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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코시모 데 메디치, 최초의 인문 경영자

김상근 | 63호 (2010년 8월 Issue 2)
 
비판의 인문학과 성찰의 인문학
 
인문학 열풍이 거세다. 경영자들 사이에서 인문학 공부가 대세다. 경영학자들이나 전문 컨설턴트들이 도맡아왔던 최고경영자 과정(AMP) 강의에서 인문학 전공자들이 주가를 올리고 있다. 인문경영과 관련한 책도 봇물을 이룬다. 경영자들이 사마천의 <사기>를 읽고, 일정에 바쁜 대기업 임원들이 플라톤의 철학서를 뒤적인다. 정부의 고위 공직자 교육과정에서도 인문학 공부가 필수다.
 
이런 인문학 열풍과 대조되는 쓸쓸한 풍경이 있다. 전통적으로 인문학 연구를 전담해 왔던 대학의 최근 모습이다. 작금의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말 그대로 고사(枯死) 상태다. 이른바 문사철(文史哲)의 쇄락은 부정할 수 없는 대학의 현실이 됐다. 우수한 학생들은 문사철 관련학과를 전공으로 선택하지 않으려고 한다. 기껏해야 심리학 정도가 인문학 위기의 예봉을 피해가고 있을까, 다른 분야에서는 파리만 날리고 있다. 일부 대학에서는 ‘경쟁력 없는’ 인문학과를 폐지하거나 유사 학문끼리의 통폐합을 추진하면서 인문학자들을 아연 긴장시키고 있다.
 
한쪽에서는 인문학이 상종가를 치고 있는데, 왜 다른 쪽에서는 인문학이 폐업 직전까지 간 것일까? 한 언론인은 이른바 ‘인기 없는 인문학’은 ‘비판’을 학문의 목표로 삼는 반면, ‘인기 있는 인문학’은 ‘성찰’을 학문의 목표로 삼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1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실제로 일부 인문학자들은 비판을 위한 비판을 구사하면서 자기 학문분야에 대한 독점권을 지켜나간다. 이들은 ‘인문학적 비판’이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마구 휘두르며, 실상은 상아탑에서 주어진 자신의 밥그릇을 보존하는 데 더 열심이다. 인문학의 인접 학문들이 서로 대화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나는 내 분야 연구에 매진할 테니, 당신은 당신 분야에 대해서만 연구하시고, 여기는 아예 접근하지 마시오! 이런 독선과 대화 단절의 악순환을 거치면서 각 학문분야는 독자적인 학문용어 게임(language game)에만 몰두하게 된다. 결과는 뻔하다. 학문으로 소통하고 봉사해야 할 일반 대중과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마다 하소연 하는 말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학자가 없다는 것이다. 소통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함량이 모자라고 학문적 수련이 충분한 사람은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단다.
 
반면 ‘성찰’을 목표로 삼는 인문학은 인기절정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삶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깊숙한 태클을 거는 이런 질문을 통해 ‘성찰의 인문학’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인간이기에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성찰은 경영자들에게 꼭 필요한 도구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으면서 어떻게 직원들에게 나를 믿고 따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일하면서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고객에게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존경받는 경영자의 기준은 소유하고 있는 부의 규모가 아니라, 인간과 세상과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이다. 인문학적 성찰이 없이는 성공도 제한적이고, 행복도 불안정하다. 인문학적 성찰이 결여된 성공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지위와 돈과 명예가 주는 행복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이며, 표피적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상과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가진 경영자의 행복과 사뭇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인문학적 성찰을 거친 ‘따뜻한 프로페셔널’이 사람과 세상과 시대를 바꾼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거의 최초로 인문 경영자란 평가를 받을 만한 사람이다. 그는 유능한 경영자였고 15세기 이탈리아의 난세를 헤쳐 가던 혜안을 가진 정치가였다. 동시에 인간과 세상과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가진 현자이기도 했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인문 경영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평생에 걸쳐 전문 학자들의 연구를 후원하고, 창조적인 예술가를 지원했으며, 본인 스스로 인문학 공부를 통해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는 참된 경영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탐욕에 이끌린 삶이 아니라 경영을 진실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삶과 연결시킨 최초의 인문 경영자였던 것이다.
 
책과 학문을 사랑했던 코시모
 
유년시절의 코시모는 피렌체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비록 전문적인 학자를 위한 교육 과정은 아니었지만 성인이 되기 전에 이미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랍어를 독해할 수 있었다. 코시모는 유럽 16개 대도시에 메디치 은행의 지점을 거느린 대기업 총수였지만 절친했던 지근(至近)의 친구들은 대부분 학자와 예술가들이었다.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이어받기 전 젊었을 때 꿈은 전 세계를 탐험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중세 시대의 각종 희귀 사본을 수집해 연구·보존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코시모는 학술적 가치가 있는 고문서 수집을 위해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준비했다가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메디치 기업을 이어가야 할 장남에게는 적절치 않다며 아버지는 아들의 계획을 한사코 말렸다. 코시모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는 대신 전문 학자와 필경사를 유럽 각국의 수도원과 동방 비잔틴 제국으로 보내 진귀한 사본을 수집하도록 했다. 코시모는 수집상들에게 진귀한 필사본의 경우 금액에 상관하지 말고 무조건 구입하라고 지시했다. 끝까지 매각을 거부하는 곳에는 피렌체에서 파견된 필경사들이 사본을 베낄 수 있도록 허락을 청하는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코시모는 베스파시아노(Vespasiano da Bisticci, 1421∼1498)라는 유명한 출판업자를 고용해서 총 45명의 전문 필경사들이 세계의 진귀한 문서를 사본에 옮겨 적도록 했다.
 
코시모는 유럽과 비잔틴 제국의 여러 수도원에서 어렵게 수집한 진귀한 고문서들을 보관할 독립적인 도서관을 건축했다. 1443년에 준공한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 내부에 메디치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학술적 가치가 있는 고문서를 보관할 도서관을 포함시킨 것이다. 신예 건축가 미켈로초가 건축한 이 도서관(Bibliotecha Marciana)은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에 의해 이전, 확장됐고 결국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바탕으로 지금의 유명한 메디치 가문의 도서관(Bibliotecha Mediceana-Laurenziana)으로 발전하게 된다.2
 
 
로마교황청이 자랑하는 바티칸 도서관(Bibliotheca Apostolica Vaticana)보다 무려 30년이나 앞섰던 메디치 도서관은 15세기 피렌체 르네상스의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물이었다. 코시모가 모든 경비를 대 건축한 이 도서관에서 고대 그리스·로마 사상이 재발견됐으며, 전성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의 철학적 기초가 정립됐다. 코시모가 고용했던 메디치 도서관의 초대 관장은 토마소 파렌투첼리(Tommaso Parentucelli, 1397∼1455)란 신학자였다.3  그는 후에 니콜라스 5세(Nicholas V, 1447∼1455년 재위)란 법명으로 교황에 취임하게 된다. ‘인문주의자 교황(Humanist Pope)’으로 알려진 니콜라스 5세는 자신이 관장으로 재직하던 메디치 도서관을 모방해 로마에 바티칸 도서관을 설립했다.4
 
플라톤 아카데미의 설립
 
인문 경영의 선구자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는 기존 지식 체계를 보존하는 데만 관심을 둔 게 아니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생각의 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시대와 운명을 함께 걸 수 있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만들기 위해 능력이 출중했던 인문학자들을 지원하는 동시에 자신도 인문학적 성찰을 거듭한다. 그는 15세기 중엽 유럽에서 ‘새로운 지식’으로 부상하고 있던 플라톤 철학체계에 주목하게 된다. 당시 유럽과 이탈리아의 지식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토머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로 대표되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기조는 현상에 대한 분석, 사물의 관찰,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였다. 그런데 코시모는 초월적 사고, 감성적 직관, 창조적 영감을 중시하던 플라톤주의에 주목했다. 코시모는 동방 비잔틴 제국에서 온 그리스 철학자 게미스토스 플레톤(Gemistos Plethon, 1335∼1452)을 초청, 자신의 저택에서 플라톤에 대한 강연을 듣는다. 강연 제목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차이에 대하여’였다.5  강연을 흥미 있게 들은 코시모는 플레톤과의 대화에서 플라톤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길러내던 플라톤 아카데미(Academia Platonica)에 관심을 갖게 된다.  
 
코시모는 플라톤의 사상이 바로 자신이 찾던 새로운 시대를 견인할 새로운 생각의 틀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플라톤 아카데미의 부활을 선언하고 즉각 실행에 옮긴다. 피렌체 외곽 성벽과 인접한 한적한 시골마을 카레지에 별장을 신축하고, 이탈리아에서 부활한 플라톤 아카데미의 운영 책임을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에게 맡겼다. 플라톤 아카데미 건물의 신축은 코시모가 총애하던 건축가 미켈로초가 맡았다. 피치노의 주도로 플라톤 아카데미가 본격적으로 연구 활동을 시작한 것은 1459년부터다. 코시모는 피치노에게 플라톤 아카데미와 카레지 별장을 운영하는 원칙을 제시했다. 그것은 단 하나, “당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시오”였다.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코시모의 파격적인 후원에 힘입어 플라톤의 전집을 그리스에서 라틴어로 번역해내는 일을 완수했다. 그동안 부분적으로 이해돼 왔던 플라톤의 모든 사상체계가 조직적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 분석의 틀이 마련됨으로써 르네상스 운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전성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의 초월적이며 신비적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모두 피치노의 신플라톤주의 미학에 기초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라톤 아카데미의 소장 피치노와 함께 동료 인문 학자였던 크리스토포로 란디노, 폴리지아노, 피코 델라 미란돌라 등은 코시모와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카레지 별장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플라톤의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면서 밤을 지새우곤 했다.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와 같은 불세출의 예술가들도 자주 이곳을 찾아 와 코시모와 정다운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날 카레지 별장을 방문한 코시모는 피치노가 피렌체로 출타한 것을 알고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어제 카레지 별장으로 왔네. 이곳에 있는 정원을 경작하러 온 게 아니라, 내 마음을 경작하기 위해 왔다네. 마르실리오, 가능하면 빨리 이곳으로 돌아오게나. 서둘러 오더라도 자네가 번역한 플라톤의 책을 가져오는 것은 잊지 말게. 정말 무엇이 나를 가장 큰 행복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라네.”6
 
생애 말년에 접어든 코시모는 아예 카레지에 거주하면서 긴 침묵과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그가 최후의 임종을 맞이한 곳은 피렌체의 화려한 궁궐이나 성스러운 성당이 아니라 학자들, 예술가들과 함께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던 카레지 별장이었다. 학자와 예술가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최후의 시간을 보내는 전통은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와 그의 손자 로렌초에게도 이어졌다. 15세기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들은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학자와 예술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임종을 맞이했다.
 
코시모의 인문 경영이 주는 시사점
 
코시모가 예술가를 후원하고 플라톤 철학을 연구하던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파격적으로 지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는 틈만 나면 피렌체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학자와 예술가들과의 철학적인 대화를 즐겼을까? 그는 전 유럽으로 확장돼 가던 메디치 은행을 경영하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이었다. 코시모의 외교정책은 15세기 유럽의 모든 국가에 영향을 미쳤을 만큼 중요했다. 그의 집무실에는 정확하게 판단하고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야 할 문건들이 늘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 왜 카레지로 찾아가서 피치노에게 “무엇이 나를 가장 큰 행복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지”에 대해 묻곤 했을까?
 
물론 코시모의 속내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증거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평소 짧은 대화조차 아꼈던 그는 단문(短文)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유명했으니, 그런 기록을 남겨 놓았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시대의 상황과 남아 있는 자료를 동원해서 추측해 보는 것이다. 코시모가 인문경영을 중요시했던 이유는 아마 아래 두 가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째, 코시모는 중세시대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한계를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철학, 윤리학, 정치학, 과학, 의학의 분야에까지 확대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쉽게 요약할 수 없지만, 그 방법론은 의외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현상에 대한 분석, 사물의 관찰, 이성적 판단을 중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과학적 근거를 대며 구체적인 숫자로 계량화되는 사고가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코시모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기초해 엄밀한 인과관계와 논리적 귀결을 따지는 과학적 기업 경영에 한계가 있음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코시모는 거대한 메디치 기업을 이끌면서 인간과 경영의 진정한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초월적 사고, 감성적 직관, 창조적 영감으로 가득한 플라톤 철학에서였다. 현자의 이미지를 물씬 풍기는 그의 삶과 사상은 초월적 사고, 감성적 직관, 창조적 영감으로 가득 찼다. 그는 비잔틴 철학자로부터 배운 플라톤 철학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완벽하게 재구성했던 플라톤의 전집을 읽으면서, 인간과 경영의 가치를 초월적 사고, 감성적 직관, 창조적 영감에서 찾으려 했다. 이른바 ‘창조경영’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21세기적 기업 환경의 요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우리 경영자들이 인문학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초월적 사고, 감성적 직관, 창조적 영감이 중요한 시대가 다시 도래했기 때문이다. 전대미문의 혁신을 추구하는 창조경영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플라톤적 사고다. 생각의 영역을 잘게 쪼개 계량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하고 뒤섞는 것, 이성의 시대가 가고 감성의 시대가 왔다는 시대정신에 대한 통찰, 합리적 분석보다 체험적인 영감을 추구하는 창조경영의 시대에는 플라톤적 사고가 제격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따르던 중세 스콜라 철학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부상하던 플라톤주의를 후원했던 코시모의 시대적 판단의 이유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코시모의 인문 경영은 우리 경영자들이 이 시대에 본 받아야 할 인간과 세상과 시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두 번째 코시모가 인문경영을 시도한 이유는 앞에서 인용했던 마르실리오 피치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언제나 무엇이 그를 가장 큰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코시모는 돈과 권력을 추구하던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했던 기업가였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돈과 권력을 많이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과 권력의 유무를 행복의 척도로 간주한다. 그러나 돈과 권력은 행복해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행복 그 자체는 아니다. 큰 기업을 소유하고, CEO로서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임원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모두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인데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을 행복 자체로 착각하곤 한다. 코시모는 별장의 정원을 경작하러 카레지로 온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밭을 경작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인문경영의 아버지 코시모 데 메디치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 발견하는 행복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고, 그것을 위해 기업을 경영하던 사람이었다.
 
사실 인문학적 성찰은 오늘날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위기 상황에 대해 결정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매 순간 내려야 하는 일상적인 선택에도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 역사학자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란 닥쳐 올 미래에 기민하게 대처할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혜롭게 사는 방식을 가르친다고 말했다. 인문학적 성찰은 경영자에게 분기별 실적보고와 같은 단기적인 일희일비(一喜一悲)를 가르치지 않는다. 인간과 세상과 시대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인문경영자는 절대행복을 위해 내면을 성찰하는 사람일 뿐이다.
 
예술가를 후원하고 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한 내면의 성찰을 인생의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던 코시모는 카레지 별장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피렌체에 거대한 저택도 있었고 풍경이 더 빼어난 별장도 수없이 많았지만, 코시모는 플라톤 아카데미가 있던 카레지의 작은 별장을 임종 장소로 택했다. 코시모가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며 최후의 숨을 몰아쉬던 침상 곁에 서서 그의 마지막을 지킨 사람은 마르실리오 피치노였다.
 
피치노는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해주고, 자신의 학문을 파격적으로 후원해 주었던 코시모의 생애에 대해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나는 두 명의 아버지를 두었다. 한 명은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의사(Medico)였고, 또 다른 아버지인 코시모 데 메디치는 내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이다. 나는 플라톤에게 큰 빚을 졌지만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진 빚도 그에 못지않다. 나는 플라톤을 통해 덕성(Virtu)을 개념적으로 배웠지만, 코시모를 통해서는 그의 삶 자체를 통해서 배웠다.”7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연세대 김상근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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