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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본 자율과 통제

즉흥연주 같지만 규칙 있는 재즈처럼
‘차이’에 기반한 통제가 창의성 극대화

박영욱 | 268호 (2019년 3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재즈만큼 각 연주자의 개성과 곡에 대한 해석이 자유로운 장르도 없다. 실제로 연주자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수십 분이 넘는 곡을 연주하는 동안 악보도 거의 보지 않는다. 이는 재즈가 정말 규칙이나 약속 없이 연주하는 곡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재즈 연주에 내포된 엄격한 규율에 따라 연주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기본적인 규칙을 더 잘 이해하고 숙지할수록 그 틀 내에서 자유롭게 응용하고 변주를 할 수 있다. 이렇듯 통제와 자율은 상반된 개념이 아니다. 통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한다면 오히려 사람의 개성과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기제가 될 수 있다.


재즈 연주는 ‘즉흥적’이지 않다
2015년 서울재즈페스티벌. 현존하는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레전드인 허비 행콕(Herbie Hancock, 1940∼ )과 칙 코리아(Chick Corea, 1941∼ )가 한 무대에서 연주를 했다. 마주한 두 대의 그랜드 피아노에 앉은 대가들은 자신들이 작곡한 대표적인 곡 외에도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1926∼1991)의 ‘솔라(solar)’를 합주했다. 이 곡은 잘 알려진 재즈 스탠더드 곡 중 하나이지만 청중들은 연주가 한참 지난 후 그 멜로디를 알아차렸다. 그제야 청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두 명장의 연주를 즐겼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추상화 같은 이들의 난해한 연주는 마치 제멋대로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연주시간은 수십 분이 넘지만 악보는 찾아 볼 수 없다. 이들은 정말 자신들이 치고 싶은 대로 아무렇게나 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보통의 관중들은 알아차릴 수 없는 철저한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

재즈 음악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재즈는 매우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나름대로 엄격한 규칙에 따르는 음악이다. 물론 클래식 음악처럼 모든 음을 통제하는 악보는 없다. 여러분들 중 상당수는 호텔 라운지나 카페 등에서 피아노, 더블베이스, 드럼으로 이뤄진 재즈 트리오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들의 연주를 들여다보면 연주자들은 대부분 악보를 펼쳐놓고 있다. (펼쳐놓는다는 말이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다. 요즘은 종이 악보보다는 태블릿 화면을 보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수분 혹은 십여 분을 연주하는 동안 악보를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악보 한 장만 달랑 놓고 연주한다.

재즈 음악에서 악보는 대체로 ‘리드 시트(lead sheet)’ 형태로 이뤄져 있다. 리드 시트란 곡의 멜로디와 코드(chord, 화음)만 간단하게 기입해놓은 악보를 뜻한다. 1000개가 넘는 재즈의 스탠더드 곡들을 모두 수록한 ‘리얼북(Real Book)’은 리드 시트의 형태로 돼 있으며, 재즈 뮤지션은 리얼북의 악보로 연주한다. 심지어는 멜로디가 그려진 오선지도 없으며 몇 개의 코드만 달랑 적어 놓은 악보를 사용하기도 한다.

재즈 뮤지션들이 악보 한 장만으로도 오랜 시간을 다채롭고도 조화롭게 연주할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만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가는 얼마만큼 재즈의 규칙을 철저하게 자신의 몸에 배도록 규율화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말하자면 재즈 뮤지션들의 음악은 규제하고 구속하는 규칙을 내면화할수록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유롭게 연주하는 대가일수록 음악의 규범 체계가 더욱더 몸에 배어 있다.



물론 이러한 일이 재즈 음악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음악에서 엄격함을 가장 중요시했던 바흐(Johan Sebastian Bach, 1685∼1750)도 마찬가지다. 바흐의 음악은 가장 엄격한 규칙과 완전성을 지닌 음악을 상징한다. 바흐의 곡을 분석한 음악학자들이나 음악가들이 공통적으로 마주치는 놀라움은 구조적 완전성이다. 여기서 구조적 완전성이란 마치 기하학 도형이나 수열, 행렬 같은 엄격한 수학적 규칙성과 관련이 있다. 적어도 수업시간에 푸가의 기법 1 을 적용한 푸가 곡을 과제물로 제출해야 하는 작곡과 학생들은 아름다운 선율을 만드는 것보다 자신이 만든 곡이 바흐의 규칙에 부합하는지에 더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그만큼 바흐의 음악은 규칙과 규범에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통념은 바흐 음악에 대한 오해라고 할 수 있다.

바흐가 규칙을 강조한 것은 결코 당위성과 구속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음악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절차다. 중급 정도의 피아노 과정을 배운 사람이라면 빠지지 않는 교재 중의 하나가 바흐의 ‘인벤션(인벤티오, inventio)’이다. 인벤션은 실제로 바흐가 피아노 교재의 목적으로 쓴 곡들이다. 바흐가 장남인 프리데만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해 쓴 곡들이 오늘날까지 피아노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인벤션을 바흐가 만든 피아노 연습곡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곡들은 손가락 테크닉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바흐 음악의 전반적인 짜임새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 곡을 기계적으로 외우거나 따라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의 의도는 인벤션이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인벤션은 말 그대로 ‘창조’를 뜻한다. 인벤션이란 당시 수사법 용어의 관례를 따른 것인데 ‘배열(dispositio)’과 더불어 수사법의 기본적인 항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배열이 미리 정해진 질서에 따라 단어와 문장을 구성하는 기술이라면 창조는 그러한 구성의 원리를 새롭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바흐가 자신의 아들인 프리데만 혹은 피아노를 배우는 많은 학생에게 원한 것은 단순히 그가 만든 규칙을 습득하고 피아노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었다. 바흐가 원한 것은 자신이 교재에 담은 규칙들이 하나의 범례가 돼서 음악을 창조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피아노를 배우는 대부분의 사람은 피아노 치는 법을 배우지 음악을 배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피아노 연주가가 될 뿐 음악가가 되지 못하며 자유로운 예술의 창조자가 되지 못한다. 우리의 통념과 달리 바흐는 오늘날 재즈 뮤지션 못지않은 ‘임프로비제이션(즉흥 연주)’의 달인이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에게 법칙이란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닌 자유를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2015년 서울재즈페스티벌에서 두 재즈 거장의 즉흥 합주가 가능했던 것도 바흐가 원한 것처럼 이 두 사람에게는 이미 재즈 음악의 인벤션 법칙이 몸속 깊이 내재화됐기 때문이다. 각고의 노력과 연마, 끊임없는 창작 과정의 고통을 거치면서 허비 행콕과 칙 코리아는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자유로운 소통과 공감의 능력을 축적한 것이다. 그들의 감동적인 합주는 법칙의 구속을 자유로운 의지의 기반으로 승화한 예술의 승리다.


기계는 왜 자유롭지 않을까
언급된 바흐나 허비 행콕, 혹은 칙 코리아뿐만 아니라 타 분야의 수많은 예술가 역시 법칙을 자유의 기반으로 승화했다. 심지어 일탈을 추구한 예술가의 경우에도 법칙의 구속은 절대적인 조건이다. 가령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만 하더라도 자유로운 자신만의 묘사와 터치를 위해서 엄격한 회화의 규범에 스스로 속박했다. 그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기 위해서 바르비종파 거장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의 그림을 끊임없이 모사했다. 밀레의 규칙을 마치 신의 규율처럼 따르고 나서야 고흐는 자신이 화가로서 누릴 수 있는 약간의 자유를 느끼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은 법칙의 구속과 개인의 자유가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더 많은 법칙과 구속을 내재화하면 더 많은 자유가 발생하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법칙과 자유의 비례가 적용되는 사례를 떠올릴 수 있다. 가령, 어떤 음악가가 바로크음악, 고전주의음악, 낭만주의음악, 재즈, 힙합, 록, 디스코 등 모든 음악 장르의 법칙을 통달한다면 그의 음악적 표현은 어느 특정한 장르에 제약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자유의 정도는 얼마만큼 많은 법칙을 몸에 내재하고 있는가의 정도에 상응한다. 디지털 프로그램 툴도 마찬가지다. 캐드(CAD, Computer Aided Design)는 예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형태의 디자인을 가능하게 했다. 20세기 초반 디자인 혁명을 꿈꿨던 바우하우스의 디자이너들은 기껏해야 틀에 박힌 기하학적 형태에 만족해야 했다. 이들에게 단순하지만 기하학적인 형태는 사치스럽고 화려한 고전적 디자인으로부터 결별한 새로운 것이었다. 나아가 바우하우스디자인의 기계적인 이미지는 디자인을 귀족층의 전유물에서 대중들이 모두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확장했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매우 단순하다. 디자인과 제작 과정에 적용한 기계적 단순성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오늘날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을 바라보면 오히려 복고적인 느낌까지 든다.

기계에 의존한 캐드 디자인은 다르다.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이 매우 한정적인 반면 캐드는 거의 무제약적인 형태의 디자인을 가능하게 한다. 3D 디자인 프로그램 툴은 그 자체가 이미 시공 혹은 제작 가능한 도면의 형태로 이미지를 디자인한다. 화면으로 디자인한 이미지는 곧 실제로 제작된다. 적어도 형태의 측면에서는 디자인의 무제약적인 자유가 달성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 이렇게 자유로운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프로그램의 툴을 익혀야 한다. 프로그램의 툴을 익힌다는 것은 그 프로그램이 제약하고 구속하는 명령들의 체계를 익힌다는 것이다. 캐드는 디자인에서 형태의 구속을 파괴하고 자유를 부여했지만 그러한 자유는 획일적으로,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명령과 구속을 얼마나 잘 따르는가에 따라서 자유의 정도는 다르다. 더 자유롭기 위해서는 더 구속돼야 한다는 법칙과 자유의 비례관계를 이보다 잘 보여주는 사례가 드물 정도다.

그렇다고 단순히 더 많은 법칙을 내재화할수록 더 많은 자유를 획득한다는 것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의 개념을 충족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유란 외부 구속으로부터의 탈피라는 우리의 통념과도 상충한다. 현실적으로 보더라도 세상의 수많은 규칙을 프로그램화해서 이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는 기계가 존재한다면 그러한 기계가 자유로운 존재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음악 장르의 규칙이나 음계를 마스터한 음악 로봇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업이 음악 지식이 없는 사람의 작업보다 더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법칙과 자유가 양립 가능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다른 조건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고민한 문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을 그는 ‘자율(autonomy)’의 개념에서 찾는다. 그는 법칙과 규율이 구속이 아닌 자유의 근거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강제가 아닌 자율적인 것이 돼야 한다고 믿었다.


자율적인 통제는 가능한가
칸트가 정의하는 자유의 개념은 대부분의 철학자가 그러하듯 보통 사람들의 통념과 어긋난다. 자유란 ‘외부의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는 사전적 정의와 달리 자유란 ‘이성의 법칙, 즉 도덕법칙에 철저하게 따르는 것’으로 정의한다. 원래 법칙이란 강제력과 구속력을 지닌다. 또한 예외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을 경우 법칙은 법칙이 아니다.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는 법칙은 예외 없이 모든 물에 적용되며 어떤 액체가 물인 한 그것은 섭씨 100도에서 끓어야 하는 강제와 구속을 지닌다.

법의 구속성과 강제성은 사회규범으로서의 법도 예외가 아니다. 법을 어긴 사람은 예외 없이 처벌받아야 한다. 설혹 범법자가 자신은 법을 몰랐거나 법에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그의 판단이나 선택과 관계없이 구속성을 지닌다. 개인의 선택이나 자유의사와는 관계가 없다. 그렇기에 철저하게 법에 따르는 것을 자유라는 칸트의 주장이 의아하게 느껴진다. 칸트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칸트의 장치가 바로 ‘자율’이라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강제적인 구속력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스스로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구속의 원천은 자신의 의지, 즉 자율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강제적인 법칙이 자율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법칙은 얼마든지 자유와 양립이 가능하다. 칸트에게 자율성은 자유의 절대적인 조건이다. (거꾸로 말하면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은 사적이지 않고 항상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 칸트 견해에 대한 비판 근거)

물론 모든 법칙이 자율적일 수는 없다. 칸트는 자율적인 법칙과 강제적인 법칙을 구분했다. 그는 우리의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법칙들은 자율성과 관련이 없는 강제적인 법칙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수학적 법칙이 이에 속한다. 하나에다가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것은 예외 없이 적용되는 법칙이다. 그러한 법칙은 우리가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지식을 구성하는 절대적인 조건이다. 이런 법칙은 우리가 무조건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의 지식은 거짓이 되고 만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셋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 언명이며, 사실과 다르다. 칸트는 이러한 법칙을 ‘구성적 법칙’라고 부른다.

칸트는 이러한 법칙과 다른 성격의 법칙을 ‘규제적 법칙’이라고 부른다. 규제적 법칙은 구성적 법칙과 달리 외부로부터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주관적 요청에 의해서 형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법칙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지식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칸트의 생각에 따르면 세계가 무한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세계가 무한하다고 주장하더라도 모순에 빠지고, 유한하다고 주장하더라도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칸트의 유명한 ‘이율배반(Antinomie)’론이다. 상반되는 두 주장이 모두 경험적 지식에 의해서 증명될 수 없으며 서로에 대해서 자신이 맞고 상대가 틀리다는 과학적 정당성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이율배반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반드시 요청해야 할 법칙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가령, ‘영혼불멸’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된다. 그는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혼불멸의 법칙을 상정해야 한다고 봤다. 영혼이 유한한 것이라면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완성하고자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결코 달성할 수 없는 것을 위해서 노력하며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한다. 심지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렇게 한다. 자신의 유한한 삶을 넘어서 어떤 무한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러한 무한한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지식으로 증명할 수도 없다. 그것을 증명하고자 할 경우 이율배반에 빠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간다운 삶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영혼불멸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칸트는 도덕법칙이야말로 자율적이지만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는 법칙이라고 봤다. 아무리 자발적으로 요청하고 전제한 법칙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니지 않는다면 법칙이라 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그 법칙이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얼핏 강제적 힘을 통해서 어떤 법이 구속력을 지닐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은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힘을 잃고 폐기되고 만다. 인간은 타고 날 때부터 신분 차가 존재한다는 노예제도의 법은 일정 시기 동안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항구적으로 지속될 수는 없었다. 물론 새로운 변화를 따르지 않고 비난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 사람의 판단이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할 것이다.

칸트는 도덕법칙 역시 필연적이라고 봤다. 필연성은 인과관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인과관계란 ‘A가 있으면 반드시 B가 나온다’는 두 사건의 필연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1+1=2’의 법칙이 필연적인 이유는 우리가 수학적 연산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또한 그러한 수학적 연산이 세계의 질서에 부합하고 이를 정합적으로 설명한다는 사실에서 그 보편성이 인과적으로 도출된다. 칸트는 이러한 인과적 필연성이 도덕법칙에도 적용된다고 봤다. 비록 도덕법칙을 ‘1+1=2’처럼 구체적으로 정식화할 수는 없지만 도덕적 판단이 사회적으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편성을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론 법칙 못지않게 보편적인 구속력을 지니는 이 법칙을 우리는 자율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다.

다소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칸트의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 것 같다. 칸트의 도덕법칙이 자율적인 요청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아직까지 ‘자유’에 대한 칸트의 정의가 해명되지는 않았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철저하게 이성의 법칙으로서 도덕법칙에 따르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법칙에 따르는 것이 어떻게 자유롭다는 것일까? 자유란 외부의 강제적인 구속이 없다는 것인데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자유와 모순이 되지 않는가? 여기서 칸트는 우리의 사사로운 감정, 즉 ‘정념’이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고 구속하는 요소라고 봤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의 것을 살짝 훔치는 것은 내 정념에 굴복하는 것이다. 혹은 오직 한 사람을 중요한 요직에 발탁하고자 할 때 학연이나 지연, 혹은 평소에 신세를 크게 진 사람이 청탁을 한 인물을 뽑고자 하는 마음에 휘둘릴 수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정념에 휘둘려 뽑게 된다면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나 불안함을 느낄 것이다. 이는 곧 정념에 따르는 것이 자유와 어긋남을 뜻한다. 오로지 이성의 도덕법칙에 따를 때 사사로운 정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칸트가 도덕법칙에 따르는 것이 자유라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칸트의 주장은 교과서 같은 말만 반복하는 꼰대의 훈시처럼 들릴 수도 있다. 확실히 칸트의 이러한 주장은 틀에 박힌 근대 계몽주의의 견해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5∼1974)와 같은 현대 사상가들은 칸트의 견해에서 이전의 가치관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고의 패러다임을 읽어낸다. 칸트가 주장하는 보편성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자. 그는 이론의 법칙이나 도덕법칙은 모두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론의 법칙, 즉 구성적 법칙은 이미 참과 거짓이 주어져 있으므로 우리가 이론적 판단을 내릴 때 그 법칙을 바르게 적용하는가, 안 하는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가령, 눈앞에 있는 얼음을 수증기라고 판단할 경우 우리는 얼음이란 물이 얼어 있는 상태라는 법칙, 즉 개념을 잘못 적용한 것이다. 참과 거짓이 분명하다. 1+1=3이라고 판단한 것 또한 법칙을 잘못 적용한 것이며 거짓이다. 이론의 보편성은 애초에 명확하며 주어져 있다.

한편 도덕법칙의 경우에는 판단이 어렵다. 하나의 행동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를 도덕적이라고 판단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비도덕적이라는 상반된 판단을 한다. 이 상반된 판단 중 어느 것이 더 타당한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서 칸트는 도덕법칙과 같이 보편성에 근거해 판단하는 다른 모델을 찾고자 했다.

그가 찾은 모델은 다름 아닌 예술의 영역이다. 칸트는 이를 ‘취미판단(Geschmacksurteil, judgement of taste)’이라고 부른다. 가령, ‘이 꽃은 아름답다’는 판단은 ‘이것은 꽃이다’는 판단과 달리 참과 거짓을 결정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이 꽃은 아름답다’고 주장할 때 그 사람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틀렸다고 반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취미판단은 개인적인 취향에 근거한 것일 뿐 어떤 보편성도 지니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칸트는 취미판단이 개인적 취향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박한다. 현실적으로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취향에 따라 마음에 안 든다고 할 수도 있으며 모나리자가 아름답지 않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술 전문가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다빈치의 그림은 아름답다’고 주장할 경우 이 주장이 단지 개인의 취향을 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나리자 그림은 아름답다’는 주장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것이며, 설혹 자신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서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으나 아름답다는 주장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편성의 요구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아렌트가 주목하는 것은 취미판단의 보편성이 이론적 판단의 보편성과 완전히 다른 기제를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론적 판단의 보편성은 이미 주어져 있으며 법칙을 제대로 적용하는지의 여부가 관건이다. 이에 반해서 ‘이 꽃은 아름답다’ 혹은 ‘이 작품은 아름답다’는 주장의 보편성은 다른 사람들의 동의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거듭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보편성은 해소되지 않는다.

아렌트가 보기에 칸트가 말하는 취미판단의 법칙은 이론의 법칙과 달리 미리 정해져 있지 않으며 사람들의 공감(공통감, sensus communis, common sense)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취미판단에서 법칙의 보편성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정서적 공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보편성은 얼마든지 역사적인 맥락이나 문화적인 환경에 따라서 그 내용이 유동적일 수 있다. 피카소의 그림이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졌다면 공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거꾸로 보면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르네상스 시대에는 피카소의 그림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보편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도 있으며 그 이후 세대에게 공감을 얻을 수도 있다.

아렌트는 이러한 공감의 구조를 정치철학의 토대로 삼았다. 만약 사회적 규범이나 규칙이 칸트가 제시한 취미판단의 모델에 따른다면 규범이나 법칙의 구속성은 강제가 아닌 자율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은 다소 이상적으로 보이며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것도 쉽지 않다. 또한 아렌트의 칸트에 대한 해석은 약간은 칸트의 의도를 넘어선 듯 보이기도 한다. 취미판단을 통해 도덕법칙의 절대적인 보편성을 보여주고자 했던 칸트에게 보편성이 역사나 문화적 환경에 따라서 상대적인 특성을 지닌다는 주장까지는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했던 계몽주의 사상가인 칸트가 통제와 자유의 이상적인 모델을 예술에서 찾았다는 사실이다.





빌어먹을 자율 따위… “자율은 환상에 불과”
통제와 자유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철학자들은 통제와 자유를 양립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고민했다. 물론 이 양립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 철학자도 있다.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는 자유라는 것 자체가 인간이 만든 허구적 관념일뿐더러 그것은 곧 속박의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자유는 인간이 세상에 대해서 느끼는 결핍으로부터 만들어진 허상이다. 세상 자체는 결핍이 없다. 세상은 그냥 있을 뿐이다. 결핍은 그 자체가 어떤 비교 대상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가령, 배가 고픈데 먹을 음식이 없다고 치자. 우리는 결핍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결핍이 아닌 배고픔에 불과하다. 배고픔을 느끼는 것과 음식이 없다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강아지는 배고픔을 느끼지만 음식이 없다는 결핍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밥을 가져다주면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는다. 그러나 배가 고픈데 밥이 없으면 배가 고픔을 느낄 뿐 밥이 왜 없는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의 경우에는 다르다. 배고픔은 결핍과 상관이 없다. 결핍은 배고픔 자체가 아니라 배고픈데 먹을 것이 없다는 데서 생긴다. 이는 곧 여기에 음식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비교해 느끼는 결여감이다. 결여는 철저하게 다른 것과의 비교에 의해서,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자면 현재 상태를 ‘부정(négation)’함으로써 만들어진 허구적인 상황이다. 지금 내 앞에 음식이 없어서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프기 때문에 음식의 결핍을 느낀다. 내가 재산이 없다고 느끼는 것도 비교를 통해서이다. 경제적 결핍은 내 경제적 상황을 다른 상태, 우리가 흔히 부자라고 부르는 돈 많은 사람과의 비교에서 비롯된다. 자동차에 대한 결핍도 자동차가 없는 현재 상태를 부정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사르트트에게 ‘없음(무, néant)’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없음을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며 결핍이 없음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것은 현재 상태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 관념에 불과하다.

사르트르는 없음이나 결핍을 거부한다. 이러한 상황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므로 마음만 고쳐먹으면 얼마든지 세상을 충만하게 살 수 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그는 없음이나 결핍이 ‘자유’라는 거창한 이상을 만들어낸 원천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철학자들이나 사회학자, 정치학자나 많은 혁명가는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주장하며 이를 위해서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투쟁했다. 사르트르는 이 고귀한 가치가 한낮 허구일 뿐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없음이나 결핍이 허구적인 관념, 즉 부정의 소산에 불과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러한 결핍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자유란 결핍이나 없음처럼 현재의 상태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리가 부상을 당해서 마음대로 걸을 수 없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다리가 멀쩡한 상태와 비교해서 현재의 상태를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데서 비롯된다. 자유란 구속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아이의 상태를 벗어나 자의식을 지닌 인간 존재가 됐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현실을 구속으로 느끼게 됐음을 뜻한다. 사르트르에게 자유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도 같은 비극이다. 사르트르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은 것이다.

인간이 자유를 갈망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인간이 ‘대자존재(對自存在, être-pour-soi)’이기 때문이다. 대자존재란 말 그대로 나 스스로에 대해서 존재하는 존재를 뜻한다.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든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혹은 자신의 말에서 생각한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을 의식하며, 제대로 글을 쓰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거울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강아지는 거울을 회피하며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자신을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자신을 생각하는 존재인 것은 다른 인간 존재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는 것도, 살이 찔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다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향해 있는 존재를 사르트르는 ‘대타존재(對他存在, être-pour-autrui)’라고 부른다. 자기 자신을 향한 자의식, 즉 대타존재의 본성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면 옷매무새나 외모를 고민하지도 않을 것이며 내 글이 제대로 완성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타인은 내 자의식의 원천이며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타인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내가 스스로 어휘를 택하고 내용을 선택해 전달하는 자유로운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어휘나 내용을 내가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내 글을 지배하는 것은 내 머릿속에 있는 미래의 독자(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다. 사르트르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사고로 잃어 외조부모가 그를 키웠다. 사르트르는 어린 시절 자신이 말을 배우고 사용하게 된 과정을 회상한다. 그의 회상에 따르면 어린 시절 자신이 처음 말을 배우고 어휘를 선택했던 기준은 자신이 아닌 그 말을 듣는 청자, 즉 외조부였다. 어떤 말을 했을 때 외조부가 좋아하는가에 따라서 그는 어휘를 선택하고 말을 했다. 말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말하는 사람이 말의 주체이며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공감을 얻어내는 자유로운 과정으로 생각한다는 생각에 완전히 반대된다.

사르트르식대로 말하자면 인간은 모두 관종(관심받기 위한 종자)이다. 관종은 불행하다. 타인의 시선을 항상 의식하며 그것에 자신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행복과 있음을 과시하는 블로그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있어빌러티’는 인간이 얼마나 타인에게 맞춰져 있는지 보여준다. 관종이란 병적인 집착을 지닌 소수의 인간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인간 자체가 관종인 셈이다. 자신의 풍족함과 자유를 과시할수록 그는 타인의 시선에 노예가 된다.

웹툰 제목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타인은 지옥이다”는 말의 원조가 바로 사르트르다. 그는 “타인(의 눈초리)은 지옥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타인은 인간에게 영원히 자신을 구속하는 지옥이며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타인이 그러한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의 머릿속을 타인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있는 현재의 나에게 미래의 독자인 여러분은 내 머릿속에서 나를 감시하며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통제와 억압, 이로부터 자유라는 것은 사르트르에게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인간에게 자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롭기 위해서 행동하고 판단하는 자신의 주체적인 행동은 자율적이지 않으며 타인에 의해서 감시당하고 조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통제란 무엇일까
인간에게 자유란 비극의 원인이며 자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르트르의 견해는 극단적이다. 철저하게 규율에 따르는 것을 자유라고 단정 짓는 칸트의 견해 역시 자율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사회적 통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전락할 수 있다. 칸트가 내세우는 규율을 보편성을 지닌 규율에 한정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보편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은 현실적으로 모호하다. 칸트의 논리는 자신의 의도와 달리 통제를 정당화할 소지가 있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생뚱맞게도 자유와 자율을 강조하는 칸트의 태도를 극단적 가학행위를 통해서 쾌감을 얻는 가학증세의 창시자 사드(Marquis de Sade, 1740∼1814)와 연결한다. 칸트에게 모든 정념을 억압하고 도덕법칙을 완벽하게 내면화함으로써 자유에 도달하는 것은 궁극적인 쾌락이다. 이러한 내면화는 외부의 통제를 절대화함으로써 자신을 억압하는 것과도 같다. 이는 타인을 철저하게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해 자신의 지배력을 절대화하는 ‘극단적 자유로움의 추구’, 즉 사디즘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은 외부의 가학증이나 피학증 환자가 되지 않고서는 외부의 통제를 완벽하게 내면화해 자유로운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파시즘 사회나 군대 같은 예외적인 사회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라캉에 앞서 니체(Frei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이미 이러한 통제의 내면화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는 인간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보편적인 기준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노예의 태도일 뿐이라고 했다. 그가 보기에 칸트가 말하는 인간 행동의 통제 원리, 즉 보편적인 도덕법칙은 ‘약자의 도덕’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지닌 자신만의 고유한 자질이나 특성, 성향, 기질 등을 억압한다. 인간이 자기만의 개성이나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칸트가 정념이라고 여기는 감성적인 측면이다. 많은 윤리 사상가는 보편적인 법칙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어떻게 내면화하는가에 집중했다. 그러나 니체의 눈에는 보편적인 도덕 법칙 따위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폭력이며 위선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고유함을 말살하는 것이자 궁극적으로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나약한 통제의 수단일 뿐이다. 심지어 그는 인간을 하나의 추상적 개인으로 보는 민주주의의 통치원리 역시 가장 저급한 형태의 통치수단이라고 비난했다.

니체는 어떤 초월적인 보편적 법칙에 따르는 약자의 도덕에 반해 진정한 ‘강자의 도덕’을 내세운다. 강자의 도덕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인 법칙 따위가 아닌 자신만의 고유한 법칙이다. 강자의 도덕은 ‘보편성’이 아닌 ‘차별감(거리의 파토스, pathos of distance)’에 기초한다. 여기서 차별감이란 다른 사람과 나는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차이의 논리를 암시한다. 가령, 나라는 존재를 인간 혹은 남성, 한국인, 교수 등의 보편적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른 남성 혹은 다른 한국인과 다른 나의 특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이러한 기준, 즉 자신의 고유한 법칙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강자다. 니체가 말하는 강자로서 도덕적 인간이란 바로 자신의 고유한 법칙을 스스로 창조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도덕적 인간은 예술가에 가깝다. 예술가란 어떤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스스로 고유한 법칙을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앞서 든 고흐의 경우만 하더라도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서 습작을 통해서 기존 회화의 법칙을 습득했다. 고흐가 밀레의 작품을 습작한 것도 기존 회화의 규칙을 내면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습작을 하면 할수록 혹은 기존 회화 규칙을 익히면 익힐수록 고흐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기존 회화 규칙으로부터 일탈했다. 급기야는 자신만의 고유한 회화 규칙들을 창출했다. 이렇듯 예술가는 의도적으로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이 표현하고자 하는 자유로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기존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법칙을 만든다. 물론 이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신만의 법칙을 창출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흡수되지 않는 자신만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자 동시에 자신의 특이성을 받아들이는 긍정의 논리다.

니체가 말하는 강자의 논리에서 우리는 통제와 자율을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에 대한 이상적인 밑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는 한에서 통제와 규율이 작동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든가 자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소한의 규율이 작동해야 한다는 식의 틀에 박힌 견해와는 구분된다. 이상적인 통제와 규율이 같음의 논리가 아닌 차이의 논리에 바탕을 둬야 함을 암시한다.



게임의 사례를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은 규칙에 의해서 통제된다. 규칙이나 통제가 없는 게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게임의 규칙은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게임의 규칙이 게임을 통제한다면 재미를 목적으로 하는 게임의 의미가 사라지고 만다. 게임에서 좋은 규칙은 게임의 과정을 획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실행 가능성을 만들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매뉴얼대로 실행하고 그 경로가 정해져 있다면 거기에 참여하는 게이머는 흥미를 잃는다. 이는 마치 앞서 설명한 바흐의 푸가에서 말하는 좋은 주제의 기준을 연상시킨다. 푸가에서 좋은 주제의 기준은 듣기 좋은 멜로디나 완벽한 화음이 아닌 풍부한 발전 가능성이다. 이때 풍부한 발전 가능성이란 변형 가능성이다. 곡이 예측 가능하지 않은 방향으로 풍부하게 전개될 수 있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곡의 경로가 정해진 소나타의 형식과 달리 푸가는 예측할 수 없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다. 푸가의 법칙이나 통제는 곡의 전개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게임처럼 예측할 수 없는 풍부한 실행 가능성을 위한 것이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오자. 허비 행콕과 칙 코리아라는 두 거장의 연주는 공동의 규칙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규칙은 획일적이거나 두 사람의 연주를 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고유한 연주방식과 즉흥연주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두 사람의 연주는 일정한 규칙의 통제를 받고 있지만 자유로운 연주를 방해하기는커녕 촉진한다. 상대방의 연주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혹은 스스로의 연주가 어떻게 전개될지 본인들도 모르며 매번 다르게 연주한다. 그들의 합주는 반복하면 할수록 획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바뀐다. 예전에 하지 않은 방식으로 연주하면서 새로운 조화의 가능성, 즉 공감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공명(resonance)’이란 정해진 화음의 규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조화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발전의 원리다. 행콕과 코리아의 합주는 새로운 공명을 보여준다. 이들의 연주는 통제가 획일성이 아닌 차이의 기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필자소개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imago1031@hanmail.net
필자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대음악과 미술, 미디어아트, 건축디자인 등 구체화된 예술 형식에 주목해 철학 사상을 풀어내는 데 주력해왔다. 저서로는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등이 있다.
  • 박영욱 박영욱 | - (현)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저서
    -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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