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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마주침’과 ‘헤아림’의 영역을 뛰어넘는 지혜

강신주 | 64호 (2010년 9월 Issue 1)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숙명과도 같은 만남은 누구에게나 한두 번 있을 것이다. 평생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 평생 희로애락을 같이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난 것,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선생님을 만난 것, 혹은 천직이라고 생각되는 직장을 얻은 것 등. 그렇지만 과연 숙명적인 만남, 다시 말해 이미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예정돼 있는 만남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흔히 결혼을 앞둔 사람은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과 애인의 사주를 보려고 한다. 점쟁이가 사주가 좋다고 하면 그는 뛸 듯이 기뻐할 것이다. 혹여 점쟁이가 인상이라도 쓰면 근심어린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수도 있다. 이것은 두 사람 모두 만남에는 어떤 필연적인 법칙이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예정된 만남, 혹은 필연적인 만남을 믿는 속내에는 현재 이루어진 만남에 대한 무의식적인 소망이 하나 있다. 사랑하는 애인을 만났거나,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났거나, 혹은 원하는 직장을 얻었을 때 우리는 모두 이런 만남을 자신에게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너무 소망했던 만남이기에 그것이 우발적인 만남일 수 없다는 식이다. 우발적이라면 지금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만남은 언제든지 막을 내릴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저주스러운 만남은 모두 우발적인 것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암에 걸렸을 때, 밤거리에서 도둑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이런 불행한 만남을 오래된 과거로부터 예정된 만남, 즉 필연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사실 모든 만남과 모든 헤어짐은 우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소망했던 만남에 필연의 아우라를 부여하려고 할지라도, 사실 우리는 지금의 만남이 우발적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숙명이나 운명이란 말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점을 정확히 통찰했던 옛 동양 사람들은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고사성어를 만들어냈다. “만난 것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의미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왕충(王充, 27∼100)이란 철학자가 숙고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땅강아지와 개미가 땅 위를 기어갈 때 사람이 발로 밟고 지나간다. 발에 밟힌 땅강아지와 개미는 눌려 죽고, 발에 밟히지 않은 것은 다치지 않고 온전히 살아남는다. 들판에 불이 붙었을 때 마차가 지난 곳은 불이 붙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며 행초(幸草)라고 부르기도 한다. 발에 밟히지 않은 것, 불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라도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우연히 불이 붙었고, 사람이 길을 가다가 때맞게 그렇게 된 것이다. … 거미가 줄을 쳐두면 날벌레가 지나가다 벗어나는 것도 있고 잡히는 것도 있다. 사냥꾼이 그물을 쳐놓으면 짐승들이 떼지어 달리다가 잡히기도 하고 빠져나가기도 한다. 어부가 강이나 호수의 고기를 그물질하다 보면 잡히는 것도 있고 빠져나가는 것도 있다. 간교한 도적이 큰 죄를 지었어도 발각되지 않기도 하고 작은 죄를 돈으로 면제 받으려다가 발각되는 경우도 있다.
- 논형 <행우(幸偶)>
 
사람의 발에 밟힌 개미는 아마 자신의 운명을 저주할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발에 밟히지 않은 개미는 자신의 운명에 감사할 것이다. 그렇지만 발에 밟히든 그렇지 않든 이것은 모두 우발적인 사건일 뿐이다. 왕충은 마차 바퀴와 잡초의 마주침, 들판을 뒤덮은 화마와 잡초의 마주침, 거미줄과 날벌레의 마주침에서도 사건의 우발성을 직감한다. 물론 이 모든 사례들은 인간의 삶이 우발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이 예기치 않은 마주침에 의해 요동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려는 인간을 깨우치려는 것, 그래서 그들을 삶의 진실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 그것이 바로 왕충의 의도였다. 어쨌든 왕충의 시선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싸늘하기만 하다.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 마주침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것과 마주침이 있을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라고 기쁨의 환호성을 지를 필요도, 후자라고 해서 비통한 심정으로 가슴을 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왕충은 비관주의자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비관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말을 하나 더 들어보자.
 
‘마주침[遇]’이라는 것은 능력을 미리 닦아 두는 것도 아니고 유세할 내용을 미리 갖추어 두는 것도 아니지만 군주의 마음에 우연히 맞게 되기 때문에 ‘마주침’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군주의 마음을 헤아려 유세할 내용을 조절하여 존귀한 지위를 얻었다면 이것은 ‘헤아림[]’이라고 하지 ‘마주침’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봄에 종자를 심고 곡식이 자라나면 가을에 수확하여 거두는 경우나, 어떤 것을 구해 그것을 얻고 일을 해서 그것이 완수되는 경우는 ‘마주침’이라고 하지 않는다. 구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이르고, 하지 않았는데도 일이 저절로 완수되어야 ‘마주침’이라고 이야기한다.
- 논형 <봉우(逢遇)>
 
왕충은 ‘마주침’ 이외에 ‘헤아림’의 영역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마주침’이 나의 의도를 넘어서는 어떤 사건과 만나는 사태를 의미한다면 ‘헤아림’은 나의 의도에 의해 무엇인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사태를 의미한다. 봄에 종자를 심어 가을에 수확하는 것처럼 어떤 것을 구하려고 해서 그것을 얻는 것은 인간의 주체적인 판단과 의지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왕충은 이런 경우를 ‘마주침’이 아니라 ‘헤아림’의 범주에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봄에 종자를 심어 가을에 수확을 기대하지만 이런 기대가 항상 현실화되는 것은 아니다. 예기치 않은 홍수나 가뭄으로 수확은커녕 종자로 쓸 만한 곡식도 거두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헤아림’의 영역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항상 우리가 바라는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헤아림의 영역을 포기하고 마주침의 영역에 철저히 몸을 기대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까?
 
낚싯줄을 호수에 드리우지 않으면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 물론 낚싯줄을 드리웠다고 해서 항상 자신이 원하던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터덜터덜 빈손으로 집으로 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지는 말자. 낚싯줄을 던지지 않는다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불확실한 결과가 충분히 예견될지라도 과감하게 낚싯줄을 던질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잡으려고 했던 물고기를 잡았다고 해서 지나치게 오만할 일도 아니고, 잡지 못했다고 해서 지나치게 비관할 일도 아니다. 지금 왕충은 해묵은 동양의 인생관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하고서 조용히 결과를 기다려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일희일비하지 마라.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망각과 자유: 장자 읽기의 즐거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장자 철학을 조명하고,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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