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논어』란 무엇인가

배움의 기쁨은 몰입에서 온다

266호 (2019년 2월 Issu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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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at a Glance
학생들에게 “왜 공부를 하려고 합니까?”라고 물으면 “공부하는 순간이 좋아서”라는 답이 돌아올 때가 있다.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공부하는 순간이 주는 기쁨에 충실한 것이다. 『논어』의 첫 구절도 이러한 맥락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그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배움이란 어떤 것이기에 기쁨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일까? 답은 『논어』의 첫 구절에 사용된 ‘열(說)’과 두 번째 구절에 등장하는 ‘락(樂)’의 의미를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실 『논어』에서는 배우면(學) 바로 기쁨이 발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배우고 때맞춰 익혀야(學而時習), 기쁨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쁨이란 배움(學)에서 오는 것일까, 익힘(習)에서 오는 것일까. 완전한 기쁨은 ‘학’의 단계보다는 ‘습’을 거쳐 일정한 숙달 단계에 이르러야 발생할 것이다. 『논어』가 설파한 배움의 기쁨에 대해 점점 더 몰입하게 되는 대목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그런데 그 기쁨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논어』에서 배움은 경제적 이익 확보나 학위 취득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배움의 기쁨은 배운다는 일 자체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배움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기쁨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논어』 첫 구절에서 ‘기쁘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열(說)’이라는 글자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열(說)’은 주로 ‘말하다’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논어』가 역동적으로 편집되던 한나라(206BC-AD220) 시대에 ‘열(說)’은 기쁘다는 뜻의 ‘열(悅)’을 대신해 쓰이고는 했다. 1 후한대의 경학자인 허신(許愼)이 저술한 유명한 자전(字典)인 설문(說文)에는 ‘열(悅)’자가 수록돼 있지 않다. 시간이 흘러 당나라(618∼907) 때 정도가 돼야 ‘열(悅)’이라는 글자가 ‘기쁘다’는 뜻을 나타내게 된다. 2 이 글자들(說, 悅)이 나타내는 ‘기쁨’은 어떤 기쁨이고, 그 기쁨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논어』 해설 2: 기쁨은 어디서 오는가
『논어』를 여는 단어, ‘열’(說)과 ‘락’(樂)


『논어』 첫 구절에 사용된 ‘열(說)’의 의미에 대한 첫 번째 실마리는 바로 뒤이어 오는 두 번째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두 번째 구절 역시 기쁨 혹은 즐거움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이 두 번째 구절에서 ‘즐거움’을 나타내는 글자인 ‘락(樂)’과 첫 번째 구절에서 ‘기쁨’을 나타내는 글자인 ‘열(說)’은 의미가 어떻게 같고, 다른가? 다시 말해서 배움에서 오는 기쁨은 친구와 함께하는 즐거움과 어떻게 같고, 다른가?

현행 『논어』 한국어 번역자 중 한 사람인 조명화는 ‘열’과 ‘락’에 관해 “공자가 그 둘을 구태여 구분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한 문장에서 동일한 뜻이 반복될 때 같은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고대 글짓기의 관행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3 그러나 동아시아의 성리학자들은 이 두 글자의 의미를 분명히 구분하고자 애썼다. 예컨대 정이(程頤, 1033∼1107년)는 이렇게 말했다: “‘열’은 마음에 있는 것이고, ‘락’은 외부로의 발산을 주로 한다.” 4 즉, ‘열’은 마음속에 머물고 있는 감정인 반면 ‘락’은 마음 밖으로 표출된 감정을 지칭한다고 본 것이다. 『논어』 두 번째 구절에는 감정을 표출할 만한 대상인 타인(친구)이 등장하는 반면 첫 번째 구절에는 아무런 타인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구분으로 보인다. 김용옥이 “‘열(說·悅)’은 나의 실존적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뜻이요, ‘락’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즐거움’을 표현한 말로 봐야 한다” 5 고 말한 것도 대체로 이러한 해석과 상통한다. 현대의 학자인 인스잉(尹世英) 역시 ‘열(說·悅)’은 내면의 체험으로서 주관적인 정서를 가리키는 반면 ‘락(樂)’은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로 표현되는 즐거움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6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여러 가지 질문을 유발한다. 감정이란 어차피 마음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는 다 매한가지가 아닐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감정이란 결국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닐까. 감정은 표출되는 과정에서 그 모습을 완성하는 것이 아닐까 등등. 이러한 질문들에 시사점을 던져주는 대화가 『논어』에는 여럿 실려 있다. ‘열’이라는 글자가 나오는 다른 구절들을 살펴보자.

선생님께서 칠조개로 하여금 벼슬을 하게 하자 칠조개가 대답하기를 “저는 아직 이 일에 확신이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기뻐하셨다. (子使漆彫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子說. 『논어』 공야장, 6)

이 구절 역시 『논어』 첫 구절과 마찬가지로 공자가 기뻐하고(說)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열’이라는 글자를 통해 홀로 있는 이의 주관적인 마음 상태를 묘사하고 있지 않고, 칠조개라는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기쁨을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열(說·悅)’은 내면의 체험인 반면 ‘락(樂)’은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로 표현되는 즐거움이라는 식의 구분은 타당하지 않다. 물론 여기에도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선생님께서 기뻐하셨다’(子說)라는 언명이 칠조개와의 대화 이후 시간이 상당히 흐른 뒤에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럴 경우, ‘선생님께서 기뻐하셨다’라는 말 역시 홀로 있는 선생님의 주관적인 마음 상태를 묘사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열’을 사용하고 있는 다음 구절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선생님께서 남자(南子)를 만나자 자로가 불쾌해했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맹세했다: 내가 맹세코 말하는데, 예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논어』 옹야, 28)



음란하다는 소문이 있는 여인 남자(南子)를 공자가 만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제자인 자로가 불쾌해하자 공자가 극구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을 위 구절은 담고 있다. 이 대화는 그 리듬으로 볼 때, 1) 공자가 ‘남자’를 만난 일, 2) 자로가 불쾌해하는 상황, 3) 공자가 극구 변명하는 일이 큰 간격 없이 연이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상호 작용의 상황 속에서 ‘열’자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감정의 외면적 표출 여부로 ‘열’과 ‘락’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성리학자의 『논어』 주석에 반기를 든 대표적인 사상가인 일본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년)는 그의 저서 『논어징(論語徵)』에서 ‘열은 본디 마음에 있는 것(悅固在心)’이며 ‘락도 모두 나에게 있는 것(皆樂在我者)’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감정이란 어차피 내면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열(悅)’과 ‘락(樂)’의 진정한 구분은 어디에 있는가? 오규 소라이는 말한다. “‘열’은 도가 아직 저 너머에 있어서 내가 배우는 것이고, ‘락’은 도가 이미 나에게 존재하므로 내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다.” 감정이란 결국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이니, 감정이 어디에 있느냐 문제로 ‘열(悅)’과 ‘락(樂)’을 구분할 수는 없다. 대신, 배움의 대상이 아직 자신의 외부에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이미 소화해 자기 안에 있느냐의 여부로 나눠야 한다는 말이다. 감정은 비록 내면의 일이지만 감정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외부 대상의 위치에 달린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외부 대상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맞춰 기쁨을 해석한 배병삼의 해석과 크게 다르다. 배병삼에 따르면 『논어』 첫 구절에 나오는 기쁨은 배움의 대상이 좋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좋아서 생기는 것이다. “나 자신이 스스로 좋고 기꺼워서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 7


관련 자료가 부족해 오규 소라이가 하는 ‘열(悅)’과 ‘락(樂)’의 구분이 얼마다 타당한지 확정하기는 어렵다. 그 타당성 여부보다 흥미로운 점은 오규 소라이가 ‘열(悅)’과 ‘락(樂)’을 모두 배움의 맥락에서 해석했다는 사실이다. ‘학(學)’이라는 글자가 있기에 『논어』 첫 번째 구절을 배움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두 번째 구절을 어떻게 배움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까? 오규 소라이는 이 두 번째 구절을 단순히 친구들과 어울리는 상황의 묘사로 간주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타인에게 가르치는 상황으로 해석한다. 즉, 오규 소라이에 따르면 두 번째 구절은 먼 곳에서 찾아온 친구에게 자신이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의 과정을 통해 터득한 내용을 가르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락(樂)’인 것이다.

배움(學)과 익힘(習)
사실 『논어』 첫 구절은 배우면(學) 곧 기쁨이 발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學而時習), 기쁨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쁨이란 배움(學)에서 오는가, 아니면 익힘(習)에서 오는가, 혹은 배움(學)과 익힘(習)이 결합해야만 오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오늘날 ‘학습(學習)’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구성하고 있는 ‘학(學)’과 ‘습(習)’을 명백하게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모든 주석가가 ‘학(學)’과 ‘습(習)’의 구분을 강조했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논어집주대전』에서 인용하는 호씨(胡氏)는 “학과 습이 두 가지 별개 일이 아니다(學與習非二事也)”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상당히 일찍부터 ‘습’과 구별되는 ‘학’의 의미를 정의하려는 노력들이 존재해 왔다. ‘습’과는 달리 ‘학’은 기존에 배운 것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일을 의미했다. 한나라 때 텍스트인 『백호통(白虎通)』과 『설문(說文)』은 모두 ‘학’이란 알지 못했던 것을 새삼 깨닫는 것으로 ‘학’을 풀이하고 있다. 가장 저명한 『논어』 해석자라고 할 수 있는 주희(朱熹, 1130∼1200년) 역시 ‘학(學)’과 ‘습(習)’을 명백히 구분한다. 주희의 『논어집주』에 따르면 ‘학’은 ‘본받는 일(學之爲言效也)’을 의미하는 반면 ‘습’은 ‘반복연습’을 뜻한다. 주희는 지속적으로 배우는 과정을 새가 거듭 날갯짓하는 것에 비유했다.

이러한 전거와 주석들을 고려한다면 ‘학’과 ‘습’을 분석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양자 간의 구별이 중요하기에 말을 이어주는 ‘이(而)’라는 표현을 일부러 사용해 ‘학(學)’과 ‘습(習)’을 구분한 것이다. 그리고 ‘학’만으로는 기쁨을 거론하기에 부족하기에 ‘습’을 덧붙인 것이다.

숙달의 기쁨
그렇다면 ‘습(習)’은 왜 기쁨을 주는가? 이 질문에 대해 주희는 『논어집주』에서 이렇게 말한다. “배우고 나서 또 때때로 익히면 배운 바가 숙달되고, 마음속에서 희열을 느낀다. 그리하여 배우고 익히는 일을 스스로 멈출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이란 서투른 상태에서 숙달한 상태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에 수반되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예컨대 루멍위(盧夢雨)는 동일한 대상에 장기간 반복학습을 하는 것은 학습자의 주의력 및 흥미를 감소시키기 때문에 주희의 설명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8

그러나 누구든 일을 잘하게 되면 기분이 흔쾌할 것이다. 못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다. 그리고 숙달되고 나면 자신은 더 이상 그 학습 대상으로부터 소외돼 있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따라서 숙달된 상태는 외부에 존재했던 어떤 앎의 대상이 자기 안으로 들어왔다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집주』에서 정이는 이렇게 말한다. ‘또 말씀하시기를 배움은 장차 그것을 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때때로 익히면 배운 바가 내 안에 있게 되므로 기쁘다.’ 즉, 배운 내용이 숙달돼 자신의 일부가 됐기에, 그리하여 운용이 원활하기에, 기쁜 것이다.

이후 많은 주석가가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고, 부연했다. ‘배우기는 하되 익히지 않으면 표리가 서로 어그러져 배우는 도리에 도달할 수 없고, 익히기는 하되 때때로 하지 않으면 공부가 끊어져 그 익힘의 효과를 이룰 수 없다. 이는 마음속으로는 비록 노력해 나아가고자 하나 또한 비쩍 마르고 설익은 것이라 즐길 만한 맛이 없고, 위태롭고 불안해 있을 만한 편안한 곳이 없는 것이다.’ 9

이러한 발언은 즐거움이 ‘학(學)’의 단계에서 온다기보다는 ‘습(習)’을 거쳐 일정한 숙달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발생함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논어』 첫 구절에서 말하는 즐거움이란 새로운 것을 알게 돼서 발생하는 경이감과는 거리가 멀다. 경이감은 배움을 촉발하는 스타트 엔진일지는 모르나 배움의 기쁨은 일정한 숙달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는 것이다. 요컨대 ‘새로이 배우는 것(學)’이 기쁜 게 아니라 ‘배우고 익혀야(學而時習)’ 기쁜 것이다.

사변의 기쁨
정이는 또 이렇게 말한다. ‘익히는 것은 거듭 익히는 것이다. 때때로 거듭 생각하고 헤아려서 마음속에 흥건하게 되면, 기쁘다.’ 주희가 『논어집주』에서 인용한 정이의 이 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거듭 생각하고 헤아려서 마음속에 흥건하다(時復思繹, 浹洽於中)’고 한 표현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단어는 ‘사역(思繹)’과 ‘협흡(浹洽)’이다. ‘협흡’이라는 어려운 단어에 대해서 주희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주자가 말했다. ‘협흡(浹洽, 푹 젖음)’ 두 글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물건이 물속에 빠졌을 때 그 순간에는 물이 아직 스며들지 않아 겉만 젖고 속은 그대로 말라 있지만 빠진 지 오래되면 속까지 침투해 모두 젖게 된다. 익혀서 익숙해지고, 익숙해져서 기뻐하는 것은 맥락이 서로 관통한다. 정자가 말한 협흡이란 바로 이것이다.” 10 즉, 배움의 정도가 깊어지는 과정(스며듦)을 거쳐서 어떤 전면적인 상태(모두 젖음)에 이르는 양상을 표현한 말이 ‘협흡’이다. 그 밖에 주희가 제자들과 대화한 내용을 정리한 『주자어류』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경전을 볼 때 이해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두루 이해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협흡할 때까지 기다리면 관련된 대상을 마주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배움의 기쁨에 도달하려면 부분적인 이해를 넘어 전체적인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전체적인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부분적인 이해에 만족해 버린다. ‘세상의 학자들은 생각하는 바가 구차하고 사려가 경박해 한 귀퉁이를 얻으면 곧 만족해버리니 그 소략함이 또한 심하다.’ 11 그처럼 부분적인 이해에 머무는 이들은 배움의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다. 배움의 기쁨을 누리려면 ‘생각하고 헤아림(思繹)’의 과정을 통해서 전체적인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다면 배움의 즐거움을 얻기 위한 핵심은 결국 ‘사역(思繹)’인데 이러한 사변적인 과정은 『논어』에서 ‘학(學)’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논어』에서 ‘사(思)’라는 단어는 ‘학(學)’과 대비돼 쓰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우되 사변을 행하지 않으면 맹하고, 사변만 행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12 그리고 (‘학’을 배제한) ‘사(思)’의 효용에 대해서 공자는 유보적이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일찍이 종일토록 밥도 먹지 않고, 밤새 자지도 않고, 사변에 몰두해본 적이 있는데 무익했다. 배움만 못하다’(子曰, 吾嘗終日不食,終夜不寢以思, 無益,不如學也).’ 13 그렇다면 배움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핵심으로 사변을 꼽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실천의 기쁨
사변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강조한 정이와는 달리 실천의 기쁨을 강조한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사량좌(謝良佐, 1050∼1103년)가 그렇다. ‘때때로 익힌다는 것은 익히지 아니하는 때가 없다는 말이다. 시(尸, 제사 때 죽은 이 대신 앉아 있는 아이)처럼 앉아 있는 것은 앉아 있을 때의 익힘이고, 제(齊, 제사 때 엄숙히 서 있음)처럼 서 있는 것은 서 있을 때의 익힘이다(時習者無時而不習坐如尸坐時習也 立如齊莊皆反立時習也).’ 14 이와 같은 『논어』 첫 구절 풀이에서 사변이 차지하는 영역은 없다. 매 상황(時)에서 어떻게 처신 혹은 실천할지를 익히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이처럼 배움의 핵심을 매 상황에서의 실천(時習)으로 이해하려면 ‘습(習)’ 앞에 붙는 ‘시(時)’라는 글자의 의미를 따져 봐야 한다. 위 인용문에서 사량좌에게 ‘시(時)’란 처한 각 상황을 말한다. 15 ‘늘’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의미로 ‘학이시습지’를 해석한 주희 역시 위에서 말한 사량좌의 ‘시(時)’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시’의 해석에 경쟁하는 대표적인 입장이 ‘시’를 ‘제때에’ 혹은 ‘때맞춰’라고 보는 입장이다. 청나라(1636∼1912) 학자 초순(焦循)의 『논어보소(論語補疏)』나 정수덕(程樹德, 1877∼1944)의 『논어집석(論語集釋)』이 전하는 이러한 견해는 성리학이 흥기하기 이전에 이미 영향력 있는 해석이었다. 황간(皇侃, 488∼545)의 『논어』 해석이 대표적인 예다. 그에 따르면 시습(時習)이란 늘 익히는 것이 아니라 제때에 적절한 것을 익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간은 ‘제때’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배우는 데는 세 가지의 종류의 제때가 있다. 첫째는 개인의 차원에서 적절한 때(身中時)다. 개인이 배울 때는 그 나름대로 적절한 때가 있기 때문에 ‘그 시기에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고생스럽게 애써도 이루기가 어렵다(時過然後學,則勤苦而難成).’ 16 이를테면 각 개인의 생애주기에 따라 배우기 적절한 대상이 따로 있을 수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외국어는 어렸을 때 배우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어 습득에 적절한 생물학적 나이가 있다는, 이른바 ‘결정적 시기 가설(the critical period hypothesis)’ 은 이러한 ‘제때’에 관련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일 년의 차원에서 적절한 때(年中時)가 있다. 절기별로 공부하기 적절한 과목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예기, 문왕세자(禮記, 文王世子)』에서 “봄에는 시(詩)를 낭송하고, 여름에는 음악을 연주하고, 가을에는 예(禮)를 배우고, 겨울에는 서(書)를 읽는다(春誦, 夏弦, 秋學禮, 冬讀書)”라고 한 것이 그 예로 거론된다. 이런 식으로 구분한 것은 그 시대 특유의 음양 이론에 기초한 것이지만 그러한 음양 이론에 따르지 않는 오늘날 사람들도 유사한 예를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이 추운 겨울에는 야외가 아니라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배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셋째, 하루의 차원에서 적절한 때(日中時)가 있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따르면 하루 중에도 마음속에 간직하는 일(藏焉), 집중하여 닦는 일(脩焉), 쉬는 일(息焉), 활동하는 일(游焉)로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 나오는 시(時)를 ‘늘’ 혹은 ‘매 상황’의 의미로 풀이한 사량좌나 주희의 견해가 맞는 것일까, 아니면 시(時)를 ‘적절한 때에 맞춰’로 풀이한 황간의 견해가 맞는 것일까? 현대의 학자 푸페이룽(傅佩榮)은 마침내 『논어』 전체에서 11차례 나오는 시(時) 자를 모두 모아 분석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는 역법(行夏之時), 계절(四時行焉), 인생의 단계(少之時)를 지칭한 용례를 빼고는 『논어』에서 시(時)는 모두 적절한 때라는 의미로 쓰였음을 밝혔다. 17 즉, 『논어』 텍스트의 일관성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학이시습지’의 ‘시’를 ‘때맞춰’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사변의 기쁨인가, 실천의 기쁨인가.
주희는 사변의 기쁨을 강조한 정이 식의 해석이나 실천의 기쁨을 강조한 사량좌 식의 해석 모두 문제가 있다고 봤다. ‘주자가 말했다. 이천의 설은 오로지 사색에 대한 것이지 역행의 공부에 대한 것은 아니다 상채의 설의 경우는 오로지 역행에 대한 것일 뿐 강구(講究, 의리를 깊이 탐구함)의 의미는 폐한 것이니 아마도 둘 모두 편벽된 듯하다(朱子曰伊川之說則專在思索而無力行之功如上蔡之說則專於力行 而廢講究之義似皆偏了).’ 18

이처럼 주희는 사변과 실천 모두를 아우르려고 했지만 나는 사량좌의 해석이 상대적으로 『논어』의 원의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성리학자들이 생각한 것과 달리 『논어』에서 ‘학(學)’의 의미는 ‘사(思)’와 대비돼 쓰이며, 따라서 ‘학(學)’에는 ‘사(思)’의 내용이 없다. 이러한 해석이 맞다면 『논어』 첫 구절에서 말하는 배움의 기쁨이란 사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서 온다.

사변이 아니라 실천에서 오는 기쁨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에 따르면 사변적 활동보다는 외적 대상을 향한 몰입 경험이야말로 우리에게 상당한 만족감을 가져다준다. 19

몰입에서 오는 만족감은 자신의 과거를 마음속에서 추체험하면서 느끼는 행복감과는 달리 특정 대상에 열중할 때 생기는 고양감이다. 그러면 몰입은 어떤 경우에 생기는가? 『논어』에서 사변보다는 실천적인 익힘이 기쁨을 가져온다고 한 것처럼 몰입(의 즐거움)은 자신의 내면의 상태에 관심을 기울일 때보다는 목전의 대상에 주목할 때 일어난다고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역설한다. 특히 대응을 요구하는 명확한 목표와 규칙, 목적의 대상이 있을 때, 제법 어려운 과제를 극복하기 위해 정력을 쏟을 때, 몰입은 가능해진다. 몰입은 지나치게 쉬운 대상에 대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일정 정도 이상의 노력을 필요로 할 때, 인간은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노력 때문에 재미를 느낀다. 요컨대 배움의 과정에서 몰입(의 즐거움)이 나타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연구를 발표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아마도 『논어』 첫 구절을 매우 좋아했을 것 같다. 혹시 그래서일까? 그의 아들 마크 칙센트미하이(Mark Csikszentmihalyi)는 버클리대에서 중국 사상을 가르치는 연구자가 됐다. 



필자소개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kimyoungmin@snu.ac.kr
필자는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 교수를 지냈다. 영문 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8)』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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