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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끝 15

폭식, 무절제, 향락, 단절…위대한 정신 잃은 메디치 家 길을 잃다

김상근 | 83호 (2011년 6월 Issue 2)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여인

1743,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유족이었던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Anna Maria Luisa de’ Medici, 1667-1743)가 임종함으로써 메디치 가문은 역사의 뒷무대로 조용히 사라졌다. 모직산업을 일으켜 당대 최고의 부()를 축적하고 유럽 최대의 은행을 운영했던 메디치 가문은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해 종교명문가가 됐고,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해 왕족 가문이 됐다. 그러나 권불십년(權不十年)에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라고 했던가. 메디치 가문도 끝내 막을 내리고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퇴장하게 된다.

안나 마리아는 생애 말년에 아주 험한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오스트리아 군대를 동원한 불면식의 외국인들이 피렌체 정부를 접수하고, 메디치 가문의 전통에 모욕을 가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다. 무능했던 아버지 코시모 3세가 죽자(1723), 안나 마리아는 가문의 권력과 명예가 빠른 속도로 쇠퇴해가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마지막 명예를 지켜가던 안나 마리아에게 남아있던 유일한 기쁨은 조상들이 대대로 수집해 왔던 르네상스 시대의 명작을 감상하는 일이었다. 마리아는 15세기의 현자(賢者) 코시모 데 메디치가 도나텔로에게 의뢰해서 만든 조각품들, 20대 초반의 미켈란젤로가 그린 <도니 톤도>, 보티첼리가 메디치 가문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프리마베라> <비너스의 탄생>, 브론지노(Bronzino, 1503-1572)가 그린 메디치 가문의 초상화 등을 특히 좋아했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사람 안나 마리아는 그 걸작 예술품들 앞에서 위대했던 조상들을 추억하며 눈물을 흘렸다. 평범한 중산층 모직업자로 출발했던 조반니 데 메디치(1360-1428)부터, 이탈리아의 국부(國父)로 불렸던 코시모(1389-1464), 이름 그대로위대한 자로 칭송받았던 로렌초(1449-1492), 격동의 16세기 가톨릭 역사를 이끌었던 두 명의 메디치 교황, 레오 10(1475-1521)와 클레멘스 7(1478-1534), 토스카나의 대공(Grand Duke)으로 즉위했던 코시모 1(1519-1574), 프랑스의 여왕으로 16세기 유럽을 호령했던 카테리나 데 메디치(1519-1589)의 아련한 추억이 깃든 작품들이었다. 작품 하나하나에 모두 메디치 가문의 찐한 스토리가 담겨 있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걸작 예술품들은 모두 바사리 통로(Vasari Corridor)에 소장·전시돼 있었다. 안나 마리아는 이 바사리 통로를 걸으며 위대했던 가문의 문을 닫기로 결심하게 된다.

바사리 통로에서 세상과 단절되다

메디치 가문은 채 350여 년을 넘기지 못하고 가문의 문을 굳게 닫았다. 메디치 가문은 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을까? 세계 최고의 부를 축적한 당대 최고의 부자였으며 두 명의 교황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던 위대했던 가문이 왜 4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야만 했을까? 메디치 가문이 갑자기 몰락한 이유는 바사리 통로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메디치 가문이 몰락의 조짐을 보인 것은 피렌체의 대공(Grand Duke)으로 정식으로 등극했던 코시모 1(1519-1574) 때의 일이다. 그는 15세기의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던 가문의 위대한 조상,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와 전혀 다른 타입의 리더였다.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 늘 신중하고 겸손하게 행동했던 15세기의 국부(國父) 코시모와는 달리 16세기의 대공(大公) 코시모는 권력을 독점한 황제처럼 거들먹거렸고 독재자의 철권정치로 피렌체를 강압적으로 통치했던 인물이다. 그는 스페인 출신의 나폴리 총독의 딸이었던 엘레오노라(Eleonora di Toledo, 1522-1562)와 정략 결혼했다. 스페인과 나폴리로부터 엄청난 결혼 지참금을 가져 온 엘레오노라를 위해서 코시모 1세는 아르노 강 남쪽의 피티 궁전(Palazzo Pitti)을 매입(1549)해 웅장한 왕실 건물로 재건축한다(1553). 지금 우피치 미술관과 함께 피렌체를 대표하는 박물관이 된 피티 궁전이 바로 코시모 1세가 아내 엘레오노라를 위해 마련한 메디치 대공 가문의 왕궁이다. 코시모 1세 부부는 새로 건축한 피티 궁전에 입주하고 장남 프란체스코에게는 자신이 거처로 사용하던 베키오 궁정(Palazzo Vecchio)을 물려줬다. 프란체스코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드 1세의 딸이었으며, 스페인의 황제 카를 5세의 조카이기도 했던 요안나(Joanna of Austria, 1547-1578)와 결혼했고(1565), 코시모 1세는 새로 맞은 왕가 출신 며느리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 피렌체 도심의 베키오 궁정을 사용하도록 배려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사돈이 되면서부터 어깨에 더욱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코시모 1세는 피렌체의 시민들로부터 점점 격리돼갔다. 그는 피렌체에서 황제처럼 행동했고 가혹한 세금으로 시민들을 몰아붙였다. 1565, 코시모 1세는 건축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아들 부부가 사는 베키오 궁정에서부터 자신의 왕궁인 피티 궁전까지를 연결하는 전용 비밀 통로를 설치토록 한 것이다. 피렌체 도심의 베키오 궁정에서 시작되는 이 비밀주랑(柱廊)은 정부청사(현재 우피치 미술관)를 거쳐 아르노 강을 가로지르는 베키오 다리 위를 지나 강 건너 편 언덕의 피티 궁전에까지 이르게 된다. 건축가의 이름을 따서바사리 통로(Vasari Corridor)’로 불리는 이 비밀주랑은 피렌체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메디치 가문의 전용 도피통로로 설계됐다. 그래서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는 있지만 반대로 밖에서 안은 볼 수 없도록 돼 있다. 이때부터 메디치 사람들은 바사리 통로에 설치된 비밀스러운 창문을 통해 피렌체 사람들을 은밀히 감시하게 된다. 폭군처럼 군림하는 강압적인 리더도 모자라 시민들을 통제하는 비밀스러운 감시자가 된 것이다.

 

전용 피트니스 센터로 변한 바사리 통로

바사리 통로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메디치 가문이 세상과 단절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피렌체 시민들의 삶과 유리된 채 가혹한 방식으로 거둬들인 세금으로 향락만을 즐기는 탐욕스러운 가문으로 전락한 것이다. 피렌체 시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15세기의 국부(國父) 코시모나 그의 손자였던위대한 자로렌초가 추구하던 피렌체1 시민으로서의 리더십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세상과 단절된 채 폐쇄적인 성격이 강화되면서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점점 더 작아져만 갔다. 르네상스의 창조 정신을 견인하던 긍정적인 세계전망은 사라졌고 개인의 향락 추구만이 일상사가 됐을 때 피렌체의 위대했던 가문도 쇄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역사가들은 메디치 가문이 문을 닫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코시모 3(1642-1723)의 오랜 통치기간(1670-1723년간) 반복해서 나타난 리더십의 부재로 돌린다. 실제로 이 무능했던 피렌체의 대공은 잘못된 결혼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고 피렌체 경제의 파탄으로 유럽 각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무시를 당했다. 그는 또한 맹목적인 기독교 신앙을 피렌체 시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광분했지만 본인은 무절제한 주색잡기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결국 그는 불규칙한 폭식과 무절제한 생활 때문에 만성적인 질환을 얻게 되고, 주치의 프란체스코 레디(Francesco Redi)는 그에게 규칙적인 걷기 운동을 처방했다. 과다 비만에 시달리던 코시모 3세는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걷기 운동을 할 만한 적절한 장소를 물색했다. 결국 그가 찾아낸 곳은 800m에 달하는 바사리 통로였다. 코시모 3세는 이 바사리 통로를 개인 피트니스 센터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이 긴 회랑에서 걷기 운동을 할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메디치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모든 조각품들을 그곳에 일렬로 전시하도록 했다. 로마의 메디치 저택에 소장돼 있던 고대의 조각품들도 이때 모두 피렌체로 옮겨졌다. 피티 궁전과 접해있던 보볼리 정원을 장식하던 수많은 고대 조각품도 모두 코시모 3세의 비밀 피트니스 센터로 이관됐다. 600점이 넘는 초상화가 바사리 통로의 긴 벽을 일렬로 장식했다. 마사초, 브루넬레스키, 미켈로초, 도나텔로, 보티첼리,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을 후원하면서 르네상스 예술이 피렌체 시민의 자부심이 되도록 배려했던 메디치 가문의 위대한 전통은 이제 개인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한 오락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피렌체가 배출했던 위대한 천재들에 의해 탄생한 예술품들이 비만에 시달리던 한 개인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눈요기로 변해버린 것이다.

당나귀를 타고 가던 코시모 데 메디치

16세기에 집권했던 대공 코시모 1세부터 18세기 초반에 메디치 가문의 문을 닫게 만든 장본인인 코시모 3세는 모두 15세기의 위대한 가문의 조상을 닮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이 코시모 1, 코시모 2, 코시모 3세로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후대의 코시모들은 선대 코시모의 이름값에 미치지 못했다. 이름은 따라 지을 수 있었지만 그 정신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약 후대의 코시모들이 선대 코시모의 정신을 유산으로 계승했더라면 메디치 가문이 그렇게 쉽게 패망의 길로 접어들진 않았을 것이다. 가문의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가문의 정신이다. 그렇다면코시모란 이름이 주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1420, 15세의 현자(賢者) 코시모 데 메디치는 부친 조반니 디 비치로부터 메디치 은행을 물려받았다. 메디치 은행은 피렌체에서 세 번째 큰 규모로 급성장했고 사람들은 부러움과 시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신흥 부자 가문의 새로운 지도자인 코시모를 주목했다. 피렌체 귀족들의 견제가 강화됐고, 특별히 알비치 가문은 노골적으로 코시모와 메디치 가문에 시비를 걸었다. 코시모는 아버지의 유언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임종의 침상에서 조반니 디 비치는 아들에게 이런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사업상 볼 일이 있는 것처럼 하면서 공연히 시뇨리아 궁전 주위를 어슬렁거리지 말아라. 시뇨리아 궁전에서 소환장이 왔을 때만 그곳으로 가고, 소환된 사무실만 방문하고, 다른 곳은 절대로 출입하지 말아라. 다른 사람들이 널 주목하게 만들지 말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라. 만약 사람들 앞에 서야 한다면 꼭 필요한 곳에만 너의 모습을 보여줘라.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절대로 대중들의 뜻에 거슬리게 행동하지 말아라.”1

아버지의 유언은 한마디로 신중하고 겸손하게 처신하란 것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부가 축적되면 될수록, 가문의 명예가 올라가면 갈수록, 이를 시기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바꾸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사람들이이웃이 잘되는 것을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코시모 역시질투는 물을 안 주어도 잘 자라는 잡초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코시모는 메디치 가문의 저택을 건축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브루넬레스키에게 설계를 맡긴 적이 있다. 야심만만했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 예술의 최대 후원자 가문이자 피렌체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던 메디치 가문의 위상에 걸맞게 거대한 저택의 설계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코시모는 브루넬레스키의 저택 설계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크기가 작고 검소한 건물 외양을 가진 미켈로초의 설계안을 받아들였다. 공연히 거대한 저택을 신축해서 피렌체 사람들의 질투심과 귀족들의 견제 심리를 부추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처럼 코시모의 관심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절대로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았다. 협상을 하다가 의견 절충에 실패하면 코시모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래요, 잘 알겠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검토해 보겠습니다.”

코시모는 피렌체 시내에서 이동할 때 절대로 말을 타지 않았다고 한다. 말을 타고 다니면 피렌체 시민들과 노상(路上) 대화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위화감이 조성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코시모는 피렌체 시내를 걸어다니면서 마주치는 주민들에게 늘 웃음으로 대했고 쓰고 다니던 빨간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곤 했다. 장거리 이동을 위해 말을 타야 할 경우라면 그는 당나귀를 애용했다고 한다.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겠다는 의지를 당나귀를 타고 가며 보여 준 것이다. 베노초 고촐리가 메디치 저택의 기도실에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에 당나귀를 타고 가는 코시모가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코시모는 피렌체의 자선사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평생 총 40만 피렌체 금화 플로린을 자선 사업에 기증했는데, 이것은 피렌체 도시국가의 연간 총 수입의 두 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예루살렘에 병이 든 성지 순례자를 위한 자선병원을 설립했고 피렌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단체인산 마르티노의 착한 사람들을 창립하고 후원했다. 이 단체에 기부된 기부금 총액의 절반이 메디치 은행에서 나왔다. 그는 매년 성탄절과 부활절에 이 자선단체에 사비(私費) 500플로린의 기부금을 냈는데, 이것은 메디치 은행 간부의 3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434∼1471년 코시모가 피렌체를 새로운 르네상스의 도시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추진했던 건축 프로젝트의 총액은 663755 금화 플로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이것은 천문학적 숫자의 돈이다. 15세기 초반, 메디치 가문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페루치(Peruzzi) 은행이 전 유럽에 있던 지점을 통해 벌어들이던 수익의 총액이 103000 금화 플로린인 것에 비교하면 이것의 무려 6∼7배에 달하는 금액을 코시모는 피렌체의 건물 신축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2  마키아벨리는 코시모의 생애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대단히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중후하고 예의바르고 덕망 넘치는 외모를 갖고 있었다. 초년은 고통과 유배와 신변 위협 속에서 지냈으나 관대한 성향 덕에 모든 정적을 누르고 백성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거부(巨富)이면서도 살아가는 모습은 검소하고 소탈했다. 당대에 그만큼 국정에 통달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도시에서 그는 30년 동안 실질적으로 피렌체를 지배했다.”

메디치 가문의 현자(賢者)는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삼갔으며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것을 경계했다. 은인자중(隱忍自重)을 원칙으로 삼았던 메디치 가문의 위대한 조상 코시모는 언제나 뒤로 물러나 조용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뒤에서 조용히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관찰하다가 문제가 있으면 조용히 다가가 그 문제를 해결해내는 현자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메디치 가문의 진정한 리더십은 은둔의 미학을 끝까지 지켰던 코시모의 삶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후대의 코시모들이 이름만 따르고 그 정신을 따라가지 못했을 때 메디치 가문은 폐망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선물

가문의 대는 끊겼지만 가문의 정신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파란만장했던 메디치 가문의 혈통은 끊겼지만 메디치 가문의 영광은 지금도 피렌체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21세기의 피렌체 사람들은 18세기 중엽에 문을 닫은 메디치 가문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시민들에게 남긴 막대한 문화유산 때문이다. 세계 5대 박물관 중의 하나인 우피치 미술관이나 거대한 피티 궁전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위대한 예술 작품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과 예술 애호가들에 의해 피렌체 시의 재정이 유지되고 있다. 1743, 임종을 앞둔 안나 마리아는 자기 조상들이 모아왔던 모든 예술품들을 피렌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단 하나의 조건으로 토스카나 정부에 전부 기증했다. 메디치 가문이 마지막으로 피렌체에 남긴 선물이었다. 이 엄청난 보물 중에 메디치 가문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화가 보티첼리의 작품도 있다. 바로 <코시모 데 메디치의 메달을 들고 있는 청년>이다. 언제나 변치 않은 신중함과 겸손함으로 피렌체 시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고 이탈리아의 국부(國父)로 불렸던 코시모 데 메디치의 정신이 피렌체 청년의 품에 영원히 간직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그림이다.

피렌체의 시인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인문학자 안셀모 칼데로니(Anselmo Calderoni) 1564년에 임종한 코시모의 생애를 이렇게 추모한 바 있다.

, 모든 세상 사람들의 빛이여, 모든 상인들의 빛나는 귀감이여, 모든 착한 근로자들의 참된 친구여, 탁월함을 추구하는 피렌체 인들의 명예여, 가난한 자들의 친절한 봉사자여, 고아와 과부들의 구원자여, 토스카나 지방의 철통같은 방패여!”

위대한 정신은 위대한 가문을 낳았고 그 정신이 쇠퇴했을 때 가문은 문을 닫았다. 메디치 가문은 정신의 위대함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역사적 선례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 위대한 정신이 쇠퇴했을 때 가문의 역사도 끝이 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교훈이야말로 메디치 가문이 남긴 문화유산보다 더 값진 것인지 모른다. 탁월함(Virtus)을 추구하던 가문이 더 이상 탁월함을 추구하지 않을 때 그 가문은 문을 닫게 된다. 메디치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14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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