의 사도가 아니라 가짜 예언자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권력을 잡으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 1 45장에서 사보나롤라의 부침(浮沈) 과정을 상세히 분석한다. 피렌체 헌법은 재판을 받고 형량을 언도받은 시민들에게 항소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었고 사보나롤라도 집권 초기에는 이 법률을 존중했다. 시민이 권력의 주인인 공화정 제도로 통치되는 피렌체에서 시민의 권리는 당연히 보호돼야만 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집권한 후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변절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줬다. 자신의 정략적인 판단에 의해 다섯 명의 피렌체 시민을 사형에 처할 일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항소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 메디치 가문의 독재를 비판하며 공정한 사법적 절차를 강조했던 사보나롤라가 스스로의 원칙을 어기며 시민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의 변절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든 권력을 잡으면 변하기 마련이다!

 

권력을 쥔 다음 법률을 무시함으로써 사보나롤라는당파적인 야망으로 가득한 본성이 폭로됐으며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고 끝내 사면초가의 늪에 빠져버렸다고 마키아벨리는 평가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법률이 무시된 뒤에 행한 모든 설교에서 사보나롤라는 법률을 흙발로 짓밟은 사람들에 대해 칭찬의 말이든, 비난의 말이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세가 바뀌어 자신에게 유리해진 위법 행위를 비난하기 꺼렸으며, 그렇다고 그것을 용서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와 사보나롤라의 관계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는사보나롤라가 자신의 친위 세력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마키아벨리의 분석에 주목해 왔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무장을 한 예언자는 승리를 차지할 수 있으나 말뿐인 예언자는 멸망하고 만다고 사보나롤라의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4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사보나롤라의 실책이 아니라 권력의 일반적 속성이다. 왜 사람들은 권력을 잡으면 변하게 되는 것일까? 왜 권력은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가?

 

1498년 5월23일, 화형을 당해 죽었던 사보나롤라의 마지막 현장을 보존한 기념 동판.

사보나롤라는 이상주의자였다. ‘불을 토하는 것 같았던그의 설교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종교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그의 호소는 피렌체 시민들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대중의 열광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잡았을 때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실의 문제에 눈을 뜨게 됐기 때문에 그는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피렌체는 극심한 가뭄과 흉년에 시달리고 있었다. 1496년부터 2년간 심각한 전염병이 피렌체를 엄습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피사와의 지루한 전쟁(1494∼1508)이 계속되면서 엄청난 전쟁 비용 때문에 나라의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메디치 가문의 몰락(1494) 이후 생긴 권력의 공백은 피렌체 정치판을 충돌과 대립으로 몰아갔다. 위기가 지속적으로 닥치면 이상주의자들은 인기를 끌게 마련이다. 곤경에 처한 대중들은 이상주의자들의 견해를 통해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갈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주의와 정치의 현실은 함께 오랜 길을 가지 못하는 길동무와 같다. 공화정의 이상주의를 주창하던 사보나롤라는 막상 권력을 잡았을 때 위기로 점철된 현실의 세계를 만나게 됐다. 가뭄과 전염병, 전쟁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결국 공화정의 수호자로 임명된 사보나롤라는 공화정의 수탈자가 되고 만 것이다. 무너진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그는 항소의 권리를 박탈하는 강압적인 조치를 불사하게 된다. 그러나 민심이 떠나갔다. 현실 정치에서 내릴 수밖에 없는 현실적 판단이 이상주의로 집권한 파퓰리스트를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권력을 잡으면 누구나 변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현실이 요구하는 변화의 이유가 절박하기 때문이고 그 현실이 우리의 행동 양식을 결정하는 동인이 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야말로 이런 현실의 힘을 직시했던 인물이다. 마키아벨리는 지금 우리에게 이런 말을 속삭이고 싶을 것이다.

 

“벗들이여! 부디 사보나롤라와 같은 포퓰리스트들에게 속지 마시오. 그들은 이상주의에 물든 아마추어일 뿐 현실을 변화시킬 힘은 없는 위인이라오. 그들이 당신들을 위해 쏟아놓는 말들은 다 맞는 말이오. 그러나 그들도 언젠가는 당신들을 배신하고 그 알량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당신들을 억누르게 될 것이오. 그것이 바로 권력의 속성이지요. 그러니 이상주의자들에게 속지 마시오. 그들은 사보라롤라 같은 가짜 프로페타일뿐이요. 합리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나 먹힐 법한 협박이나 감언이설에 능숙한 그들을 제발 경계하시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15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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