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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변화 이끌 ‘마음 속 불씨’ 찾아라

곽민영 | 29호 (2009년 3월 Issue 2)
객석에는 연배가 지긋한 관중들이 적잖이 보였다. 무대 위 스크린에는 한자가 가득했다.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농심 본사 리더십센터에서 마이크를 잡은 강사는 손욱 농심 회장. 삼성SDI 사장과 삼성종합기술원장, 삼성인력개발원장을 거치면서 ‘혁신 전도사’로 이름을 알렸던 그다. 손 회장은 또 2년 전부터 ‘한국형리더십연구회’를 이끌며 주요 정치·경제 지도자들의 리더십 유형을 체계적으로 분석해왔고, 최근에는 포스코 이사회 의장으로도 선임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가 주최한 ‘정조실록학교’ 첫 강좌에서 ‘조선의 혁신군주, 정조’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 손 회장을 만났다.
 
정조, 현장경영 실천한 조선 개혁 지도자
최근 정조의 비밀 서한 299통이 발견돼 주목을 끌었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 ‘훈남’ 임금으로 알려졌던 정조가 실은 정적(政敵)들과 은밀히 접촉하고 막후 설득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 이런 ‘통치의 기술’ 때문에 정조를 주목한 것인지 물었다. 하지만 손 회장은 정조가 통치했던 당시의 ‘시대정신’에 주목했다. 19세기를 목전에 둔 세기말은 ‘단순계’에서 ‘복잡계’로의 변화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정조가 통치하던 당시 사회 환경과 이념 체계가 복잡해지면서 갈등이 표출됐습니다. 정조가 ‘지금 고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말할 만큼 위기의식이 팽배했지요. 변화와 혁신이 필요한 지금의 시대 상황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시대 상황에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일지 정조의 사례에서 배울 게 상당히 많습니다.”
 
정조는 즉위 3년차에 ‘경장대고(更張大告)’를 통해 서민 경제 회생 강한 군대 양성 인재의 고른 등용 튼튼한 국가 재정 확립 등 개혁 방향을 제시했다. 또 신도시 건설(수원 화성)을 통해 왕권을 확립했고, 국가 재정의 기초를 다졌다.
 
포용 부족해 개혁 완성 못해
하지만 정조의 개혁은 스스로가 말년에 “도무지 효과가 나지 않는다”고 밝혔을 정도로 미완에 그쳤다. 토지제도 개혁은 아예 추진되지 못했고, 언관들의 권한을 약화시킨 언론 개혁은 공론정치를 위축시켜 정조의 사후 세도정치의 씨앗이 됐다. 손 회장은 정조의 실패 이유를 포용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정조는 듣기보다는 가르치는 군주였습니다. 수평적 의사소통을 통해 협력과 포용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부족했지요. 그 결과, 목숨을 걸고 개혁을 함께 이끌 동지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정약용조차도 말년에는 좌천시키지 않았습니까. 혁신을 하려면 우군을 계속 늘려야 하는데, 정조는 시간이 갈수록 우군의 수를 줄였습니다.”
 
손 회장은 삼성그룹 설립자인 이병철 전 회장의 리더십을 정조와 대비해 소개했다.

이병철 전 회장은 계열사 사장을 호출하면 첫마디가 ‘이야기해봐라’였어요. 이야기를 시작하면 표정도 변함없이 끝까지 다 들었지요. 두세 시간을 내리 듣기만 하는 걸 본 기억도 있어요. 회사 직원뿐 아니라 외부 인사를 만나도 늘 듣는 게 먼저였습니다. 아들인 이건희 전 회장이 회장직에 취임할 때 이병철 전 회장이 써주었던 글귀가 ‘경청’이었습니다. 포용은 경청에서 나옵니다.”
  
하늘이 준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손 회장에 따르면,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하다.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다. 위기 상황(천시)과 변화를 이끌어낼 구심점(지리), 그리고 변화를 이끌 리더 그룹(인화)을 각각 뜻한다. 그는 특히 위기를 ‘하늘이 준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능력 있는 리더는 위기를 변화의 계기로 삼습니다. 위대한 리더는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위기가 아니어도 굳이 위기 상황을 만듭니다.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제프리 이멜트 회장은 취임 뒤 ‘환경 변화’라는 위기를 조직 내에 조장했습니다. 그 결과, 환경 및 바이오 산업에 성공적으로 진출했지요.”

삼성그룹의 ‘신(新)경영’ 역시 위기의식 속에서 출발했다고 손 회장은 설명했다.

이건희 전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한 게 1993년입니다. 이 전 회장은 당시 ‘세기말에는 세상이 요동친다. 이때의 성공 여부가 일류와 3·4류를 가른다’면서 조직에 위기의식을 일깨웠지요. 얼마 뒤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신경영은 빛을 발했습니다. 위기를 남보다 앞서 인식하고 활용할 줄 아는 것이 리더의 덕목입니다.”
 
이런 점에서 손 회장은 “지금의 경제위기는 외환위기에 이어 한국에 허락된 또 다른 천시”라면서 “변화의 구심점을 중심으로 리더 그룹이 한마음이 되어 국민을 이끈다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고 조언했다.

성공의 불씨를 찾아라
때가 따르고,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을 구했다 해도 변화의 구심점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다. 엉뚱한 목표를 설정하면 조직은 추락한다. 손 회장은 조직원들을 변화로 이끌 ‘불씨’를 찾으라고 강조했다.
 
불씨는 조직원들의 마음에 숨어 있는 깨달음과 자신감입니다. 성공 사례, 우수 사례를 찾아 그것을 다른 조직원들에게 알리고 칭찬하세요.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조직원들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변화의 불길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는 삼성전기 시절 불씨 하나가 변화의 불길로 이어졌던 일화를 공개했다.

중졸 학력의 플라스틱 사출 담당 A 과장이 있었습니다. 그가 맡은 생산 라인은 기계가 지저분해 불량이 많고 효율도 떨어졌지요. 그에게 다른 지시 없이 우수한 클린 공장을 견학시켰습니다. 얼마 뒤 그는 자신의 라인을 바꿔보겠다며 혼자서 아침 일찍 나와 기계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생산 직원들은 구경만 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닦았습니다. 두 달 뒤 한 사람이 ‘내 기계는 내가 닦겠다’며 따라나섰습니다. 세 달 뒤에는 모두가 동참했지요. 작업 환경 개선으로 불량률이 현저히 떨어지고, 생산성은 높아졌습니다.”
 
첫 불씨가 불을 피우려면 점화의 순간이 필요하다. 손 회장은 리더가 이런 점화의 순간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건희 전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한 직후, 그룹 사장단 200명을 프랑크푸르트로 불렀습니다. 이들은 두 달간 회사 일에서 손을 떼고 일등석 비행기를 타고, 일류 호텔에서 묵으며, 일류 자동차를 타고, 일류 기업과 공장을 줄곧 시찰했습니다. 이들이 한국에 돌아와서 무엇을 느꼈는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지요. 사장단 각자의 마음에 타오른 불씨는 곧 조직 전체로 퍼져 나갔습니다.”
 
불씨론은 기업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라고 손 회장은 지적했다.

요즘엔 모두가 위기다, 어렵다는 얘기 속에 빠져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성공 사례와 희망의 불씨를 지속적으로 찾고 자꾸 알려야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는 ‘새마을 운동’이 변화의 불씨였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성공한 새마을 지도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성공을 치하하고 널리 알리곤 했지요. 숨은 불씨를 찾아 온기를 불어넣어주면 언젠가는 타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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