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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리더십 집중 해부-2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김영수 | 46호 (2009년 12월 Issue 1)
통일 전의 진나라
중국사를 크게 구분할 때 흔히 쓰는 용어로 ‘선진(先秦)’이라는 말이 있다. ‘진(秦)나라 이전’이라는 뜻이다.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를 기점으로 중국사를 그 이전과 그 이후로 크게 나누는 말이다. 그만큼 중국사에서 진나라의 통일이 갖는 의미는 크다.
 
통일제국 이전의 진은 당초 서쪽 변경에 치우쳐 있던 보잘것없는 부족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기원전 771년 주(周)나라 유왕(幽王)이 자신이 아끼는 애첩 포사를 웃기려고 봉화 놀이를 즐기며 정실을 내쫓고 태자를 폐위시키려다 견융(犬戎)과 신후(申侯)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듬해 유왕의 아들 평왕은 동쪽 낙양으로 도망치듯 도읍을 옮겼다. 이때 진의 양공(襄公)은 군대를 파견해 평왕을 호위토록 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진은 중원의 다른 제후국들과 같은 제후 반열에 끼게 됐다. 이로써 진은 주(周) 중원(中原)의 선진 문물을 접하고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어 기원전 7세기 중반에 즉위한 목공(穆公)은 획기적인 인재 기용 정책으로 일약 강자로 급부상했다. 목공은 춘추시대를 대변하는 이른바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서 국제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목공 때를 전후로 진은 서방의 융족을 평정하고 강역을 크게 넓히는 등 의욕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목공 이후 진은 전국시대 중반기까지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채 부침을 거듭했다. 그러다 기원전 361년 21세의 패기만만한 효공(孝公)이 즉위하면서 또 한 번의 전기를 맞이했다. 효공은 과거 목공이 실천했던 과감한 인재 기용 정책을 벤치마킹하여 즉위하자마자 천하를 상대로 유능한 인재를 후한 조건으로 초빙한다는 ‘구현령(求賢令)’(또는 ‘초현조[招賢詔]’)을 발표했다. 소국 위(衛)나라 출신으로 당시 강국으로 군림하던 위나라에서 푸대접받던 상앙(商)이 효공의 구현령에 고무되어 진나라로 건너왔다. 천하 제패의 야망을 품고 진나라를 전면 쇄신할 인재를 애타게 찾던 효공과 풍운의 개혁가 상앙은 이렇게 조우했다. 그 결과 진나라는 전국시대 나머지 6국을 압도하는 국력을 갖출 수 있었다.
 
진시황의 천하 통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시대적 역할을 완수한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진 왕조의 뿌리인 선진시대의 진이 수행한 역사적 역할에 대한 검토 없이는 진시황의 천하 통일에 제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사마천도 이 점을 정확히 인식하여 통일 이전 제후국 시대의 진나라 역사를 제왕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본기’에 편입시켜 통일제국 진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탁월한 역사 안목을 보여주었다.
 
요컨대 진시황의 천하 통일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통일 과정에서 보여준 진시황의 탁월한 리더십과 통일 이후 그의 리더십이 어떻게 변질되었나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축객령(逐客令)
기원전 237년 전후, 야심 차게 동방 6국에 대한 정벌 전쟁을 펼치고 있던 진나라에 특별한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약 10년 전인 기원전 246년부터 진나라는 한(韓)나라 출신의 수리 전문가인 정국(鄭國)이라는 인물을 기용해 농지에 물을 대는 대규모 수로를 건설해왔다. 그런데 이 일이 진나라의 국력을 고갈시키려는 한나라의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말하자면 정국이 간첩 노릇을 해왔다는 것이다. 진시황은 이를 역이용하여 진나라 관중의 농경지를 확대하여 진나라의 농업 생산량을 크게 늘렸다. 그리고 정국이 만든 수로를 정국거(鄭國渠)라 불렀다(이 정국거 유지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정도로 마무리될 것 같던 정국 사건이 기원전 237년 무렵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진나라의 수구 기득권층인 왕족과 대신들이 “정국을 비롯한 외국 출신들의 빈객(賓客)들은 하나같이 진나라를 이간질하러 온 자들이니 모조리 내쫓아야 한다”며 들고 일어났다. 외국 출신의 인재들이 오랫동안 득세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역사상 그 유명한 ‘축객령’이 내려졌다.
 
당시 진시황의 객경(客卿·외국 출신에게 주는 고위 자문직)으로 있던 이사(李斯)도 당연히 축출 대상에 올랐다. 이사는 초나라 출신으로 진나라 실세인 여불위(呂不韋) 밑에서 가신으로 있다가 여불위의 눈에 들어 진시황에게 유세할 기회를 얻었다. 이사는 진시황에게 뇌물과 이간, 그리고 암살이라는 수단으로 제후국들을 혼란에 빠뜨릴 것을 제안했다. 진시황은 이사에게 이 일을 맡기는 한편 장군으로 하여금 이사의 뒤를 수행하게 했다. 이사는 이 공을 인정받아 객경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사는 젊은 날부터 출세에 강한 집착을 보인 출세 지상주의자였다. 그가 군의 말단 관리로 있을 때, 변소에 사는 쥐는 사람이나 개를 보면 깜짝 놀라는 반면 곡식 창고에 사는 쥐는 사람이 다가와도 태연히 곡식을 갉아 먹는 모습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아 “사람의 잘나고 못난 것도 쥐와 같으니,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구나!”라고 탄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후 순자(荀子)에게서 제왕학을 배운 뒤 “비천함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없으며, 빈궁함보다 더 심한 슬픔은 없습니다”라며 출세에 대한 강한 의지를 안고 떠났다.
 
그런 이사에게 축객령은 청천벽력이었다. 이제 겨우 자신의 야망을 성취할 수 있는 기반의 일부를 마련했을 뿐인데 축객령이라니! 이사는 붓을 들고 자신의 생각을 적어 진시황에게 올렸다. 그리고는 진시황 앞에서 축객령의 부당함을 강력하게 설파했다. 이것이 천하의 명문으로 남아 있는 ‘간축객서(諫逐客書)’다. ‘축객령에 관해 드리는 말씀’이라는 뜻의 이 글은 이사의 재능을 잘 보여주는 명문일 뿐 아니라, 진나라가 어떻게 통일이라는 대업에 근접할 정도로 강한 국력을 소유하게 되었는지를 명쾌하게 진단하고 있다.
진나라 부국강병의 원인
이사는 먼저 축객령이 잘못된 것이라면서 기원전 7세기 목공 이래 진나라에서 활약했던 외국 출신들의 인재들을 하나하나 거론함과 동시에 이들이 진나라에 기여한 공헌을 꼼꼼히 지적했다. 서방에 치우쳐 중원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진나라는 사실 기원전 7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낙후된 야만국으로 멸시당했다. 목공이 융(戎)에서 유여(由余)를, 완(宛)에서 백리해(百里奚)를, 송(宋)에서 건숙(蹇叔)을, 진(晉)에서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支) 등을 과감하게 스카우트함으로써 국력을 크게 신장시킬 수 있었다. 외국 출신의 인재로 진나라의 부국강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개혁가로 평가받는 상앙이었다. 효공 때 기용된 상앙은 이른바 ‘변법(變法) 개혁’을 시행하여 진나라를 단번에 초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사는 자기 당대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장의(張儀)와 범수(范睢)가 진나라 외교 책략에 미친 영향까지 언급하면서 외국 인재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이 네 임금들께서는 모두 빈객들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런 과거의 역사가 엄연하거늘 어째서 빈객들이 진나라를 저버린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앞의 네 임금들께서 받아들이지 않고 빈객을 물리치고, 인재를 멀리하고 등용하지 않으셨다면 나라에 부귀와 이익은커녕 진나라는 강대국의 명성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사는 기원전 7세기 이래 외국 출신의 인재들이 없었다면 진나라가 강대국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음을 지적했다. 이어 이사는 진나라 조정에 수입돼 있는 외국의 미녀와 장식품, 음악, 보물 등을 꼬치꼬치 들먹였다. 이런 외국 문물들을 거리낌 없이 다 받아들이면서 빈객들을 내쫓으려는 것은, 이런 문물들은 소중히 여기고 인재는 경시하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사가 남긴 다음 대목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명언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태산은 단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높은 것이며,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았기에 그렇게 깊은 것입니다.”
 
이사는 진나라가 지금 누리고 있는 부국강병의 역사적 배경을 정확하게 통찰했다. 강대국 진은 넓은 포용력으로 국적과 민족과 출신을 따지지 않는 인재 기용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진시황 천하 통일의 역사적 배경을 이사의 ‘간축객서’만큼 정확하게 지적한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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