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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에서 북경까지 : 부와 명예

너무 높이 나는 용은 반드시 후회한다

안동섭 | 276호 (2019년 7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명예를 얻고자 돈을 벌거나 돈을 벌고자 명예를 얻는 일이 속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무언가를 위해 분투하는 삶은 그래도 건강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얻은 나머지 더 이상 불태울 열정이 없어 재만 남은 경우가 위험할 수 있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이는 이제 내려오는 수밖에 없는데 이때 우아하게 내려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는 어쩔 줄 몰라 정점의 언저리에서 잠시 서성이다 퇴락하고 만다. 부와 명예 중에 하나쯤은 ‘싫다’고 말하는 게 인생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편집자주
인간사에는 늘 반복되는 패턴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함은 바로 그 패턴 속에서 현재의 우리를 제대로 돌아보고 조금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철학과 역사학을 오가며 중국에 대해 깊게 연구하고 있는 안동섭 인문학자가 주(周)나라가 낙양을 건설한 후로 현대 중국이 북경에 도읍하기까지 3000년의 역사 속에서 읽고 생각할 만한 거리를 찾아서 서술합니다.



DJ DOC가 ‘돈 싫어, 명예 싫어’를 외친 지가 어언 25년이지만 아직까지 사람들이 돈과 명예를 덜 좋아하게 됐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가 이 힙합 그룹에게 돈과 명예를 안겨줬을 때 그들이 딱히 그걸 정중하게 사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진심으로 돈과 명예를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사회학자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은 어김없이 힘을 추구하는데 이 힘은 돈과 명예라는 두 기축통화로 표기돼 유통된다고 한다. 누군가는 돈이 많지만 누군가는 명예가 많다. 돈이 많은 이는 명예를 가지고 싶고, 명예가 많은 이는 돈을 가지고 싶다. 그래서 달러와 엔을 은행에 가서 교환할 수 있듯이 돈과 명예 역시 적절한 환전소를 찾아가면 교환할 수 있다. 다만 환율이 일정하지 않을 뿐이다. 1

전통시대 중국의 정부들은 대체로 돈이 많지 않았다. 2 어떤 경제사가의 연구에 따르면 17~19세기 영국의 GDP는 동시대 청(淸)나라의 그것보다 현저히 낮았지만 각 정부의 재정 집행 규모로만 따질 경우 영국이 청나라의 다섯 배에 이르렀다. 3 영국이 나라의 크기에 비해 많이 걷고 많이 쓰는 큰 정부를 운영했다면 청나라는 적게 걷고 적게 쓰는 작은 정부를 가졌던 셈이다. 또 다른 기축통화인 명예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영국은 민간에서도 비교적 쉬이 명예를 생산-유통했던 반면 청나라는 이를 거의 독점 했다.

정부가 독점상품을 판매하는 경우를 전매(專賣)라고 한다. 중국 제국들은 예로부터 전매를 통해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소금을 독점하고, 철을 독점하고, 술을 독점하고, 차를 독점하고, 말을 독점해서 세수를 올린 기록이 대단히 많다. 4 2100년 전의 기록에서도 전매제도의 정치적 정당성과 재정적 유용성에 대한 집중 토론을 찾아볼 수 있다. 5 오늘날 많은 국가가 술, 담배, 석유 등에 특별세를 설정해 수익을 올리는 것의 원조 격인 셈이다.

중국 제국들은 명예도 전매했다. 사람은 제아무리 돈을 벌어도, 아니, 오히려 돈을 벌면 벌수록 자신이 가지지 못한 또 다른 힘에 대한 갈망이 깊어만 간다. 그렇게 돈을 내고 명예를 사고자 하는 이가 생긴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수요를 이용해서 명예직을 팔았다. 이름 자리가 빈 명예직 임명장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일정 금액을 내는 민간인에게 그의 이름을 적어서 수여하는 식이다. 고작 그 종이 한 장에 사람들이 돈을 쓸까 싶겠지만, 정말로 썼다. 6

우리는 기근이 들면 식량이 없어서 사람이 굶어 죽는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그렇지 않다. 평소보다 부족할지언정 대개의 경우 식량은 있다. 다만 식량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쌀을 살 돈이 없는 사람부터 굶어 죽게 된다. 자료가 비교적 충분히 남아 있는 근세기의 기근들을 연구해보면 대기근이 든 지역에서도 곡식의 총산출량은, 놀랍게도, 해당 지역 인구가 모두 함께 먹으며 버틸 만큼 존재했던 경우가 많았다. 현대 중국의 악명 높은 대약진운동 대기근 때도 국가는 곡물을 수출하고 있었고, 빅토리아시대 영국령 인도에서 수천만의 사상자를 냈던 대기근 때도 인도는 여전히 곡물을 수출하고 있었다. 7 문제는 쌀이 아니라 돈이다. 흉년이 들면 곡물 가격은 상승하고, 곡물 가격이 상승세를 타면 여유가 있는 이들은 너도나도 곡물 사재기에 들어간다. 사재기가 시작되면 곡물을 팔겠다는 사람은 판매를 유보하고, 이에 곡물가는 더욱더 상승한다. 아무도 팔지 않는데 사겠다는 사람만 있는 시장에선 설령 굶어 죽는 이가 나와도 선뜻 곡물을 팔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중국 지방 관료들의 임무는 없는 곡물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부유층을 설득해서 이미 있는 곡물을 시장에 내놓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맨입으로 쌀을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으니 그들에게 명예 임명장을 팔고 대금으로 쌀을 받았다. 돈과 명예가 싫다고 노래했지만 굳이 마다하지 않았던 DJ DOC처럼 중국의 부자들은 명예가 가지고 싶어서 쌀을 내놓았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준다는 명예직을 사양하지도 않았다. 부자들은 명예를 위해 기부를 했던 것일까. 선행 뒤에 명예가 자연스레 따라왔던 것일까. 어쩌면 강매를 당했던 건 아닐까. 줄담배를 피우는 내 친구 하나는 담배를 끊으라는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은 담뱃세로 애국하기 위해 매일같이 몸을 희생하는 것일 뿐이라고 강변한다. 그런데 강변이 오래되다 보니 가끔은 정말로 담배를 피우면서 애국심 같은 게 생기는 듯한 느낌도 든다고도 고백했다. 당시 중국 부자들의 심리도 내 친구의 복잡 미묘한 심사와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남송(南宋)의 지방관이자 성리학(性理學)자인 주희(朱熹)는 조정에서 이런 임명장을 시원하게 풀지 않는 것이 무척 불만이었다. 8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것을 발행해서 굶어 죽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만큼 어진(仁) 일이 또 없을 텐데 어째서 황제 폐하께서는 임명장 발행에 이리도 인색하신 것일까. 주희의 의분(義憤)이 부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정의 입장 또한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명예란 희소성이 생명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시중에 풀었다간 금세 그 가치가 폭락할 수 있다. 월드컵 트로피가 귀한 것은 4년에 한 번, 오직 단 하나의 국가대표팀에게만 허락되기 때문이다. 문제의 트로피가 매년 32개국에게 골고루 주어지는 것이었다면 2002년 여름의 기억이 우리에게 그렇게 강렬했을 리가 없다.

조선 정부 역시 국내에 유통되던 명예를 반독점한 공기업이었다. 기근이 들거나 환란이 닥치면 구성원의 ‘자발적’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빈 임명장을 발행했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위기가 너무 잦았던 탓인지 사회에서 수용할 수 있는 양 이상으로 임명장을 발행했고, 이러한 명예 통화의 ‘양적 완화’는 결국 격심한 명예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단편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 김 첨지의 ‘첨지’는 정3품 무관직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줄인 말인데, 말하자면, 인력거꾼도 서로 국방부 장관이니, 참모총장이니 했던 것이다. 양적 완화가 이렇게 무섭다.



혹자는 명예를 얻고자 돈을 벌거나 돈을 벌고자 명예를 얻는 일이 속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언가를 위해 분투하는 삶은 그래도 건강하지 않나. 치열하게 사는 이들의 눈은 대체로 반짝거리게 마련이다. 오히려 모든 것을 얻은 나머지, 더 이상 불태울 열정이 없어 재만 남은 경우가 위험할 수 있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이는 이제 내려오는 수밖에 없는데 이때 우아하게 내려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는 어쩔 줄 몰라 정점의 언저리에서 잠시 서성이다 퇴락하고 만다.

중국의 삼국시대를 수놓은 수많은 영웅은 모두 천하통일을 위해 인생을 걸고 싸웠지만 우리는 그 싸움 끝에 최고의 부와 명예, 곧 새로운 통일제국의 황제가 된 이가 과연 공주님과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는지 어쨌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서기 265년, 사마의(司馬懿)의 손자인 사마염(司馬炎)은 조조(曹操)의 손자인 조환(曹奐)을 폐위시키고 진(晉)나라의 초대 황제로 등극했다. 솔선하여 사치풍조를 엄히 경계하고 몇 차례 국가적 위기를 현명하게 넘긴 그는 결국 서기 280년 손권(孫權)의 손자인 손호(孫皓)가 다스리던 오(吳)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하지만 반짝이는 눈을 가졌던 현군은 목표를 이룬 뒤 거짓말처럼 추락해버렸다.

타는 목마름으로 일통황제라는 부와 명예를 갈망했던 사마염은 이제 타는 목마름으로 술을 찾았다. 궁궐의 하렘에는 1만 명의 궁녀가 각자 작은 집을 얻어 살고 있었는데, 황제는 누구와 자야 할지도 몰라 염소가 끄는 작은 수레에 올라 혼술을 하며 염소 발길이 가는 곳으로 가 그날 밤을 보냈다. 황제와의 동침을 원했던 궁녀들은 소금과 풀 따위를 뿌려서 염소를 자기 집 쪽으로 유인했다. 9 삶의 목적을 잃고 술에 취해 부유하는 몸뚱이를 그렇게 궁녀들이 주워다가 재워줬다. 몸을 이렇게 굴리고도 오래 살기를 바랄 수는 없다. 사마염은 통일 후 10년 만에 죽었고, 그가 죽은 지 26년 만에 진나라는 내란으로 망했다.

부와 명예를 모두 독점하는 게 이렇게나 위험하다. 너무 높이 날아오른 용은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亢龍有悔). 10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둘 중 하나 정도는 ‘싫어’라고 말해보는 것이 좋겠다.

필자소개 안동섭 인문학자 dongsob.ahn@univ.ox.ac.uk
필자는 연세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동양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중국 남송시대를 연구한 박사 학위 논문이 현재 심사 중이다. ‘정이의 거경에 대한 연구’ ‘Contested Connection: the 12th Century Debate on Zhou Dunyi’s Hometown’ 등의 논문을 국내외 유력 학술지에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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