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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배상호 LG전자 노조위원장

구성원 자긍심 높이는 USR 활동
노조 상생 리더십의 새 방향 제시

장재웅 | 340호 (2022년 03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조합원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노동조합 위원장은 전통적으로 회사와 대립하는 강성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표를 얻는 데 유리했다. 하지만 회사와 상생하면서도 10년 넘게 안정적으로 노조위원장 자리를 유지하는 사례도 있다. 대표적으로 배상호 LG전자노동조합 위원장은 2011년부터 노조위원장을 맡아 안정적으로 노조를 이끌고 있다. 특히 배 위원장은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USR(Union Social Responsibility)라는 개념을 LG전자 노조에 뿌리내리게 한 주인공이다. LG전자의 사례는 노동조합이 단순히 조합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가 아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단체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편집자주

DBR가 경영, 문화, 스포츠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거나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리더상을 제시하고 있는 각계각층의 리더를 엄선해 혜안을 듣는 인터뷰 코너 ‘리더에게 리더가’를 신설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정당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근래 국내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발현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귀족 노조’ ‘기득권 노조’ 등 이제는 흔하게 느껴지는 노조에 대한 수식어는 노동조합에 대한 세간의 반감을 잘 드러낸다. 또한 기업 노조의 위원장이 되려면 강성 이미지여야 한다는 편견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노사관계는 대화와 타협보다는 대립과 반목을 유지하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노동조합이 회사와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LG전자와 LG전자노동조합은 1993년, 기존의 수직적 개념의 ‘노사(勞使) 관계’ 대신 수평적 개념의 ‘노경(勞經) 관계’라는 LG전자만의 고유한 개념을 도입해 노경이 상호 협력하는 자발적인 파트너십을 발휘하는 ‘노경공동체’를 구축했다. 그 결과 LG전자는 1990년 이후 단 한 번의 노사분규 없이 발전적인 노경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LG전자노동조합을 2011년부터 12년째 이끌고 있는 배상호 위원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조위원장과는 차이가 있다. 배 위원장은 2011년부터 이후 내리 4선에 성공하며 노동조합을 이끌면서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다. 즉, 무조건 회사와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주기적으로 회사 경영진과 만나 회사의 경영 현황을 공유받고 회사와 노조가 협력할 방안을 고민하는 방식으로 노조를 이끌고 있다. 또한 임금 인상, 고용 안정 등 근로 조건 개선과 권리 찾기 중심으로 전개됐던 전통적인 노동운동 방식에서 벗어나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USR, Union Social Responsibility)1 과 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조합원들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어려움을 해결해주려고 노력하는 ‘경청 리더십’을 바탕으로 조합원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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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LG전자 노조는 올해 1월, USR로 유엔 경제사회이사회가 부여하는 ‘특별 협의 지위(Special Consultative Status)’를 받게 되면서 화제의 중심에 섰다. DBR가 배 위원장을 만나 USR의 가치와 비전이 노조 활동 및 리더십에 미치는 영향, 대기업 노조 리더가 시대 흐름에 부합해 앞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 등에 대해 물었다.

노조의 사회적 책임(USR)이란 개념이
아직은 생소한 것 같다. 어떻게 도입하게 됐나.

LG전자노동조합이 USR를 시작한 것은 2010년의 일이다. 하지만 이미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노조 역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당시 노조 내부에서부터 노조가 지금처럼 조합원의 임금이나 처우 문제만 다뤄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과 함께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하는 노동운동은 의미가 없다는 반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마침 회사에서 당시 노조집행부를 해외로 보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줬다. 다른 회사들도 우수 조합원들에게 단기 해외 연수 기회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공부 목적보다는 휴가의 성격이 강한 것 같다. 하지만 LG전자는 당시 경영진의 배려로 BMW, 도요타 등 선진 기업들을 방문하며 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벤치마킹 사례를 찾아 다녔다. 2004년에는 미국 코넬대를 방문해 노사 관계 연구로 유명한 해리 캇츠(Harry Katz) 교수(전 코넬대 총장)를 직접 만나 한국의 노동운동과 노사 관계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했다. 또 핀란드 헬싱키대를 찾아 경제학 교수들로부터 북유럽 노조 실용주의에 대한 혜안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배움을 넓혀 가는 과정에서 지금까지의 노조 활동은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노동조합 역시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결국 회사 측이 노조집행부에 견문을 넓힐 기회를 준 것이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 준 변곡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려대 노동대학원을 다니면서 노조 활동에 대해 학문적 관점에서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고 이후 앞서 말한 해외 단기 연수 등을 통해서 개인적으로도 USR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그 결과로 2010년 LG전자노동조합은 국내 대기업 노조 최초로 USR 헌장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USR 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 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USR 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됐고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2013년 초 국내 최초의 USR 관련 서적2 을 회사 경영진•대학 교수와 공동 저술해 출간하기도 했다. 2014년 초엔 관련 백서를 국내 기업 노조 최초로 발간했다.

최근 LG전자노동조합의 USR 활동이 크게
주목을 받았는데 계기는 무엇인가.

올 1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UN ECOSOC)가 LG전자노동조합의 USR 활동의 가치를 인정해 LG전자노동조합에 ‘특별 협의지위(Special Consultative Status)3 ’를 부여했다. 이는 UN이 특정 영역에서 역량을 갖춘 단체에만 선별적으로 부여하는 것으로 경제사회이사회가 주관하는 회의나 행사에 참여해 의견을 내면서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주로 NGO 단체에만 부여했던 것으로 LG전자는 국내 대기업 가운데선 최초로 관련 지위를 부여받는 영예를 누리게 됐다.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사실 생소한 개념이었을 텐데 당시 조합원들의 반발은 없었나. 또 USR가 노조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나.

사실 USR가 아니라도 노조 집행부가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추진할 때 지지를 받고 힘을 얻으려면 조합원들의 신뢰가 선행돼야만 한다. 당시 집행부가 USR를 노동조합의 새로운 역할로 제시하기 전부터 조합원들과 자주 만나 신뢰를 쌓은 것이 새로운 활동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만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USR가 노조가 해야 할 일이 맞냐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한국노총 역시 USR 활동을 낯선 눈으로 봤다. 하지만 이미 다양한 교육과 해외 연수를 통해 USR가 노동조합이 나아가야 할 방향임을 확신한 집행부는 대기업 소속 노조라면 사회의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해야 함을 구성원들에게 강조했다. 조합원들을 자주 만나 교육도 하고 설명도 하며 설득의 시간을 가졌다. 다행히 실제 회사 내에서 시작된 USR 활동에 참가해 본 조합원들의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노조의 역할이 조합원의 권익 신장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스스로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자 USR 활동을 이어가는 데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LG전자는 매년 모범 조합원을 뽑아 해외 연수를 보내주는데 한 번은 해외 연수 대신 봉사활동, 즉 캄보디아에서 우물을 파고 화장실을 만드는 USR 활동에 참여하게 한 적이 있다. 이때 참가한 조합원이 다음 해에 찾아와 자비라도 괜찮으니 아들까지 동반해서 한 번 더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들에게도 권하고 싶을 만큼 잊지 못할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또 해외 기업들이 USR를 배우고 싶다며 문의해오기도 했다. 한 예로 2018년 2월 브라질 타우바테(Taubate´) 지역 금속노조위원장과 사무처장이 한국을 찾아 LG전자 노조의 USR 활동을 비롯한 선진 노사 문화에 대해 듣고 갔다. 사람은 누구나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USR 활동은 그런 의미에서 조합원들에게 노동조합이 지역사회에 기여하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런 활동이 노조 내에 깊게 뿌리내릴수록 노조가 추진하는 활동에 대한 조합원들의 신뢰가 생기고 노조 전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모두 힘을 합쳐 선한 활동을 펼치는 것은 긍정적인 에너지와 메시지를 발산하고, 결국 리더로서 조직을 이끄는 데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DBR minibox ‘USR 활동이 노조 조합원에게 미치는 영향’ 참고.)

USR 활동을 추진하고 이끄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노조의 사회 공헌 활동과 관련해 벤치마킹할 국내 사례가 많지 않아 초반엔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봉사활동과 연계한 활동들을 기획했다. 그러다 2010년, 국제표준화기구(ISO)가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국제표준(가이드라인) ISO 26000를 발표하면서 7대 영역별 과제(조직 지배구조, 인권, 노동, 환경, 공정 관행, 소비자 이슈, 지역사회 참여 개발)를 공개했고 이 기준에 맞춰 본격적으로 USR 활동을 실천해 나갔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에티오피아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생활지원금 지원 사업과 캄보디아 지원 사업 등이 있다. 2011년 시작된 캄보디아 지원 사업은 낙후된 지역을 찾아가 우물 파기, 공용 화장실 건립, 마을회관 건립 등을 지원하는 것이다. 또한 에티오피아에서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생활지원금 활동은 노조 기금으로 참전용사 1명에게 200달러씩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또한 회사와 노동조합이 함께 에티오피아, 케냐 등에 LG희망마을을 만드는 사업도 진행 중이다. LG가 설립하고 지원하는 연암대 학생 및 교직원과 함께 현지를 방문해 참전 용사들에게 옥수수, 닭 등을 키우는 법을 가르쳐주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렇게 지원 대상자의 경제 활동을 도운 덕에 에티오피아의 경우 이들이 모여 사는 LG희망마을이 주변에서 가장 잘사는 동네가 됐다고 한다. 또한 국내에서도 USR 활동을 지속 전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다문화 가정 가족 고향 보내주기 등을 전개하고 있고 지역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지부별로 시행 중이다.

DBR mini box

USR 활동이 노조 조합원에게 미치는 영향

USR 활동이 조합원들의 직무 만족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미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와 김영기 전 LG전자 부사장(CRO)은 2010년 10월1일부터 10월15일까지 약 2주간 LG전자노동조합 6개 지부 조합원 800명을 대상으로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 활동들이 구성원들의 조직 몰입, 직무 만족, 이직 의도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i

연구팀은 회귀모형의 주요 설명 변수를 근로자들의 ‘USR 활동 참여 여부 및 참여도’, 그리고 ‘범주별 USR 활동 프로그램’으로 구성했고, 다양한 통제요인의 영향력을 검증하기 위해 각종 인구학적 요인, 즉 근로자들의 기업 내 지위, 노동조합 직책, 성별 및 이직 경험 등을 변수로 포함했다. 또한 주요 종속 변수는 조직 몰입과 직무만족도 및 이직 의도 등으로 구성했으며 이 가운에 조직 몰입의 경우 감정적 몰입(주로 소속 욕구 및 감정적 애착으로 인한 몰입), 지속적 몰입(도구적 차원의 몰입, 즉 회사와 구성원 간의 상호작용성, 이직 난이도와 혼란도 등을 의미하는 몰입), 그리고 규범적 몰입(조직에 대한 개인의 책임과 의무감에서 발생하는 몰입) 등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눠 분석했다.

조사 결과, USR 활동은 감정적 몰입, 지속적 몰입, 감정적 몰입 모두에서 조직 몰입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특히 참여도의 경우 직무 만족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컸다. USR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조직 몰입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USR 활동은 조직 몰입 외에도 조합원들의 직무 만족과 이직 의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USR 활동에 참여한 조합원일수록 직무 만족도는 높아지고 이직 의도는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LG전자노동조합의 6개 지부 중 젊은 조합원들이 많은 지부일수록 USR 활동이 조직 몰입과 직무 만족도 등에 미치는 영향이 높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또한 직급별로 분석해 본 결과 노동조합 대의원보다 평조합원들 사이에서 USR 활동의 효과성이 높게 나타났다. 이는 USR 활동이 장년층보다는 젊은 세대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고 분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젊은 조합원들이 USR 활동을 새로운 노동운동의 방향성으로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도 풀이할 수 있다.

USR 활동 기금은 어떻게 마련하나.

일단 큰 틀에서는 조합원들이 받는 상여금의 끝전을 기부하는 방식으로 기금을 마련한다. LG전자 노조 소속 노조원이 약 9000명에 달하기 때문에 합치면 꽤 큰 금액이 된다. 여기에 활동 취지에 동참한 사무기술직 사원들도 3만여 명이나 동참을 해주고 있다. 활동 중 일부는 회사와의 협업을 통해서도 진행된다. 우물을 파주거나 태양광 설비를 설치해주는 등 규모가 큰 사업은 회사 및 제3의 기관 등과 협업해 진행하고 있다. USR 성공 사례는 해외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LG전자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비결은 조직 안정성에 있었다고 본다. 노조위원장이 매번 바뀌었으면 꾸준히 이 활동을 지지하고 실천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개인의 참여와 헌신이 필요한 활동에 지속적으로 조직원을 동참시키기기 위해서는 프로젝트 자체가 일관성 있게, 장기적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본다.

노동조합의 USR 활동은 회사 전체의 ESG 활동과도 연계될 수 있을 듯한데.

USR는 LG전자 노조가 조합원 모두 스스로 참여해서 사회공헌을 실행해 나가는 미래 방향성을 제시한다. 따라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ESG 활동과도 괘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 평택 지부나 창원 지부 등 국내 각 지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다문화가정 지원이나 독거노인 지원, 지역사회의 생태 및 수질 개선 관련 노력 등은 ESG의 ‘S(Social)’와 연관성이 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노조는 회사가 주도하는 ESG 활동에도 참여, 지원할 준비가 돼 있다.

처음 노조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또 대부분 기업의 노사 관계가 대립적인 데 반해 LG전자는 그렇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입사 직후 청주공장에서 사출 성형을 담당했는데 1987년 노사분규 이후 두 달 만에 현업에 복귀하니 내 업무가 아닌 다른 지원 업무로 배정됐다.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나에게 불이익을 주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노동조합 일을 제대로 맡아서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청주공장은 생긴 지가 얼마 안 된 공장(1985년 완공)이었고 노동조합은 1987년 설립됐다. 자연스레 노조 업무를 할 사람이 필요했던 시점이기도 했다. 지금은 노사 간 충돌이 거의 없지만 처음 노조 일을 맡을 때만 해도 LG전자 노조는 강성이었다. 당시 1987년과 1989년 파업으로 LG전자가 입은 매출 손실이 5000억 원에 달할 정도였다. LG전자 평택공장 직원들은 공장에서 가까운 경부고속도로를 점거할 정도로 격렬하게 파업을 했다. 하지만 1989년 파업을 기점으로 회사나 노조 모두 이런 대립은 서로에게 손해만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LG전자 노사는 대립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상대방을 이해해는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대립적인 노사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데 회사 측의 역할이 컸다는 점도 평가하고 싶다. 당시 회사 임원들이 아침 일찍 나와 정문에서 출근하는 사원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도 하고 생산 현장에 들어와 직접 청소도 하면서 틀어진 노사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회사 경영진이 솔선수범해서 움직이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렸다. 또한 이전에는 회사가 얼마를 벌고, 어떤 경영 관련 이슈가 있고 하는 정보를 노조에 공개하지 않아 불신이 쌓였다면 90년대 이후에는 이런 정보가 적극적으로 공유됐다. 이런 것이 LG만의 노경(勞經)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던 배경이 된 것 같다. 지금도 분기별로 회사로부터 경영 관련 브리핑을 받으며 회사의 상황을 이해하고 노조로서 거기에 맞춰 정당하게 요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회사 측이 노조에 경영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가.

다른 회사는 교섭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 경영 정보를 공유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LG전자의 경우는 단순히 경영 실적만을 공유하지 않고 회사의 전략 방향이나 경영 환경, 회사를 둘러싼 다양한 경제 상황과 이런 상황이 향후 미칠 영향 등을 아주 상세하게 노조와 공유한다. 특히 이 같은 설명을 LG경제연구원 소속 연구원들이 나와 직접 설명해 준다. 올해는 어떤 이슈가 있고, 올해 경제 전망은 어떻고부터 이를테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향후 회사 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에 대해 교육해준다.

USR 활동에 동참해 줄 것을 조합원들에게 설득하고 이를 잘 진두지휘하기 위해서는 리더십이 필요했을 것 같다. 실제 4선에 성공할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는 듯한데 비결은 무엇인가. 본인만의 리더십 스타일이 있다면.

스스로 리더십이 뛰어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한국의 노조위원장’ 하면 떠오르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위원장으로서 노력하는 게 하나 있다면 조합원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않고 개별 조합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파악한 뒤 이를 최대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조합원들과 10∼20명 단위로 간담회를 할 때면 조합원들에게 ‘내가 하는 요구가 말이 되는지 고민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해 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어떤 사연이든 일단 끝까지 들어준다. 과거에는 조합원들이 노조에 요구하는 것은 거의 임금이나 복지 관련 내용이었다. 최근엔 이외에도 개인의 가정사나 법률 상담 등을 요청하는 조합원들도 있다. 이걸 내가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사내에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팀들을 연결해주려 애쓴다. 개인의 고민은 결국 생산성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심지어 고민이나 요구가 회사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일단 바로 거절하지 않고 관심 있게 들어주려고 한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자체로 힘이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어도 꼭 피드백은 주려고 한다. 안 되면 왜 안 되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 수긍하는 편이다.

주로 술자리 같은 캐주얼한 만남을 통해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듣는 편인가?

난 술을 한 잔도 못한다. 무슨 노조위원장이 술도 못 먹냐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술을 못 먹는 게 어찌 보면 큰 실수 없이 오래 일할 수 있는 비결 같기도 하다. 술은 못해도 술자리는 가고, 그 자리에서 말을 하기보단 들으려고 애쓴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사태로 대면으로 만나 얘기 듣는 자리가 한결 줄었지만 오히려 그 덕에 더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메신저 등 온라인상에서 카톡 등으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오히려 마음을 터놓고 속 시원히 고민을 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 평소 조합원들에게 밤 12시까지는 언제든 연락하라고 하고 퇴근 후에도 휴대전화를 켜 놓는다. 실제 새벽까지 긴 통화가 이뤄지는 날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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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선까지 할 수 있게 된 비결에는 조합원의 지지만큼이나 회사의 신뢰도 한몫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적어도 회사가 위원장이 어느 정도 합리적 대화가 가능한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나 싶다. 사실 조합원으로부터나, 회사로부터나 신뢰를 얻기 위한 핵심은 ‘진정성’에 있다고 본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둘러대기보다는 진정성을 갖고 일하려 애쓰는 것이 ‘우리 위원장은 합리적으로 일한다는 느낌을 준다’는 평가를 받는 게 아닐까 싶다. 결국 위원장의 존재 의미는 조합원들의 삶을 가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협상 상대인 회사 측과 협상하는 방법이 반드시 투쟁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리더로서 나를 믿어준 구성원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도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장 실현 가능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회사와 노동조합의 신뢰 관계는 나 혼자 잘해서가 아니라 선대 위원장들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LG전자 노조는 1991년 일간지에 ‘생산과 품질은 우리 노동조합이 책임지겠다’는 광고를 낼 정도로 기업 경쟁력 강화에 힘을 썼다. 회사 경영진 역시 CEO가 되면 첫 출근을 항상 LG전자 본부 노조로 하고 생산 현장을 방문하면 각 지부 노조를 찾는 등 노동조합을 존중해 왔다. 현재 LG전자 CEO인 조주완 사장 역시 올해 발령을 받고 첫 출근을 이곳 LG전자노동조합 본부(서울시 금천구 가산동)로 했다. CEO로서 노동조합에 뭐를 해결해 줘야 할지 묻고 위원장의 고민이 무엇인지도 물어봤다. 이후 내가 요청한 게 빠르게 현장에 전달되고 반영되는 것이 느껴지면서 다시 한번 회사가 노조를 존중한다고 느꼈다. 또 코로나 사태로 잠시 중단됐지만 매년 열리는 노조 간부 체육대회에는 CEO 및 경영진 전원이 참석한다. 과거에는 CEO가 노조위원장을 업고 달리기를 하는 행사를 하기도 했다. 유치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런 장면이 조합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상당하다. 이런 노력에 호응하기 위해 위원장으로서 나 역시 분기별로 경영 현황 브리핑을 받거나 회사 임원들을 만날 때 회사 측의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노조가 회사를 이해하고, 회사가 노조를 존중하면 소통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근 리더에게 요구되는 역할 중 하나가 MZ세대 조직원들을 합리적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들 노조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나.

확실히 젊은 조합원들은 이전의 조합원들과 생각이 많이 다르다. 이전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근무를 많이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게 목표였고 이를 노조에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임금 인상보다는 워라밸과 관련된 요구나 복지에 대한 요구가 더 많다. 이를테면 노동조합 명의로 가지고 있는 국내 콘도 계좌를 더 늘려 달라거나 계열사 혹은 관계사가 운영하는 스키장 등 레저 시설 할인을 해달라거나 하는 식이다. 이런 변화를 보면서 노조 역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는 조합원들의 복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노조의 정책 및 협상 방향도 수정돼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결국 조합원들이 지금 바라는 것, 시대의 요구를 실현시켜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정신이 되고 있는 ESG에 부합하는 USR 활동에 조합원을 참여시키고, 소통이 절실한 팬데믹 시대, 비대면으로라도 최대한 많은 구성원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를 믿어주는 조합원들이 회사 생활에서 명분과 의미를 찾고, 이를 통해 보람을 느끼는 동시에 개인적 행복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


장재웅 기자 jwoong0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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