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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11

좌절금지! 망한 가문의 추기경, 교황이 되다

김상근 | 75호 (2011년 2월 Issue 2)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라고 믿는 사람은 순진한 사람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 우리 마음에 큰 위로를 주기 때문에 그렇게 불러보는 것이다. 우리는 싸구려 소파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노래방에서 술 냄새가 배어 있는 마이크를 붙잡고,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며 목 놓아 소릴 지른다. 모름지기 대중가요란 일반 대중의 고단한 현실을 위로하기 위한 도구일 뿐, 그 고단한 현실을 타개할 만한 대안을 제시해주진 못한다. 대중을 위한 베스트셀러도 마찬가지다. 서울 강남에 빌딩을 가진 우리나라의 어떤 부자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그렇게 정말 ‘무소유’로 산 적이 있었던가? 그저 아침마다 붐비는 지하철에서 낯선 사람과 몸을 부대껴야 하는 이 땅의 평범한 이웃들이, 그 책을 읽으며 자신의 무소유를 위로해왔을 뿐. 이 사실을 통감하시던 법정 스님께서 스스로 ‘말빚’을 남기지 않겠다고 작심하시어 유언으로 그 책의 절판을 선언하신 것은 아닐까?
 
모름지기 지금 흐린 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은 무작정 새날이 오고, 쨍하고 해가 뜰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사람, 한 번의 뼈저린 실패로 뒤로 물러서야 했던 사람은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면서 사회부연(死灰復燃, 사그라진 재에서 불이 다시 살아남)과 권토중래(捲土重來, 한번 패배한 사람이 흙먼지를 날리며 다시 재기함)를 노려야 한다. 사노라면 흐린 날을 한숨 속에 보내야 하는 슬럼프에 빠질 수 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설움과 절망의 순간을 맞이할 때도 있다. 그러나 실패의 뼈저린 아픔 속에 처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그 절망의 순간을 견뎌내야 할 것인가? 무엇을 도모하면서 그 설움을 견뎌야 할까? 메디치 가문은 우리에게 설움과 절망의 위기를 극복하는 법을 알려준다.
 
라파엘로의 <교황 레오 10세와 메디치 가문의 추기경>
1494년, 메디치 가문은 갑자기 몰락했다.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사망한 지 채 2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 그 위기가 닥쳤다. 로렌초의 아들이 무능했기 때문이다. 장남 피에로 데 메디치(Piero de’ Medici)는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를 향해 진격하자 미리 겁을 먹고 줄행랑을 쳤다. 가문의 명예와 가족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었다. 돈이 될 만한 값비싼 보석 몇 개를 움켜쥐고 혼자서 야반도주했다. 이런 권력의 공백을 틈타 피렌체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증조할아버지 코시모와 아버지 로렌초가 거액을 들여 수집한 고대 유물과 그들이 후원했던 15세기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모두 폭도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피렌체 사람들은 이제 메디치 가문의 운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후, 르네상스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초상화 작가로 명성을 날렸던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가 작품 하나를 완성했다. 그 작품의 주인공들은 놀랍게도 23년 전에 피렌체에서 쫓겨났던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었는데, 한 사람은 교황의 법복을 입고 있고, 나머지 두 명은 붉은 색 추기경의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이 놀라운 그림의 주인공들은 메디치 가문의 화려한 복귀를 만천하에 알리고 있었다. 이 작품이 바로 라파엘로가 1517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그린 <교황 레오 10세와 메디치 가문의 추기경들>이다.
 

이 작품은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교황 레오 10세는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둘째 아들로, 세속명은 줄리아노였다.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추기경은 루이지 데 로시(Luigi de’ Rossi, 왼쪽에서 관람객을 응시하는 인물)와 줄리오 데 메디치(Giulio de’ Medici)이다. 작품이 제작됐던 1517년에 추기경으로 임명된 루이지 데 로시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아들인 피에로 데 메디치(1416-1469)의 외손자였으며, 교황의 비서로 활동했던 인물이다.1  작품의 오른쪽에 등장하는 줄리오 추기경은 장차 교황 클레멘트 7세(1523-1534년 재위)로 등극할 인물이다. 라파엘로는 이 작품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르네상스를 후원하는 메디치 교황의 모습뿐만 아니라 맡겨진 성직(聖職)을 성실하게 수행하려는 종교적 열망을 정교하게 표현했다.2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교황의 오른 손이 성경의 <요한복음서> 앞부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교황은 <누가복음서>가 끝나고 새로 <요한복음서>가 시작되는 부분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 교황 레오 10세의 세속명은 조반니(Giovanni), 즉 요한(John)이다. 라파엘로는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메디치 가문의 새 교황이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누가복음서>가 끝나고 <요한복음서>가 시작되는 곳에 교황의 손을 올려놓은 것이다. 교황이 직접 두꺼운 돋보기를 들고 있는데 이는 레오 10세가 학문과 독서에 몰두하는 인문학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해서 메디치 가문은 1494년의 위기를 극복하고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피렌체에만 머물러 있던 가문의 영향력은 로마와 이탈리아, 그리고 가톨릭신앙을 신봉하던 전 유럽으로 확대됐다. 메디치 가문은 어떻게 절망과 설움의 순간을 극복하고 교황을 배출한 이탈리아의 명문가로 다시 설 수 있게 됐을까?
 
13살짜리 소년 추기경의 탄생
탁월한 정치 감각을 가졌던 로렌초 데 메디치는 가문의 미래를 위해 장남과 차남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남 피에로 데 메디치에게 더 큰 희망을 걸었다. 첫째 아들은 잘생겼고 활달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피렌체 사람들의 신망이 높았다. 반대로 차남인 조반니는 키가 작고, 뚱뚱하고, 천하에 게으른 골칫덩어리였다. 그러나 혜안을 가진 아버지는 차남에게 호감을 느꼈다. 장남 피에로가 건강한 신체를 가졌다면(메디치 가문에서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차남 조반니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신중한 결정을 내렸다. 첫째 아들은 피렌체에 남아서 메디치 가문을 이끌고, 둘째는 로마로 보내 성직자의 길에 들어서게 한 것이다. 교황의 주거래 은행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교황의 자리에 메디치의 아들을 앉히기 위한 담대한 계획에 착수했다. 물론 이런 원대한 꿈을 꿀 수 있었던 이유는 로렌초의 아내였던 클라리체 오르시니(Clarice Orsini, 1453-1487)가 로마의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대대로 교황을 배출한 전통을 가진 오르시니 가문이 사돈 가문 아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었다.
  
 
로렌초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현직 교황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해서 미래를 도모하는 것. 그리고 둘째는 하루 속히 조반니에게 추기경의 모자를 씌워 주는 것이었다. 우선 추기경이 돼야만 교황선거에 후보로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로렌초는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토스카나 지방의 최고급 포도주를 활용했다. 지금도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토스카나 지방의 키안티(Chianti) 와인을 줄기차게 교황의 식탁 위로 올렸고, 현직 교황이었던 이노센트 8세(1484-1492년 재위)는 로렌초의 선물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았다. 로렌초의 선물은 와인 이상의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전임 교황이었던 식스투스 4세(1471-1484년 재위)와 전쟁까지 불사했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스스로 교황에게 선물까지 바치는 것은 현직 교황인 이노센트 8세에게는 흐뭇하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결국 이노센트 8세와 로렌초는 사돈을 맺게 된다(1488년). 교황과 사돈을 맺는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당시로는 교황이 자녀를 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지탄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로렌초는 사랑하는 딸 막달레나(Maddalena)를 교황의 아들인 프란체스체토(Francechetto)와 결혼시켰다. 로렌초는 이 결혼식에 둘째 아들 조반니를 대동했는데, 그 때 조반니의 나이는 겨우 8살이었다. 로렌초는 딸을 교황의 며느리로 바치면서, 장차 아들도 교회에 바치겠노라고 교황께 충성맹세를 했다. 사돈의 말에 감격했던 교황은 소년 조반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가 13살이 되면 추기경으로 임명해주겠다고 화답했다. 추기경은 법적으로 최소 16살이 돼야 하기 때문에 3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조건이 슬쩍 붙었다. 이렇게 해서 역사상 유래가 없는 13살짜리 소년 추기경이 메디치 가문에서 탄생했다.
 
16살 소년으로 성장한 조반니가 결국 추기경의 붉은 색 모자를 쓰게 됐을 때, 로렌초 데 메디치는 숨을 거두게 된다(1492년). 로렌초는 다가오는 임종의 순간을 느끼면서, 추기경 임명식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로 떠나는 아들에게 장문의 유언장을 썼다. 그는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추기경의 임명은 우리 메디치 가문의 최대 경사”이며 “앞으로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을 위해서 노력을 아까지 마라”고 신신당부한다. 죽음의 문턱에 선 아버지는 장차 가문과 교회의 미래를 이끌고 갈 아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덧붙였다. “지금까지 말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이 한 가지를 반드시 엄숙하게 지키기를 바란다. 제발 아침에 일찍 좀 일어나거라!”
 
절망의 순간에는 사람을 만들어라
아들에게 주는 마지막 유언이 “제발 아침에 일찍 좀 일어나거라”였다니! 죽음의 순간에도 농담을 던질 수 있는 로렌초다운 유쾌한 유언이 아닐 수 없다. 문맥의 의미로 보아 그것은 천성이 게으른 아들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만 가진다면,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한창 여드름이 송송 솟아오르는 16살 소년으로, 로마 교황청의 살벌한 정치판을 헤쳐가야 할 아들에게 주는 격려의 말이었다. 실제로 조반니 추기경은 게으른 성격 외에는 나무랄 것이 없는 똑똑하고 신중한 젊은이였다. 폴리지아노로부터 인문학과 철학을 배웠으며, 또래의 천재 예술가였던 미켈란젤로와 친구사이였고,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메디치 가문의 기대주였다.
 
그러나 조반니 추기경의 첫 출발은 순탄하지 않았다. 추기경으로 임명되던 해에 아버지 로렌초와 사돈이자 교황이었던 이노센트 8세가 연달아 임종하면서 든든한 배경이 사라져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피렌체는 프랑스의 찰스 8세에 의해 점령당했고, 자기 형 피에로가 이끌던 메디치 가문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새로 부임한 보르자 가문 출신의 교황 알렉산더 6세(1492-1503년 재위)는 메디치 가문 출신의 조반니 추기경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소년 추기경은 로마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장기간의 유럽 순례에 오른다. 일단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중요했다. 만약 조반니 추기경이 로마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교황의 아들이자 폭압적인 무력을 휘둘렀던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1475-1507)에게 독살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가 죽었고, 사돈 교황도 서거했고, 믿었던 형은 도망쳤으며, 가문은 문을 닫았다. 말이 로마의 추기경이지, 현직 교황이 목숨을 노리는 가련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무슨 희망이 남아 있을까.
 
놀랍게도 소년 추기경 조반니는 이 절망과 설움의 순간을 서서히 극복해 간다. 다른 또래 아이들이 이제 겨우 사춘기를 지내고 처음 빠진 풋사랑에 몸 달아 있을 즈음에 소년 추기경은 주위 사람들과 함께 미래를 도모하기 시작한다.
 
그는 절망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기 힘으로 메디치 가문의 영광을 부활시키리라는 소망을 간직한 채 한 가지 일에 몰두했다. 그것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었다. 절망의 순간에 소년 추기경은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기로 한다. 앞으로 교황으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아직 본인이 어렸기 때문에 대권을 꿈꾼다면 차차기(次次期)를 노리는 것이 현명했다. 그렇다면 차기 교황으로 선출된 사람을 미리 선택하고 그 사람과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함께 고생하며 미래를 꿈꾸다
로마에서 급히 몸을 피한 조반니는 항구도시인 피사(Pisa)로 말을 몰았다. 사촌 동생인 줄리오(Julio)가 피사 대학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이다. 사촌 동생인 줄리오는 아버지 로렌초의 동생, 그러니까 파치가의 음모(1478년) 때 암살당한 줄리아노의 사생아였다. 동생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자, 그 해에 태어난 불쌍한 유복자를 로렌초는 집안 식구로 받아들였다. 사촌지간인 조반니와 줄리오는 함께 자랐다. 조반니는 사촌 줄리오를 설득해 유럽 여행을 핑계로 은둔할 것을 제안한다. 추기경이 된 사촌 형의 제안을 줄리오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촌 형제의 긴 방랑이 시작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줄리오는 장차 사촌 형 조반니의 뒤를 이어 로마 교황으로 취임하게 된다. ‘로마의 함락(1527년)’을 몸소 겪었던 유명한 교황 클레멘트 7세가 바로 조반니 추기경과 고난의 행군에 참여했던 사촌 줄리오다.
 
장차 교황이 될 이 두 명의 사촌 형제들은 10대 후반의 나이에 아무런 정치적 후원이나 교황청의 신임장 없이 이탈리아와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조용히 미래를 도모한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미래를 꿈꾸던 그들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절망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들은 서로에 대한 우정과 믿음을 키웠고 무엇보다 미래를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세상살이의 이치를 배웠다. 우선 피사를 떠난 그들은 메디치 가문에게 우호적이었던 베네치아를 잠시 방문했고, 다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Maxmillian I, 1459-1519)를 알현했다. 메디치 가문의 똑똑한 두 젊은이들에게 매료된 황제는 네덜란드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자신의 아들 필립 공에게 추천서를 써 준다. 장차 유럽을 이끌고 갈 젊은이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친분을 쌓으라는 배려였다.
 
조반니와 줄리오는 다음 교황으로 선출될 만한 인물을 찾아야 했다. 그 미래의 교황과 친분관계를 확보하는 일이 자신들의 미래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두 소년들은 다시 말을 돌려 제노아 항구로 향했다. 그 곳에 은둔하고 있던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 1443-1513) 추기경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이미 승하한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조카였다. 시스티나 예배당을 건축했고 로렌초 데 메디치를 암살 시도하고 피렌체와 전쟁까지 일으켰던 바로 그 교황의 조카였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원수의 조카와 아들이 제노아에서 만나 화해의 악수를 한 것이다. 유서 깊은 델라 로베레 가문의 줄리아노 추기경와 메디치 가문의 조반니 추기경은 제노아에서 의기투합했다. 삼촌과 부친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과 반목은 모두 잊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지금 공동의 적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줄리아노 델라 로베라 추기경을 로마에서 추방하고,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을 독살하려고 했던 현직 교황 알렉산더 6세가 바로 이 두 사람의 공동의 적이었다.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이제 막 20살이 된 젊은 추기경 조반니 데 메디치에게 완전히 매료됐다. 키가 작고 뚱뚱했지만 날렵한 승마술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어릴 적부터 마상 창 시합과 사냥에 익숙했던 조반니 추기경은 사냥을 좋아하던 줄리아노 추기경과 금방 친해졌다. 인문학적 소양이나 신학 지식과는 거리가 멀었던 줄리아노 추기경으로서는 조반니 추기경의 깊이 있는 학문적 소양을 높이 평가했다. 줄리아노 추기경은 제노아에서 자신의 강력한 지지 세력을 얻게 됐고, 조반니 추기경은 다음 교황으로 선출될 만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인물을 확보하게 됐다. 줄리아노 추기경은 장차 교황 율리우스 2세로 등극(1503-1513년 재위)하게 되고, 조반니 추기경은 그 뒤를 이어 교황 레오 10세(1513-1521년)로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두 추기경과 함께 말을 달리던 줄리오 역시 교황 클레멘트 7세(1523-1534년 재위)로 선출된다.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될 세 명의 젊은이들이 함께 설움과 고난을 견디며 미래를 도모했던 것이다.
 
좌절 금지! 절망과 설움의 기억을 공유하라
악명 높았던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서거(1503년)하고 다음 교황으로 선출된 피우스 3세는 몇 달 만에 다시 세상을 떴다. 그동안 로마에서 좋은 평판을 유지하던 조반니 추기경은 교황의 후보로 간택돼 시스티나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레베(Papal concleve) 현장에서 조반니는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다음 교황으로 선출될 사람을 적극적으로 밀었다. 바로 함께 제노아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절망과 설움의 시간을 견뎠던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었다. 줄리아노 추기경은 부유하고 학문이 뛰어난 추기경 조반니 덕분에 쉽게 교황으로 선출됐고, 율리우스 2세로 취임하게 된다. 율리우스 2세가 교황의 상징인 베드로의 열쇠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삼촌 식스투스 4세가 건축했던 시스티나 예배당을 나설 때, 가장 기뻤던 사람은 아마 다음 교황으로 선출될 것이 확실했던 조반니 추기경이었을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이렇게 사회부연(死灰復燃)과 권토중래(捲土重來)를 이루었다. 절망과 설움의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함께 도모할 사람을 만들며 때를 기다린 것이다. 사노라면 좋은 날이 무조건 오지 않는다. 좋은 날은 좋은 사람과 온다. 특별히 그 사람이 함께 설움과 절망을 견뎠다면, 언젠가는 그 좋은 사람과 함께 쨍 하고 해 뜰 날을 맞이할 것이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등 14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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