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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민 베이직교회 목사 인터뷰

"인생의 닻 찾지 못하면 삶은 미로로 변해…자기愛 버리고 ‘영원’이란 시간 자각하라"

이방실 | 169호 (2015년 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자기계발

 

삶의 목적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일. 모든 직업의 진정한 목적 역시 사람을 살리는 일. 올바른 목적은자기애(自己愛)’에서 벗어나는 것.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다 보면 인간은 궁극적으로 의식주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끝없는 탐욕의 악순환에 빠지게 됨.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올바른 목적을 세울 수 있는 방법

객관적 시간에 초점을 두는크로노스적 시간관에서 주관적 시간을 뜻하는카이로스적 관점으로 시간의 패러다임이 전환돼야 함. 시간관을 새롭게 정립해 현재를 살아가지만 영원한 시간으로 눈을 돌려야 함.

목적이 이끄는 삶

하나의 공동체로 화합해 약자를 배려하고 정직하며 사회 정의를 추구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 사랑한다는 것은 헌신한다는 것이고, 헌신은 성숙을 가져오며, 성숙해지면 온전해짐. 이것이야 말로 현재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유일한 길.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한서연(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조정민 베이직교회 목사는 언론인 출신이자 전직 CEO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지난 1978 MBC에 입사한 조 목사는 사회부·정치부 기자 및 워싱턴 특파원을 거쳐 뉴스데스크 앵커로 활약한 바 있다. MBC 계열사인 iMBC 대표 및 기독교 선교방송인 CGN TV의 대표도 역임해 실제 기업을 경영해 본 경험도 갖고 있다. 25년간 언론인의 삶을 살아왔던 그는 나이 마흔일곱에 회심해 크리스천이 됐고 쉰셋에 미국으로 건너가 고든콘웰신학교에 들어갔다.

 

 

조 목사는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 역사가 BCAD로 갈라지듯이 나의 인생도 BC AD로 나뉜다인생의 전반부(BC)를 세상의 뉴스를 전달하는 데 썼다면 후반부 인생(AD)은 하나님의 말씀, 이른바굿 뉴스(Good News·복음)’를 전파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한 복음 전파에도 힘쓰고 있다. 예리한 통찰과 핵심을 찌르는 메시지로 유명한 조 목사는 트위터상에 18만 명이 넘는 팔로어(follower)를 거느린 파워 트위터리안(@ChungMinCho)’이기도 하다.1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올린 두세 문장의 짧은 글귀들을 모아 지금까지조정민의 트위터·페이스북 잠언록이라는 부제로 발간된 책만 4권에 달한다.2  남들은 모두 은퇴를 생각하는 나이인 60대에 접어들어 서울 청담동에 교회를 개척한 조정민 목사를 만나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한 통찰을 들어봤다.

 

 

 

 

 

 

삶의 목적은 어떻게 찾을 수 있나?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사람은 단순히 먹고사는 걸 목적으로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건 짐승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는 지금 여기에 왜 살고 있는지, 출발부터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으면 인생의 어떤 항로를 걷더라도 길을 잃기 쉽다.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인 릭 워렌 목사가 지적했듯이 목적이 이끄는 삶은나에 관한 것이 아니다(It’s not about me)”. 인생은 내가 목적이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았을 때 궁극적으로 행복한 사람은 없다. 내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욕망의 끝은 또 다른 욕망이고 그 과정은 탐욕이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더 목마르다. 나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에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귀결점이 없다.

 

 

 

배에 닻이 없다면 표류할 수밖에 없고 영혼에 닻이 없다면 방황할 수밖에 없다. 흔들리지 않는 힘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있는에 있다. 바로 이 닻이 목적이다. 인생이 미로로 변하는 까닭은 확고한목적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변하는자신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목적이 다 좋은 건 아니다. 모든 목적이 다 가치 있다거나 의미가 있지도 않다. 다수가 추구하는 목적이라고 해서 나 역시 맹목적으로 추구해서도 안 된다. 내가 진정 뿌리 내리고 있는 인생관과 가치관, 세계관에 기초해 명확한 방향을 세워야 한다. 무엇을 목적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내가 추구하는 목적이 올바른 목적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나?

‘자기애(自己愛)’에서 벗어났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자기애란 내 소유를 지키고, 내 소유를 늘려 사람과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 많은 소유와 더욱 강력한 지배가 자기애의 핵심이다. 자기에게만 집중하다 보면 인간은 의식주 걱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온종일 내가 먹고 자고 입을 것만 생각하게 된다. 대개 사람들이 더 많은 재물을 축적하려 하고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기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인(惡人)자기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이다. 악한 사람들은 절대적 기준을 거부하고 나를 모든 것에 선행하는 최우선 기준으로 삼는다. 자기의 이익과 욕망에 방해가 되는 존재를 못 견뎌 하는 사람이 바로 악인의 전형적 모습이다. 올바른 목적을 세우려면 먼저 나로부터 돌이켜야 한다. 자기 사랑이라는 모질고 질긴 악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려야 한다.

 

 

진정한 목적이 이끄는 삶은 더 이상 내 것을 탐욕스럽게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기꺼이 손해 보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점점 더 공동체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돈을 벌었다면 공동체를 위해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고민하고, 높은 지위에 올라갔다면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내려올 준비부터 한다.

 

 

올바른 목적을 세우기 위해 우리가 평생 싸워 나가야 할 존재, 극복해야 할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자기 사랑이 아닌 이웃 사랑에 기초한 배려심과 공동체 지향적 마인드는 나를 버리는 헌신이 없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목적 달성을 향해 질주하지 말고 올바른 목적을 향해 나로부터 돌이켜야 한다. 자기중심적 생각과 나 중심의 사고를 벗어던지지 못한다면 그 삶은 허상에 불과하다.

 

 

자기애에서 벗어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올바른 목적을 세울 수 있나?

무엇보다 시간관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인간은 시간 앞에 섰을 때만 누구인지를 제대로 자각할 수 있다. 돈 앞에 서면 내가 누군지 모르고 교만해 지고, 권력 앞에 서면 내가 누군지 모르고 착각에 빠지며, 인기 앞에 서면 내가 누군지 모르고 중독된다. 오로지 시간 앞에 서 있을 때, 특히영원이라는 시간을 자각할 때에만 진정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틀 안에서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이라는 재료를 통해시간이라는 틀 안에서 형상화된 존재가 인간이다. 인생은 날 때와 죽을 때의 사이, 나서 죽기까지의 시간을 이르는 말이다. 이걸로 다 끝일까? 아니다. 죽음 너머가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잠시 형상화돼 있는 시간 너머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농작물을 예로 들어보자. 농작물의 일생은 땅에 심겨졌다가 뿌리째 뽑히는 사이 동안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뽑혀진 이후, 즉 죽음 이후에 농작물은 어떻게 될까? 인간의 몸으로 들어가 영양분으로 봉사하는 시간을 이어간다. 벼는 벼 혼자 생을 즐기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인간의 양식으로서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 창조된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나서 죽는 동안까지의 시간이 전부가 아니다. 죽음 너머에 존재하는 영원한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

 

 

 

 

진정한 목적이란 인간의 죽음을 넘어서까지 가치 있는 목적이 돼야 한다. 한시적인 나의 생애를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목적이어야만 진정 선하고 바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올바른 목적을 세우기 위해 시간에 대한 새로운 성찰부터 해야 하는 이유다.

 

 

시간관을 새롭게 정립하고 영원에 눈을 돌리게 되면 이 땅의 것들, 소위 말하는 나의 의식주를 추구하는 일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시한부 인생을 살 뿐이며 이 땅에 천년만년 살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덕택이다. 삶의 우선순위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다. 이 땅 위에서 한시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단기 전략(short-term life strategy)이 아니라 영생을 살아가기 위한 전략(eternal life strategy)으로 인생 전략 자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애를 뛰어넘어 더 큰 목적에 헌신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다.

 

 

헬라인들은 시간을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봤다. 물리적으로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는 객관적 시간인크로노스와 각자에게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갖는 주관적 시간인카이로스적 관점이다. 영원이라는 시간은 바로 카이로스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시간 개념이다. 영원은 단순히 오랜 시간, 무한한 시간을 뜻하지 않는다. 시간의 혁명이요, 물리적 시간과는 전혀 다른 질적 시간이다. 그저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크로노스)이라는 강물에 빠져 시간을 흘려보내며 사는 건 허랑방탕하게 살아가는 삶이다. 날마다 깨어 낚싯대(목적)로 시간(카이로스)을 건져내는 삶이야말로 영원한 삶, 영원한 생명에 접속돼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가 영원한 시간이 되지 않으면, 현재는 가상 시간에 불과하다. 현재를 영원의 시간으로 건져내지 않으면, 현재는 과거나 미래라는 틀에 묶여버릴 뿐이다. 시간이란 우리 각자가 인생을 살면서 각자의 소명과 목적을 다하기 위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당장 이 땅에서 더 잘 먹고 더 잘사는 것, 소위 의식주에 사로잡혀 자기애에 탐닉해 사는 게 인생의 목적이 돼서는 안 되는 이유다. 호화 주택에 살고 비싼 차를 몰고 다니며 사는 삶이 진정으로 잘사는 삶인지 냉철하게 점검해야 한다. 절대 충족될 수 없는 욕망과 탐욕에 붙들려 살면 삶은 복잡하게 엉켜버릴 수밖에 없다. 자기애에서 벗어나 영원의 시간을 바라볼 때 진정으로 목적에 이끌린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 삶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삶이다.

 

 

영원을 추구하라는 말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다.

우리 삶의 매 순간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영원을 추구하라는 말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조언 아닌가? 너무 막연하게 들린다.

진정한 목적이라는 것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갈망하고 추구하는 삶은 동물이나 하는 일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라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이 점을 잊어버리면 인간은 동물과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된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목적이라고 착각하고 시간을 허비하는 삶을 산다. 한번 생각해 봐라. 지금보다 더 큰 집에 살기 위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갖다 버리고 있나? 연봉 많이 주는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비싼 차를 타기 위해, 고급 골프장에 가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생의 시간들을 쏟아붓고 있나? 왜 이럴까? , 회사, 자동차, 골프장 같은공간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시간’, 더욱이 영원한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올바른 목적도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공간을 선택하기 위해 시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위해 공간을 선택하는 삶이다.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공간을 위해 보이지 않는 시간을 희생하며 산다. 공간 중심의 관점에서 시간 중심의 인식으로 삶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한다면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며 완전한 기쁨에 이르지 못한다. 인간은 눈앞에 있는 세상의 것들로는 만족할 수 없도록 창조된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석학이자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론자로 꼽히는 C.S.루이스는만일 내 안에 이 세상 어느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갈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내가 또 다른 세상을 위해 창조됐음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설명이 될 것이라고 설파했다. 세상의 것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이다. 영원을 추구하라는 말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다. 우리 삶의 매 순간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매 순간을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언이다.

 

 

육신의 생명을 뜻하는 목숨은 헬라어로비오스. 생물학적 생명 주기가 끝나면 다하는 게 비오스로,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반면조에는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헬라어로 꺼지지 않는 열정을 가리킨다. 영원이라는 확장된 시간 개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생명이비오스조에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우리의 목적이 영원한 가치에 기초한다면 육신의 생명, 즉 비오스를 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에, 즉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에겐 어떤 어려움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목적에서 비롯된 열정이 존재한다면 이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나는 인류 역사 속에서 변함없이 이런 열정을 가진 이들이 인류의 방향성을 결정해 왔다고 믿는다.

 

 

21세기는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가 생명적이냐, ()생명적이냐를

따지는 시각도 수용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개인적 차원에서 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차원을 달리 해 목회 이전에 기업을 경영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CEO로서 목적이 이끄는 기업에 대한 의견을 나눠달라.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다. 바로 사람 살리는 일이다. 모든 직업의 진정한 목적도 사람 살리는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기업의 궁극적 목적 역시 사람을 살리는 일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사는 돈을 남기는 것이고 사업은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단순히 금전적 이윤의 극대화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아무리 규모가 큰 기업이라고 해도 차원이 낮은 장사치에 불과하다. 하지만 먼저 사람을 남기면 돈은 따라온다고 믿고 그런 철학에 따라 운영하는 회사라면 아무리 규모가 작다 해도 위대한 기업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는 자본주의의 끝자락에 와 있다. 과거 자본주의가 지나친 산업 자본주의로 경도됐을 때 공산주의라는 반작용을 강하게 만났듯이 후기 금융 자본주의가 무한경쟁 내지는 자본의 효율성을 계속해서 극대화하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강한 반작용을 만날 것이라고 본다. 자본주의 자체의 생존을 위해서도생명 자본주의같은 새로운 관점을 하나씩 수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좋은 기업, 나쁜 기업을 구분할 때에는 공해를 만들어 내는지, 친환경적인지 아닌지 등을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21세기는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가 생명적이냐, ()생명적이냐를 따지는 시각도 수용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인류의 존립 기반까지 심각하게 훼손하는 공멸의 주범이 될 것이다.

 

 

 

 

경영자 역시 기업의 장기적 존립 기반이나 가치를 더 굳게 확인하고 가야 한다. 어떤 사업을 통해 단기간 이윤이 남더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 반생명적인 비즈니스라면 과감하게 방향을 바꾸는 결단을 해야 한다. 어떤 윤리적 기준을 갖고 특정 산업을 겨냥해 하는 말은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하수도가 반드시 있어야 하듯이 경제 영역에서도 하수도의 기능을 해 줄 산업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수도가 범람해 상수원을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 사회 전체가 존립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탓이다. 하수도는 하수도대로 지면 아래에서 관리돼야 한다. 과거엔 그 관리 책임을 정부에 전적으로 맡겼지만 이제는 기업 스스로도 자정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본다. 생명적 가치의 기준에서 비즈니스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생명을 살리고 공동체와의 공존공영을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 기업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기업이라고 믿는다.

 

 

조직에서 추구하는 목적이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일치하지 않아 갈등을 겪는 직장인들이 종종 있다.

그런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회사를 선택할 때 가장 먼저 그 회사가 추구하는 비전이 무엇인지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고 직장을 선택해야 한다. 회사나 조직은 절대 나를 위해 설립된 게 아니다. 회사에는 회사 나름의 목적이 있고, CEO에겐 CEO 나름의 목적이 있다. 내가 그 회사를 선택했다는 것은 그 기업이, CEO가 추구하는 비전과 목적에 내가 동참하겠다는계약행위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계약을 맺어 놓고 나중에 계약서 조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고민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는가? 고민과 갈등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해야 할 일이지, 나중에 사인까지 다 한 후에 할 일이 아니다.

 

 

안타까운 점은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목적과 회사의 목적이 일치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경제적 이유를 직장 선택의 최우선 기준이자 거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요새 취직하기가 너무 어렵다보니 뽑아주는 데만 있다면 무조건 들어간다고 한다. ‘호구지책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하지만 이는 젊은이들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비록 돈벌이는 얼마 되지 않더라도 회사의 비전과 방향, 일이 주는 의미와 목적이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일치한다면 그 자체로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삶의 에너지와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젊음이란 실패할 수 있는 특권이다. 실패해도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방향과 목적만 옳다면 늦게 가고 빨리 가는 건 중요하지 않다. 방향이 틀어지면 빨리 갈수록 재앙이지만 방향이 옳다면 조금 늦게 천천히 가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물론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목적과 조직의 비전이 같아 회사에 입사했다고 하더라도 조직 생활을 하면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 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내가 100% 만족할 수 있는 회사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어차피 인간은 어디서든지 긴장과 갈등을 경험하게 돼 있다. 이때 핵심은 이런 긴장과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다. 업무 능력은 경험이 축적되고 기회만 제대로 주어지면 얼마든지 쌓을 수 있다. 하지만 관계에서 생기는 긴장과 갈등을 처리하는 능력은 단시간에 형성되지 않는다. 일생 동안 빚어내야 하는 능력이다. 이는 단순히 직장을 바꾼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이 사람 보기 싫다고 다른 직장에 간다 한들 새 직장에서도 비슷한 갈등을 겪을 확률이 크다. 직장만 여기저기 전전하게 될 뿐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라면 나의 만족을 추구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내가 조직에서 겪을 수 있는 경험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 인간관계를 관리하고 긴장과 갈등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펼치게 되면 끝없이 윗사람이나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게 돼 있다. 부딪히는 만큼 갈등이 증폭되고 불필요하게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게 된다.

 

 

 

목적이 이끄는 기업의 경영자들이 갖춰야 할 리더십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보나?

단연코노블레스 오블리주. 이를 실천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돈이든 사람이든 내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분명히 해야 한다.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만 내 것이 아니라면 내 멋대로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명확하게 새겨야 한다. 한발 더 나아가 내가 먼저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태도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궁극적 성숙이다. 윗사람이 먼저 고통을 감내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리더십이다. 더 큰 책임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만큼 더 많은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차원이 낮은 자본주의적 사고다. 더 많은 책임을 떠안았고 그만큼 더 많은 특권을 받았기에, 비록 물질적인 보상이 덜하더라도 더 큰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수준 높은 자본주의적 사고다. 우리나라 기업 CEO들에게서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더 강력히 작동한다면 한국 기업들이 우리나라 경제를 한 단계 발전시켜 나가는 견인차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고자 결심하는 이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인생의 성공은 바른 목적을 가진 사람이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아는 삶이다. 목적이 없는 성공은 추락의 문턱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진정한 목적을 놓치면 돈이나 권력, 인기, 명예 등에 종노릇하기 쉽다. 그게 헛된 우상인 줄도 모르고 감쪽같이 속아서 목숨을 걸고 섬긴다. 나의 욕망, 나의 탐욕만을 채우려는 자기애에서 벗어나 분명한 목적을 향해 돌이키지 않으면 인간은 헛된 우상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생은 혼자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수고하는 게 아니다. 그저 이 세상 왔다 가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게 목적이 돼야 한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로 화합해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 정직하고 사회 정의를 추구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헌신하는 것이고, 바른 헌신은 성숙을 가져오며, 성숙해지면 온전해 진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오로지 나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질주하는 삶의 방향을 올바른 목적을 향해 돌이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방실기업가정신센터장 smile@donga.com

 

 

  • 이방실 이방실 | - (현)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기자 (MBA/공학박사)
    - 전 올리버와이만 컨설턴트 (어소시에이트)
    - 전 한국경제신문 기자
    smi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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