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Case Study 朝鮮: 17세기의 변화대응논리

원칙만 따졌다면 ‘대동법’은 없었다

김준태 | 260호 (2018년 1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17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정치경제적으로 급격한 변화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권도’와 ‘변통’의 논리로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해나갔다. 대동법, 양전사업 같은 시스템의 혁신은 때때로 원칙과 진리에 어긋나더라도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과감하게 행동에 옮기는 판단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 속에서 신속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오늘날 경영자들에게도 필요한 자질이다.

17세기 조선 왕조는 다양한 도전에 직면했다. 우선, 건국한 지 200여 년이 지나면서 나라의 시스템이 시의성(時宜性)을 잃었다. 전후 복구와 민생안정도 시급한 과제였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참화가 연이어 발발하면서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크게 고통받았기 때문이다. 국가 자원의 부족도 문제로 대두됐는데 경작지 1 및 인구 감소로 인해 정책을 추진할 만한 재원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명(明)·청(淸) 교체가 진행되면서 조선은 명나라와의 의리(義理)를 지켜야 한다는 도덕 원칙과 변화된 국제 질서에 적응해야 한다는 현실론 사이에서 괴리를 겪었다. 병자호란 당시 소위 척화(斥和)와 주화(主和)의 논쟁이 여기에 해당한다. 게다가 인조가 여러 차례 몽진(蒙塵) 2 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 등 국가의 권위가 실추됐고, 여기에 천재지변 3 과 정치적 혼란 4 까지 중첩되면서 조선 조정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이에 당시 지식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국가 차원의 총력 대응을 주문했다. 저명한 학자로 우의정을 지낸 장유(張維, 1587∼1638)는 “재앙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지금 해야 할 일은 혼란을 다스리는 것이요, 지금 지켜야 할 대의는 정혁(鼎革, 혁신)하는 것이니 분발하여 있는 힘을 다해 진작해야 한다”라고 했다. 5 좌의정을 지낸 조익(趙翼, 1579∼1655)도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서는 새로운 일을 벌일 필요가 없이 그저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힘쓰면 그만이지만 지금과 같은 난세에는 반드시 통렬한 개혁에 나서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6 인조대의 대표적인 정치가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막히고 구애된 것은 변경해 통하게 하고, 애매하고 심오한 것은 소통시켜 분명하게 하며, 폐기돼 효력이 떨어진 것은 고쳐서 다시 드러내고, 번거롭고 복잡한 것은 깎아 내고, 빠진 것은 보충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7 위기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대대적인 개혁과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7세기 들어 유독 ‘권도(權道)’와 ‘변통(變通)’이라는 용어가 활발히 등장했던 것은 바로 그래서다. 먼저, 권도란 불변의 진리, 보편적 도덕 원칙을 뜻하는 ‘경도(經道)’가 현실에 맞게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변칙(變則)이다. 상황과 환경에 맞춰 대응하는 것으로, 공자와 맹자가 인정한 이래 유학의 주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8 그런데 권도란 기본적으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는 행위다. 부득이한 상황 때문이라지만 때로는 원칙과 반대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권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권도를 실행하되 궁극적으로 경도에 부합하게(규범과 원칙에 귀결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행위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권도는 오용되거나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그 때문에 유학자들 중에는 함부로 권도를 사용하지 말라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131-1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시대의 변화나 개별 상황에 대응하기가 어려워진다. 맹자의 말을 빌리자면 아내가 아닌 이성과 손을 잡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 구해주기를 망설이다가 죽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급박한 위기나 예측하지 못했던 변화 앞에서 내가 과연 권도를 사용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다가는 골든타임을 놓쳐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유는 시대의 변화에 부합하고 민심이 지지하며 나라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 일이라면 누구든 권도를 행해도 된다고 했다. 9 최명길도 사심 없는 마음과 굳센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권도를 시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0 권도를 가로막는 심리적 기제를 제거함으로써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다음으로 ‘변통(變通)’을 살펴보자. 보편도덕을 변화된 현실에 맞게 구현하기 위해 제시된 ‘권도’가 실천철학적인 의미를 갖는다면 정책 차원에서는 이 변통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됐다. ‘변통’은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11 에서 유래했는데 그 바탕에는 수시변역(隨時變易)과 인시제의(因時制宜)의 의미가 담겨 있다. “만물이 때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천지의 변함없는 법칙” 12 이므로 일정한 것에 고착돼 있으면 그것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시대 상황에 걸맞은 마땅함을 찾아 적절하게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 변통이다. 13


이러한 변통을 강조한 대표적인 인물은 김육(金堉, 1580∼1658)이다. 그는 자신이 올린 거의 모든 상소에서 ‘변통’을 거론했는데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에 맞게 법과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14 한 번은 임금이 직접 김육에게 ‘고금의 법제를 무너뜨리고 있다’며 비판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김육은 사직상소를 올리며 “법과 규례를 엄격히 집행해야 한다는 것을 신이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형세를 알아서 적절하게 변통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변통’이 포기할 수 없는 가치임을 천명한 것이다. 15

이와 같은 ‘권도’와 ‘변통’의 이념을 바탕으로 당시 정치가들은 다양한 개혁정책을 시도했다. 그들은 “비상(非常)한 변고가 있으면 비상(非常)한 공으로 대응해야 한다”라며 특수한 상황에 걸맞은 특수한 대응을 강조했다. 기존의 질서를 과감히 바꾸고 시스템의 혁신을 위해 노력했는데 양전(量田)사업, 대동법(大同法), 호패법, 동전 유통, 염철(鹽鐵) 개편, 관제 개편, 군비 확충 등 다양한 조치들이 단행됐다. 이 과정에서 나라의 규범을 흔든다는 반론이 제기됐지만 ‘권도’와 ‘변통’의 논리로 돌파해갔다. 물론 정책에 따라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이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노력 덕분이었다. 예를 들어 1670∼1671년 역사상 유례없는 대기근이 닥쳤을 때 조선 조정은 신속하고도 놀라운 위기 대응 능력을 보여줬다. 권도와 변통의 능동성을 체질화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16

‘권도’ ‘변통’으로 대표되는 17세기 조선의 변화 대응 논리는 오늘날 기업에도 시사점을 준다. 기존의 관례나 규범에 얽매이지 말고 항상 혁신해야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변화’를 상수로 간주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저 여기까지라면 굳이 이 시대의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기업들은 훨씬 더 상세하고 체계적인 변화 대응 매뉴얼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권도’에 판단 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도란 지금 이 시대에, 이곳의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선택지를 찾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지금이 과연 권도를 사용해야 할 상황인가? 그렇다면 어떤 권도를 사용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사용한 권도를 어떻게 하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만들 것인가?(정당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숙고해서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변통’도 마찬가지다.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고 올바르게 방향을 설정하려면 역시 판단력이 중요하다. 선입관을 배제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권도와 변통을 주장한 학자들이 하나같이 판단 주체로서 인간 마음의 역량을 강조하고, 이를 키우기 위한 수양 공부를 중시한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게다가 권도와 변통은 선한 목적을 위해 때로는 규범, 의(義)에서 벗어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도 길을 잃지 않으려면 인간의 마음이 확고하게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심화하고 변화의 속도가 가속화하면서 선제적이면서도 창조적인 대응 능력이 중시되고 있다. 하지만 변화를 따라가는 데 급급해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고 결정을 내리는 주체인 개인의 성숙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기술의 중요성만 얘기할 뿐 기술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근본적인 판단과 실행력을 간과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상황은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숙고할 수 있는 국면이 아니다. 충분히 생각해볼 시간 없이 빠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때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사람의 습관이고 사고 체계이며, 내재된 가치관이다. 평소 꾸준히 배움과 수양을 통해 자신을 갈고닦아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불확실성이 심해질수록 더욱 확실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 17세기 조선이 주는 메시지다.

필자소개 김준태 성균관대 유학대학 연구교수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 등이 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