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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역사

장수 생명체의 조건은 ‘잡식성’

서광원 | 333호 (2021년 1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장수생명체로 유명한 뱀상어, 악어, 바퀴벌레 등의 장수 비결 중 하나는 가리지 않고 먹는 ‘잡식성’이다. 식량이 풍부할 때 많이 먹어 두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위기 상황에서 버틸 수 있다. 반대로 멸종 위기에 몰린 동물은 식성의 폭이 좁은 경우가 많다. 기업 역시 매출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향후 몇 년 간 버틸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해 두는 것이 좋다. 진짜 능력은 위기 상황에서 나타난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2015년 10월 한국의 한 셰프를 소개했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음식을 만들고 있는 곳이 있다. 뉴욕도 아니고 코펜하겐도 아닌 한국의 외진 암자에 있는 한 비구니 스님이 경이로운 채식 요리를 만든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미셸 브라, 알랭 파사르 같은 반열에 있는 세계적인 셰프다.”

우리나라에 뉴욕타임스가 인정하는 세계적인 스님 셰프가 있다고? 그것도 외진 암자에? 누구지? 세상의 눈이 뉴욕타임스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이제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사찰 요리 전문가 정관 스님이다. 스님은 전남 장성 내장산 기슭에 있는 백양사 천진암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사찰 요리를 공양한다.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 (Chef’s table)’에도 출연했다. 전 세계 유명 셰프들 가운데 단 여섯 명만 나오는 프로그램이다.

정관 스님은 몇 년 전 뉴욕에서 사찰 요리 한 상을 냈다. 국수말이와 우엉양념구이에 탱자로 만든 청(淸)을 얹었는데 먹고 난 이들이 기립 박수를 쳤다. 청은 외국인들에게 낯선 식재료인데 맛도 맛이려니와 이 청을 소개한 스님의 한마디가 맛을 더했다. 1

“300년 된 탱자나무에서 딴 탱자로 청을 담궈 3년을 숙성시킨 것입니다.”

낯설지만 새로운, 정말이지 기가 막힌 맛이 300년이나 된 나무의 열매에서 온 것이라니. 맛이야 두말할 나위 없었겠지만 스토리가 한층 그 맛을 돋웠을 것이다.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맛이 그 오랜 시간에서 오는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자신들의 역사를 통틀어 봐야 200년이 조금 넘는지라 전통을 상당히 존중하는 미국인들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생명은 유한해서 그런지 우리는 오랜 시간을 살아온 생명체에게 생각 이상의 가치를 부여한다. 사람의 일생인 몇십 년 살기가 이렇게 힘든데 몇백 년, 아니 몇천 년을 사는 게 보통 일이 아님을 잘 아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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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말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가 100명 가까운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테이블을 놓았을 때 몰려든 사람들이 좋은 예다. 크기도 그렇지만 4만8600년이나 된 거대한 카우리 소나무로 만들었다는 말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거기에 앉으면 왠지 그 오랜 시간을 살아온 기운을 느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는 사람이 많았다. 크고 오랜 천년 고목에 사람들이 소원을 빌듯 그런 마음이 우리 안에 있고, 그런 마음이 오래 살아온 생명력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이상한 건 이런 찬사가 오랜 시간을 살아온 동물 생명체에겐 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1억 년 이상의 장수 생명체들이 대표적이다. 알다시피 1억 년이라는 시간은 탱자나무의 300년과는 비교도 할 수도 없는데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몰라서 그렇지 알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러면 지금부터 우리가 흔히 보는 것 중 일부를 소개하겠다. 어떤 마음이 드는지 스스로 헤아려 보기를.

여름이면 나타나는 모기와 파리, 가을이면 흔히 볼 수 있는 귀뚜라미는 어떨까? 놀랍게도 이들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2억 년 너머까지 간다. 2억 년은 1억 년과 비교도 안 되는 시간이니 우러러보는 마음이 한층 높아야 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귓등으로 흘린다. 아무리 오래돼도 작고 하찮으면 눈길을 받기 힘들다. 거대하거나 우람하거나 보기에 뭔가 달라야 한다. 더구나 귀찮게까지 하는 해충들 아닌가? 마음이 꿈쩍도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 오랜 시간 겪었던 수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이겨낸 생존의 지혜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존재 자체는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될지 몰라도 그들의 생존력은 충분히 배울 만하다. 웬만큼 탁월하지 않고서 어떻게 1억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올 수 있겠는가. 지난 회에 이어 다시 한번 구구절절 강조하는 건 장수 생명체 대부분이 비호감이어서다. 외면만 보지 말자는 것이다. 이번 회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몇 번 더 별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잠시 옆으로 모셔 두자는 얘기다.

언젠가 학자들이 뱀상어의 배 속에 뭐가 들었을까 싶어 자연사한 상어를 해부해봤다. 뱀상어는 400종 정도 되는 상어 중 아주 미끈하게 생기고 활동력도 좋은 녀석들인데 영어로는 타이거샤크(tiger shark, 호랑이상어)로 불린다. 호랑이를 소문으로만 들었던 서양인들이 호랑이처럼 무시무시한 성질을 가졌다고 붙여준 이름이다. 최대 길이 6m, 최대 무게 1t까지 자라는데 이 정도면 바다 생태계에서 꽤 존재감 있는 편이라 이 덩치를 무기로 먹을 만하다 싶으면 무조건 돌진, 일단 꿀꺽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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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 스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요리계에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말이 있다. “당신이 뭘 먹는지 알려주면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겠다.”(장-앙텔므 브리야-샤바랭) 학자들이 뱀상어의 위장을 궁금해한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상어의 위장은 뭘 알려줬을까? 열어 보니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즐비했다.

‘오버코트 세 벌, 비옷 한 벌, 운전면허증 하나, 신발 몇 켤레, 소 발 하나, 사슴뿔, 아직 소화되지 않은 바닷가재 12마리, 반쯤 소화된 닭들이 가득한 닭장 한 개.’

식성이 특별한 상어인가 싶어 다른 뱀상어의 위장도 조사해봤다.

‘물고기, 신발, 맥주병, 석탄, 개, … 사람의 신체 부위.’ 2

어느 한 개체의 특별한 취향이 아니었다. 학자들이 이들을 ‘바다의 쓰레기통’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런데 이게 상어의 장수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있다. 이게 바로 이들이 4억 년 넘게 살아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살만 하면 대멸종이 전 지구를 휩쓸었다. 이들에게 산다는 건 이런 세상에서 살길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광대한 우주에서 날아온 암석들이 뭉쳐져 만들어진 지구는 뜨거운 불바다로 시작했다. 불바다가 어느 정도 잦아들면서 생명이 탄생했지만 이후에도 세상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먹을 걸 찾는 게 급선무였다. 길게는 몇천 년씩 지속되는 대멸종이 닥칠 땐 좋아하던 것, 먹어왔던 것들을 더이상 구할 수 없다는 뜻이니 빨리 다른 먹을거리를 구해야 했다. 당연히 그전까지 먹지 못했던 걸 먹을 수 있는 생명체만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장수 생명체들에게서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뭐든지 먹을 수 있는 식성, 잡식성이다. 먹는 걸 별로 가리지 않는다. 식성이 까탈스럽지 않다.

이 조건은 지금도 유효하다. 가끔 멸종 위기에 몰렸다고 뉴스를 타는 동물들을 보면 대체로 식성의 폭이 좁다. 북극곰은 바다표범 같은 고기만 먹는데 얼음이 사라지면서 바다표범이 사라지다 보니 자신들 또한 사라져가고 있다. 이미 평균 체중이 상당히 줄었다는 연구가 있다. 북극곰의 서식지 아래쪽에 사는 회색곰들은 인간의 개발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잡식성이다. 딸기부터 조개까지 못 먹는 게 없다. 먹을 게 없으면 들판에 지천인 딸기를 하루에 몇만 개씩 먹는다. 당연히 북극곰보다 훨씬 높은 생존력을 자랑한다.

중국의 판다도 북극곰과 마찬가지 신세다. 옛날에는 대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그것만 먹고도 편히 잘살 수 있었는데 개발 바람이 불면서 대나무 숲이 사라지자 같이 사라지고 있다. 다른 먹이로 전환해야 하는데 변화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신체 변화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인간 때문에 멸종 위기 상황에 몰렸는데 인간의 보호 정책 덕분에 멸종을 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2000마리 정도로 늘어나 멸종은 가까스로 면한 상태다.

이 같은 장수의 조건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요즘처럼 패러다임 자체가 변화할 때나 심각한 불경기에는 빨리 다른 먹이(수익원)를 찾아내는 것이 생존을 좌우한다. 높아지는 세상의 불확실성이 내 삶의 불확실성을 높인다면 생존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럴 땐 다른 에너지원을 찾아 신속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 있을 수 있는 능력을 구축해야 한다. 새로운 능력을 만들어내야 한다. 생명의 역사가 진화의 역사인 것도 이런 까닭이다.

평상시에는 큰 덩치가 장점이지만 변화의 물살이 거셀 때 덩치는 짐이 될 때가 많다. 먹이 구하기는 물론이고 기후변화에 적응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덩치 큰 존재가 1억 년 넘게 살았다는 건 대단한 것인데 상어는 덩치를 장점으로 적극 활용했던 것 같다. 큰 덩치를 저장고로 삼아 먹이를 구할 수 없는 시기를 넘기는 것이다.

인간에겐 하나뿐인 간을 세 개나 갖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작지도 않다. 3t에서 5t쯤 나가는 백상아리의 간을 보면 하나가 어른 키만 하다. 이런 간이 심장 근처에서 꼬리 근처까지 기다랗게 자리 잡고 있다. 알다시피 간은 해독 작용도 하지만 대표적인 영양 창고 기능을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넓은 바다에서 살다 보면 몇 주씩 굶는 게 일상적이라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돌발 상황이 생겨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보릿고개’를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돈을 버는 것(사냥)도 중요하지만 저축(저장)하는 것도 능력인 것과 같다.

상어의 위장 속에 다양한 물건이 들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뭐든 가리지 않고 먹고, 먹을 수 있겠다 싶으면 일단 먹어 두는 것도 그렇게 해서 간에 저장을 해두어야 무슨 일이 일어날 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창고’ 안에는 곧바로 꺼내 쓸 수 있는 성분인 지방이 가득 들어 있는데 무게를 재보면 몸무게의 10∼25%, 많게는 30%씩이나 되고 무게는 50㎏이 될 정도로 무겁다. 이 거대한 영양 창고를 생태학적으로 해석하면 세상에 불확실성이 가득하다는 걸 상어들이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어느 정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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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커다란 덩치로 2억 년 넘게 살아오고 있는 악어도 비슷하다. 이들은 먹고 사는 게 영 아니다 싶으면 동면과 비슷한 여름잠(하면, 夏眠)에 들어간다. 작은 굴 같은 곳에 들어가 1년 동안 거의 먹지 않는 상태로 지낸다. 신진대사를 최저로 한 다음 가(假)수면 상태로 최악의 시절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이들도 간이 큰데 이들 역시 상어처럼 무엇이든 있을 때 많이 먹어 둔다. 위가 축구공 정도로 작은데 어찌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는가 싶지만 방법이 있다. 위에 오래 남겨두지 않고 곧바로 지방이나 다른 영양분으로 전환해 간에 저장한다. 이런 식으로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다.

그 덕분에 최장 6개월 정도는 먹을 게 없어도 버틸 수 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탁월한 ‘존버’ 능력이다. 세상이란 곳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이런 시기를 넘기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맷집과 비위가 좋고 식성이 까탈스럽지 않아 웬만한 어려움 정도는 끄떡없이 이겨낼 수 있다.

몇 년 전 어떤 모임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어떤 이가 손정의가 회장으로 있는 소프트뱅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프트뱅크가 국내 투자 기업들에 이와 비슷한 경영 코칭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특히 매출이 전혀 없다고 가정하고 적어도 2년 이상을 버틸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해 두라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많은 유망한 스타트업이 일시적인 자금 부족으로 쓰러지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살아가는 원리는 같다는 말을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나 불확실성을 견뎌내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덩치가 비교적 큰 동물들은 이런 식으로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 있지만 작은 동물은 어떻게 험난한 시기를 넘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생명체가 있다. 상어와 악어보다 더 비호감인 바퀴벌레다(물론 좋아하는 이들도 있긴 있다. 이들을 퇴치하는 회사들이다). 3억 년 전쯤 생겨난 이들은 상어보다 역사도 덜 됐고 상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지만 이 세상을 오랫동안 주름잡았던 공룡이 사라진 후에도 살아남은 주인공이다. 무려 세 번의 대멸종을 견디고 살아남은 생존자답게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을 정도로 번성 중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토록 공들여 퇴치 작업을 벌이는 데도 사라질 줄 모른다. 우리에겐 골칫거리지만 생태학적으로 보면 그만큼 생존력이 강하다는 뜻이다.

이들의 번성 역시 그냥 이뤄진 게 아니어서 자세히 보면 독특하고 차별화된 능력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들의 생존력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이 알려졌기에 여기서는 과학적인 연구들이 밝혀낸 ‘고급 능력’만 소개할 텐데 놀라운 능력들이 즐비하다.

이들은 목이 잘리고도 2주 동안 살 수 있다. 머리가 없는 채로 2주를 사는 것이다. 머리가 붙어 있다면 숨을 쉬지 않고 40분을 버틸 수 있다.3

게다가 우리 인간이나 대부분의 생명체는 방사선에 아주 약한데 이들은 강하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보다 무려 10만 배 이상의 방사선에도 끄떡없다. 방사선을 막아내는 ‘특수 갑옷(껍데기)’을 개발한 덕분이다. 그래서 요즘엔 이 골칫거리들을 활용할 방법을 찾고 있다. 잘만 훈련하면 방사능 사고 현장에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먹지 못하는 것을 먹는 것이야말로 차별화된 능력인데 이런 능력을 갖춘 녀석들이 많다. 이들은 대체로 동물 사체 같은 것을 분해해서 에너지를 얻는데 이 범위를 넓히는 녀석들이 나타나고 있다. 무엇이든 먹는 식성이 그것이다. 여기서 ‘무엇이든’이란 치약, 합성섬유, 스티로폼 같은 것들이다.

앞에서 말한 장수의 조건도 갖추고 있다. 먹을 게 없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 한 달을 버틸 수 있다. 이 작은 몸에 어떤 장치가 있는지 몰라도 위기를 견디는 능력이 대단하다. 단점은 없을까?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단점이 하나 있긴 하다. 피부가 약해 수분이 쉽게 빠져나간다. 그래서 물이 없으면 오래 살 수 없다. 축축한 곳에 사는 것이 이 이유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단점 또한 극복하고 있는 중이다. 독일바퀴벌레는 물이 없어도 1주일을 산다. 계속해서 적응력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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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식력도 감탄할 만하다. 교미를 한 암컷은 바로 수정시키지 않고 몸속에 간직하고 있다가 상황이 괜찮다 싶을 때 수정을 시킨다. 새끼들이 자라나기 좋을 때 낳는 것이다. 그래서 짝짓기 한 번으로 평생 알을 낳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만 마리의 새끼를 낳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1년 정도 사는 암컷이 최대 200만 마리(보통 150만∼180만 개의 알)를 생산할 수 있다. 아무리 쫓아다녀도 이들을 없앨 수 없고 이들을 전문적으로 쫓는 사냥꾼, 즉 바퀴벌레를 잡는 회사들의 산업이 날로 성장하고 있는 이유다. 다음 대멸종 사태가 닥치면 인간보다 이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연구팀이 센서가 부착된 최첨단 ‘경기장’을 만들어 놓고 미국바퀴벌레의 달리기 실력을 재봤다. 세상에! 초당 1.5m를 달렸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이들은 6개의 다리를 갖고 있는데 긴 다리마다 3개의 관절을 장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다리를 초당 25번이나 휘저을 수 있다. 어, 하는 순간 말 그대로 바퀴처럼 굴러 사라지는 것이다. 몸 구조 또한 납작해 웬만큼 좁은 틈은 바람처럼 통과할 수 있다. 더구나 밤에만 활동하니 잡기가 힘들다.

이전 기고문에서 상어의 장수 비결을 말할 때 운동 능력뿐 아니라 탁월한 감각 능력(상황 파악 능력)이 필수적이라고 했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다. 몸 뒤쪽에 있는 미엽(cercus)으로 주변의 공기 속을 흐르는 뭔가 미심쩍은 걸 예민하게 탐지한다. 1마이크로미터(100만 분의 1m)보다 작은 공기 입자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동물의 왕국 전체에서 가장 민감한 성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레이더를 원거리 탐색용으로 쓰고 가까운 상황 파악에는 다리털을 이용한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날개도 있다. 에너지가 많이 들어 잘 쓰지 않고, 꼭 필요할 때만 쓰는 데다 주로 밤에 쓰기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날 밤, 천장에서 조용히 날아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뭔가 이상해서 눈을 뜨는 순간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눈치채지 못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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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더 대단한 건 우리 인류가 동굴 생활을 할 때 이미 우리의 미래를 알아봤는지 인류와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기네들이 결정한 것이긴 하다. 그 덕분에 인류가 번영할수록 같이 번성하고 있다. 다른 곤충들은 겨울이 되면 고치를 짓고 그 안에 들어가야 하지만 이들은 그럴 필요가 없고, 먹을 것 또한 널려 있을 정도라 핍박받는 것에 비하면 ‘가성비’가 좋다. 뉴턴의 표현대로 하자면 ‘거인의 어깨 위에 서는’ 전략이 성공한 것인데 시대 흐름이라는 파도에 멋지게 잘 올라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전 세계에 5000여 종이 넘는 다양성을 자랑한다. 어디서든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을 종합하면 수억 년을 살아온 장수 생명체들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예기치 않은 변화가 닥쳐도 어떻게든 살아갈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능력을 갖춰야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듯 진짜 능력은 상황이 좋을 때보다 좋지 않을 때 나타난다. 무엇이 진짜 능력인지, 누가 그것을 갖췄는지 드러난다. 비록 비호감이지만 제대로 된 생명력으로 수억 년을 살아온 이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생존의 교훈이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 araseo11@naver.com
필자는 경향신문, 이코노미스트 등에서 경영 전문 기자로 활동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대한민국 리더의 고민과 애환을 그려낸 『사장으로 산다는 것』을 비롯해 『사장의 자격』 『시작하라 그들처럼』 『사자도 굶어 죽는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등이 있다.

  • 서광원 |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필자는 경향신문, 이코노미스트 등에서 경영 전문 기자로 활동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대한민국 리더의 고민과 애환을 그려낸 『사장으로 산다는 것』을 비롯해 『사장의 자격』 『시작하라 그들처럼』 『사자도 굶어 죽는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등이 있다.
    araseo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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