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생각 없어?”라는 말 넘치는 세상. 생각의 달인은 고전에 있더라

230호 (2017년 8월 Issu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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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근 신정근
Article at a Glance

생전에 ‘상갓집의 개’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공자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뭐라도 하려고 한다’는 뜻의 지기불가이위(知其不可而爲)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쓰러졌다가도 금방 다시 일어나길 반복했고, 그 지난한 실패의 과정을 견뎌냈기에 사회현상의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대안을 찾아내는 ‘생각의 기획자’가 될 수 있었다. 생각이 최종적으로 형상화되기까지 종종 답답하고, 갑갑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하지만 공자처럼 안 되더라도 다시, 또다시 노력할 때 수만 갈래의 생각 소(素) 중 일부가 결국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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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이제 G20에 참가할 정도로 국제사회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다. 한국전쟁으로 전국토가 폐허가 됐던 상황을 고려하면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산업 분야도 선진국의 제품을 모방해서 수출하던 단계를 벗어나서 첨단 제품을 고안하고 개발해야 살아남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 있던 것을 모방하던 수준에서 없는 것을 기획해야 하는 수준에 이른 셈이다. 주변에 “뭐 좋은 생각 없어?”라고 질문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생각 좀 합시다”라는 말이 빈번하게 들린다. 이제 더 이상 생각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상황이 아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지금의 지위를 지키기 어렵게 된 것이다. 생각이 귀찮다고 나 몰라라 하는 일은 더 이상 애교로 봐줄 수도 없게 됐다. 바야흐로 ‘생각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생각의 의미와 조건

그렇다면 도대체 ‘생각’이란 무엇인가. 생각을 이야기하려면 그 의미를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의미를 고려하고 있으면 같은 말이라도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에는 일단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어 그리워하다는 뜻이 있다. 또 잊는다고 하면서 잊지 못하고 계속 미련을 두다는 뜻도 있다. 하지만 이런 감정 맥락의 생각은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로 각자 알아서 할 사항이지 공적으로 논의할 사항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생각’은 바로 바뀌는 현상들 중에서 어떤 일관된 흐름을 포착해 형상화와 개념화를 해내고 다양한 대안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에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정신적 활동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생각’이라고 하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려워한다. 금방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쭉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다양한 요소를 비교하며, 장단점을 나누어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론화하고 북한 핵문제를 푸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반면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만지고 느끼는 대상이라면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쉽다고 여긴다. 단일한 대상에 대한 짧은 시간에 느낀 것을 말하자니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뜨거운 걸 뜨겁다고 하고, 시원한 생맥주가 맛있다고 하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학생들에게 여기저기 자료를 편집하는 졸업논문보다는 차라리 인문 사회 또는 자연과학의 교양 주제를 제시하고 A4 용지 3∼5장 분량으로 자신의 생각을 작성할 것을 주문하고 싶다고 종종 이야기한다. A4 용지 3∼5장은 1∼2분 머리를 짜내서 채울 수 있는 분량이 아니다. 적어도 상당한 시간에 걸쳐 생각을 정리하고서 30분에서 1시간 이상 작성해야 하는 긴 분량이다. 이렇게 30분 이상씩 생각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다면 홀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힘이 예사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생각을 정리할 10분의 시간을 가진 뒤 원고 없이 5∼10분 발표를 해보는 것도 좋다. 생각을 정리하고 노트 없이 조리 있게 말한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글쓰기와 말하기는 누구에게 의존할 수 없고 오로지 자신의 기억과 정리한 학습을 바탕으로 쉬지 않고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다. 외운 것을 받아쓰거나 읊조리는 것이 아닌 이러한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통과한다면 실용적이든, 전문적이든 의제가 제시됐을 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의제의 논전을 뽑아내고 대안과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것이 생각을 잘하기 위한 일반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생각을 잘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17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적으로 40만 부 이상이 팔린 스테디셀러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의 사례에서 여실히 알 수 있듯이 축소를 통해 전체를 통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만약 지구에 100명이 산다면’으로 가정해 살펴보면 63억의 인구가 살고 있는 전체 지구의 모습이 한눈에 확 들어온다. 남자가 48명이면 여성이 52명으로 4%가량이 많고 어린이가 30명이면 어른 70명으로 후자가 두 배 이상이다. 몇억에 달하는 큰 숫자를 말하려면 발언하기도 쉽지 않고 정확하게 외우기도 쉽지 않다. 대신 축약하면 전체 숫자를 장악해 큰 그림을 그리기가 한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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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사고의 규칙을 지켜가면서 판단(判斷)을 내리고, 일단 판단을 내리면 과단성 있게 추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판단의 한자를 살펴보면 칼과 도끼가 의미의 요소로 들어가 있다. 판단은 이처럼 앞서 진행해온 생각의 흐름을 끊고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흘러 사고의 규칙을 지키지 않거나 사고의 규칙을 지키고도 제때에 판단을 내리지 못하면 늘 생각 중이되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일을 진행할 수 없게 된다. 기업 CEO의 경우, 중요 정책을 판단하지 못해 기업 전체가 올 스톱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린 판단은 모두 문제이므로 적실한 판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공자도 너무 여러 차례 생각을 뒤집는 사람에게 “두 번 정도 반복해서 생각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의 재사가의(再思可矣)를 강조하기도 했다.



고전은 생각의 무한한 보고

밥을 지으려면 쌀이 필요하다. 마법을 부리지 않고서야 쌀도 없이 밥을 지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신이 아니라면, 생각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낼 수 없다. 우리가 멀리 여행을 가려면 적금을 부어 여유 자금을 준비하듯이 생각을 잘하려면 사전에 생각을 풀어나갈 자료를 준비해두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전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고전을 읽자고 하면 간혹 현재는 과거와 다른데 고전을 읽으면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다. 일견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고전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지금도 유효한 의미와 메시지를 던지는 책이라고 한다면 읽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예컨대 다윈은 종래의 창조설을 대신해 <종의 기원(1859)>에서 진화(evolution) 학설을 주장했다. 지금도 진화론은 생명의 탄생과 발전을 설명하는 유력하고 타당한 학술로 권위를 잃지 않고 있다. 따라서 생명 현상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종의 기원>은 ‘19세기 중엽’과 ‘영국’의 시공간을 초월해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인문학에서 <논어(論語)> <장자(莊子)> 같은 고전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BC6세기 인류나, 21세기의 인류나 모두 ‘호모 사피엔스’에 속한다. 호모 사피엔스에 속하는 한 인간은 이성과 감성의 충돌로 갈등하고, 사소한 실수를 합리화시키기도 하고, 또 실패와 좌절에서 지혜를 찾아내기도 한다. 물론 오늘날 인공지능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호모 사피엔스 이후의 next human, post human의 탄생이 예기되기도 하고 신이 된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데우스(Homo Deus)’란 단어가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은 아직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라는 점에서 합리적인 자기 절제와 이웃과의 연대를 말하는 <논어>, 변신(transformation)으로 자유를 누리고 사태에 감정 이입을 배제하길 강조하는 <장자>를 여전히 읽을 만하다.

결국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고전은 후대의 사람들이 생각을 진행시켜나가는 데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는 사상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을 읽어서 소화한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떤 주제가 나에게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고전에서 캐낸 사상 자원을 바탕으로 생각을 요령 있게 진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고전은 시공간의 검증을 통과해 유효한 만큼 수많은 사람과 대화를 진행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 이때 수많은 사람은 근대 교육을 받은 세계 각지의 사람을 가리킨다.

물론 지금의 시대와 시간적으로 간격이 있기 때문에 고전의 언어가 낯설고 문체가 이질적일 수 있다. 단, 일정 시간을 들여 지금과 다른 특성을 이해하면 금방 극복할 수 있다. 고전(古典)을 두고 힘들게(苦戰), 홀로 싸우다(孤戰) 보면 높은 전망을 던져주는 고전(高展)의 지평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다.



생각은 미래의 나를 만나는 사건

과거엔 미래(未來)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간주됐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대를 가리켰다. 그러나 최근 빅데이터의 구축과 활용, 과학적 예측이 발전함에 따라 미래가 어느 날 갑자기 현재화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나는 시간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물론 현재와 미래 사이의 단절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다양한 가능성과 요소가 미래로 옮겨가서 재조직화(reorganization)된 것이기 때문에 현재와 완전히 다른 미래의 출현 가능성은 희박하다. 예컨대 2017년의 결과는 분명 2016년의 원인에 바탕을 두고 있다. 2016년 정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2017년의 도래를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2016년을 읽어내면 2017년의 전부를 예측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조망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미래를 알기 위해 신탁을 맡길 일이 아니다. 다양한 가능 세계(possible world) 중 실현된 현실 세계(real world) 이외의 다른 가능성을 검토하거나 현실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다가올 미래 사회의 모습을 예측할 수 있다. 여기서 아직 실현되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의 작용이 아주 중요하다. 이미 실현된 것은 학습해서 기억하면 되지만 실현되지 않은 것은 학습도, 기억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실현되지 않은 것을 재조합해 새로운 것을 낳을 수 있는 생각의 힘, 상상력이 필요하다.



과거 우리는 주입식 교육과 기억을 중시했다. 기억은 모든 학습의 기본이므로 그 자체가 좋다,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다만 학습의 초점이 기억에 맞춰져 있고 그 기억에서 하나씩 차례로 끄집어내는 것에만 그친다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기억하지 않는 다른 것을 생각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내 기억에 따르면 이랬고 저랬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만약 이런 경우라면 지금과 달리 요렇게 해볼 수 있다”는 말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상상력은 기존에 결합되지 않던 방향으로 사물과 사태를 결합시켜 인식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품을 기획할 수 있게 해준다. 상상은 기억을 바탕으로 하지만 기억에 한정되지 않으며 새로운 결합을 창조하는 재배치 능력이다. 이 능력이 발휘되려면 자유로운 연상과 도발적 기획이 중요하다. 꽉 막힌 틀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제한을 두는 장벽을 철폐해야 기존에 생각지 못했던 재조합을 가볍게 시도할 수 있다.

또 이러한 상상이 한갓 아이디어의 홍수에 그치지 않고 전망 있는 대책으로 발전하려면 상상력은 환상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형상화(imagination)와 개념화로 이어져야 한다. 형상화는 크기, 색깔 등 특정한 재원을 가진 구상이 갖춰지는 것이다. 북송시대 화가 문동(文同)과 문인 소식(蘇軾)은 이를 ‘흉중성죽(胸中成竹)’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대나무를 그리려면 현실의 대나무에서 덧보탤 것은 덧보태고 뺄 것은 빼서 예술적 형상으로 재창조돼야 한다. 화가의 의식에 대나무의 형상화가 자리를 잡아야 붓으로 그려낼 수 있다. 형상화가 예술적 창작과 관련이 깊다면 개념화는 언어적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아무리 좋은 생각과 아이디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도 없고 과정을 더 구체화할 수도 없다.

생각은 형상화와 개념화 작업을 통해 예술적으로 표현되고 언어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평소 예술 작품을 많이 감상하고 개념적 사고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러한 생각의 훈련을 거칠 때만이 필요할 때 핵심을 포착해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는 등 리더의 미덕을 갖추게 될 것이다.



생각의 형성

생각이 아이디어 단계에 이르러 살이 붙고 구체적인 대안으로 제기되는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장자에 따르면 생명은 신의 창조가 아니며 성체(成體)가 태어났다가 일정한 시간 뒤에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최초의 단계를 살펴보면 본래 생명이 없었다. 생명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형체도 없었다. 형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도 없었다. 황홀한 가운데 섞여서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를 갖추게 되고 형이 변하여 생명을 갖추게 된다.”(찰기시이본무생(察其始而本無生). 비도무생야(非徒無生也), 이본무형(而本無形). 비도무형야(非徒無形也), 이본무기(而本無氣). 잡호망홀지간(雜乎芒芴之間), 변이유기(變而有氣), 기변이유형(氣變而有形), (형변이유생形變而有生). <지락> 中)

장자의 말에 따르면 생각도 처음부터 구체화돼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저렇게 하면 어떨까’라는 식으로 여러 가지 생각의 자료가 마구 뒤엉켜 있다. 이 상태에서 생각의 한 갈래를 잡고 물고 늘어지면 “이게 좋지 않을까”라는 느낌이 온다. 그것이 바로 기(氣)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구체적 생각을 더하다 보면 형상화와 개념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형(形)의 차원이다. 마지막으로 형에 다시 생각을 더 보내고 변수와 상수, 그리고 장단점을 비교해 “꼭 이거여야 된다”는 믿음이 들면 생(生)의 차원이 나타난다. 비로소 생각이 제 색깔의 옷을 입고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고기를 꼬치에 꿰듯이 순식간에 완결될 수도 있지만 한 단계 한 단계 넘어갈 때마다 수많은 시간을 잡아먹으며 더디게 진행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실패에 대해 관용의 태도를 취하고 실패한 자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문화를 길러야 한다. 한 번의 실패가 재기불능의 퇴출로 이어진다면 누가 기(氣)의 단계에 있을 때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적극적으로 말하겠는가? 자기 스스로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을 모르는데 책임부터 지라고 하면 과연 누가 가볍고 자유로운 대화의 마당으로 나오겠는가?

공자는 생전에 ‘상갓집의 개’라는 말을 듣는가 하면 실로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필자는 그중에서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뭐라도 하려고 한다”는 지기불가이위(知其不可而爲)가 공자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쓰러졌다가 금방 일어서는 오뚝이를 닮았었다. 그가 컨설팅과 로비를 통해 성공이 보장된 꽃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이루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그때마다 공자는 실패를 통해 자신을 단련하며 실패에 대한 면역을 길렀다. 이 때문에 공자는 사회 현상을 겉으로 보고 넘어가지 않고 깊이 들여다보고, 그 대안을 찾아내는 시대의 기획자가 될 수 있었다.



생각이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종종 어떻게 형상화시킬 수 없어 답답하고, 뭐라고 표현할 수 없어 갑갑하기 그지없는 침묵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때 안 된다고 포기하지 않고 공자처럼 안 되더라도 넘어진 지점에서 다시 일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주위의 격려와 위로가 절실히 요청된다. 수만 갈래의 생각 소(素·물건의 시초나 바탕) 중 극히 일부분이 현실 세계에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직급과 지위를 따지지 않고 자유롭게 의사를 교환하고 장단점을 말하는 ‘토론 공화국’이 실현돼야 한다. 생각이 나와도 침묵만 흐르고 실패한 뒤에 책임만을 추궁한다면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분만 말하고, 조금의 위험성만 감지돼도 중도에 그만두자고 할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의 광장에 나와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을 때 토론 참가자들은 모두 생각의 달인이 되고 부자가 될 수 있다. 말하는 데에 용기가 필요하다면 참가자들은 영원히 생각의 초보이자 빈자가 될 것이다. 우리가 전자를 바란다면 생각의 결과만을 노릴 것이 아니라 생각을 둘러싼 우호적인 여건이 단단해지도록 해야겠다.



창의마저 교육하는 사회

생각이 강조되는 것은 다른 말로 창의(創意)적인 사고가 중시된다는 말이다. 정부와 기업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창의와 혁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을 보면 창의는 전혀 비창의적인 방식으로 논의되고 있다. 창의를 교육하면 비창의적인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창의적인 인재로 바뀌리라고 가정하고 있는 듯하다. 창의의 중요성은 슬로건을 내걸며 강조할 수 있지만 창의 자체는 캠페인으로 떠든다고 해서 갑자기 가능해지는 일이 결코 아니다.

창의는 앞서 살펴본 상상력과 부분적으로 닮아있는데 창의는 상상력보다 훨씬 희소성을 띄는 사고 활동이다. 그리하여 고대에는 창의를 신적 특성으로 봤으며 낭만주의 시대에는 천재의 특성으로 간주했을 정도다. 또 창의는 기존의 문법과 규범에 적응하지 못하는 광적인 의미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저런 맥락을 따지지 않고 “창의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집단 최면에 걸린 모양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창의를 너무나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정신적 활동으로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 신과 천재가 아니더라도 당연히 창의력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는 식이다.

보통 사람은 사고의 폐쇄 회로에 따라 움직인다. 인지와 행동, 그리고 사고에도 일종의 패턴이 존재한다. 그런데 기존에 없었고 앞으로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것을 내놓으라고 하면 개개인의 사고 안정성이 흔들리게 된다.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고 말해도 되느냐는 의구심을 넘어서야 한다. ‘의구심의 허들’이 우리 사회에 아직 강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 보면 창의력이 발휘되지 않을 환경에서 갑작스레 창의력을 발휘하라고 다그치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효율과 안정성을 가진 사고의 패턴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비근한 일례로 출근해서 컴퓨터를 부팅하고 e메일을 체크할 때는 컴퓨터에 대해서 누구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스위치 버튼을 눌렀는데도 부팅이 되지 않으면 그때서야 컴퓨터를 언제 샀고, 왜 작동하지 않은지 생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기존 사고 패턴이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 다른 대안과 가능성을 모색하게 된다. 이때 ‘창의’는 가장 먼저 앞장서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선도적 특성을 갖는다. 이후의 활동은 최초의 창의적 사고를 따라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모든 활동에서 창의를 말할 게 아니라 실제로 창의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창의를 요구할 때 창의적 사고가 가능해질 수 있다. 창의적 사고를 지나치게 자주 요구하게 되면 창의와 무관한 일도 창의로 왜곡되는 일이 일어난다. 창의를 말해야 할 때 창의를 요구하고 통상적 상황이면 패턴의 숙지와 일상적 개선으로 충분하다.



우리 사회는 갖춰야 할 미덕과 활동을 캠페인처럼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밀어붙여서 가능한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 특히 사고의 활동은 순간적으로 확확 바뀌고 확장되는 영역이 결코 아니다. 몸의 관성처럼 사고의 관성도 변화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생각이 깊고 풍부하며 창의가 왕성해지려고 하면 몇 번의 교육으로 가능하지 않다. 자신의 사고 패턴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대안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충분한 여유를 줘야 한다. 생각의 한 갈래라도 붙잡고 수차례 검토하고 그 결과를 차분하게 토론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생각의 달인을 만들고 창의적 인재를 키우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여럿이 어울려 이야기하는 만큼 혼자서 깊게 생각하는 여유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공자의 말처럼 말이다.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면 그 과정에서 생각과 창의의 길을 찾아낼 터이니 기쁘지 않겠는가?”(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xhinjg@hanmail.net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동서철학을 배우고 동양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성균관대 유학대학에서 재직하고 있다.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다양하게 실험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
간> <동양철학, 인생과 맞짱 뜨다> <불혹과 유혹 사이>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공자와 손자, 역사를 만들고 시대에 답하다> 등이 있다.



생각해볼 문제

1 생각을 형상화해내기까지는 개인의 노력은 물론 주위의 격려와 위로가 절실히 요구된다.
생각을 끄집어낼 수 있는 우호적인 여건이 먼저 자리 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과연 당신의 조직은 과연 개인들이 거리낌 없이 발언하고, 토론할 수 있는 ‘생각의 광장’을 갖추고 있는가. 생각이 나와도 침묵만 흐르고, 생각을 내놓은 이에게 오히려 책임을 추궁하고 있지는 않은가.

2 생각을 잘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축소를 통해 전체를 통찰하는 능력이다. 축약할 때, 오히려 제대로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 당신의 조직이 직면한 크고 작은 문제를 간결하게 압축해 말로 풀어내보자. 오히려 해결해야 할 ‘큰 그림’이 보일지도 모른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35호 Smart SCM 2017년 10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