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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14

잠재력에 투자하는 ‘영감(靈感)의 리더십’

김상근 | 81호 (2011년 5월 Issue 2)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어떤 사람을 쓸 것인가?

종국에는 사람이 문제란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눈다. 어려운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극복해 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가 주어졌을 때도 그것을 완수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쉬운 과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이 있다. 특정 과업이 주어졌을 때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를 완수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가까이 둘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이런과업 종결자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주위 사람에게 전염되는 경향이 있다. 과업에 대한 자심감과 결과에 대한 긍정적인 성취감은 바이러스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확산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긍정적 에너지를 분출하는 사람을 늘 가까이 둬야 한다. 그들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내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 놓기 때문이다. 근주자적(近朱者赤)에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하지 않았던가!1

반면에 부정적인 생각,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짓눌려 있는 사람의 패배감도 동일한 전염성을 갖는다. 우리는 이런 부정적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 섣불리 조언하려다가 자신도 무력감에 빠져든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부정적 생각과 패배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전문적인 식견이 없다면 패배감과 우울증을 겪는 사람은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다.
 

이렇게 우리는 능력 충만한 사람과 늘 가까이하고 패배감에 시달리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교육받아 왔다. 넘쳐나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검증된 사람도 많은데 왜 검증되지 않은 불확실한 사람을 쓸 것인가? 그래서의심스러운 사람을 쓰지 마라(疑人勿用)’는 용인술은쓰고 있는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다(用人勿疑)’는 용인술보다 늘 앞서 왔다. 인재를 널리 구해야 할 기업체는 검증되고 보편타당한 스펙을 구비한 긍정적 에너지의 인재를 선호한다. 감성과 지성을 테스트하고 조직 내 행동에 대한 심리학적 검사를 동원해 의심할 바 없는 인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보편타당한 스펙을 구비한 인재가 꼭 뛰어난 인재일까? 탁월한 용인술(用人術)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메디치 가문도 최고의 스펙을 갖춘 인재를 등용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을까? 콩 심은 데 콩 나니 좋은 콩 밭만 찾아다니면서 처음부터 튼실한 콩만을 입도선매(立稻先賣) 했을까?
 

그렇지 않다. 메디치 가문의 용인술은 오히려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들은 아직 스펙은 갖춰져 있지 않지만 세상을 바꿀 만한 잠재력을 가진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에게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아직 그 진가가 드러나지 않은 젊은 예술가와 학자들을 주목하면서 그들의 여물지 않은 미래에 희망을 걸었다.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스펙을 갖춘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인재들에게 어떤 영감을 불러일으킬지를 먼저 고민했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로마 유학파 건축가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 1377-1446)를 물리치고 무명의 신예 미켈로초(Michelozzo, 1396-1472)를 가문의 건축 책임자로 등용한 코시모 데 메디치는 영감의 리더십(Inspiring Leadership)에 몰두한 사람이다. 10대 무명의 길거리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를 가문의 양자로까지 입양했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파격적인 용인술은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코시모의 후원을 받은 미켈로초가 르네상스 건축의 기본 골격을 완성하게 되고, 로렌초의 후원을 받았던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 조각의 최고 정점(Paragon)에 도달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잠재력을 가진 인재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던(Inspiring) 메디치 가문의 리더십 때문에 가능했다.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인재들은 모두 자신의 능력 이상의 업적을 달성했다. 그들의 잠재력조차 능가하게 만들었던 영감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최초의 여성 화가를 발굴한 코시모 2

무명의 인재를 발굴해 그들의 마음속에 창조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메디치 가문을 따를 자가 없다. 잠재적 가능성이 엿보이면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그 인재의 출신 성분도, 과거도 개의치 않았다. 능력 외에 모든 것은 너그럽게 양해했다. 메디치 가문의 등용문은 출신성분이 낮은 사람에게도, 어두운 과거를 가진 사람에게도 언제나 개방돼 있었다. 메디치 사람들이 본 것은 미래였지 과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 엘리트로서 많은 역사적 공헌을 남겼다. 특히 최초의 오페라를 탄생시킨 가문도 메디치라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오페라의 전신으로 불리는 인테르메디오(Intermedio)가 최초로 상연된 것은 대공 코시모 1세와 톨레도의 엘레오노라의 결혼식(1539) 때로 프란체스코 코르테치아(Francesco Corteccia, 1502-71)가 작곡한 일 코모도(Il Commodo).2  메디치 가문의 결혼식 축하연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오페라 형식은 1565, 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와 오스트리아의 조바나(Giovana of Austria)와의 결혼식(La Cofanaria, 프란체스코 담브라 작곡) 1589년의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와 로레인 가문의 크리스틴과의 결혼식을 통해 점차 발전됐다. 오페라(Opera)란 장르의 이름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메디치 가문의 연주자 겸 악장(樂匠)이었던 야코포 페리(Jacopo Peri, 1561-1633). 그가 1597년경 작곡한 다프네(Dafne)가 최초의 오페라로 알려져 있다. 악보가 현존하는 최초의 오페라는 메디치 가문의 마리아 데 메디치와 프랑스의 국왕 앙리 4세의 결혼식을 기념해 만든 에우리디체(Euridice). 역시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했던 아코포 페리의 작품이다.

 

최초의 오페라가 메디치 가문의 저택에서 탄생한 것처럼 최초의 여성 화가도 메디치 가문을 통해 배출됐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까지 여성은 예술을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소비하거나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오브제로 등장해왔다. 귀족이나 왕족 부인들이 예술 작품을 구매하거나, 신화의 주인공인 여성이 누드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형식이 바로 여성과 예술이 관계를 맺어오던 방식이었던 것이다.
 

17세기 초반, 최초의 여성 화가가 탄생했다. 이름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 모든 서양미술사에 그 아름다운 이름이 올라있는 아르테미시아는 원래 로마 출생이었지만 메디치 가문이 이끌던 피렌체에서 화가로서의 첫 명성을 쌓게 된다. 아르테미시아는 단 한 번도 여성화가에게 개방되지 않았던 피렌체의 미술가 길드 겸 대학(Accademia di Arte del Disegno)에 최초로 가입해 활동한 여성 화가다.3  최초의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역시 메디치 가문의 산물이다. 어두운 과거와 추문에 시달리던 예술가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에게 창조의 영감을 불러일으킨 메디치 가문 때문에 한 여성은 예술과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메디치 가문은 어떻게 아르테미시아에게 창조의 영감을 불러일으켰을까?



르네상스 말기를 주름잡던 카라바조의 화풍

아르테미시아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소개해야 할 한 위대한 예술가가 있다. 바로 혁명적인 화풍으로 르네상스를 마감하고 바로크 시대의 첫 개막을 알린 천재 화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4  밀라노 출신이었던 카라바조는 테네브리즘(Tenebrism, 어둠의 기법)을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세계를 진지하게 성찰해 유럽 화단에 큰 충격을 준 인물이다. 짙은 어둠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줄기 구원의 빛으로 조명했던 카라바조의 작품은 북유럽의 루벤스와 렘브란트에게 전수돼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카라바조의 대표작 중 하나인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는 카라바조의 테네브리즘과 예술 정신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단도를 휘둘러 적장(賊將)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참수하고 있는 유디트의 섬뜩한 표정과 행동은 당시 카라바조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처절한 신념에 몰두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기존 가치와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살해의 현장에서 의연한 표정을 짓는 유디트의 얼굴에서 17세기 초반의 유럽 가톨릭사회가 직면했던 위기의식을 엿볼 수 있다. 카라바조 자신의 삶도 폭력과 피로 물들어 있었다. 로마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자 신세로 남부 이탈리아를 전전하던 카라바조는 1610, 스스로 자기 목을 참수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로마로 숨어들다가 전염병에 걸려 객사하는 운명에 처한다.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충격적이며 파괴적인 삶을 살았던 카라바조의 생애와 최초의 여성 미술가인 아르테미시아는 어떻게 연결돼 있을까. 아르테미시아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가 바로 카라바조의 로마 친구였다. 어린 시절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카라바조의 충격적인 그림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를 보았을 것이다. 그 참혹한 그림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 되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면서….

 

 

로마를 뒤흔든 강간 사건

다시 아르테미시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때는 1611 5 9. 카라바조가 죽은 지 1년쯤 지났을 때이고, 장소는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가 운영하던 로마 화실이다. 카라바조의 친구이자 동료 화가였던 오라치오는 그림에 대한 딸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는 딸을 자신의 화실에서 숙식을 시키며 미술 수련을 쌓게 했다. 10대 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아르테미시아는 미모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탁월한 미술솜씨 만큼이나 놀라운 미모를 지닌 아르테미시아는 재색(才色)을 겸비한 소녀 미술가로 로마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오라치오는 아예 딸의 미모를 이용해서 돈벌이에 나섰다. 아르테미시아를 관능적인 누드모델로 사용한 것이다. 작품을 판매할 때는 부녀(父女)가 함께 그렸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당시 오라치오는 로마의 퀴리날레 언덕에 있던 팔라비치니 궁전(Palazzo Pallavicini) 내부를 장식하는 큰 공사를 주문받았다. 로마의 명문가였던 파르네세 가문이 발주한 이 프레스코화 장식을 위해 오라치오는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 1578-1644)란 인물을 동업자로 고용했다. 아고스티노 타시는 어두운 범죄의 전력이 있는 인물로 한때 리보르노에서 노예선을 젓는노예의 형벌에 처해지기도 했다. 바다에서의 이런 경험 때문인지, ()와 바다를 그리는 솜씨를 갖게 된 타시는 곧 사면을 받고 로마로 흘러들어와 카라바조의 친구였던 오라치오와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오라치오는 타시에게 딸 아르테미시아의 미술 교육도 맡겼다. 여기서 사고가 발생한다. 타시가 화실에서 당시 미성년자였던 아르테미시아를 강간한 것이다. 아르테미시아의 미모와 재능에 호기심을 보이던 로마의 길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스캔들에 대한 소문으로 가득차게 된다.

1612 3 16, 타시는 강간 혐의로 체포됐고, 7개월간 아르테미시아에게는 수치스러운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타시는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했다. 아르테미시아가 먼저 유혹했으며 지금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아르테미시아는 피해자 신분이었지만 당시 관습에 따라손톱 뒤틀기라는 고문을 당했다. 남성 우월주의 사회에서 피할 수 없었던 한 가련한 여성의 숙명이 아르테미시아의 삶과 예술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판결은 1612 11 27일에 내려졌다. 당시 로마 법정은 강간범을 엄하게 다스렸다. 최소 5년에서 최장 20년간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노예의 형벌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미성년자를 강간한 타시에게는 5년간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형벌을 선택하거나로마 추방이라는 관대한 처벌이 내려졌다. 피해자였던 아르테미시아가 사고를 자초한 부분이 있다는 로마 사람들의 가십(Gossip)이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타시가 저지른 추가 범행이 발각돼 결국 1년형의 감옥 형으로 사건은 종결됐다. 강간의 피해자였던 아르테미시아는 돌이킬 수 없는 모욕과 수난을 당했고 그녀의 탁월한 예술적 가능성도 사장(死藏)될 위기에 처했다.
 

수렁에서 건진 내 딸

자포자기 상태에 이른 아르테미시아는 로마의 3류 화가였던 피에란토니오 스티아테시(Pierantonio Stiattesi)에게 팔려가다시피 하는 결혼식을 올린다.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아끼던 한 후원자가 거액의 결혼지참금을 약속하자 빚에 시달리던 피에란토니오가 강간 사건의 피해자인 아르테미시아와 결혼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그동안 타시라는 악한(惡漢)에게 시달렸던 아르테미시아는 이번에는 약삭빠른 남자로부터 철저히 이용을 당한다. 그러나 마땅한 돌파구가 없었던 아르테미시아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성 우월주의 사회가 한 여성 예술가를 파멸로 이끌어가고 있었지만 가련한 아르테미시아로서는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고 하루빨리 로마를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거액의 결혼 지참금을 노리던 약삭빠른 신랑 측에 의해 결혼식은 서둘러 추진됐다. 결혼식 당일에서야 어린 신부 아르테미시아를 처음 본 신랑은 그 미모에 놀랐다고 한다. 부부가 된 두 사람은 서둘러 로마를 떠났다. 결혼식을 올려 새 출발을 했지만 좁은 로마의 뒷골목에서는 아르테미시아의 스캔들이 잦아들지 않았다.
 

이 신혼부부는 1612 12 13, 아픈 기억의 도시 로마를 떠나 메디치 가문의 대공 코시모 2(Cosimo II, 1590-1621)가 통치하던 피렌체 공국으로 이주했다. 신랑 피에란토니오의 부친은 원래 피렌체 출신으로 코시모 2세의 양복 재단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었다. 이제 부부는 피렌체 공국의 시민이 됐고, 아르테미시아는 추문에 휩싸여 있던젠틸레스키란 성을 버리고 로미(Lomi)란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과거의 소문은 조금씩 피렌체 사교계에서 퍼져나갔다. 조용히 은둔하며 작품 제작에만 전념하고 있던 아르테미시아에게 이런 소문의 확산은 이로울 리 없었다. 전전긍긍하며 그림에 몰두하고 있던 아르테미시아의 화실에 뜻밖의 주문이 들어왔다. 메디치 가문의 대공 코시모 2세가 직접 작품 제작을 의뢰한 것이다. 작품 주제는 바로 카라바조가 그렸고 아르테미시아가 아버지 오라치오와 함께 그린 적이 있는
<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였다.5  

 



1615 3 15. 아르테미시아가 운영하던 화실에 20여 명의 귀한 손님들이 전격 방문했다. 메디치 가문의 대공 코시모 2세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의 작품 품평을 위해 피렌체의 명사(名士)들을 이끌고 직접 화실을 방문한 것이다.
 

이것은 로마에서 흘러들어온 타지 출신의 예술가에게 파격적인 대우였다. 피렌체에서 배출된 거장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타지 출신의 예술가들은 피렌체에서 찬밥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Raffaello, 1483-1520)가 피렌체에서 푸대접을 받은 것과 베네치아의 국민화가 티치아노(Tiziano, 1488/90-1576)가 홀대당한 것은 예술의 도시 피렌체가 특유의 자존심을 지킨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피렌체를 통치하던 대공 코시모 2세가 직접 타지 출신의 예술가, 그것도 스캔들에 휩싸여 있던 여류화가의 화실을 직접 방문한 파격을 보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메디치 가문이 인재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이었다. 잠재적인 가능성이 보이면 파격적인 대우를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25살의 젊은 군주였던 대공 코시모 2세는 이미 아르테미시아의 숨기고 싶은 과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군주는 여성화가의 과거나 어두운 기억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르테미시아의 그림 솜씨였다. 아르테미시아의 화실을 전격 방문한 코시모 2세는 아내 마리아 막달레나를 대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 수준의 피렌체 지식인을 함께 데려왔다. 대공과 함께 화실을 방문했던 20명 정도의 피렌체 명사(名士)들 중에는 이제 오십의 나이에 접어든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포함돼 있었고, 17세기 피렌체 화단을 대표하던 화가 크리스토파노 알로리(Cristofano Allori, 1577-1621)도 있었으며, 미켈란젤로의 친조카이자 대학교수였던 네오나르도 부오나로티(Leonardo Buonarotti)도 있었다. 피렌체를 대표하던 모든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산 피에르 마조레 구역의 아르테미시아 화실을 방문한 것이다.

코시모 2세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단검으로 자르고 있는 유디트의 얼굴이 바로 아르테미시아의 얼굴임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그리고 자신을 강간하고 법정에서 온갖 수모를 안겨준 아고스티노 타시의 얼굴이 홀로페르네스의 얼굴로 그려졌음도 알아봤다. 함께 작품을 감상하던 피렌체의 명사들은 홀로페르네스의 잘려진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코시모 2세는 아르테미시아의 작품을 찬찬히 훑어본 다음, 함께 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솜씨보다 더 낫지 않소?”
 

대공 코시모 2세는 이 말 한마디로 아르테미시아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마음에 영감의 불을 댕긴 것이다. 천재화가 카라바조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아르테미시아는 이 말 한마디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딸의 작품이 아버지의 예술 세계를 넘어섰다는 이 격려의 한마디로 아르테미시아의 영감에 불을 지핀 것이다.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의 기대와 실력을 넘어서고 싶었다. 카라바조의 명성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대공 코시모가 피렌체 최고의 지식인들 앞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인정해주는 한마디 격려의 말을 던진 것이다. 코시모 2세는 아르테미시아가 단독으로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에 고액의 사례금을 지불하고 <류트를 켜는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를 추가로 주문함으로써 첫 여성 예술가가 탄생했음을 온 세상에 알렸다. 아르테미시아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창작의 열정에 온 몸을 던질 수 있는 새로운 창조의 영감을 얻게 됐다. 이렇게 그려진 아르테미시아의 명작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는 지금도 메디치 가문의 소유였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어떻게 영감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아버지 솜씨보다 더 낫지 않소?” 대공 코시모 2세의 이 한마디가 아르테미시아를 과거의 아픈 기억에서 끄집어내고 창조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아픈 과거의 기억을 묻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예측하며 사람들 앞에서 인재를 격려해 주었던 코시모 2. 대공의 신분으로 일개 여류화가의 화실을 방문했던 파격과 배려. 아버지 세대의 실력을 넘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단번에 날려준 한마디의 격려. 이런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리더십이 세계 최초의 여성 화가를 탄생시켰다.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14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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