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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논어』란 무엇인가

열받지 않으려면 타인에게 연연하지 말라

김영민 | 275호 (2019년 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흔히 주변에서 누군가 화를 내면 ‘군자는 아무 때나 열 받지 않는다’고 표현하곤 한다. 『논어』 첫 부분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는 그만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구절은 그동안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인정해주느냐, 아니냐에 연연하지 말라는 취지로 이해돼왔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다양한 해석이 있다. 다른 사람이 가르치는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해석도 있고, 등용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된 소인(素人)이라는 정치적인 풀이도 있다. 『논어』에서는 자기 자신의 안위나 이해관계가 걸린 상황은 분노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말한다. 배움이란 타인의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성립하기 때문이다. 또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열 받지 않으면 군자가 아닌가?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논어』 해설 4 : 군자는 아무 때나 열 받지 않는다.

『논어』 첫 부분의 마지막 문장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에 대해서는 현행 『논어』 한국어 번역본들 사이에 폭넓은 공감대가 있다. 거의 예외 없이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느냐”는 뜻 정도로, 즉 다른 사람의 인정 여부에 연연하지 말라는 취지로, 이 문장을 해석하고 번역해왔다. 그러나 이 문장을 좀 더 꼼꼼히 살펴보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경쟁하는 해석들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라는 말의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생략된 문장 요소를 재구성해봐야 한다.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에서 ‘인부지(人不知)’ 부분의 주어가 ‘인(人)’임은 명확하다. 고전 한문에서 ‘인’은 자기 자신과 구분되는 타인을 지칭하곤 한다. 그렇다면 인부지에 대비되는 구절인 ‘불온(不慍)’ 앞에 생략된 주어는 자기(己)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볼 때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를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느냐, 마느냐는 인정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논어』 내에 남이 자신을 알아주는 데 연연하지 말라는 언급이 수차례 더 나온다. 이를테면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라” 1 라든가 “군자는 무능함을 근심하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않는다” 2 와 같은 취지의 말을 거듭했으며 “나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구나!” 3 라고 탄식한 적도 있다.

둘째, 그러나 장송후이(張松輝) 같은 학자들은 『논어』에 나오는 유사한 문장들과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4 다른 유사한 문장들에는 지(知)라는 동사에 기(己)라는 목적어가 따르는 반면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에는 목적어가 없기 때문에 서로 구별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는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알아듣지 못할 때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라는 것이다. 과거의 주석 중에는 황간(皇侃, CE488-545)의 『논어의소(論語義疏)』가 바로 그러한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5

셋째, 앞서 말한 두 해석보다 더 정치적인 차원의 해석이 있다.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CE1666-1728)는 『논어징(論語徵)』에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은 세상에 쓰이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人不知謂不見用於世也)”고 말했다. 즉 오규 소라이는 인부지(人不知)에 나오는 인(人)을 타인 중에서도 특히 자신을 등용해줄 권력자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한 해석은 인(人)을 범인(凡人)으로 해석한 황간의 『논어의소』의 입장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이러한 오규 소라이의 입장은 『중용(中庸)』 11장의 취지와 통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은거의 삶을 추구하고 괴이한 행동을 일삼으면 후세에 기억되기는 하겠지만 나는 하지 않겠다. 군자가 도를 좇아 행하다가 중간에서 때려치우기도 하는데 나는 그만둘 수 없다. 군자는 중용에 의거하여 세상을 피해, 알려지지 않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데, 오직 성인이라야 그렇게 할 수 있다.(子曰, 素隱行怪, 後世有述焉, 吾弗爲之矣. 君子遵道而行, 半塗而廢, 吾弗能已矣. 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 唯聖者能之)”

김용옥이 “공자의 인생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해줄 명군을 만나기 위해 주유한 삶이었다. 결국 ‘인부지’란 뜻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할 때, 정치적으로 등용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된 소인(素人)으로서 마감한다는 뜻이다” 6 라고 해설한 것은 오규 소라이의 해석을 따른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7 실로 이러한 정치적 해석에 공명하는 문장들이 『논어』에는 제법 있다. “자리를 걱정하지 말고, 과연 그 자리를 맡을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를 걱정하라.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알아줄 만하게 되기를 구하라” 8 와 같은 문장들이 그 예다. 이러한 문장들은 누군가를 등용할 수 있는 권력자와 등용을 추구하는 이들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넷째, 현대 학자 왕즈(王志)는 위와 같은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9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따르면 제(齊)나라에서 공자가 임용되지 못한 것은 공자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나라 상황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가 제나라를 떠난 이후, 제나라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며 “공자가 통치하면 반드시 패업을 이룰 것이다(孔子爲政必霸)”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초나라 소왕(昭王)이 공자에게 봉토를 주려 하자 공자처럼 뛰어난 자에게 봉토까지 주었다가 장차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신하가 우려를 표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위정자들이 공자 가르침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왕즈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왕즈의 대안은 무엇인가? 공자가 출신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제자로 받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그러한 공자의 뜻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 대한 공자의 반응이 바로 이 문장이라는 것이다. 『논어』 술이 7에 나오는 ‘육포 한 묶음 이상 가져오는 이들은 다 가르쳤다(自行束修以上,吾未嘗無誨焉)’나 위령공 38에 나오는 ‘가르침은 있되, 차별은 없다(有教無類)’와 같은 문장, 그리고 『순자』 ‘법행(法行)’ 등은 공자가 가리지 않고 폭넓게 제자를 받았으며 사람들이 그런 상황을 잡스럽다고 여겼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묘사들을 종합해보면 공자가 제자들을 폭넓게 끌어모으는 데 꽤나 성공적이었다는 사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비판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러한 비판 혹은 오해에 맞서 공자는 원망하거나 화낼 필요가 없다고 발언했다는 것이다. 특히 비천한 출신의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공자의 태도는 각별히 중요하고 고마운 부분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논어』 맨 앞 구절에 해당 내용을 기록했으리라고 왕즈는 추정한다.


『논어』 첫 세 문장을 연결하는 방식

위에서 소개한 해석들은 모두 그 나름의 일리가 있으며 각 해석을 나름대로 지지하는 추가 언명들이 『논어』 내에 있다. 남의 인정 여부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의 가치를 긍정하는 태도, 남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문제, 누구나 배울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논어』 전반에 걸쳐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들이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해석이 좀 더 설득력을 얻으면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라는 문장이 바로 앞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문장,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문장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현행 『논어』 텍스트에는 이 세 문장이 묶여 있기 때문에 적어도 현행 『논어』의 편집자는 이 세 문장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으리라고 봤음에 틀림없다.

첫째,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느냐는 인정의 문제로 해석했을 때,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와 선행하는 두 문장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모호하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나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는 타인의 인정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앞서 살펴봤듯이 장송후이 같은 학자들은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라는 문장이 배우는 사람이 과연 자신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느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학이시습지’는 자기 자신의 배움을 다루고 있는 반면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는 타인과 교섭하는 배움의 과정을 다루고 있고,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는 그러한 타인 중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된다. 즉 『논어』 처음에 나오는 세 문장은 자신이 배운 뒤 그 배움을 타인에게 가르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셋째, 구체적으로 권력자가 자신을 등용하느냐에 대한 말이라고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를 해석할 경우 『논어』 첫 부분에 나오는 세 문장은 배움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해(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타인과의 교섭 과정을 거쳐(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마침내 세상에 널리 쓰이는 (혹은 쓰이는 데 실패하는) 과정을 나타내게 된다. 중국 고대에는 이러한 해석에 공명할 만한 언급들을 포함하는 문헌들이 상당수 있다. 1993년 후베이성(湖北省) 곽점촌의 묘지에서 발견된 이후 학자들의 주목을 끌어온 곽점초간(郭店楚簡) 중 ‘궁달이시(窮達以時)’라는 문헌이 그 예다. 그 문헌에는 어떤 이가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도 그를 알아주는 세상이 아니라면 현인조차도 뜻을 펼칠 수 없다는 취지의 대목(有其人,無其世,雖賢弗行矣)이 나온다. 이 ‘궁달이시’의 문장을 『논어』 첫 구절 뒤에 위치시키면 개인→친구→권력자→세계로 확장돼 나가는 점층적인 구조가 『논어』 첫 부분에 자리하게 된다.

넷째, 『논어』 첫 부분에 나오는 세 문장을 배움의 발전 단계로 해석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논어』 세주(細註)에 나오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태연하게 처하기를 마치 터럭만큼의 불평의 뜻도 없는 듯 하는 것은 덕을 이룬 군자가 아니라면 그 누가 할 수 있으리오. 이는 배움의 끝 단계다(人不見知處之泰然略無纖芥不平之意非成德之君子其孰能之此學之終也)”와 같은 언급이 그 예다. 즉, ‘배움의 끝 단계(學之終)’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의 단계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와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의 단계를 거쳐 결국 이르게 된 배움의 마지막 단계다. 이러한 취지에서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에서 다산 정약용은 지(知)의 목적어가 ‘자신의 배움이 완성됐다는 사실’이라고 본다. 즉 자신의 완성된 배움을 사람들이 몰라주는 상황에 대해서 발언한 것이 바로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라는 문장이다.(人不知, 謂人不知我之學成也)



그 밖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논어』 첫머리의 세 문장을 연결할 수 있다. 예컨대, 양차오밍(楊朝明)과 같은 학자는 『논어』 첫 부분에 나오는 열(說), 락(樂), 온(溫)이라는 글자들에 주목해 “모두 사람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며, 또한 『논어』 이 장의 세 문구는 따로 이해해서 안 된다는 것을 표명한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10 이 경우 『논어』 첫머리 세 문장을 꿰는 실마리는 특정 정서다.


어떤 분노인가?

『논어』 첫 부분에 나오는 열(說)이나 락(樂)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논한 바 있다. 그렇다면 『논어』 주석가들이 그간 상대적으로 덜 주목한 온(慍)이라는 글자의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 허신(許愼, CE58?-147?)의 『설문해자(說文解字)』와 하안(何晏, CE196-249)의 『논어집해(論語集解)』는 공히 ‘온(慍)’을 “온(愠), 노야(怒也, 화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기(禮記)』 ‘단궁(檀弓)’의 주석(注) 역시 예기 단궁편에 나오는 ‘무사온(舞斯慍)’이라는 구절을 해설하면서 “유노야(猶怒也, ‘慍’는 怒와 같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주희(朱熹, CE1130-1200)의 『사서집주(四書集註)』 역시 “온함노의(慍含怒意, ‘온(慍)’은 분노의 뜻을 가진다”고 해설한다. 이렇게 볼 때 온(慍)을 분노(하다)라는 정서적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해석은 현행 『논어』 본문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말고도 현행 『논어』 텍스트에서는 두 번 더 온(慍)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영윤(令尹)인 자문(子文)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가 영윤이 됐음에도 기쁜 얼굴빛이 없었고, 세 번이나 그만두는 데도 열받는 빛이 없었다.(令尹子文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11 이 문장에서 희색(喜色)과 온색(慍色)은 명백히 대비돼 사용되고 있고, 희(喜)가 노(怒)와 대비돼 사용돼온 사실을 감안한다면 온(慍)과 노(怒)는 호환 가능한 단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분노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서양 고전학자들은 분노를 지칭하는 단어에도 ‘cholos’ ‘thymos’ ‘orgē’ 등 다양한 단어가 존재하며 그 의미에 편차가 있을 뿐 아니라 하나의 단어 의미도 시대에 따라 변천해 왔음을 지적한 바 있다. 12 중국 고전에 대해 비슷한 시도를 한 사람이 일본의 언어학자 도오도오 아키야스(藤堂明報, CE1915-1985)다. 13 그에 따르면 노(怒)는 ‘발칵 성을 내다’, 에(恚)는 ‘뾰족하게 앙심을 품다’, 온(慍)은 ‘분을 마음속에 담아 두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세밀한 구분에 주목한다면 노(怒)와 온(慍)을 묶어서 그저 화내다 혹은 분노하다로 번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도오도오 아키야스의 구분에 따른다면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는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속에 담아두지도 않아야 비로소 군자라고 할 만하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논어』와 비교적 가까운 시대의 중국 고대 문헌을 꼼꼼히 살펴보면 도오도오 아키야스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진나라 때 승상 이사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편린으로만 남아 있는 자전 『창힐편(蒼頡篇)』에서는 “온(慍), 한(恨)”이라고 해 ‘온’을 원한이 담긴 감정으로 풀이하고 있다. 창힐편을 읽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규 소라이도 『논어징』에서 그와 유사한 의견을 표명했다. “온(慍)은 마음에 억울한 바가 있는 것이다. … 노(怒)라고 풀이할 필요가 없다.(慍, 謂心有所怫鬱也…不必訓怒)”

공자와 대체로 시대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는 문헌인 『좌전·양공23년(左傳·襄公二十三年)』은 『논어』 시작 부분의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문헌의 존재는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에 담긴 생각이 공자 특유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당대 여러 사람이 했던 도덕적 가르침의 하나임을 시사한다. 그러면 『좌전』에 나오는 해당 단락 전체를 살펴보자.

계손이 낯빛을 잃었다. 계씨가 공서를 마정에 임명하자 열받아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민자마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대는 그러지 마시오. 화와 복은 문이 없습니다. 오직 사람이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자식이 되어서는 불효할까 걱정하지, 지위를 걱정하지 않습니다.”(季孫失色. 季氏以公鉏爲馬正,慍而不出。閔子馬見之,曰:“子無然。禍福無門, 惟人所召, 爲人子者患, 不孝不患無所.”)

이 인용문에서는 적어도 세 가지가 주목된다. 첫째, ‘낯빛을 잃었다’와 같은 표현을 볼 때 온(慍)은 표출되지 않은 감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온’ 역시 타인이 알아볼 수 있는 감정 표현이다. 그러기에 그에 대한 다른 사람(민자마)의 조언이 가능하다. 둘째, 『논어』의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와 마찬가지로 남이 알아주는 문제, 구체적으로 어떤 직위를 누리느냐는 문제와 관련돼 ‘온’이 사용되고 있다. 14

셋째,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에 비춰 화를 내고 있기에 민자마는 계손이 가진 ‘온’의 감정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을 감안하다면 ‘온’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상황은 결코 분노의 정당성을 주장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논어』에서 역시 ‘온’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분노를 지시하기 위해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분노의 양상을 다루고 있는 『논어』 내의 다른 문장들을 함께 고려해보자. 『논어』 텍스트 안에서 ‘화내다’의 뜻을 전달하는 단어는 ‘온’ 이외에도 怒(노), 忿(분) 등 여러 가지가 있으며, 이 단어들이 사용된 문장들을 함께 고려하면 공자가 분노의 감정에 대해 가진 태도를 좀 더 종합적으로 알 수 있다.

진나라에 이르러 식량이 떨어져 따르는 이들이 병이 나서 일어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자로가 열 받아 공자를 뵙고 말했다: 군자도 곤궁할 수가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곤궁한 것에 흔들리지 않는다. 소인이면 곤궁하면 막 나간다.(在陳絶糧.從者病,莫能興.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子曰, 君子固窮, 小人斯濫矣.) 15

위 인용문에 따르면 곤궁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자로는 ‘온’이라는 감정을 표출한다. 그러자 공자는 곤궁하다는 이유 하나로 흔들리는 자로의 자세를 비판한다. 권력자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상황과 식량이 떨어져 곤궁한 상황의 공통점은 공적인 차원에서 도덕적 분노를 발산할 만한 상황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안위에 관계된 상황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분(忿)이나 노(怒)보다는 온(慍)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아홉 가지 있다. 보는 일에 관한 한 환하게 볼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듣는 일에 관한 한 분명히 들을 것을 염두에 둬야 하고, 안색에 관한 한 낯빛을 온화히 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몸가짐에 관한 한 공손히 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말에 관한 한 충심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일 처리에 관한 한 공경스러움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의문스러운 일에 관한 한 물어볼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분노에 관한 한 그로 인해 초래될 어려움을 염두에 두고, 이득 볼 것을 마주치게 되면 도덕적 합당함을 염두에 둔다.

(孔子曰, 君子有九思.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16


위 인용문의 ‘분노에 관한 한 그로 인해 초래될 어려움을 염두에 두고(忿思難)’라는 구절은 분노를 발산할 때의 자세를 논한 것일 뿐 분노의 발산 자체를 비판하고 있지는 않다. 즉 분(忿)은 온(慍)보다 중립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분노를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인 노(怒)의 경우는 어떠한가?

애공이 물었다: “제자 중에서 누가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까요?” 공자가 대답하기를 “안회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화를 옮기지 않고 같은 허물을 거듭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이가 없습니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이를 아직 들어본 적 없습니다.”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17


위 예문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화를 옮기지 않고(不遷怒)’의 해석이다. 이에 대해서는 성리학자의 주석과 성리학 이전의 주석이 크게 다르다. 『사서집주』에 따르면 주희는 이를 A에게 화낸 것을 B에게 옮기지 않고, 앞에서 잘못한 것을 뒤에서 반복하지 않는다고 풀이한다.(遷, 移也. 貳, 復也. 怒於甲者, 不移於乙, 過於前者,不復於後) 정이(程頤, CE1033-1107)의 풀이는 좀 더 철학적인데 안회의 마음은 거울과도 같아서 분노의 대상이 사라지고 다른 대상이 거울에 맺히면 그 다른 대상을 그저 비출 뿐이므로 분노를 옮기지 않게 된다고 풀이했다.(如鑑之照物, 妍媸在彼, 隨物應之而已, 何遷之有) 그러나 성리학자들에 비해 공자와 더 가까운 시대를 살았던 황간의 풀이는 사뭇 다르다. 황간은 ‘화를 옮기지 않고’를 “노여움이 타당하므로 바꾸지 않는다”고 해석한다.(當理而怒之, 不移易也) 18 즉, 이치에 맞춰 합당한 분노를 한 것이므로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황간의 주석으로부터 노(怒)는 정당한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고려해 온(慍)을 번역할 때는 ‘열받다’라는 번역을 사용하고자 한다. ‘온’은 도덕적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인 ‘노’와는 구별된다. 한국어에서 “열받다”라는 말은 도덕적 분노를 표시하는 데 적합하다기보다는 범속한 감정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곤 하므로 ‘노’보다는 ‘온’을 번역하기에 적절한 표현으로 보인다. 게다가 ‘온’이 온도를 나타내는 글자 ‘온(溫)’과 형태의 일부를 공유한다는 점에서도 ‘온(慍)’을 ‘화내다’라기보다는 ‘열받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열받지 않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현행 『논어』에 나오는 공자는 분노의 발산 일반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관건은 어떤 때, 어떻게 분노를 발산하느냐는 문제였다. 적절히 분노를 발산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 분노해야 하는지를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논어』 첫 구절은 자기 자신의 안위나 이해관계가 걸린 상황은 분노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권력자가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아 등용되지 못하는 상황 같은 것은 분노를 정당하게 발산할 계기가 아니다. 그런 때에 느껴지는 감정의 격동은 ‘열받음(慍)’이지 ‘분노(怒)’가 아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안위나 이해관계가 걸린 상황에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지난날 시누이들과 함께 살던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마음의 평정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며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단다. 엄마 좀 보렴. 너희 고모들이 날 아무리 괴롭혀도 난 끄떡없잖아. 걔들이 무슨 지랄을 해도 다 이해하잖아. 아, 그런데 그 망할 것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열받네… 진짜 지금 당장 찾아가서 한바탕할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기란 이렇게 어렵다.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혹은 타인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열받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타인의 행태에 자신의 마음 상태가 좌우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시대별로 다르다. 성리학자들은 일관되게 다음과 같이 주장해왔다. 정이(程頤)의 후계자로 알려진 윤돈(尹焞, CE1071-1142)은 배움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고 앎은 타인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무슨 열받을 게 있겠냐고 반문했다.(學在己, 知不知在人, 何慍之有) 즉, 배움이란 타인의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돈의 말에 대해 진덕수(眞德秀, CE1178-1235)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자신에게 진정으로 배운 바가 있다면, 남이 알아주건 말건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나 손해도 없다.(己誠有所學, 人之知不知何加損於己)” 19

한 걸음 더 나아가 주희는 이 사안을 밥 먹는 일에 비유한다. “밥을 먹는 것은 곧 스스로 배를 불리려 함이니 이미 배가 부르다면 하필 다른 사람이 (내 배부른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물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대개 남과는 애초부터 별 상관이 없다.(譬如喫飯乃是要自家鉋旣鉋, 何必問外人知不知. 蓋與人初不相關也)” 이 비유가 흥미로운 것은 인정이라는 비물리적인 현상을 밥 먹는 일과 같은 물리적인 현상과 같은 차원에 놓았다는 점이다. 이처럼 성리학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한결같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근본적으로 나와 상관없다.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문제다.

필자소개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kimyoungmin@snu.ac.kr
필자는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 교수를 지냈다. 영문 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8)』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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