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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의 리더십

진시황의 리더십 집중 해부-1 : 역사 문화 아이콘이 된 ‘단 하나의 제왕’

김영수 | 45호 (2009년 11월 Issue 2)
천고일제(千古一帝)
최근 건국 60주년 기념행사를 요란하게 치른 중국에서는 새삼 마오쩌둥(毛澤東)이 ‘문화 아이콘’으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마오쩌둥은 2000년 넘게 지속돼온 제왕 중심의 전제주의를 단번에 무너뜨리고, 평등 정신의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주인공이다. 반편 ‘마지막 황제’라는 조롱조의 평가까지 받고 있기도 하다. 이런 그가 역사상의 수많은 영웅호걸들을 물리치고 오늘날 광적인 추앙을 받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적 인물이 문화적 아이콘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지속적으로 이뤄지면서도 극명하게 상반되어야 한다. 중국 역사상 이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두 사람이 바로 마오쩌둥과 이 글에서 언급하는 진시황(秦始皇)이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사후 50년을 넘기도 전에 선명하게 양립되기 시작하더니 끝을 알 수 없는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있다. 진시황에 대해서는 죽음과 거의 동시에 부정적 평가가 주류를 이뤘고, 그 후 2000년 가까이 그 기조가 유지됐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오면서 신() 사학의 태동과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역사 인식에 힘입어 진시황에 대한 ‘철옹성’ 같은 기존 평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보다 앞서 진시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이 없진 않았다. 중국 역사상 최악의 사상 탄압기였던 16세기 명나라 말기에 온몸으로 체제 이데올로기에 저항했던 이단아 이탁오(李卓吾)는 주저 없이 진시황을 ‘천고일제(千古一帝)’라 불렀다. 진시황에게 ‘역사상 단 하나의 제왕’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오랜 ‘단조로움’에서 벗어났으며, 이후 흥미진진한 논쟁의 드라마가 연출되기 시작했다.
 
역사 문화 아이콘으로서의 진시황
진시황은 역사상 가장 많은 논쟁에 휩싸인 인물이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몇 권의 책으로 묶어도 모자랄 정도다. 이런 점에서 그는 역사 아이콘으로서의 자기 자리를 확실하게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1976년 병마용갱(兵馬俑坑)의 위용이 전 세계에 공개되고, 그의 무덤과 그 주변에 대한 놀라운 발굴 성과가 쌓여가면서 이제는 문화 아이콘으로서의 면모도 함께 갖춰지고 있다.
 
진시황에 대한 평가에서 전혀 바뀌지 않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중국사 최초의 통일 제국을 이룬 첫 황제였다는 점이다. 이 사실이 없었더라면 그가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남겼어도 지금처럼 과분한 평가는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진시황은 중국사 최초의 통일제국을 수립한 위대한 업적의 주인공이자, 정치·경제·행정·군사·문화·사상 등을 일사불란한 시스템으로 정비하고자 했던 원대한 포부를 가진 제국의 총 기획자였다. 우리는 이런 그의 리더십을 어떻게 해부해야 할까?
 
진시황은 단순히 이해하기 어려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때론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대변되는 사상과 문화의 압제자로, 때론 몇 차례의 암살 위기를 넘기면서 소위 ‘암살 노이로제’에 걸려 노심초사했던 최고 권력자로 비춰졌다.
 
타국에서 생명의 안위를 걱정하며 살아야 했던 유년 시절,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한 생부 여불위(呂不韋)의 그늘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소년기, 생모가 정부(情夫)를 침소에까지 끌어들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와 작당해 반역을 도모하는 것까지 지켜봐야 했던 청년기…. 이런 시절들을 거치면서 진시황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준비를 하며 권력을 향해 달려갔을까?::
 
‘불로장생’이라는 황당무계한 헛소리에 홀려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던 행동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만리장성과 아방궁으로 상징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토목 건축사업에 열을 올렸던 과대망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이렇게 콤플렉스 덩어리인 그가 어떻게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단 말인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치밀하게 설계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제국의 시스템이 대체 어떤 문제로 불과 15년 만에 붕괴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논쟁을 넘어 통찰의 문으로
진시황은 거대한 제국을 창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제국을 작동시키기 위한 각종 시스템을 직접 고안해냈다. 그의 리더십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대목이다.
 
진시황은 이 시스템을 보다 완벽하게 작동시키기 위해 수시로 현장을 점검하려고 열정적인 대순시에 나섰다. 그는 또 제국을 움직이는 시스템이 보다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제안이나 건의를 검토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다. 하루에 일할 양을 정해놓고 다 마치지 못하면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할당량을 채웠다. 진시황은 만성피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는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이 창건한 제국을 일사불란하게 작동시킬 원리를 알고 있었다. 300만㎢에 이르는 방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원리와 시스템을 창안할 수 있었던 이유다. 진시황은 그 누구보다 부지런한 리더였고, 자신의 일에 지나치리만치 최선을 다했다.
 
사실 분서갱유라는 사상 문화 탄압은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제왕들도 많았다. 어쩌면 이 사건은 제국의 체계적인 작동을 위한 ‘최소한의 희생’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토목 건축사업도 경제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얼마든지 긍정적 논의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침몰이라는 예상 밖의 결과는 진시황의 모든 업적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진행된 제국의 침몰은 곧 ‘완벽한 시스템’의 붕괴이기도 했다. 어처구니없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와 분석이 목표를 잃고 방황한다.
 
최초의 황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늘 이분법으로 귀착되거나 양비·양시론으로 얼버무려지곤 했다. 인간 진시황의 한계와 제왕 진시황의 초월적 능력을 날카롭게 연계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의 콤플렉스가 제국을 경영함에 있어서 어떻게 작용했는지 꿰뚫어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최초의 통일 제국을 세울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신뢰할 만한 자료 제시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부모는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왕과 왕비였다. 이들의 뒤에는 어마어마한 비밀을 숨긴 채 아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착잡한 심경으로 지켜보는 친부가 있었다. 진시황은 타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행여나 잡혀가 죽을 수도 있는 생사의 관문을 넘나들었고, 13세에 아버지를 잃고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랐다.
 
남편을 잃은 젊고 아름다운 과부 어머니는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진시황의 생부와 옛정을 되살리는 불륜에 탐닉했다. 생부는 아들의 시선이 두려워 옛날 자신의 애첩이었던 태후와의 관계를 끊고자 자신을 대신할 건장한 사내를 태후에게 갖다 바쳤다. 태후는 이 사내와 마구잡이로 놀아났고 자식을 둘이나 낳았다. 점점 간이 커진 사내는 급기야 최고 권력을 탐했고, 진시황은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2세에 어머니와 그 정부의 난을 냉혹하게 진압한 진시황은 자신의 생부마저 퇴출하고 마침내 자기 손으로 나라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통일 제국을 출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결단과 정책 수행 능력은 역사상 어떤 리더보다 뛰어났다.
 
이제 앞서 설명한 진시황에 대한 전반적 정보를 염두에 두고, 그의 리더십을 냉정하고 치밀하게 분석해보자.(다음호에 계속)
 
필자는 고대 한·중 관계사를 전공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년 동안 사마천의 <사기>에 대해 연구해오고 있으며, 2002년 외국인 최초로 중국 사마천학회의 정식 회원이 됐다. 저서로 <난세에 답하다> <사기의 인간경영법>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사기의 경영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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