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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시대 중국 상인 이야기

지역 엘리트로 성공한 휘주 상인의 비밀

조영헌 | 329호 (2021년 09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중국 15∼18세기 대운하시대 활동했던 10대 상방 중 제일로 꼽히는 상인은 휘주 상인이다. 휘주 상인은 상업이 크게 번성했던 양주 지역에 후발주자로 등장했지만 대운하가 관통하는 물류의 거점이라는 지리적 조건을 십분 활용해 유통망을 복구시켰고, 새로운 왕조의 경제 안정을 도모했다. 휘주 상인은 창의적인 대응 능력과 더불어 빈민 구휼 등 지역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지역의 새로운 엘리트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편집자주
중국 상인을 심층적으로 연구해 온 조영헌 고려대 교수가 ‘대운하 시대, 중국 상인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과도기적 역사 속에서 신속한 대처 능력과 전략적 투자로 입지를 넓혀 나간 역사 속 중국 상인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난세를 극복하는 경영의 지혜를 익히시길 바랍니다.

중국에서 상인은 언제부터 천시받지 않았을까?

오늘날 광범위한 지역에 점포를 개설해 많은 자산을 운용하는 비즈니스맨, 즉 상인을 천시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성공한 비즈니스맨의 사회적 영향력은 한 국가를 넘어 글로벌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비즈니스맨의 위상이 이렇게 높아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상인의 사회적 위상은 상당히 낮았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똑똑한 자식은 가업을 잇게 하기보다는 공부를 시키려 했고, 수많은 이를 먹여 살린 상인이었더라도 조정에 밉보이는 순간 그동안 쌓았던 부와 명예를 순식간에 잃었다.

그나마 중국의 상인은 한국의 상인보다는 나아 보였다. 물론 중국인은 타고 난 장사꾼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중국의 역사를 봐도 오래전부터 상당한 위세와 영향력을 지닌 상인 혹은 상인 출신의 정치가들이 배출된 바 있다. 은허(殷墟)를 도읍으로 두었던 나라의 이름이 ‘상(商)’이고 상나라 사람들이 물물교환 형태로 이뤄지는 상업에 능했기에 그 후예 가운데 장사꾼들을 ‘상인(商人)’으로 불렀다. 춘추(春秋)시대 제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끌며 도읍지 임치(臨淄)를 전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로 발전시켰던 재상 관중(管仲, ?∼기원전 645)도 상인 출신이었고, 전국시대(戰國時代) 후반 진(秦)나라가 통일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놓았던 재상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35) 역시 대표적인 상인 출신 정치가로 손꼽힌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 중국의 상인들은 사회의 말단 신분이라는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들은 오랜 기간 농업을 ‘본업(本業)’이라 중시하고 상업을 ‘말업(末業)’이라 천시하는 중농억상(重農抑商)이라는 억압적 인식 속에서 인내하며 실력을 연마해 나갔다. 조선시대 중국을 방문했던 사신들의 눈과 감각으로도 명(明)과 청(淸) 왕조는 사회경제적으로 현저하게 발전했고 상인들의 위상도 남달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중국의 상인들 역시 문인층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서 ‘인내(忍耐)’를 격언으로 삼으며 살아가야 했다.

이러한 인고의 세월 가운데 드디어 상업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태도에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대체로 명•청 시대에 본격적으로 발생했다고 파악한다. 그래서 일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는 이 시기를 ‘자본주의 맹아’가 싹텄던 시기로도 불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명나라(1368∼1644)만 해도 276년이고, 청나라(1644∼1911)의 267년까지 합하면 도합 543년이나 되기에 519년간이나 지속됐던 조선왕조(1392∼1910)보다도 더 긴 시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변화의 시기를 ‘명•청 시대’로 뭉뚱그려 불렀던 이유는 명과 청이라는 두 왕조를 연속성에서 바라보려는 전통적인 생각의 관성과 더불어 더 적합한 시대 구분을 찾기 어렵다는 비(非)수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좀 더 세밀하게 나눠 상업에 대한 인식 변화와 상인의 활동상을 규명할 때가 됐다. 게다가 19세기 아편전쟁을 비롯한 잇단 전쟁에서 서구 열강에 패배한 후 반(半)식민지를 경험하게 되면서 중국 사회는 글로벌한 세계 경제와 맞물린 사회경제적인 대변동을 경험했으므로 그 이전까지의 경제 시스템과 한 묶음으로 이해하기에 곤란한 부분이 많아졌다. 그래서 이번 연재를 통해 살펴보려는 역사 속의 중국 상인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명•청 시대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 용어가 필요하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상인의 위상 변화가 보편적으로 감지되기 시작하는 시기이자 외세의 강제적인 영향력인 ‘불평등조약’ 체제로부터 자유로운 시대적인 상황을 오롯이 담고 있는 시기여야 했다. 오늘날 달러와 유사했던 세계의 은(silver)이 중국으로 흡입되며 중국의 상품경제를 한껏 고무시키면서도 전통적인 사회경제적 시스템이 유지되던 마지막 시기가 적합했다. 바로 ‘대운하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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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와 조응하는 ‘대운하 시대’의 사회경제적 특징

‘대항해 시대’가 아니고? 아마도 많은 독자는 유럽 국가들이 주도했던 대항해 시대라는 용어는 익숙할 테지만 대운하 시대는 처음 들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만약 대운하 시대를 보고 대항해 시대를 떠올렸다면 필자의 의도를 이해할 준비가 돼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필자는 다분히 유럽 중심주의적인 개념인 대항해 시대를 부득불 사용하면서도 오래전부터 불만이 많았다. 워낙 보편적이면서 인상적인 개념인 대항해 시대는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용어와 짝을 이뤄 한때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하여 한국인의 일반적인 역사 인식 속에서 15세기 이래 세계의 패권이 바다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용감하게 진출했던 유럽으로 넘어간 것은 역사의 발전상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부지불식간에 이미 오래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아오던 인디언과 원주민은 유럽에 의해 ‘발견’된 신인류가 됐고, 19세기적 세계 질서의 형성이 역사의 필연인 것처럼 서술하는 유럽 중심주의적 해석에 동아시아의 역사마저 물들어버렸다. 유럽 중심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대 중심주의를 파생시켜 유럽식 근대야말로 온 인류가 나아가야 할 보편성을 지닌 것으로 설정된 상태에서 동아시아의 전근대와 근대가 해석된 것이다.

대항해 시대라는 내러티브를 그럴싸하게 만들어줬던 중국의 내러티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보다 약 80여 년 전에 명나라를 출발해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방문하고 돌아왔던 환관 정화(鄭和)의 거대한 해양 원정대(총 7차례나 파견됐다)가 1433년 정화의 죽음 이후로는 단 한 차례의 진지한 재개의 논의조차 없이 중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일부 관료는 혹시라도 모를 환관들의 득세와 대외 원정의 재개를 두려워해 관련 기록까지 불태워 버렸다. 명나라의 개창자였던 홍무제는 해금(海禁) 1 정책을 강력하게 선포했고, 이는 조공(朝貢)이라는 오래된 중국식 국제 질서와 함께 바다를 완전히 차단하지 않으면서도 중국 상인들의 자유로운 진출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안보(security)를 중시하는 이러한 해양 정책은 청나라를 건립했던 만주족 통치자들에게 근본적인 변화 없이 이어졌다. 그들은 반청(反淸) 세력이었던 대만의 정성공(鄭成功) 집단(=정씨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서 수백 ㎞에 달하는 해안선을 완전히 비워버리는 2 전대미문의 폭압적인 천계령(遷界令)을 수십 년간 시행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정씨 세력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중국 청나라4대 황제 강희제가 1684년 네 곳의 항구를 열면서 해관(海關)을 설치했던 것은 상당히 개방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이는 해외와의 자유무역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실제 운영은 통제적인 개방(controllable openness)에 가까웠다. 그나마 이 사구통상(四口通商) 형태는 후대 황제에게 계승되지 않았기에 청나라의 특성이라기보다는 강희제의 개성으로 볼 수 있다.3 이 모든 현상이 동시대 바다의 항해권을 놓고 경쟁적으로 진출하던 유럽의 여러 나라와 대조되면서 유럽 중심적인 대항해 시대 담론은 역사의 패권을 오랫동안 쥐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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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제시하는 대운하 시대는 그 시점인 1415년부터 종점인 1784년까지 대략 370년을 포괄한다. 이는 철저하게 중국의 대운하(大運河)라는 인공수로 유통망과 물류 체계를 근거로 한 시대 구분으로 왕조나 지배층의 변화와는 상관없는 연도이다. 1415년 중국은 바다를 통한 수도로의 곡물 운송을 중단시킴으로 조운(漕運)을 대운하로 일원화했고 1784년 중국은 그 대운하를 이용한 황제의 강남 지역 순방 4 을 마지막으로 단행했다. 5

이 시대는 이전 시대와 차별되는 두 가지 물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내부적으로 수도로의 국가적 물류 체계인 조운이 북경과 항주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로 일원화됐다. 즉 조운에서 해운이 철저하게 금지됐다. 이는 해금 정책과도 연계된 결과였다. 둘째, 대외적으로 해외와의 교역이 조공과 해금이라는 외피 아래 통제 가능한 소수의 거점 지역으로 제한됐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공적, 사적 교역이 묵인됐다. 즉 국가 주도의 자유로운 교류는 아니지만 제한된 형식이나 사적인 방식의 대외 교류는 활발하게 진행됐다. 이른바 규정을 초과한 조공 무역이나 책봉의 의례(ritual)를 필요로 하지 않는 호시(互市) 무역이 대표이지만 이 둘에도 포함되지 않은 밀무역의 비중도 무시할 수 없었다. 요약하자면 조운이라는 국가적(national) 물류에서는 철저히 해금의 정책적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국제적(international) 물류에서는 통제된 거점과 암묵적인 밀무역을 허용했던 시대가 바로 대운하 시대였다.

이번 연재는 역사 속의 중국 상인 이야기를 담되 대략 15세기에서 18세기에 해당하는 대운하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그 속에는 중국 상인들의 드라마틱한 성공과 실패 이야기가 다수 포함돼 있지만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상인의 위상 변화가 보편적으로 감지되기 시작했던 시대적 상황과 한계를 보여주는 데 주안점을 맞추고자 한다. 즉 중국 상인의 스토리를 그들만의 리그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능한 한 동아시아적 맥락 내지는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소환하고 해석해보고자 한다. 아울러 대운하 시대에 대륙을 주유(周遊)했던 상인들과 그들의 문화를 이해함으로써 오늘날 대국굴기(大國崛起)를 꿈꾸는 중국의 상업 관행과 기업 문화를 장기 지속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는 생각의 단서를 제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에 첫 번째 주제로 대운하 시대에 유럽 대륙만큼 거대했던 중화제국의 거미줄 같은 유통망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상인들의 윤곽을 그리면서 중국 제일의 상인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들이 여러 상인 사이의 경쟁 속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가늠해보는 것부터 시작함이 적당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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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상방’의 출현과 10대 상방

대운하 시대 중국 대륙에 얼마나 많은 상인이 활동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 자료는 없다. 실제 세금을 납부하고 용역을 담당하는 통계상의 숫자만 존재할 뿐 전체 인구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시기였으니 그 속에서 상인이라는 특정 직군의 비중은 가늠조차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 시기에 이르면 농사를 짓다가 상업에 종사하거나 과거를 준비하다 포기하고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는 상업에 뛰어들어 얻어낼 수 있는 이윤이 확대했음을 반증한다. 대체로 1억 명이 채 안 돼 시작된 명나라의 인구가 청나라 중후반에 접어드는 19세기 중엽에는 4억 명에 육박할 정도로 급증했던 인구력이 가장 큰 동력이 됐다. 아울러 인구 증가에 상응해 활성화되는 상품경제와 장거리 유통업의 발전, 은으로 통일되는 모든 경제 지표(은 경제의 확산), 여행업과 사치 풍조의 확산 등은 모두 상업에 뛰어들게 하는 유인 요소가 됐다.

대운하 시대의 상업 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바로 객지로 진출해 상품을 유통하는 객상(客商)의 급증이었다. 이전에도 고향이나 도시에 정착해 장사하는 포상(鋪商)으로 분류되는 상인과 함께 객지를 전전하는 상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확천금을 노리고 객지로 진출하며 시세 차익을 노리는 현상이 유행처럼 확산된 것은 분명 15세기 이후, 즉 대운하 시대에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특별히 소비 인구가 몰려 있는 수도 북경과 경제 최선진 지역인 강남을 연결하며 남과 북을 잇던 대운하는 성공에 대한 포부로 가득 찬 상인들로 북적이는 경제의 동맥이 됐다. 분명 그 시대는 풍운의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 돈 냄새를 따라 전국 각지를 주유하는 객상이 되는 것이 젊은이들에게 일종의 사회적 유행처럼 번져갔다.

이처럼 객상이 급증하자 이들의 존재가 객지에서 현지인들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제 이들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소수의 장사꾼이 아니었다. 특별히 경제 중심지에는 외지에서 진입한 객상들이 끼리끼리 뭉치며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객지에서 상인들이 뭉치는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낯선 객지에서 그들의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워낙 땅덩이가 큰 중국에서 각 지역의 방언마저 다양하다 보니 방언을 심하게 쓸 경우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들이 우선 말이 잘 통하지 않는 타향에 적응하기 위해,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서 먼저 의지했던 사람이 바로 말이 통하는 동족(同族)과 동향인(同鄕人)이었다. 당시 유행했던 소설에도 타향에서 잔뜩 긴장하고 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동향 사투리를 쓰는 동향인을 발견하고 순식간에 서로 흉금을 터놓는 사이가 됐다가 의외의 사기를 당하는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각 지역 관료와 지역 엘리트인 신사(紳士)6 의 주도하에 편찬됐던 지방지에 객상의 존재가 빈번하게 기록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대체로 신사층의 근심과 우려의 대상이 됐던 상인, 특히 무리 지은 객상을 지칭하는 용어가 필요했다. 가령 산서성 출신의 상인들은 ‘진상(晋商)’이나 ‘산우상(山右商)’, 안휘성 휘주부 출신의 상인들은 ‘휘상(徽商)’이나 ‘신안상인(新安商人)’이라 불렸다. 이는 이전과 달리 지역사회의 현안에 언급이 될 정도로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커졌단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이들의 통칭을 묶는 단위는 다양했다. 산서 상인이나 산동 상인처럼 1개 성(省) 단위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휘주 상인처럼 성보다 작은 부(府)를 단위로 부르거나 용유(龍游) 상인처럼 부보다 작은 현(縣) 단위로 불리는 상인 집단도 있었다. 동정(洞庭) 상인도 있는데 여기서 동정은 호남성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 동정호(洞庭湖)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중심지 강남의 소주(蘇州) 서남쪽에 위치한 동정산(洞庭山) 출신을 말한다. 산서성과 인접한 섬서성(陝西省) 출신의 상인들은 종종 산서 출신 상인들과 함께 ‘산섬상(山陝商)’ 혹은 ‘진진(秦晉)’ ‘양적지고(陽翟之賈)’ 등으로 불렸다.

근래에 중국 학계에서는 동향 단위로 묶이는 상인 집단을 상방(商幇) 7 으로 부르곤 하는데 특별히 명•청 시대에 유명했던 집단을 10대 상방으로 정리했다. 장하이펑(張海鵬)과 장하이잉(張海瀛) 교수가 대표로 편집했던 기념비적인 책 『중국십대상방(中國十大商幇)』8 의 순서에 따라 10대 상방을 나열하면 산서 상방, 섬서 상방, 영파 상방, 산동 상방, 광동 상방, 복건 상방, 동정 상방, 강우 상방, 융유 상방, 휘주 상방이 그들이다. 당시 거대 상방을 딱 10개로 꼽는 방식이 보편적이라고 보기는 곤란하지만 대운하 시대를 대표하는 상인의 추세라 말해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10대 상방 중에 제일 상인은 누구였을까?

그렇다면 10대 상방 가운데 제일로 꼽을 수 있는 상인 집단은 누구였을까? 어려운 질문이지만 누구나 알고 싶어 하는 주제일 것이다. 상인을 십수 년 동안 연구한 필자도 이에 한마디로 답하기가 주저된다. 아마 중국의 역사학자들도 자신이 전공으로 하는 지역 상인을 제일로 꼽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고, 시대나 지역에 따라 가장 유력한 상인이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제일 상인을 꼽으려면 우선 시대와 지역이라는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필요한데 15∼18세기에 해당하는 대운하 시대에 한정한다면 대체로 두 집단을 꼽는 데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바로 산서 상인과 휘주 상인이다.

하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대운하라는 경제의 대동맥에 주목한다면 산서 상인보다는 휘주 상인의 영향력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화됐음이 분명하다. 특히 경제 중심지인 강남 지역에서 휘주 상인의 영향력은 여타 상인들을 압도했다. 당시 출판 시장도 강남에 집중됐고 시대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소설의 작가군도 강남 지역에 편중돼 있었다. 이번 연재에서 자주 인용할 소설 『삼언(三言)』 9 과 『이박(二拍)』10 의 편저자인 풍몽룡(馮夢龍, 1574∼1646)과 능몽초(凌濛初, 1580∼1644) 역시 강남 지역 출신이다. 그러다 보니 대운하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소설에서 휘주 상인은 단골손님처럼 등장한다. 이는 실제 당시 상업계에서 휘주 상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남 지역에 편중된 도서시장의 취향을 반영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산서 상인과 휘주 상인이 맞붙였던 대표적인 도시는 대운하와 양자강이 교차하는 요충지에 위치한 양주(揚州)였다. 양주는 교통의 요지라는 특성상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처음 개착한 수나라 이래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대운하 시대에 양주는 가장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했던 염업(鹽業)의 중심지11 라는 기능까지 덧붙여져 거대 상인들의 치열한 경쟁의 장이었다.

선두주자는 산서 상인과 섬서 상인이었다. 북변으로의 곡물 운송과 소금 유통의 면허장인 염인(鹽引) 교환을 연계시킨 명나라의 개중법(開中法)이 시행되면서 북변에 인접한 산서와 섬서 출신의 상인이 양회 염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양주로 집결했다. 그들은 고향과 거리가 먼 양주에서 객상으로 정착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기보다 협력 관계를 형성했다. 16세기 중엽 중국 동남 연해 지역을 교란시켰던 왜구 세력이 양주에 침입했을 때 관리를 도와 양주를 지키기 위해 활 잘 쏘고 용맹한 500명의 가속을 ‘상병(商兵)’으로 차출했던 이들이 바로 산서 상인과 섬서 상인들이었다.

후발주자는 휘주 상인이었다. 그들은 1492년 소금 유통의 먼허권을 교환해주는 대가가 곡물 운송에서 은으로 납부하는 염세(鹽稅)의 납부 능력으로 바뀌는 운사납은제(運司納銀制)의 실시를 계기로 양주에 진출해 염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양주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휘주 출신의 객상들은 선두주자인 산서, 섬서 상인들과 협력보다는 경쟁 구도를 이뤘다. 『천공개물(天工開物)』의 저자로 각종 경제적인 상황에 밝았던 송응성(宋應星, 1590∼1650)은 17세기 초 양주 염업계에서 휘주 상인을 산서, 섬서 상인과 함께 3대 자본가로 손꼽았다. 12 1605년 출간된 양주의 지방지에는 양주의 사치 풍조를 외부에서 온 객상들이 주도하는데 “휘주 상인이 가장 성하고 산서, 섬서, 강서 상인이 그다음이며 토착인은 열에 하나일 뿐”이라고 한탄했다. 13 그리고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천붕지열(天崩地裂)의 동란기를 거치면서 잠시 양주를 떠나 고향으로 피신했던 휘주 상인들은 지리적 인접성을 근거로 재빨리 양주로 돌아와 새로운 지배자인 만주 지배층의 양주 재건 사업을 음양으로 도우면서 18세기까지 양주 염업계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해나갔다. 양주의 주도권에서 밀린 산서 상인은 활동 지역을 북변과 몽골 지역 등지로 전환했고, 일부는 환어음을 취급하는 표호(票號)를 개설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경제 대동맥인 대운하의 유통망을 둘러싼
경쟁과 비교 우위의 비결

휘주 상인의 위상 변화 과정에는 다양한 요인이 존재했지만 여러 요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대운하이다. 대운하가 짊어지고 있는 국가적 물류의 부담이 운하가 관통하는 지역, 특별히 휘주 상인이 후발주자로 진출했던 양주나 회안과 같은 지역(회•양 지역)에 고스란히 전수됐기 때문이다. 지역민들과 함께 이러한 부담을 함께 짊어지고 책임 있게 대처하는 자만이 진정 지역사회의 리더로 인정받기 마련이다.

휘주 상인은 은 경제의 확산, 염운법의 변화, 장거리 유통업의 확산이라는 상황 변화 속에서 자신들이 진출한 회•양 지역의 현안인 대운하에 관련된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후발주자’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는 재주가 있었다. 보통 지역사회의 현안에 대한 해결은 일차적으로 문인 엘리트인 신사(紳士)에게 요청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운하시대 회•양 지역은 달랐다. 물류의 중심이자 유동 인구가 워낙 많았던 지역이기에 현지에 오래 정착했던 문인 가문의 세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약했다. 게다가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동란기에 심각한 파괴와 학살을 경험하면서 그나마 있던 신사층의 존립 기반마저 큰 타격을 입었다.

위기의 순간에 다시 회•양 지역으로 과감하고 신속하게 복귀한 이들이 바로 휘주 상인이었다. 도시의 경제 기반이 대부분 파괴되고 정권은 이민족에게 넘어갔으므로 복귀 결정은 사실 ‘모험’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운하 유통망을 회복시켜 새로운 왕조의 경제적 안정과 통합을 희구하던 만주인 정권의 필요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사실 양주는 명 말에 만주족의 통치에 저항하는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도시였기에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에 기록돼 있듯 ‘수십만’의 무고한 백성들이 본보기로 학살을 당했던 비극의 도시였다. 그러나 대운하가 관통하는 물류의 거점이자 양자강, 황하, 회수가 교차하는 수리(水利)의 중심지라는 양주와 회안의 지리적 조건은 변함이 없었다. 만주 통치자에게도 양주를 비롯한 회•양 지역의 경제 회복 없이는 수도 북경으로의 물자 조달(조운)이나 엄청난 염세의 징수(염정), 그리고 고질적인 황하-대운하-회수로 연동된 홍수나 범람의 위험성 극복(하공)을 이뤄낼 수가 없었다. 조운, 염정(鹽政), 하공(河工)으로 구성된 삼대정(三大政)을 유지하고 지역사회를 수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됐고, 새로운 통치자 역시 누군가의 후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때 문화적 자존심이 강한 문인 신사보다 시세 파악이 빠르고 대처 능력이 뛰어난 휘주 상인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휘주 상인은 지역사회의 필요와 국가 권력의 기대를 동시에 충족시켰다. 그들은 대부분 양자강과 대운하를 이용한 유통업에 종사했던 경험이 풍부했으므로 지역사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민감하게 인식하고 대응 전략을 발 빠르게 마련했다. 후발주자이자, 이방인이자, 상인 특유의 강한 성공욕과 주류사회에 포함되지 못하고 겉도는 상황이 겹쳐지면서 오히려 창의적인 대응 방식이 속출했다.

운하 준설을 통해 조운과 염운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 수재가 발생할 때 제방을 수축하거나 수재민을 구호하는 것, 수로 이용자들의 안전을 위해 구생선(救生船)을 운영하거나 수신(水神) 사당을 재건하는 것, 빈민층과 유동 인구를 위해 각종 사회 기구를 건립•운영하는 것, 그리고 황제가 대운하를 이용해 시행하는 남순(南巡)을 거행할 때마다 수로를 정비하고 연회를 마련하는 것 등은 모두 휘주 상인에게 창의적인 전략적 ‘투자’였다. 그 결과 휘주 상인은 지역사회의 주류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더 나아가 황제로부터 관원의 직함까지 하사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휘주 상인에게 대운하는 단순한 상품 유통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대운하는 회•양 지역에 객상으로 진출해 결국은 엘리트로 정착하게 만들어줬던 ‘생명수’와 같은 의미가 있었다. 14

대운하 시대(1415∼1784) 휘주 상인은 회•양 지역에서 대운하와 밀접하게 관련된 각종 지역사회의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면서 외래 상인이자 체류자(sojourner)의 정체성을 탈피하고 정착자(settler)이자 지역 엘리트(local elite)로서의 위상을 확립해 나갔다. 후발주자이자, 이방인이자, 차별받는 상인이라는 불리한 상황에서 지역사회의 현안인 대운하와 물류의 문제를 돌파하는 창의적인 대응 방식이 도출됐다. 이것이 바로 회•양 지역을 비롯한 대운하 거점 도시에 진출했던 휘주 상인의 성공 비결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양자강 일대에는 “휘주 상인이 없으면 시진(市鎭, 중소형 경제 도시)이 형성되지 않는다(無徽不成鎭)”는 속담이 생겨났다. 15 또한 진거병(陳去病, 1874∼1933)은 18세기 이래의 양주를 돌아보며 “양주의 흥성은 실로 휘주 상인이 열었으며 양주는 휘주 상인의 식민지였다”고 회고했다. 16

앞서 살펴봤듯이 휘주 상인은 절대 강자가 사라진 과도기적 상황에서 과감하고 신속한 대처 능력과 창의적인 전략 투자로 지역사회의 필요를 충족해 불리한 상황을 역이용하며 회•양 지역의 엘리트로 정착할 수 있었다. 이는 현대의 조직이나 개인에게 작용해도 마찬가지의 미덕이 될 것이다. 국제 정세의 급변과 IT의 발전으로 빠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는 기업이나 조직이 있다면 회•양 지역에 정착해 중국 제일의 상방이 된 휘주 상인과 같은 기지를 발휘해 봐도 좋을 것이다.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chokra@korea.ac.kr
필자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방문 학자와 하버드-옌칭 연구소 방문 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국 근세 시대에 대운하에서 활동했던 상인의 흥망성쇠 및 북경 수도론이 주된 연구 주제이고, 동아시아의 해양사와 대륙사를 겸비하는 한반도의 역사 관점을 세우는 데 관심이 있다. 저서로 『대운하 시대, 1415-1784: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엘로우 퍼시픽: 다중적 근대성과 동아시아(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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