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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7

교황과 싸울 때도 그는 지혜와 위엄을 지켰다

김상근 | 67호 (2010년 10월 Issue 2)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위기는 일상적인 현상일 뿐이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위기(危機, crisis)란 ‘어떤 상태의 안정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정세의 급격한 변화’다. 지금도 이런 정의가 유효할까? 위기에 대한 이런 고리타분한 설명은 오래 전에 폐기처분됐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위기는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 항시적인 현상이다. 위기란 특별한 상태가 아니라 우리 삶의 현실일 뿐이다.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작금의 세상에서 위기란 우리 삶의 일부다. 한때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석권했던 GM이 맥을 못 추고 있고, 휴대폰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노키아가 스마트폰 열풍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라.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초경쟁사회에서 위기는 현실의 일상을 반영하는 작은 거울에 불과하다.
 
경영학에서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은 위기 경영(Crisis Management)이라는 세부 전공에서 연구돼 왔다. 흥미로운 것은 위기 경영에 대한 참고 서적들의 출발점이 얼추 비슷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저자들은 ‘위기’의 한문인 ‘危機에 대한 글자풀이로 위기 경영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위기란 위험(, danger)과 기회(, opportunity)가 공존하는 현상이므로, 위기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라고 설명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런 아시아적 해석을 서구의 경영학자들이 더 자주 사용한다는 것이다.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는 우리들에게 이런 아시아적 해석은 식상하단 느낌이 든다. 새로운 맛이 없다. 그렇다면 위기에 대한 그리스식 해석은 어떤가? 위기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crisis)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krisis’인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 동사인 ‘krinein’에서 유래됐다. ‘분리해내다’ 혹은 ‘구별하다’란 뜻이다. 따라서 위기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상적인 현상과의 분리가 필요한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위기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서두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해석이다.
 
위기 상황에 직면한 리더의 대응방식은 그리스식을 따라야 한다. 위기 상황을 무엇인가 특별한 조치가 필요한 상태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위기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리더는 위기 상황 속에서 당황하거나 조급하지 말고, 담담하게 그 위기를 현실로 인정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무엇보다 위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위기가 닥쳐왔다고 해서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리더의 덕목이 아니다. 위기의 강도(强度)가 강하면 강할수록 지도자는 더 냉정을 유지하면서 지성의 힘과 임기응변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15세기 후반, 메디치 가문을 이끌던 ‘위대한 자(Il Magnifico)’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1478년 봄, 가족과 함께 조용히 부활절 미사를 드리고 있을 때, 교황청과 나폴리 왕국의 비호를 받고 있던 파치(Pazzi) 가문의 암살단이 그의 목숨을 노린 것이다. 로렌초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현장에서 동생 줄리아노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로렌초와 메디치 가문은 이 다급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위기 상황에 처한 리더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파치 가문의 역사
18세의 어린 로렌초가 로마 명문가의 규수인 클라리체 오르시니와의 결혼을 서두른 이유는 아버지 피에로 데 메디치가 병으로 위중했기 때문이다.1  피에로는 비록 아버지 코시모의 카리스마와 통찰력을 이어받지 못했지만 조용히 미래를 준비하는 리더의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오르시니 가문과의 통혼(通婚)은 이미 비상(飛上)하고 있던 메디치 가문에 더 튼튼한 날개를 달아 준 것과 같았다. 이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를 완전히 장악하고 이탈리아라는 더 큰 역사의 무대로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중세시대부터 피렌체의 유력한 귀족 가문이었던 파치, 살비아티, 우베르티, 구이디, 토르나퀸치, 부온델몬티 가문 등은 메디치 가문의 급부상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메디치 가문이 로마의 최고 권력과 사돈을 맺자, 이들은 적지 않은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3세기 말부터 등장했던 피렌체의 신흥 ‘부르주아’ 가문인 스트로치, 알비치, 페루치, 피티, 토르나부오니 등도 메디치 가문에 섭섭한 감정을 품게 된다. 메디치 가문이 며느리를 피렌체의 유력 가문에서 얻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그들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은 이탈리아에서도 마찬가지다. 막강한 권력과 엄청난 재력에다, 로마의 정치적 후광까지 입게 된 메디치 가문의 승승장구를 도끼눈으로 지켜보던 가문이 있었다. 15세기 후반 메디치 가문의 최대 경쟁자였던 파치(Pazzi) 가문이었다. 대대로 기사(騎士)를 배출해온 파치가의 사람들은 메디치 타도를 공개적으로 외치며 사사건건 로렌초와 대립하게 된다.
 
파치 가문의 역사는 1088년,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원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무슬림 교도들이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 성을 탈환하기 위해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며 성벽에 올랐던 인물 중에 파초 파치(Pazzo Pazzi)란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파치 가문의 조상이다. 십자군 전사로 혁혁한 무공을 쌓은 파초 파치는 예루살렘의 예수 성묘(聖墓) 교회에서 출토된 작은 부싯돌 3개를 포상으로 받고, 고향 피렌체로 귀환했다. 파치 가문은 자기 조상의 영웅적인 전투를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다. 매년 부활절 기념 초에 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첫 ‘성화’는 파치 가문의 창시자가 예루살렘에서 가져 온 부싯돌로 채화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 부활절 전통이 공식화된 이후 파치 가문은 기사 계급을 배출하는 피렌체의 명문가로 빠르게 성장했다.
 
피렌체 경제가 급성장하던 14세기 중엽부터 파치 가문은 다른 신흥 ‘부르주아’ 명문가처럼 은행업과 모직산업에 진출했다. 덕분에 파치 가문은 피렌체의 가장 부유한 지역인 산 조반니 구역에서 고액 납세자 6위에 올랐다.2 자연스럽게 파치 가문은 메디치 가문이 주도하는 피렌체 정국과 경제 운영에 불만을 품고 사사건건 메디치 가문과 경쟁하는 모습을 보인다. 1478년에 발생한 ‘파치가의 음모’가 추진되기 전인 1460년대와 1470년대의 피렌체 경제는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특별히 메디치 가문과 파치 가문이 서로 경쟁하던 은행업의 이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당시 피렌체 은행업의 연간 수익은 1460년대에 약 62%, 그리고 1470년대에는 약 42%에 달했다.3  과다한 이익이 있는 곳에 과다한 경쟁이 초래되기 마련이다. 그 과다한 경쟁이 초래한 위기가 바로 파치가의 음모 사건이다. 아예 메디치 가문의 수장들을 죽여버리겠다는 암살시도였다. 그러나 사실, 그 위기의 원격 조종자는 멀리 로마에 있던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 1471-1484년 재위)였다.



로렌초를 암살하라
자기 식구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던 교황 식스투스 4세는 교황청의 공식 주거래 은행이었던 메디치 은행을 제치고, 로마의 파치 은행과 거래하기 시작했다. 볼로냐 인근의 이몰라(Imola)라는 작은 도시를 매입해 자신의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 백작에게 넘겨주고 싶었던 교황은 메디치 가문에 대출을 신청했다.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을 운영하던 로렌초는 정치적 이유를 들어 이 대출을 승인하지 않았다.4 그러자 교황은 파치 은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 다음, 메디치 은행을 더 이상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1474년 7월). 그 해 10월, 메디치 가문과 교황청의 갈등과 반목은 더욱 악화됐다. 식스투스 4세가 로렌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측근인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를 피사의 대주교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살비아티는 파치 가문과 인척관계로 얽혀 있었고, 결국 교황청은 다시 한번 파치 가문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대대로 피사의 대주교는 피렌체 정부의 결정에 따라 임명되는 게 관례였는데, 피렌체의 실질적인 영주였던 로렌초의 동의없이 대주교를 임명한다는 것은 로렌초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로렌초는 살비아티 대주교의 피렌체 입성을 금지시킴으로써 교황청과의 불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러자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최후의 결정을 내린다. 파치 가문으로 하여금 메디치 가문의 리더인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암살토록 한 것이다. 거사는 1478년 4월 26일 부활절 아침, 장소는 미사를 드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으로 결정됐다. 교황청의 피렌체 대사였던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도 이 미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 젊은 추기경도 교황의 친척이었다. 원래 로마에서 파견된 용병대장(몬테세코 백작)이 암살을 지휘하려 했으나, 성당에서의 살인이 불경하다는 이유로 갑자기 거사에 불참하겠다고 통보했다. 결국 미사 현장에 투입될 두 명의 사제가 자객으로 지명됐다.
 
1478년, 부활절 아침 피렌체 주성당에서 일어난 일이다. 사제가 부활절 미사의 성체 빵을 들었을 때, “내 칼을 받아라, 반역자여!”라고 고함을 지르며 두 명의 칼잡이가 로렌초와 줄리아노에게 갑자기 달려들었다. 암살단의 일원이었던 베르나르도 바론첼리와 프란체스코 데 파치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줄리아노는 열아홉 곳에 깊은 칼자국을 남기고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다행히 사제들의 공격을 받았던 로렌초는 오른 쪽 귀 아래 부분에 경미한 상처만 입고 성물 보관소로 몸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
 
한순간에 피렌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파치 가문의 암살자들은 거리에서 피렌체 시민들을 선동하며 쿠데타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거사가 추진된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친메디치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줄리아노가 즉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피렌체 시민들은 암살자들에 대한 피의 보복을 외쳤고, 거사에 가담한 파치 가문의 일족들은 한 명씩 처참하게 살해됐다. 현장에서 칼을 휘둘렀던 프란체스코 데 파치는 알몸으로 교수형에 처해졌고, 피사의 주교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도 교수형을 받았다. 분노와 고통 때문이었는지, 처형장에서 살비아티가 프란체스코의 몸을 물어뜯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5
로렌초는 암살의 위기를 모면하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위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암살을 성공시키지 못한 교황 식스투스 4세는 피렌체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노리던 나폴리 왕국의 국왕 페란테(Ferrante, 1423-1494)와 연합군을 결성해 피렌체에 대한 무력도발에 나선 것이다. 피렌체 시민들의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1473년부터 토스카나 지방에 가뭄이 들어 밀의 수확량이 급감했고 빵 값이 폭등하면서 피렌체 시민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그 와중에 로렌초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백주 대낮에 벌어졌고, 급기야 전쟁까지 터지자 민심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부 피렌체 시민들은 차라리 로렌초를 적에게 넘겨주고 전쟁을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주장했다. 피렌체를 통치하던 메디치 가문의 리더십에 중대한 도전이 생긴 것이다.
 
로렌초는 위기 앞에서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암살 기도와 동생의 죽음, 그리고 임박한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서도 리더가 지녀야 할 위엄을 잃지 않았다. 전쟁이 임박한 12월 5일, 로렌초는 피렌체의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십인회’와 사회 각계각층의 주요 인사 40명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전대미문의 위기를 극복할 자신의 위기 대응책을 제시한다. 단 한 번의 감동적인 연설로 내부의 위기의식을 잠재우고, 명쾌한 위기 대응책을 제시한 것이다. 이때 행한 그의 연설문은 거의 유언장의 내용처럼 들릴 정도로 감동적이다.
 
“친애하는 원로 여러분. 위기와 절망에 처한 피렌체를 구하기 위해 이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 우리 피렌체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다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지금, 피렌체가 더 큰 재난에 봉착하기 전에 제 목숨을 걸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폴리로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그토록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들끓는 그곳으로 제가 가겠습니다. 우리 피렌체에 평화를 가져 올 수 있다면, 적의 손에 저를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나폴리 국왕이 우리 도시에서 자유를 뺏아갈 계획이라면, 피렌체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 재앙이 닥치기 전에 제가 먼저 그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겠습니다. 저 혼자서 그 희생을 먼저 감당하는 것이 오히려 영광일 뿐입니다.”
 
로렌초는 이 연설을 마치고 조용히 피렌체를 떠나 피사 부근에서 갤리선을 타고 나폴리로 향했다. 군대나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은 채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든 것이다. 그곳에서 로렌초는 교황청 연합군에서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하던 적장 페란테와 담판을 벌였다. 그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사용했다.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에서 나오는 달변과 문화적 소양으로 상대방을 압도한 것이다. 지성의 힘과 임기응변의 능력으로 본다면, 페란테는 로렌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로렌초는 약 석 달 동안 나폴리에 체류하며 협상에 임했고 최종 결과는 이듬해인 3월 13일에 발표됐다. 놀랍게도 페란테 국왕은 나폴리 왕국과 피렌체 공국의 화친을 선포했고, 교황 식스투스 4세도 평화조약에 동의함으로써, 1478년 봄부터 시작된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의 위기는 1년 만에 완전히 극복됐다.
 
보티첼리의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피렌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는 우피치 미술관이 자랑하는 <비너스의 탄생>과 <프리마베라>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그가 그린 <팔라스와 켄타우로스>란 작품도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합리성과 이성(理性)을 상징하는 지혜와 승리의 여신 팔라스(Pallas)가 반인반마(半人半馬)의 괴물이며 동물적 본능을 상징하는 켄타우로스(Centauros)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있다. 힘깨나 쓸 것 같은 괴물이 연약해 보이는 지혜의 여신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다. 여기서 창을 든 팔라스(‘처녀’란 뜻)는 곧 전쟁과 승리의 여신인 아테나(Athena)를 말한다. 아무리 힘이 센 괴물도 지혜의 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그림이다.
 
이 그림 속에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지혜와 위엄으로 극복한 로렌초에 대한 찬사가 숨겨져 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지혜의 여신 팔라스는 1479년의 나폴리와의 전쟁에서 피렌체를 승리와 평화로 이끈 ‘위대한 자(Il Magnifico)’ 로렌초 데 메디치를 상징한다.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는 그림 속의 항구는 로렌초가 협상을 벌였던 나폴리다. 작품 뒤쪽에 나지막하게 보이는 산은 그 유명한 베수비오 화산일 것이다. 서기 79년, 이 화산이 폭발해 폼페이 최후의 날이 왔던 것으로 유명하다. 작품 속 항구 앞 바다에는 로렌초가 타고 왔을 것 같은 작은 배가 떠있다. 보티첼리는 이 그림을 통해 지성의 힘과 임기응변의 능력, 그리고 리더의 위엄으로 피렌체를 위기에서 구했던 로렌초의 위기경영 리더십을 마음껏 찬양하고 있다. 지혜의 여신 팔라스가 입고 있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겉옷에는 메디치 가문의 문장인 다이아몬드 반지가 새겨져 있다.
 
파치가의 음모 사건과 교황청 연합군과의 전쟁이 초래한 피렌체의 위기를 학문적으로 분석했던 라우로 마르티네스는 로렌초의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가 처해 있던 상황은 적의와 야심을 품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때문에 생존을 위해 민첩하고 교활한 지성, 임기응변의 능력, 그리고 위엄까지도 필요로 했다. 한마디로 천재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이다.”6
 
그렇다. “민첩하고 교활한 지성, 임기응변의 능력, 그리고 위엄”이 리더로 하여금 일상적인 위기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구한다. 민첩한 지성과 임기응변의 능력, 그리고 위엄은 위기에 처한 오늘의 리더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등 14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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