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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2>

與民同樂: 몸을 낮춰 대중의 편에 서다

김상근 | 57호 (2010년 5월 Issue 2)

 

유약겸하(柔弱謙下)와 여민동락(與民同樂)
메디치 기업은 후발주자였다. 원래부터 귀족 가문으로 출발한 것도 아니고, 비즈니스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도 아니었다. 피렌체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귀족 가문과 부호(富豪)들의 견제가 살벌할 만큼 극심했다. 어느 사회에서나 기존 체제를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은 새로운 세력의 진입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14세기 말, 피렌체의 분위기는 더욱 그랬다. 말이 공화정이지 실제로는 귀족 명문가들(Grandi)이 피렌체 정치와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메디치 가문과 같은 신규 시장 진입자에게는 여러 규제와 견제장치가 가동되고 있었다. 피렌체의 변두리 시골 마을인 무젤로(Mugello) 출신의 메디치 가문의 수장 조반니 디 비치는 바짝 몸을 낮추며 강자와의 경쟁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유능하나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뒤로 물러설 것! 온화하게 몸을 낮추며 조용히 처신할 것! 이러한 유약겸하(柔弱謙下)가 메디치 가문이 세상을 열어가던 첫 번째 원칙이었다면, 1  언제나 대중의 편에 서서 피렌체 시민들과 함께 한다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신이 메디치 가문의 두 번째 신조였다. 2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고, 피렌체 시민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추진하지 않았다. 메디치 가문은 늘 ‘옳은 일을 하는 것(Do the right thing)’을 기업 경영의 대원칙으로 삼았다. 옳은 일이란 언제나 ‘대중이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대중이 원하는 일이라면 손해 보는 일도 했고, 대중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이익도 과감히 포기할 줄 알았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의 행적이 피렌체의 역사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부터다.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시 말하면, 별 볼 일 없는 집안이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중세시대가 막바지로 접어들던 12세기 후반부터 피렌체 역사에 등장한 메디치 가문은 어느 때부터인가 독자적인 가문의 문장을 사용했다. 그 문양의 의미를 살펴보면 가문의 초기 실상이 드러난다.
 
방패처럼 보이는 패널에는 여섯 개의 둥근 공(palle)이 박혀있다. 3  이 공을 환약(丸藥)으로 보는 첫 번째 견해가 있다. 영어로 의술(醫術)을 메디신(Medicine)이라고 하는데 메디치(Medici)와 같은 뜻이다. 메디치 가문의 조상들이 의약(醫藥) 관련 직종에 종사했다고 보고 가문의 문장에 새겨진 둥근 공을 환약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지금과 달리 중세 말기 유럽에서 의사 혹은 약사는 비교적 낮은 계층에 속했다. 메디치 가문을 의약과 관련된 집안으로 해석하는 것은 메디치 가문의 딸로 프랑스 왕실에 시집을 간 카테리나 데 메디치(Caterina de’ Medici) 때문이다. 프랑스 왕실 사람들은 이탈리아에서 시집 온 카테리나가 왕실 귀족가문 출신이 아니라고 트집을 잡았다. 카테리나가 이탈리아라는 적대국가에서 온 신분이 낮은 여자라고 깔보기 위해 메디치 가문의 문장을 환약으로 간주했다. 4 물론 메디치 사람들은 이런 견해를 가문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다.
 
두 번째 견해는 문장에 박힌 공이 환약이 아니라 동전을 상징하다는 것이다. 메디치 기업의 주력회사였던 메디치 은행은 원래 작은 환전상에서 출발했다. 피렌체의 환전상들은 건물 간판에 동전 모양을 새겨 넣고 장사를 했기 때문에 이런 광고판이 자연스레 가문의 문장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가장 개연성이 높은 해석이다.
 
마지막 세 번째 해석은 16세기 후반에 등장했다. 문장에 새겨진 공이 환약이나 동전이 아니라 방패에 찍힌 여섯 개의 철퇴 자국이란 설이다. 코시모 1세로부터 시작되는 16세기 중엽의 메디치 가문은 자신들을 피렌체의 대공(Grand Duke), 즉 통치자(왕족) 가문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해 가문의 출발점을 강력한 무공과 힘을 가진 장군의 이미지와 결합시켰다. 서기 800년의 황제 대관식을 통해 유럽의 신성로마제국 시대를 열었던 샤를마뉴(Charlemagne, 찰스 대제, 742814)의 충성스러운 군인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Averardo de’ Medici)와 연관된 전설이다. 황제의 명을 받은 아베라르도는 유럽의 천하통일을 위해 이탈리아 피렌체 인근의 무젤로 지역으로 출정했다. 거인 괴물이 자주 출몰해 주민들을 괴롭힌다는 보고를 받은 아베라르도는 그 거인 괴물과 일대 일 결투를 벌였다. 거인은 거대한 철퇴를 휘두르며 공격했지만 아베라르도는 방패로 이를 막으며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생긴 방패의 철퇴 자국이 바로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되었다는 해석이다. 메디치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아베라르도는 거인과의 싸움에서 승리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철퇴 자국이 박힌 방패를 무젤로 지역에 정착한 메디치 가문의 문장으로 승인했다고 한다.
 
가문의 문장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는 메디치 가문의 첫 출발은 평민에 불과했던 약제상이었거나 환전상 아니면 용병으로 활약한 군인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도 메디치 가문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예견할 만한 고귀한 직업이 아니다. 귀족 가문도 아니었고 더더구나 왕족과는 거리가 먼 한미한 집안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평범한 집안이 세계 최고의 부를 축적하고, 교황과 프랑스 왕비를 각각 두 명씩이나 배출하는 위대한 가문으로 도약할 수 있었을까?
피렌체 역사에 등장하는 초기의 메디치 가문
피렌체 도심에서 35번 고속도로(A1)를 타고 북쪽으로 30분쯤 달리면 무젤로란 작은 산간 마을이 나온다.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메디치 가문이 원래 거주했던 곳이다. 그들은 13세기에 무젤로를 떠나 피렌체로 이주했다. 현존하는 13세기 후반의 피렌체 기록에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 환전상으로 일했다는 간단한 언급이 보인다. 환전업은 은행업의 초기 형태지만 13세기 메디치 가문의 환전업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구(舊) 시장’이란 뜻의 메르카토 베키오(Mercato Vecchio)에서 작은 탁자를 펴놓고 오가는 시민들을 상대로 푼돈을 바꿔주는 보잘 것 없는 비즈니스였다. 거의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1314세기의 피렌체 은행업은 바르디(Bardi), 페루찌(Peruzzi), 아치아올리(Acciaiuoli) 가문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 명문 귀족집안 출신의 은행가들은 피렌체에 본점을, 각 유럽 도시에 지점을 개설하고 있었다. 피렌체 내부에서만 환전업을 경영하던 메디치 가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소득을 올렸다. 피렌체 시내에서의 환전업도 스트로찌(Strozzi), 리치(Ricci), 알비찌(Albizzi), 귀다로티(Guidalotti)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피렌체의 은행업자나 환전업자는 모두 아르테 델 캄비오(Arte del Cambio)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다. 14세기 중반의 메디치 환전상 대표는 이 은행가 길드에 기본 회비인 1플로린 5 을 납부했다. 그러나 대표적인 명문 은행가였던 페루찌 가문은 18 플로린을 납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6  메디치 가문의 미미한 출발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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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후반까지도 메디치 은행은 별 볼 일 없는 환전상에 불과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기록도 남아있다. 1364년, 피렌체는 인근 도시국가인 피사(Pisa)와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군자금 마련을 위해 모든 피렌체 시민들은 재정 상태에 따라 가구별로 분담금을 납부했다. 총 20 가구로 구성되어 있던 메디치 가문은 모두 304플로린을 납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스트로찌 가문은 무려 2063 플로린을 부담했다. 메디치 가문이 납부한 304 플로린도 그 자세한 내막을 살펴보면 딱하기만 하다. 메디치 가구 중에서 최고액을 납부한 가구는 58플로린인 반면 피렌체의 다른 부자 가문이 납부한 개별 가구의 최고액은 640플로린이었다. 메디치 가문에 속한 몇몇 가구는 기본 납입금인 2플로린을 내기도 했다. 이것은 피렌체 시민의 최하위층을 형성하던 모직공장의 직공 하층민들이 내는 수준에 불과했다. 7
 
신속하고 과감했던 모직산업 진출
이렇게 미미한 출발을 했던 메디치 가문은 15세기 초부터 서서히 피렌체의 유력 기업가로 부상한다. 15세기 초 피렌체의 산업은 모직직조 상공인 길드(Arte dei Lana)와 모직 매매업자 길드(Arte di Calimala)가 주도하고 있었다. 1406년, 알비찌 가문의 주도로 피렌체가 피사(Pisa) 항구를 점령함으로써 지중해와 대서양으로 직접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해로가 개척되었고, 이것이 피렌체 모직 산업 발전의 분기점이 되었다. 안정적인 수출입의 물류가 확보되었으며, 때마침 유럽의 인구증가로 의류 산업이 붐을 타고 있었다. 흑사병으로 급격하게 감소했던 유럽의 인구가 빠른 회복세를 보이면서 사람들은 입을 옷이 필요했다. 피렌체 상인들은 영국과 네덜란드 지역에서 양모를 수입해서 염색·가공한 옷을 만들어 전 유럽으로 되파는 무역업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1397년에 메디치 은행의 문을 열었던 조반니 디 비치는 재빨리 두 개의 모직 공장을 인수하고 모직직조 상공인 길드에도 가입했다. 은행과 모직공장이라는 두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메디치 기업의 모태가 탄생한 것이다.
유약겸하(柔弱謙下)로 견제를 피하다
메디치 기업은 후발 업체였다. 은행업과 모직산업에 뛰어들었지만 이미 시장의 기득권은 다른 귀족가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른바 시장 개척자(Market Pioneer)나 최초 시장 진입자(Early Market Entrant)가 아니라 후발 시장 진입자(Late Market Entrant)에 불과했다. 엄청난 시장 진입장벽이 메디치 기업 앞에 놓여 있었다. 이제 막 새로 태동하고 있던 서구 자본주의의 물결을 타고 은행의 문을 열고 또 모직 공장도 인수했지만, 시장의 기득권을 쥐고 있던 피렌체 귀족 명문가들은 도끼눈을 뜨고 메디치 가문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조반니 디 비치는 유약겸하(柔弱謙下)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했다. 피렌체의 권력과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던 기존 명문가와의 경쟁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피렌체에서 돈 꽤나 번 사람들은 공직에 나가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렸다. 금력은 권력과 상통하는 것이 15세기 피렌체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조반니 디 비치는 가급적 공직에 나서지 않았다. 공직을 권하는 사람들이 애걸하다시피 해도 그는 손사레를 치며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억지로 공직을 맡기도 했지만 중요한 결정은 내리지 않고 모든 것을 다른 귀족명문가 사람들에게 위임했다. 이제 막 시장과 정치판에 얼굴을 내민 사람이 단호한 결정을 내리면 이해가 얽혀있는 살얼음판 같은 상황에서 잡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조반니 디 비치는 차라리 무능하단 소릴 들을지언정 다른 귀족명문가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쥐 죽은 듯이 납작 엎드려 자신의 때를 기다린 것이다.
 
조반니 디 비치의 유약겸하(柔弱謙下)는 메디치 가문의 한 조상이 30여 년 전에 개입했던 정치적 사건과 연관이 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귀족명문가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주목과 견제를 받고 있었다. 14세기의 인물인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Salvestro de’ Medici)란 조상의 전력 때문에 메디치 가문은 일종의 연좌제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살베스트로는 1370년과 1378년에 각각 피렌체의 곤팔로니에레(Gonfaloniere)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곤팔로니에레는 총통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8명으로 구성된 피렌체 원로원의 대표를 겸하는 자리다. 이 원로원은 ‘8인 위원회(Eight Priors)’라고도 불리는데, 그 중 6명은 피렌체의 중요한 길드(Arti Maggiori)를 각각 대표하며 전통적으로 귀족 명문가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했다. 즉, 곤팔로니에레는 피렌체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리였다. 8  그런데 이 곤팔로니에레 직에 임명된 메디치 가문의 살베스트로가 1378년에 발발한 ‘치옴피의 반란(Revolt of Ciompi)’ 때 피렌체 민중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무장 봉기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피렌체에서는 도시가 인정한 길드의 회원이 되었을 때만 그 직종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각 길드가 정치적 대표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관리로 등용되기 위해서는 길드에 가입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었다. 이런 길드에 가입할 수 없는 단순노동자들을 피렌체에서는 치옴피(Ciompi)라고 불렀다. 이들은 당시 피렌체의 주력산업을 이끌던 모직 매매업자 길드(Arte della Lana)에 주로 소속되었으며, 천을 직조하고 염색하는 단순노동자들이었다. 치옴피들에게는 길드를 조직할 법적인 권리가 없었다. 모직 조합의 고용주들이 예고없이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이른바 피렌체 노동시장의 약자들이었다. 이들은 1378년에 무장 폭동을 일으켜 길드에 준하는 향상된 처우를 받게 된다. 이것을 ‘치옴피의 반란’이라고 부른다. 폭동을 일으킨 치옴피들은 미켈레 디 란도(Michele di Lando)를 새로운 곤팔로니에레로 선출하고 피렌체 정부청사를 무력으로 접수했다. 그러나 치옴피의 반란은 채 몇 주를 넘기지 못하고 무산된다. 피렌체의 가장 강력한 정치경제 집단이었던 모직 조합에서 반대하고 나서자 치옴피들의 처지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메디치 가문에 속했던 살베스트로가 치옴피의 반란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는 점이다.
 
치옴피의 반란 이후, 그러니까 14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정치적 역량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14세기 말부터 피렌체의 강력한 통치자 가문으로 부상하고 있던 알비찌 가문은 메디치 가문의 전력을 잘 알고 있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메디치 가문을 견제했다. 조반니 디 비치는 치옴피의 반란에 참여했던 친척 살베스트로 때문에 정치적 견제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처신으로 일관했다. 조반니 디 비치가 1421년에 곤팔로니에레로 피선되었을 때 알비찌 가문과 함께 피렌체를 장악하고 있던 명문가 출신의 니콜로 다 우짜노(Niccolò da Uzzano)는 조반니 디 비치가 살베스트로의 전철을 밟아 피렌체 하층민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앞장 설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제비뽑기로 선출된 공직자 조반니 디 비치는 유약겸하(柔弱謙下)의 전략을 선택했다. 이른바 도광양회(韜光養晦)를 통해, 빛 속에서는 정체를 숨기고 어둠 속에서는 실력을 기르는 태도를 견지한 것이다. 조반니 디 비치 다음 세대의 특징인 예술가나 학자 후원도 추진하지 않았다. 피렌체 귀족 명문가들의 주목을 받은 행동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유럽의 각 도시에 메디치 은행의 지점을 하나 둘 소리없이 늘려갔다. 바짝 엎드려 메디치 가문의 시대가 올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렸다.
 
여민동락(與民同樂)으로 사람 마음 얻다
1422년, 피렌체와 밀라노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밀라노를 통치하던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Filippo Maria Visconti, 1392-1447)는 피렌체와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남하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피렌체의 영토로 침공했고, 피렌체 정부는 이에 대항하여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밀라노의 팽창주의에 맞섰다. 5년간 지속된 이 전쟁은 결국 피렌체의 승리로 끝났지만 용병에 의존했던 피렌체 정부는 엄청난 규모의 전쟁부채를 안게 되었다. 무려 420만 플로린이라는 국가의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피렌체 정부는 조세 원칙을 바꾸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까지만 해도 피렌체의 세금 징수 원칙은 각 개인의 수입에 대한 추정을 근거로 매겨졌다. 당연히 이 추정의 원칙은 지주계급인 명문가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땅이나 건물에 대한 세금이 아니라 금전적인 수익에 대한 세금이었으므로 이 조세원칙의 희생자들은 피렌체의 일반 대중(popolo minuto)이었다. 고소득 자영업자에게 유리하고 유리 어항처럼 투명한 일반 월급쟁이들에게 불리한 요즈음의 세금제도와 닮았다. 엄청난 금액의 전쟁 채권에 허덕이던 피렌체 정부는 추정의 원칙을 포기하고, 대신 등록의 조세원칙을 새롭게 제안했다. 이것은 소유 재산(부동산 포함)을 모두 등록하게 한 뒤 등록 목록을 근거로 세금을 매기는 방식이다. 물론 새롭게 제안된 등록 조세 원칙은 땅과 건물, 그리고 사업체를 소유한 귀족 명문가를 겨냥한 것이었다. 피렌체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던 명문가 귀족들과 부호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이 새로운 원칙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기업가 한 사람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등록의 원칙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기 시작했다. 바로 메디치 가문의 조반니 디 비치였다. 피렌체 시민들은 그동안 숨죽이며 자중자애(自重自愛)하던 메디치 가문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알비찌와 우짜노 가문에 눌려 숨죽이는 세월을 보내던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 일반 시민들의 편에 서서 새로운 조세 정책을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은 시민들에게서 나온다는 공화정 원칙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피렌체 사람들의 마음이 차차 메디치 가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피렌체 하층민들의 애환을 이해했던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 조세제도의 모범을 통해 한층 더 시민들 편에 다가섰다. 그때부터 피렌체 사람들은 믿기 시작했다.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피렌체 시민들과 여민동락(與民同樂)한다고. 언제나 피렌체 서민들 편에 서고, 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을 가문의 목표로 삼는다고. 메디치 가문과 기업의 인기가 하늘 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동서고금의 진리
21세기 중국은 세계 경제를 주름잡으며 욱일승천(旭日昇天)하고 있다. 박재희 민족문화컨텐츠연구원장은 중국 공산당이 지난 30여 년간 지켜온 도광양회(韜光養晦)를 그 비결로 꼽았다. 9 빛을 감추고(韜光) 어둠 속에서 힘을 길렀던(養晦) 중국의 노력이 이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납작 엎드려 때를 기다렸던 메디치 가문의 시장진입 노력과 유사하니 동(東)과 서(西)가, 고(古)와 금(今)이 크게 다를 바 없다.

 

후발 주자였던 메디치 가문은 유약겸하(柔弱謙下)의 처신으로 난세를 극복했다. 동서고금의 변치않는 진리가 또 있으니, 바로 대중의 편에 서는 것이다. 옳은 일을 해야만(Do the right thing), 기업도 지속가능하다. 그 지속가능을 도모하는 기업은 메디치 가문처럼 여민동락(與民同樂)해야 한다. 피렌체 시민을 위하고, 그들과 기쁨을 함께 했던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이렇게 새로운 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연세대 김상근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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