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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과 제국

하루아침에 사라진 ‘로마 초대 왕’ 로물루스 그가 남긴 교훈은…

임용한 | 217호 (2017년 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로물루스는 로마의 건국자이자 초대 왕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전쟁에 참여한 젊은이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면서 그들을 ‘로마의 시민’으로 만들었다. 그게 곧 ‘로물루스의 시민’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느낀 기득권자들은 로물루스를 경계했고, 로물루스는 자신의 안전보장을 위해 300명의 정예병사로 구성된 경호대를 창설했다. 그의 권력은 막강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지 38년이 되던 해이자 54세가 되던 해에 갑자기 사라졌다. 기존 권력자들인 ‘의원들’이 둘러싸고 있던 상황이었다. 암살이 의심됐지만 의원들은 그가 ‘신이 됐다’고 선포하며 그를 신격화해버려 갈등과 분열을 막았다. 이 일화에는 영웅조차 이길 수 없는 ‘권력욕’ ‘권력의 냉혹함과 대중의 현실주의’ 등 현대 정치와 경영에 주는 다양한 교훈이 숨어 있다.


편집자주

그리스·로마 문명은 르네상스의 모태였고 서구 문명과 현대사회를 만든 힘입니다. 로마제국과 르네상스의 이야기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생생한 교훈을 던져주는 이유는 서구 문명과 현대사회가 지닌 공통성 때문입니다. 그리스 문명과 로마제국을 만든 사람들과 그들 세계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통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을 키워나가시기 바랍니다.


로물루스는 로마의 건국자이자 초대 왕으로 인정받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 왕이라는 지위가 후대의 왕과 같은 것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로마의 7언덕은 고구려의 5부나 사로국의 6촌처럼 서로 필요에 의해 협력하고 반목하는 공동체였다. 로물루스는 최고 권력자였지만 세습적이고 안정적인 권력을 지닌 왕은 아니었다. 그 사실은 로물루스가 제일 잘 알았다. 마지막 전투를 끝내고 내치로 돌아선 로물루스는 더 확고한 권력을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혈연이나 부족공동체라는 울타리에 구애받지 않는 권력 기반이 필요했다.

로물루스가 찾아낸 방법은 군대였다. 아니, 모험심이 가득하거나 정복과 폭력의 세계로 기꺼이 뛰어들 자세가 돼 있는 젊은 전사 집단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로물루스는 전쟁으로 획득한 땅을 병사들에게 나눠줬고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 방법은 훗날 카이사르나 옥타비아누스같이 로마 제국의 건설자들이 그대로 답습하는데 그들이 로물루스를 따라했다기보다는 똑같은 정치적 판단을 내렸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로물루스는 선구적이고 대담한 리더였다.

토지를 분배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로물루스는 ‘아버지들’이라고 불리던 의원들을 배제했다. 의원들이 자신의 몫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지만 토지 분배를 전적으로 자신의 공으로 돌리고 싶었을 것이다. 대중들은 자기들에게 이익을 나눠주는 지도자를 좋아하게 돼 있다. 아직 사회가 크게 분화하지는 않았지만 가시적으로는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세력가, 부호들에게 갈 몫을 빼앗아서 주는 형식을 취하면 더 감격한다.

의원들은 로마시 안에 존속하는 여러 구역과 가문, 공동체를 대표한다. 로마라는 깃발 아래서 이들도 모두 함께 싸워왔던 만큼 그들은 분명히 로마가 획득한 정복지에 대해 지분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로물루스는 구역과 부족을 무시하고 전쟁에 복무한 병사, 개인을 기준으로 땅을 분배했다. 이것은 언덕의 주민을 로마 시민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물론 다른 사람의 눈에는 ‘로물루스의 시민’을 만들어내는 의도로 보였을 것이다.

로물루스도 이런 불만을 눈치 채고, 일찌감치 ‘켈레레스’라는 300명의 경호대를 창설했다. 아마도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사령관을 보호하는 호위대로 창설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평화 시에도 해산하지 않고 로물루스의 주변에 머무르게 됐다. 켈레레스는 재빠른 자들이라는 뜻인데 전투에서 왕을 보호하려면 재빨라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재빠름은 점차 빨리 시중을 들고, 왕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군중을 제어하고, 로물루스가 내리는 체포령을 신속하게 수행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왕이 행차할 때 행렬의 앞에 서는 켈레레스는 막대기와 가죽끈을 들었다. 경찰의 곤봉과 수갑과 같은 것이었다.

로물루스는 54세 되던 해, 왕위에 오른 지 38년 째였던 해의 7월7일, 갑자기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장소도 볼카누스신전이었다는 설과 도시 밖 염소의 늪이라는 곳 근처의 평원에서 군대의 재배치를 의논하기 위해 민회를 열던 중이었다는 설이 있다. 어느 설이든 확실한 것은 그가 사라졌을 때 그의 주변을 의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에 의원들이 그를 살해한 후에 시신을 토막을 내서 각자 일부를 품에 숨겨서 나갔다는 추측도 생겼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했으면 의원들이 모두 피투성이가 됐을 것이다. 좀 더 그럴듯한 설명은 갑자기 어둠이 내려앉고 폭풍과 천둥이 치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됐는데 날씨가 개이자 로물루스는 사라지고 빈 의자만 남아 있더라는 것이다.



그날 현장에서부터 로물루스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공존했다. 어떤 이들은 로물루스가 보이지 않자 의원들이 로물루스를 살해하고 시신을 은닉했다고 추궁했다. 의원들은 엉뚱하면서도 대담한 주장으로 자신들의 암살설을 일축했다. 로물루스가 하늘로 불려 올라가 신이 됐다는 것이다. 평소에 존경받던 인격자이며 로물루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알바 출신의 의원 율리우스 프로쿨루스는 신 앞에서 엄숙히 선서를 하고 자신이 신이 돼 하늘로 돌아가는 로물루스를 길에서 만났다고 증언했다. 로물루스가 프로쿨루스에게 자신은 가장 위대한 운명을 타고난 도시를 세우기 위해 신들의 세상에서 파견됐고, 이제 사명을 마쳐 하늘로 돌아간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프로쿨루스는 로물루스가 로마 시민에게 메시지를 남겼다고 말했다. “로마 사람들에게 전해주게. 자기 절제를 실천하고, 이를 용기에 더한다면 인간 능력의 극한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그대들의 행운의 신, 퀴리누스가 돼 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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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 현장에서 의원들이 ‘승천설’을 주장하며 군중들을 설득했던 것을 보면 암살은 치밀하게 준비됐던 것 같다. 로물루스는 살해당하는 순간 자신의 지지자들과 병사들이 자신의 복수를 해줄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민중은 승천설을 의심했지만 그 의심이 소요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대중은 선동가들의 이상주의에 곧잘 현혹되지만 막상 그들 앞에 선택이 놓이면 대단히 현실적이 된다. 그래서 성공적인 선동가들은 대중을 설득해서 이상주의자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상을 손을 뻗으면 간단히 잡을 수 있는 현실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로마의 시민들은 로물루스가 나눠주는 선물을 좋아했지만 죽은 로물루스를 위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마음은 없었다. 그의 선물에 고마워하면서도 로물루스가 독재자로 변해가는 것에 두려움도 함께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들은 이미 땅을 얻었고 독재의 위험성은 사라졌다. 로물루스의 기대와 다르게 이것은 그의 지지자들에게도 타협할 수 있는 결말이었다.

게다가 의원들은 누구도 로물루스의 지난 행적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를 신으로 추앙하고,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업적을 찬양하고, 진심으로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 로물루스의 신전도 세워졌다. 포로 로마노에 307년 막센티우스(Maxentius)가 죽은 아들을 위해 세운 신전이 있다. 이 신전이 원래 로물루스 신전 자리였다고 추정한다. 제국시대에는 퀴리날레언덕의 숲에 로물루스 신전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퀴리날레언덕에는 이탈리아 대통령궁이 있다.

로물루스의 신격화는 무슨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 같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지극히 현실적이다. 리비우스는 의원들은 죽은 로물루스를 폄하하지 않고 그의 공로만을 기억하고 로마의 창건자로 예우한 것이 암살설을 지워버리고 안정과 단합을 가져왔다고 서술했다. 의원들이 로물루스의 제거를 의거로 내세웠으면 과거 로물루스를 지지하거나 함께 행동했던 사람들도 제거의 대상이 되거나 악행에 동조한 사람들이라는 낙인이 찍힘으로써 사회는 분열했을 것이다. 로물루스의 말년에 발생한 사회분열과 정치적 위기는 신화라는 휘장을 치고 타협의 손을 잡았다.

제국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로물루스의 죽음은 암살이라고 생각했다. 공화정 말기 로마가 해적으로 골머리를 앓자 로마 민회는 폼페이우스에게 전례 없는 권력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함선 200척을 주고, 재정은 폼페이우스가 원하는 만큼 받아갈 수 있으며, 속주 15곳에 대한 인사권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폼페이우스가 민회로부터 이런 전격적인 지지를 얻었던 것은 그가 상승장군이기도 했지만 병사들에게 토지와 재산을 나눠주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병사와 민중에게서 큰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민중의 지지가 폼페이우스에게 몰려가자 원로원은 기겁을 했는데 한 집정관이 폼페이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로물루스 흉내를 내다가 로물루스의 운명을 맞이할 수 있음을 명심하시오.” 그 집정관이 이런 비유를 사용했다는 것은 로마의 지식인들이 로물루스의 일생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로마는 공식적으로는 로물루스의 신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오비디우스는 <축제이야기>에서 로물루스의 신격화를 당연하게 노래한다. <변신이야기>에서는 좀 더 세련되게 각색된 로물루스의 신화를 소개했다. 로물루스를 신계로 호출한 사람은 그의 조상인 전쟁의 신 마르스이다. 마르스는 이제 로물루스가 돌아올 때가 됐다고 주피터에게 요청한다. 이때 마르스의 대사는 거의 성서의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 “이제 때가 이르렀으니 그때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로물루스가 갑자기 승천해 버리자 아내 헤르실리아는 생과부가 됐다. 여신 유노(그리스 신화의 헤라)는 여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녀도 하늘로 불러 로물루스와 해후하게 했다. 인간적인 배려까지 가미된 신화지만 이 신화에서도 로물루스가 죽어야 했던 이유가 은근히 암시돼 있다.

“아버지인 대신(주피터)이시여, 이제 때가 왔습니다. 로마는 반석 위에 섰고, 나라는 한 인간의 손으로 좌지우지할 수가 없을 만큼 튼튼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룰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손자되는 제 아들(로물루스)을 땅에서 거두시어 이 천성으로 불러주소서”1

로마인의 기준으로 볼 때 로물루스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고,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로마인은 그의 좋은 점과 잘못된 점을 모두 알고 있지만 그의 좋은 점은 기억하고 잘못된 점은 신화로 포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죽음이 주는 교훈을 잊은 것도 아니었다. 알고 보면 그의 신비한 죽음 이야기 안에는 영웅조차도 이기기 힘든 권력욕에 대한 개인의 패배와 권력의 냉혹함, 대중의 현실주의, 타협과 양보를 통해 이루어가는 사회의 발전, 언덕 도시 로마가 위대한 로마가 되기 위해 넘어야 했던 갈등에 대한 지혜가 어우러져 녹아 있다.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명장, 그들은 이기는 싸움만 한다> <뇌물의 역사>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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