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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설득하려면 상대의 ‘역린’을 헤아려라

강신주 | 45호 (2009년 11월 Issue 2)
사람들은 서양철학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데 비해 동양철학은 ‘감성적이고 직관적’이라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특히 서양철학을 상징하는 플라톤(BC 428?∼BC 348?)의 대화편들을 읽어보면 서양철학이 얼마나 집요하게 논리를 지향했는지를 알 수 있다.
 
플라톤 대화편들의 주인공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BC 469∼BC 399)다. 대부분의 대화편들은 소크라테스가 논리적인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논증 과정으로 점철돼 있다. 반면 동양철학의 정신을 상징하는 <논어(論語)>를 넘겨보면 전혀 다른 대화의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 공자(BC 551∼BC 479)는 인()에 대해서 만나는 사람들에 따라 각각 다르게 이야기한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간과했던 것
공자는 어느 제자가 인에 대해 물어보자 “말을 어눌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또 다른 제자가 인에 대해 물었을 때는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고 이익은 나중에 생각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나 서양의 논리학에 익숙한 사람들이 <논어>를 읽고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논리를 중시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사용하는 용어의 정확한 정의(definition)를 요구한다. 개념의 정의가 상황마다 달라진다면 이성적인 논증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공자는 비논리적인 철학자였던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는 인이란 ‘두 사람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가능케 하는 주체의 자세나 태도’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인()한 사람은 타자와 만날 때 갈등의 관계가 아니라 조화의 관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분명 인의 이념을 중시했다. 하지만 그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인의 이념을 제자들에게 설득하는 일이었다. 공자는 인 자체의 가치를 중시했지만, 제자들이 그 가치를 받아들여 실존적으로 변화하기를 더 원했다. 너무 유창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은 타인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타자와 조화로운 관계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이런 제자에게 “말을 어눌하게 하라”고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때 힘든 일은 피하고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자는 이런 성향의 제자에게는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고 이익은 나중에 생각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스승의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제자는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공자가 인을 자신이 정의한 대로 모든 제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제자들 중 일부는 자신의 스승이 제안하는 인이 추상적이고 고압적인 가르침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공자와 제자들 사이에 갈등과 불신이 생겼을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들은 그의 곁을 떠났을 것이다. 대화에 대한 공자의 입장은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그것과는 분명히 구별됐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여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대화(dialogue)는 둘을 의미하는 ‘다이아(dia)’와 말이나 논리를 뜻하는 ‘로고스(logos)’로 이뤄진 단어다. 누군가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 한다면, 대화가 함축하는 다이아의 정신은 사라지고 모놀로그(monologue)의 ‘모노(mono)’라는 유아론적 정신만 남는다.
 
서양 학문에는 논리학(logic)과 더불어 수사학(rhetoric)의 전통이 공존하고 있다. 논리학이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수사학은 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모두 “수사학은 궤변”이라고 비판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어느 사람에게나 혹은 어느 지역에서나 타당한 것을 추구했다. 그런데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가 지향했던 논리의 궁극적 목적은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있지 않았을까? 불행히도 논리적 논증만으로 우리가 상대방을 설득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상대방은 자신이 논리의 힘으로 압박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간과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공자가 위대했던 진정한 이유를 찾았다. 그는 논리를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자는 인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한 것은 물론, 그것을 듣는 대화 상대방에 맞춰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상대방의 내면까지 읽어내려는 노력은 불가피했으리라.
 
 
설득하려면 상대의 역린(逆鱗)을 읽어라
이런 동양철학의 전통은 공자를 가장 비판했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한비자(BC 280?∼BC 233)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조화보다는 군주의 강력한 법치에 의한 일원적 지배를 강조했던 그도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기에 앞서 상대방에 대한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무릇 용이라는 짐승은 길들여서 탈 수 있다. 그렇지만 용의 목 아래에는 지름이 한 척 정도 되는 거꾸로 배열된 비늘, 즉 역린(逆鱗)이 있다. 만일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용은 그 사람을 죽이고 만다. 군주에게도 마찬가지로 역린이란 것이 있다. 설득하는 자가 능히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 설득을 기대할 만하다. -한비자 <세난(說難)>
 
이 구절은 한비자가 ‘유세(遊說)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했던 말이다. 용을 길들이려는 사람은 용의 목에 있는 거꾸로 된 비늘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역린을 자극하는 순간, 용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타고 있는 사람을 물어 죽인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다. 유세하는 사람은 정치적 이념을 군주에게 설득하려 할 때, 군주의 의식적 이성뿐 아니라 무의식적 정서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물론 한비자는 유세하는 사람이 자신이 가진 정치적 이념을 군주의 입맛에 맞게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중요한 점은 군주의 무의식적 정서를 건드리지 않아야 군주가 유세자의 정치적 이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비자의 통찰은 매우 단순하다. 아무리 논리적인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수사학적 노력이 실패하면 그 주장은 채택될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들만의 역린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반성하고 체계화하는 일은 우리가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타자를 설득하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결코 아니다.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생각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상대방은 의식적으로 나의 이야기를 옳다고 인정할 수는 있다. 누가 보아도 타당한 주장, 즉 논리적으로 옳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게 할 수 없다면, 나의 이야기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논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그러한 감수성을 읽을 때에만 우리는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상대방의 역린을 읽을 수 있는 수사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빛을 발할 수 없다.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해 드립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망각과 자유: 장자 읽기의 즐거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장자의 철학을 조명하고,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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