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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경영:삼국지 리더십

다이아몬드 모델로 분석한 삼국지 영웅의 리더십

김태현 | 86호 (2011년 8월 Issue 1)
 

 
소설은 우리를 자신 밖으로 끌어내고 우리와 다른 많은 인물들을 만나게 한다. 우리는 <삼국지>를 통해 2000여 년 전 넓은 중국 땅을 무대 삼아 자신의 뜻과 꿈을 펼쳐왔던 영웅호걸들을 만날 수 있다. <삼국지>를 통해 그들의 숨결을 느끼고 오랜 전란의 와중에서 살아간 무수한 사람들의 삶의 역정과 희로애락도 느낄 수 있다. 부채를 흔들면서 천하를 논하는 전략의 대가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적토마에 몸을 맡기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광활한 중원 땅을 달리는 관운장(關羽)의 멋진 모습에 많은 사람들은 매료된다.
 
소설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도 가르쳐준다. 경영 관점에서 보면 <삼국지> 속의 전장은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인 오늘의 비즈니스 현장과도 흡사하다. 경영자의 리더십에 따라 기업들의 부침이 있듯이 <삼국지>의 나라들도 리더의 역량에 따라서 흥망이 확연하게 갈라졌다.
 
원소(袁紹)는 조조(曹操)나 유비(劉備)보다 훨씬 큰 세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기반을 지키지 못하고 쉽게 무너졌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넓은 영토와 훌륭한 인재들을 대거 거느리고 있었지만 오만 방자한 성품 때문에 초기에 패망했다. 반면 조조, 유비, 손권(孫權)은 각각 다른 리더십을 가졌지만 국가를 훌륭히 경영해 나라를 반석 위에 세웠다. 조조, 유비, 손권의 국가 통치방식은 오늘날 기업 CEO들이 모범 사례로 삼을 수도 있고 때로는 반면교사로서 우리를 일깨워 줄 수도 있다.
 
국가경쟁력 모델
조조, 유비, 손권의 리더십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한 모델은 하버드대의 마이클 포터(Michael Porter) 교수와 서울대 경영대학의 조동성 교수가 연구한 ‘국가경쟁력 모델’이다. 국가경쟁력 모델에 따르면 국가 경쟁력은 해당 국가의 내부 요인인 인적 요인, 물적 요인과 외부 요인인 기회의 세 가지 요인들에 따라 결정된다.(표 1) 그중에서 인적 요인은 정치인/행정가, 기업가, 전문경영자, 근로자 등 네 가지 집단의 사람들로 구성되고 이들의 능력이 국가경쟁력에 영향을 미친다.
 
<삼국지>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정치인/행정가, 기업가, 전문경영인 중 하나로 명확히 구분하기 힘들어 하나의 집단으로 생각했다. 삼국시대 당시 고위직 관리들은 다양한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갈공명도 정치인/행정가와 기업가, 전문경영인 역할 모두를 수행했다. 다만 근로자는 병사와 백성으로 생각하고 분석했다.
 
물적 요인은 4가지로 구성되는데 물적 자원, 경영환경, 관련 산업, 국내 수요가 그것이다. 물적 자원은 부존자원이나 기술력 같은 나라의 자원을 말하며 경영환경은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 있는가를 나타낸다. 관련 산업은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산업의 종류와 산업 구조를, 국내 수요는 국내 수요의 크기와 성장성, 소비자의 욕구성향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물적 요소들도 나라의 리더인 조조, 유비, 손권의 리더십에 따라 더욱 활성화되거나 퇴보할 수도 있다. 마지막 한 가지 요소는 외부 요인인 기회(opportunity)인데 기회 요인은 리더의 통제 범위 밖에 있다고 가정하고 본 글에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조조의 리더십
타고난 자질과 부지런함으로 자신을 단련했던 조조는 현대의 경영환경에 적합한 경영자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조조는 몸소 전장을 누비며 싸움을 주도했다. 어떤 때에는 정면 승부로, 어떤 때에는 꾀와 외교로, 또 어떤 때에는 위계와 사술로 적을 하나씩 물리쳤다.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 조조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말에서 내려와서도 천하를 다스렸다. 조조는 한발 앞서 생각하고 기민하게 판단하고 실행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조조는 명분보다 능력을 우선시한 실용의 경영자 스타일이었고, 위대한 전략가이면서 행정가이고, 또 시인이었다. 조조는 계속 공부해 본인을 업그레이드시켰고 이를 자신의 강점으로 만들어나가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또 조조는 인재 등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조는 유비와 손권까지도 자신의 수하로 두고 싶어 할 정도로 인재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조조는 인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인재를 찾아 나섰다. 위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가후(賈詡)와 사마의(司馬懿)는 조조가 위나라의 장래를 위해 미리 포석해놓은 사람들이었다. 제갈공명이 후주 유선(劉禪)에게 출사표를 바치고 위나라 북벌에 나섰을 때 사마의가 없었더라면 위가 상당한 곤경에 처했을 수도 있었다. 비록 적이지만 관운장을 수하로 거두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서도 인재에 대한 조조의 갈구가 대단했음을 볼 수 있다. <삼국지>를 보면 조조의 진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무장, 문인, 모사, 관료 등 나라 경영에 필요한 온갖 유형의 인물들이 즐비하다.
 
위나라가 강성해진 이유는 조조의 성공적 인사관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조는 일할 보람과 안정된 자리, 물질적 보상을 마련해주는 현대적 관리기법을 일찍부터 사용했다. 부하의 잠재력을 파악한 후 적절한 경력관리를 통해 인재를 육성해나갔다. 조조의 부하들 중에는 상위 전문가 그룹이 강하고 두터웠는데 이러한 인재들이 위나라의 법령, 행정체계를 체계적으로 갖춰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 기여했다.
 
인재 활용 시 조조는 원칙과 줏대를 세우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를 자주 보여줬고 의도적으로 적시에 사람들을 칭찬해 감동시켰다. 유비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관운장이 조조 곁을 떠났지만 “나의 정성이 모자랐다”라고 탄식해 주변 사람들과 관우를 감동시킨 일화도 있다. 조조는 유비나 손권보다 주도 면밀하게 사람을 다루고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조는 사후 대비 준비 또한 철저했다. 조조는 죽기 9년 전부터 후계 구도를 치밀하게 준비했다. 조조는 후계자를 빨리 선정하지 않고 심사숙고했는데 능력을 기준으로 조비(曹丕)를 후계자로 낙점해 그를 냉정히 단련시켰다. 황제의 권한을 차츰 줄이면서 조비의 세력을 점차 키웠고 많은 인재를 붙여 조비를 뒷받침했다. 조조는 조비에게 훌륭한 인재풀과 시스템, 제도들을 남겨 위나라의 미래를 단단하게 하고 죽었다. 한국의 기업들도 최근 2세, 3세 경영자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조조처럼 후계자에 대한 철저함이 필요하다.
 
인적 요인에서 탁월함을 보였던 조조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조조가 인재를 중히 여긴 것은 맞지만 자신의 뜻과 다른 경우에는 가차 없이 처단하는 모습을 지닌 점에서다. 조조는 부하를 진정으로 발전시키는 리더십(Enabling leadership)과 윤리적 경영관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얻지 못한다. 조조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지만 자신의 뜻에 반대한다고 평생을 같이한 최고의 전략가인 순욱(荀彧)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살하게 했다. 어머니를 강제로 위나라로 불러들여서 유비 측 전략가인 서서(徐庶)를 유비로부터 떠나게 하는 모습에서는 냉혹함도 보인다. 조조는 용도가 있을 때는 사람을 지극히 아끼지만 용도가 끝나면 차갑게 대한다는 점에서 인정 많은 촉나라 유비와 다르다. 관운장을 자신의 옆에 두고자 천하의 명마인 적토마까지 하사했지만 그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 것도 이러한 조조의 한계 때문일지 모른다. 성격이 충직하고 곧은 사람들은 조조 밑에서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난세에는 도덕성보다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조조의 인재관이었기 때문이다.
 
물적요소에 있어서 조조의 리더십은 어땠을까? 위나라는 영토의 크기, 경제력, 국가 시스템, 문화적 수준에서도 유비의 촉나라와 손권의 오나라를 압도적으로 앞섰다. 위나라는 중국의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상공업이 발달했고 자원도 풍부했다. 이러한 물적요소를 조조는 적절히 활용했다. 조조는 훌륭한 정치가이자 행정가로서 전란 중인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활안정이라고 생각했다. 계속된 전란 때문에 백성들은 안전한 삶과 생업을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조조는 버려진 땅을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수확량의 6할을 받는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했다. 국방문제에 있어서는 병호제(兵戶制)를 실시했다. 이는 병사를 일반 백성과 구별해 일선지역에 근무하면서 농사를 짓게 하는 제도이다. 아버지가 사망하면 아들이 그 뒤를 이어나가게 했다. 국가세입은 호조제(戶調制)라는 선진 시스템을 도입했다. 조조는 이와 같이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시스템을 과감히 도입해 국가의 경제력을 넓혀나갔다.
 
아울러 조조는 나라를 경영함에 있어 법에 의한 치국을 기본으로 삼았다. 조조는 원리원칙을 따지면서 법 집행에 엄격했다. 법에 따라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조조가 다스리던 나라는 기강이 잡히고 법치 강국이 될 수 있었다. 조조는 죽을 때까지 법가적 통치방식을 견지했다.
 
조조는 나라의 질서를 바로 잡는 일뿐만 아니라 장래에 대비하는 일에도 신경을 썼다. 바로 교육과 문화정책이다. 전란으로 나라의 예의범절과 청소년 교육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해 그쪽에 특히 신경을 썼다. 지방 500호마다 학교를 설치해 재주 있는 청소년들을 교육시켰고 재주 있는 문인들을 휘하에 많이 끌어모아 각기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들은 중국 문화의 전성기를 이룬 건안문단(建安文壇)을 형성하게 됐다. 

 
유비의 리더십
유비의 강점은 어진 마음에서 시작한다. 어질다 보니 겸손한 자세가 몸에 배어 있고 너그러운 마음과 알지 못할 불가사의한 매력이 있었다. 한번 유비를 만난 사람은 그 인품에 반해 평생 유비를 위해 봉사했다. 유비가 그토록 궁핍하게 지낼 때도 관우, 장비(張飛)는 물론이고 조자룡(趙子龍), 제갈공명, 법정(法正) 등 최고의 인재들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유비는 다른 이들의 능력을 각기 최대화시켜 최고의 시너지를 내게 했다. 유비는 부하들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수하의 전문경영자와 전문가 집단이 최선을 다하도록 만드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위대한 경영자는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이상과 원칙을 지키는 뱃심과 결의가 필요하다. 적당히 타협하면 보통의 경영자는 될 수 있어도 위대한 경영자는 될 수 없다. 유비가 실천한 원칙이나 바른 길은 당장은 바보스럽고 답답해 보였지만 길게 봤을 때 오히려 좋고 빠른 길이 됐다. <삼국지>에는 제갈공명이나 방통(龐統) 같은 참모가 좋은 계책을 건의해도 유비가 차마 인의상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해 애를 먹고 답답해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길게 보면 이러한 유비의 판단이 옳은 경우가 많았다. 유비는 도리에 맞고 지혜로운 결정을 하는 데 자신도 모르게 최고의 경지에 와 있었던 것이다. 유비야 말로 타고난 CEO라 할 수 있다.
 
인적 요인들에 대한 유비의 리더십은 조조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인재 등용 노력에서 빛을 발했다. 유비는 조조와 같은 창업형 군주다. 조조가 좋은 가문에서 쉽게 시작한 사람이라면 유비는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해 밑바닥 경험을 많이 하면서 성장한 자수성가형 창업 군주다. 유비는 자신의 약점인 조직이나 유능한 사람에 목말라 있었을 것이다. 유비는 도원결의로 관운장, 장비와 형제가 되면서 조금씩 힘을 키워나갔다. 작은 중소기업을 창업한 셈이다. 유비를 멀리서 흠모하던 조자룡까지 얻으면서 유비의 인재풀 가동이 활발해졌다. 전쟁에서 전략적인 전문가가 필요하자 유비는 수경선생 사마휘(司馬徽)의 소개로 서서를, 유비를 위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의 전략적 목표를 제시하는 제갈공명을 얻게 됐다.
 
<삼국지>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삼고초려 장면은 유비가 인재 영입을 얼마나 갈구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예를 다해 제갈공명을 자신의 전략 전문경영자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사마휘가 당대 최고 2명의 기재라 불렀던 복룡(伏龍)과 봉추(鳳雛) 중에서 복룡(제갈공명)을 수하로 삼은 것이다. 이때부터 유비 진영은 물 만난 물고기 형세가 된다. 이어 유비는 봉추도 정성을 다해 영입했고, 익주를 공격할 때는 법정이라는 뛰어난 인재를 구해 촉나라를 건국하는 데 활용했다. 유비의 부하들은 조조보다 수적인 측면에서는 적었지만 부하들 각각이 질적인 면에서 탁월한 인재였다. 유비 곁에는 제갈공명 같은 뛰어난 전문경영자, 봉추 같은 전략의 귀재, 관운장, 장비, 조자룡, 마초(馬超), 황충(黃忠) 등 적진을 한달음에 무너뜨릴 수 있는 천하의 맹장들이 포진해 있었다.
 
유비는 스스로 일을 하기보다는 밑의 사람이 목숨을 걸고 일을 하게 만드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었다. 부하들이 유비를 전적으로 신뢰했다는 것은 유비가 경영자로서 타고난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유비는 제갈공명을 군사로 삼아 항상 붙어 지내면서 천하경영에 대해 집중교육을 받았다. 유비는 전문경영자 제갈공명에게 중요한 권한을 대부분 위임하며 2인 3각 체제의 공동경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현대 기업들의 창업자와 전문경영자의 윈윈 경영체제를 2000년 전에 유비와 제갈공명이 실행한 것이다. 이는 유비가 타인에게서 믿음과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비의 극진한 은혜를 입은 제갈공명은 유비가 죽은 후에 자신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촉나라를 위해 몸을 던져 북벌을 추진했다. 유비와 제갈공명의 관계는 과거 유방(劉邦)과 소하(蕭何),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관계 이상으로 볼 수 있다.
 
관운장과 장비, 조자룡 등의 뛰어난 전투 전문가들과 더불어 제갈공명 같은 천하의 전략가를 보유함으로써 유비는 날개를 달고 촉나라의 미래 비전을 가지게 됐다. 중소기업 CEO였던 유비가 대기업으로의 먼 장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오나라와 협력해 치러낸 적벽대전을 통해 나라의 규모를 키웠고 익주를 정복해 촉나라를 건설했다. 유비의 인화 리더십은 제갈공명의 가세로 욱일승천(旭日昇天)해 대기업 CEO의 반열로 성장했다.
 
특히 유비는 백성과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빼어났다. 따뜻한 감성적인 리더십으로 백성에게 다가 갔다. 백성이 먼저였고 자신은 그다음이었다. 이는 자신을 버리려는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선택이다. 형주에서 조조 군에게 쫓겨갈 때에는 뒤따르는 수천명의 백성을 버리지 못하고 동행해 많은 희생을 낳기도 했다. 피난민을 버리고 가자는 신하들의 요청에도 유비는 “모든 일은 백성이 근본인데 우리끼리 도망가서 무얼 하겠느냐. 모두 같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의 이해를 초월한 큰 마음이 없었더라면 유비는 한낱 작은 무리의 두목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유비의 마음은 백성들을 사로잡았고, 그러한 인덕이 알려져서 전투에서 백성들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유비의 인간적인 리더십은 관운장이 오나라의 여몽(呂蒙)에게 형주성을 빼앗기고 처형되는 시점부터 균형감각을 잃었다. 한 나라를 부흥시킨다는 대의를 잊고 오나라 정벌에만 매진해 인생의 후반부를 실패로 마감했다. 제갈공명과 조자룡의 충언도 듣지 않았다. 지나친 자신감과 복수심으로 유비가 평소의 겸손한 자세를 잃어가자 촉나라의 비극은 시작됐다.
 
유비는 2세 경영자인 유선도 강하게 단련시키지 못했다. 제갈공명이 있어도 유선의 주변에 간신들이 득세하면서 촉은 기울어갔다. 결국 더 강한 나라를 건설하지 못하고 위에 의해 망하게 됐다. 경영자는 어려울 때일수록 냉정을 찾아야 한다. 흥분하면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다.
 
물적 요인에 대한 유비의 리더십은 어떨까. <삼국지>에 유비의 국가 정책에 대한 기술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다. 나라 유지의 근간이 될 자원 공급, 경영여건의 구축, 산업정책 등에 관해서는 제갈공명과 전문가 집단 신하들에게 위임해 진행했으리라 생각된다. 나라의 기본적인 물적 자원은 촉나라의 험한 산세 때문에 위나라와 오나라에 비해 열악했고 경영환경도 두 나라에 비해 좋지 않았을 것이다.
 
문헌을 보면 촉나라의 경제력은 무척 궁핍했던 것 같다. <태평어람>이라는 책에서 제갈공명은 촉의 경제력을 한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백성은 가난하고 국력이 약해 적을 막을 군비는 비단으로만 마련할 뿐이다.’ 당시 촉나라의 비단과 견직물은 중국 내에서도 매우 뛰어나 이를 오나라에 수출해 자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러한 피폐한 경제 상황 속에서 유비는 무리한 전쟁을 단행했다가 대패하고 유비까지 죽게 됐다는 분석이다. 조조는 한실(閑室)을 기반으로 시작한 경우이므로 국가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진 상황이라 체제 정비에 여유가 있었다면 유비는 단시간에 그러한 체제를 갖추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손권의 리더십
손권은 영특한 3대로서 수성에 성공한 명 CEO라 할 수 있다. 손권은 통 크고 신중한 성격으로 물려받은 인적 자원을 잘 관리했을 뿐 아니라 좋은 사람을 많이 초빙해 키워냈다. 또 강동 명문들을 잘 포용해 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다. 실사구시적 성격에 생각도 유연해 원칙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았다. 실리를 위해서라면 체면에 구애 받지 않고 유연하게 행동했다. 특히 외교에 능했던 손권은 오나라의 3대째 CEO로서 가장 이상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손권은 요즘 용어로 말하면 이른바 3세 경영자다. 1대 군주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이고 2대 군주 손책(孫策)의 동생이므로 3세 경영자라 할 수 있다. 손권은 3세 경영자의 성공적인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창업형 경영자인 조조나 유비가 도전하고 승부를 걸면서 천하의 주인 자리를 노렸다면 손권은 수비에 힘쓰면서 자신의 힘을 길러나간 경영자라고 볼 수 있다.
 
선대의 전문경영자들을 그대로 물려받은 손권은 인재 관리에 있어 합리적으로 처신했다. 오나라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주유(周瑜) 같은 토호 세력을 끌어들이고, 최고 관료였던 장소(張昭) 등의 의견을 경청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하면서 자신의 힘을 키워나갔다. 3세 경영자로 기존 정치가, 행정가들과의 적절한 타협과 조화로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갔다. 인내가 대단했다는 점은 군주로서 손권이 가진 큰 장점이었다. 외치에서는 주유, 내치에서는 장소의 협조를 받아 나라의 기반을 갖추고 노숙(魯肅), 제갈근(諸葛瑾), 여몽, 육손(陸遜) 같은 인재들을 키워 나라의 강성에 크게 기여했다.
 
손권은 외교 감각이 탁월해 당시 물고 물리는 삼국관계에서 항상 최선의 선택을 했다.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공격해올 때 손권은 대외적으로 치밀한 외교를 펼쳤다. 우선 위나라에 무릎을 꿇었다. 조조에게 사신을 보내 신하를 자처하면서 지금 천하가 다 바라고 있으니 새 왕조를 세워 천자가 되라고 청했다. 손권 자신은 오나라를 바치고 항복하겠다는 뜻이었다. 손권은 오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자신의 자존심쯤은 문제 삼지 않는 실리주의자였다. 어떤 때에는 조조의 편이 됐다가, 어떤 때에는 유비의 편에 섰다.
 
손권은 말년에 총명이 흐려져서 황태자를 둘러싼 분쟁의 중심에 섰다. 오나라 조정은 두 패로 갈려 암투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적통을 황태자로 지지하던 충신 육손 같은 사람을 의심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권력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황태자를 견제하는 심리가 강해져서 황태자의 편을 드는 사람은 잔인하게 처벌했다. 황태자를 둘러싼 후유증 때문에 오나라에는 충신이 사라지고 기강이 문란해져 망국의 씨앗이 커졌고 결국 위나라에 복속됐다.
 
손권이 지배한 장강 중하류는 토지가 비옥하고 강수량이 풍부해 농사 짓기에 알맞은 지역이었다. 손권은 지형의 이점을 살린 토지정책을 실시했다. 철강, 방직, 제염 등 특산물도 많이 생산하면서 중국의 강남 개발에 큰 기여를 했다. 또 손권은 조조처럼 둔전제를 시행했다. 둔전제 시행으로 경제력이 풍부해졌고 이는 오나라의 군사력에 많은 도움이 됐다. 오나라는 장강이나 바다를 중심으로 한 수로가 많았기 때문에 무역이 활발하고 조선업도 발달했다. 조선업은 삼국 중에 가장 앞서 있었고 이는 장강 유역 경제가 황하 유역의 경제를 앞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밖에도 손권은 장강유역의 경제발전을 추진하면서 항해법을 크게 발전시켰다.
 
세 인물의 리더십 평가와 기업 경영자의 역할
조조는 이성적인 경영자, 유비는 사람을 중히 여겨 충성심을 유발시키는 경영자, 손권은 많은 사람의 의견을 잘 듣고 판단하는 합의형 경영자 스타일이다. 젊은 시절부터 조조, 유비, 손권 모두는 최선을 다해 나라를 경영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국가경영에 대한 열정에는 차이가 있었다. 특히 본인의 사후 후계자 교육과 관련해서 세 사람의 수준 차이는 확연했다.
 
조조는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먼 미래를 관망하는 혜안이 있어 철저히 준비해 나라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유비나 손권은 그러하지 못했다. 유비의 사후에 제갈공명이 실권을 잡고 후주 유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준비되지 않은 2세인 유선이 제대로 황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손권도 마찬가지로 2세 경영에 실패해 오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조조, 유비, 손권의 리더십은 S곡선 개념을 적용해 설명할 수 있다. S곡선은 기업이 한창 잘나갈 무렵에 또 다른 S곡선을 만들어 기업이 새로이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준비하라는 개념이다.(그림 1) 이러한 S곡선 개념은 위, 촉, 오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조조는 나라가 한창 힘이 있을 때 후계자 구도, 우수한 인재 가동, 체계적인 국가 틀을 준비해 새로운 S곡선을 만들어 나갔다(A 지점). 그런 노력으로 조조의 사후에도 후계자인 조비가 나라를 잘 다스려 위나라를 꾸준히 더 발전시켰다(A 에서 B로).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司馬炎)이 왕위를 찬탈해 위가 망하고 진나라가 건국됐다(C 지점). 반면 유비와 손권은 강성할 때 나라의 발전을 더 꾀하기 위해 새로운 S곡선을 그렸어야 했는데 본인들의 사후에 대비하지 못해 나라는 기울고 결국 위나라에 의해 망하게 됐다(D 지점). 여유 있을 때 미래를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한 조조는 유비와 손권 두 사람보다 지혜롭게 나라 경영을 했고 위나라는 촉나라, 오나라보다 훨씬 오래 존속됐다.
 
기업 입장으로 논의를 전개하면 과거 한창 잘나가던 노키아는 더 큰 도약을 위한 새로운 S곡선을 만들지 못해 최근 경쟁력이 크게 약화됐다. 반면 선도 기업인 P&G, UPS, Best Buy 같은 기업들은 계속 새로운 S곡선을 그리면서 꾸준히 성장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을 위해 기업들은 첫째, 충분히 큰 시장을 찾아내는 능력, 둘째, 조급한 사업확장 유혹에서 벗어나 실력을 키우는 자세, 셋째, 능력 있고 헌신적인 인재를 기르는 태도가 중요하다. 기업 경영자들은 <삼국지>에 등장한 리더들의 지혜를 참고해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하는 기업을 만들어가야 한다.
 
맺는 글
<삼국지>의 리더십을 적용한 S곡선은 우리에게 깊은 통찰력을 주고 있다. 경영자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조조처럼 평소에 항상 공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공부를 통해 세상을 다양하게 경험하고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예상해 새로운 S곡선을 만들어가는 실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폭넓고 깊으면서도 다양한 공부와 경험을 갖춰 지혜로운 경영자의 자질을 지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조조의 카리스마 리더십, 사람을 중시하는 유비형 리더십, 합의형 리더인 손권의 리더십은 각각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가업을 이어받은 2, 3세 경영자들은 손권이 군주로 취임한 후의 경영방식을 유심히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주변 사람들과 환경을 잘 분석해 최상의 조합을 이루고 같이하는 사람들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 언제든 최고의 리더십이 될 것이다.
 
김태현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 thkim@yonsei.ac.kr
김태현 교수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대(Indiana University)에서 Operations Management 전공으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경영대학 학장을 지냈다. Global Supply Chain Management(GSCM) 분야가 주 연구 분야이며 <21세기를 대비한 Supply Chain Management 개념과 사례><전략적 물류경영>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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