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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게임 즐기던 소년병을 바꾼 힘

김정수 | 38호 (2009년 8월 Issue 1)
1990
년대 중반, 서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10대 소년병들이 ‘사람 죽이기’ 시합을 하고 있다. 그들 앞에는 5명의 포로가 떨고 있다. 총을 쓰지 않고 가장 빨리 포로를 죽이는 사람이 상을 받는다. 어린 소년들은 저마다 총에 달린 단도를 매만진다. 드디어 시작 명령이 떨어지자 이 중 한 소년이 단칼에 포로의 목숨을 끊고 분대장 자리를 꿰찬다. ‘사람 죽이는 일이 물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쉽고 익숙한’ 소년들은 환호하며 승리를 자축한다.
 
시에라리온은 1700년대 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중심지였다. 1808년 영국의 식민지가 됐고, 1961년에야 독립했다. 이 나라는 독립 이후 수없이 많은 내전과 쿠데타를 경험했으며, 국민들은 끊임없이 피를 흘렸다. 이 와중에 소년병들이 등장했다. 병력 부족 때문에 고심하던 정부군과 반군은 10대 소년들을 강제로 징집했다. 소년들은 자기 키보다 더 큰 총을 메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장의 잔인함을 극한까지 겪어야 했다. 반군들이 불에 태운 시체를 들개들이 조각내 물고 다니는 모습을 지켜보고, 발가락이 썩어가는데도 야생 마약을 씹어가며 고통을 잊었다. 적개심을 주체하지 못해 심장을 도려내 죽어가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눈을 빼낸 후에야 숨통을 끊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사를 모르고, 불에 탄 시체를 볼 때마다 혹시나 가족들은 아닌지 하나하나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시에라리온의 어린 소년들에게는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생지옥이었다.
 
 

 
소년병 시절의 경험 집필
이스마엘 베아는 이토록 생생한 전쟁의 참상을 <집으로 가는 길(A Long Way Gone)>이라는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써냈다. 시에라리온 출신인 그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국제연합(UN)을 비롯한 각종 사회 단체에서 소년병 구제를 위해 외교관 못지않은 활약을 하고 있다. 뉴욕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도 운영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같은 나라 출신에 비슷한 또래지만 총칼을 분신처럼 지니고 하루하루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시에라리온의 10대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이 있다. 베아 자신도 10여 년 전인 1998년까지 정부군 소속의 소년병이었으며, <집으로 가는 길>의 모든 내용은 바로 본인의 경험담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불과 10년 만에 그의 인생에 이렇게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1996년 당시 15세의 베아는 전쟁터에서 한창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어느 날 유엔아동기금(UNICEF) 소속 민간인들이 부대를 찾아왔다. 부대장은 한참 얘기를 나눈 후 부대원들 중 어린 축에 속하는 15명을 불러 민간인 트럭에 오르게 했다. 베아는 소년병들을 위한 재활원에 가게 됐고, 이 사건은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첫 단추가 됐다.
 
하지만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총과 마약을 빼앗긴 소년병들은 정신이상 증세와 극도의 공격성을 보였다. 수돗물을 틀었을 때는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환영에 시달렸고, 아무 이유 없이 지나가는 민간인들에게 돌을 던져 머리를 깨뜨리기 일쑤였다. 유리창을 손으로 깨서라도 피를 흘리고서야 안정이 찾아왔다.
 
고국 떠나 뉴욕으로 탈출
베아의 마음을 돌려놓은 이는 간호사 에스더였다. 그녀는 베아가 좋아할 만한 노래를 녹음해 들려주고, 잔인함으로 가득 차 있던 소년병의 마음을 서서히 돌려놓았다. 그러던 중 또 하나의 기적이 찾아왔다.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에 살고 있는 삼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베아는 삼촌의 직업이 목수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것도 없었고, 이전에 삼촌을 만나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름과 직업이라는 2가지 단서만으로 수소문해 삼촌을 찾았다. 삼촌은 그를 집으로 데려가 친자식처럼 키워줬다. 베아는 최소한 시에라리온의 평범한 소년으로는 돌아가게 됐다.
 
삼촌 집으로 옮겨간 지 얼마 후, 베아는 UN이 뉴욕에서 열리는 ‘소년병들의 실상 파악을 위한 회의’에 참가할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글을 제대로 읽을 줄도 몰랐지만 “저는 전쟁을 경험해봤고, 소년병들의 실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라는 진솔한 말 한마디로 선발됐다. 숲 속을 맨발로 누비던 소년병에게 뉴욕의 록펠러 센터와 (지금은 사라진) 쌍둥이 빌딩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는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며칠간의 여정을 끝내고 다시 시에라리온으로 돌아온 그에게 뉴욕은 평생 추억으로만 남을 장소였다.
 
베아가 돌아온 후 도시는 다시 내전에 휩싸였다. 이 와중에 삼촌이 죽었고, 그에게는 다시 한 번 불행의 그림자가 씌워졌다. 베아는 ‘왜 나만 빼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죽는 걸까?’ 하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시에라리온을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 뉴욕 회의에서 만났던 작가 로라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 미국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고는, 며칠 밤낮을 걷고 버스를 얻어 타며 인근 국가인 기니로 잠입했다. 그곳 시에라리온 대사관에 일단 피신을 한 후, 천신만고 끝에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한 번밖에 만난 적 없는 로라는 이런 그를 도와주고, 급기야는 양자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거짓말 같은 ‘인생 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불과 10년 만에 베아는 소년병에서 대학을 졸업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변신했다.
‘약한 고리’의 힘
베아가 전쟁터의 참상에서 벗어나 오늘날의 성공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언뜻 생각해보면 ‘운이 좋았다’는 것 외에는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들이 농담처럼 하는 얘기 중에 “열심히 하는 사람은 머리 좋은 사람을 못 당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즐기면서 하는 사람을 못 당하며, 즐기면서 하는 사람은 운 좋은 사람을 못 당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운은 성공의 큰 열쇠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베아도 본인의 노력 못지 않게 우연과 운이 따랐고, 크게 성공한 기업의 뒤에는 기적 같은 행운의 신화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렇다면 운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일까? 우리는 그냥 행운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 베아의 사례를 살펴보자. 필자는 그의 성공에서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운의 원천은 네트워킹’이란 시사점을 찾아낼 수 있다고 본다. 베아는 운명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실낱같은 네트워크를 통해 희망을 찾아냈다. 프리타운에서 찾은 생면부지의 삼촌과 그를 뉴욕에서 살게 해준 작가 로라가 그랬다.
 
롭 크로스와 앤드류 파커는 저서 <사회적 네트워크의 숨은 힘(The Hidden Power of Social Networks)>(HBS Press, 2004년)에서 재미있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이들은 직장인들에게 ‘공식적 보고 라인을 떠나서 가장 많이 커뮤니케이션하게 되는 사람’을 써내도록 했다. 그리고 이름이 나온 사람들을 점으로 표현한 후, 자주 커뮤니케이션하는 사람들을 선으로 연결했다. 그 결과 수많은 선이 뻗어 나가는 소수의 사람, 즉 커뮤니케이션의 허브(hub)와, 이보다 훨씬 적은 수의 선이 뻗어 나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느 직장에서건 그림의 모양은 비슷했다. 허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부서 간의 정보를 연결하고, 그러면서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며, 한 부서의 시각으로는 생각해낼 수 없는 아이디어들을 내놓는다. 즉 네트워크가 좋은 사람이 좀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마크 그라노베터 하버드대 사회학과 교수가 이미 1970년대 내놓은 ‘약한 연결고리(weak tie)’ 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새로운 직장을 찾은 사람들의 17%만이 친한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고, 55%는 가끔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28%는 1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 사람에게서 정보를 얻었다. 중요한 정보는 네트워크에서 나오되, 늘 만나는 친한 사람이 아닌 약한 연결고리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가까운 사람과는 이미 대부분의 정보를 공유하고 있어 새로운 것이 나오기 어려운 탓이다.
 
베아도 자신의 ‘약한 고리’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찾았다. 내 주변의 네트워크, 특히 약한 연결고리로부터 정보를 얻고, 이를 융합해 새로운 기회를 찾는 일은 오늘날과 같은 정보사회에서도 여전히 효과 있고 실용성도 높다. 이것이야말로 ‘운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확실한 방법 아닐까.
 
필자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산업자원부에서 국제통상 업무를 담당했다. 공인회계사이며,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베인&컴퍼니 도쿄 및 시드니 오피스에서 근무했고, 현재는 서울 오피스 이사로 재직 중이다. 국내외에서 금융, 중공업, 인수합병(M&A) 및 인수 후 통합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 김정수 | - (현) GS칼텍스 전략기획실장(부사장)
    - 사우디아람코 마케팅 매니저
    - 베인앤컴퍼니 파트너
    - 산업자원부 사무관
    jungsu.kim@gscaltex.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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