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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은 단순한 ‘중간’이 아니다

이치억 | 220호 (2017년 3월 Issue 1)
‘중용’은 동서의 현자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한 사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의 전제조건으로서 절제의 중용을 중시했고, 인도의 보살 나가르주나는 사상적·실천적 중도를 설파하는 <중론>을 저술했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중용>이라는 책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중용>은 <예기(禮記)>의 한 편으로 전해 내려 오다가 송대의 주자에 의해 독립적인 경전의 지위에 올랐다. 공자의 사상이 2500년간 맥을 이어오고, 오늘날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중용사상에 있다. 오늘날도 중용을 지킨다는 말은 매우 고상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이 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는 오늘날 더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사상이기도 하다.

중용이란 무엇일까? 중용을 한마디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만 반대되는 개념을 통해 이해를 도울 수는 있다. 중용의 반대말은 ‘극단’이다. 중국의 전국시대, 일반 백성들에게 부귀는 꿈꾸는 것조차도 사치일 정도로 생존이 위협을 받던 시절, 백성들에게 가장 환영받던 사상은 양주(楊朱)와 묵자(墨子)였다. 양주는 ‘세상이 이롭게 된다 할지라도 내 털 하나 뽑아주지 않는’ 극단적인 위아(爲我)주의자였고, 묵자는 ‘세상에 이롭다면 내 몸을 산산이 부서뜨려서라도 돕겠다’는 극단적인 겸애(兼愛)주의자였다. 자막(子莫)이라는 노나라의 현자는 이 두 사상이 매우 극단적이라고 생각해서 그 중도를 취했다. 반쯤은 나를 위하고, 반쯤은 세상을 위해서 마음을 쓰겠다는 것이다. 맹자는 자막이 극단적인 위아주의나 겸애주의보다는 낫지만 중용은 아니라고 했다. 경중을 고려하지 않고 항상 고정된 중도를 취하는 것은 중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용은 단순한 중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위아와 겸애의 중간이 중용이 아니듯 오늘날의 진보와 보수의 중간인 중도, 부자와 빈자의 중간인 중산층, 우월과 열등의 중간 등등은 중용이 아니다. 진정한 중용이 되려면 양 극단을 모두 이해하고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정치적 중도는 보수와 진보를 모두 멀리할 것이 아니라 보수와 진보 모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중용은 상황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항상 중간의 한 지점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맞는 중용, 즉 시중(時中)을 해야 한다. 사안과 사태에 따라 가장 알맞은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시중을 실천하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때로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결정을, 때로는 극단적으로 진보적인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이는 기회주의자나 무원칙과는 다르다. 기회주의자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고 무원칙은 주관이 없는 사람이지만 시중은 공평무사함과 뚜렷한 주관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용을 실천하기는 어렵다. 공자는 “천하의 재산도 나누어 줄 수 있고, 벼슬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시퍼런 칼날도 밟을 수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불가능이란 정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중용의 어려움을 강조한 표현이다. 중용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중용적인 인간이 돼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사욕을 내려놓되 전체를 ‘나’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인(仁)의 심성과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방안을 찾아낼 수 있는 지(智)의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끊임없이 성찰하고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이치억 성균관대 초빙교수

필자는 퇴계 선생의 17대 종손(차종손)으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서 유교에 대한 반발심으로 유교철학에 입문했다가 현재는 유교철학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성균관대 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성균관대·동인문화원 등에서 교학상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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