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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연평답문> 혹은 쇄락의 경지

강신주 | 65호 (2010년 9월 Issue 2)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조선 왕조 500년 옛사람의 정신을 지배했던 것은 무엇일까? 서원이나 종갓집 등을 돌아다니다보면 건물마다 현판이 걸려 있게 마련이다. 이 현판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신이 지향하던 정신의 경지를 표현했던 글귀가 새겨있다. 그 중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쇄락(灑落)’이란 한자어일 것이다. 이 말은 한 여름 무더위에 텁텁하기만 한 마당에 물을 뿌렸을 때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상쾌함과 시원함을 의미한다. 사실 이 쇄락이란 말을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이라는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이다. 동시대 철학자 주돈이(周 敦 , 1017∼1073)를 존경한 그는용릉주무숙(舂陵周茂叔), 인품심고(人品甚高). 흉회쇄락(胸懷灑落), 여광풍제월(如光風霽月)”이란 시를 쓰게 된다. “용릉 땅에 살던 주돈이 선생은 인품이 매우 놓았네. 그 마음이 쇄락하여 마치 비갠 뒤의 바람과 달과 같았네란 뜻이다.

한자에 조금이라도 익숙한 사람이라면쇄락말고도광풍제월이란 한자어도 많이 접했을 것이다. 깊은 밤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멈추고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매만질 때, 맑게 빛나는 달을 본 적이 있는가? 이것이 바로광풍제월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온갖 시름과 고뇌가 씻은 듯이 사라져 맑아진 마음 상태를쇄락이나광풍제월에 비유했던 것이다. 성리학(性理學)은 바로 인간의 마음을 쇄락이나 광풍제월의 경지에 이르게 하려는 학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주자학이 이기(理氣), 혹은 성정(性情)과 같은 형이상학적 논쟁에만 매몰된 사변적인 학문 경향이었다고 비하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이런 형이상학적 논쟁은 모두 탁한 마음과 맑은 마음을 구별하려는 데 뜻이 있었다. ()나 정()이란 개념이 평범한 사람의 탁한 마음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면, ()나 성()은 성인(聖人)의 마음처럼 완전히 맑은 마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에게 진정한 학문의 길을 밝혀주었던 스승이 한 명 있다. 바로 연평선생(延平先生)이라고 불렸던 이통(, 1093∼1163)이다. 주희의 아우라가 강해서인지 이통의 이름을 지금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통이란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면, 주희는 진정한 학문의 길이쇄락광풍제월로 상징되는 맑은 마음을 갖는 데 있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주희가 이통의 가르침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은 책이 한 권 있다. 늙은 스승이 죽자마자 주희는 스승과 주고받았던 서신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는데, 그것이 바로 주희 나이 34세 때 완성한 연평답문(延平答問)이다. 자신이 스승으로부터 배웠던 것, 그리고 배우기는 했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스승의 금과옥조의 가르침을 가슴에 아로새기려는 노력이었다. 이통은 청년 주희에게 성인(聖人)이 되라고 가르쳤다. 아울러 그는 마음이 쇄락의 경지에 이를 때, 성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젊은 제자에게 보내는 이통의 가르침을 직접 읽어보자.

일찍이 저는사태를 만났을 때 고체(固滯)가 조금도 없다면, 곧 쇄락(灑落)의 경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이 마음이 확연히 크게 공정해져 남과 나라는 편벽되거나 치우친 생각이 없게 되면, 아마도 도리에 대해 하나로 꿰뚫게 될 것입니다. 가령 일에 당해 꿰뚫지 못하여 마음속에 편벽되거나 치우친 바를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못한다면, 곧 고체(固滯)와 관련된 것이니 모두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연평답문(延平答問)

이통에게쇄락(灑落)’은 딱딱하게 막혀 정체된고체(固滯)’의 상태와 대립되는 마음 상태를 묘사하는 개념이다.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근원적인 비유는얼음이었던 것 같다. ‘얼음은 딱딱하고 정체되어 있어 타자와 부딪칠 수밖에 없다. 반면은 무엇을 만나든 간에 그것에 맞추어 자신의 모양을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얼음과 같은 마음이고체상태에 있는 마음이라면, ‘과 같은 마음은 바로쇄락상태에 있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네모난 얼음이 있고, 둥근 그릇이 하나 있다고 해보자. 여기서네모남은 이 얼음의 고착된 자의식을 상징한다. 만약 이 얼음이 둥근 그릇과 소통하려 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네모남과 둥긂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억지로 네모난 얼음과 둥근 그릇을 소통시키려 한다면, 네모난 얼음이 파괴되거나 아니면 둥근 그릇이 찌그러지고 말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 네모난 얼음이 둥근 그릇과 소통할 수 있겠는가? 얼음이네모남이란 고착된 자의식을 버려야만, 그래서 그릇의둥긂을 수용할 수 있을 때에만 소통은 가능할 것이다. 네모남을 버리려면 혹은 네모남을 버렸다면, 얼음은 반드시 물로 변형되어야 하거나 그렇게 되었어야만 한다. ‘얼음의 비유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얼음이 상이한 두 가지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가지는 두 양태(mode)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얼음사이의 변화는 실체의 변화가 아니라 양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얼음과 같은 마음이나 물과 같은 마음은 모두 우리 마음의 두 가지 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치열한 자기 수양에 의해 우리는 성인도 될 수 있고, 아니면 평범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얼음과 같은고체(固滯)’의 마음 상태와 물과 같은쇄락(灑落)’의 마음 상태를 구분하는 이분법은, 이통 자신뿐만 아니라 성리학을 신봉했던 모든 옛사람들의 사유를 관통했던 근원적인 것이었다. ‘얼음처럼 부드럽게 만들면 우리는 성인(聖人)이 된다. 바로 평범한 인간이 광풍제월로 묘사되기도 하는 성인(聖人)의 마음에 이른 것이다. 여름밤 먹구름으로 꽉 막힌 하늘이 시원한 바람이 불면서 맑게 개고 밝은 달이 드러난 것이다. 반대로 노력하지 않고 마음을 방치하면 우리는 얼음과 같은 딱딱한 마음 상태에 머물게 된다. 밝은 달을 보이지 않게 막고 있는 먹장구름과 같은 마음인 셈이다. 막연한 비유가 아니라 구체적으로쇄락의 경지, 혹은 성인(聖人)의 마음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통은이 마음이 확연히 크게 공정해져 남과 나라는 편벽되거나 치우친 생각이 없게 되는 상태라고 말한다.

누군가와 관계할 때, 충돌과 대립으로 힘든 경우가 있다. 물론 그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하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어서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이통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자신을 점검해볼 필요도 있다. 혹시 상대방이 아니라 내 자신이 얼음처럼 고착된 마음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닐까? 공정함을 잃어버리고 남과 나를 구별하고 있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내가 아닐까? 그러나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진단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자신들의 집 현판에쇄락이나광풍제월을 아로새겼고, 그를 통해 계속 자신이 혹시고체의 마음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가 치열하게 점검했던 것이다. 어쩌면 평범한 우리에게 완전한 성인(聖人)의 경지, 혹은쇄락의 경지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부단히 자신의 마음이 좁아져 있지 않은지 반성하는 일일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과 삶은 이전보다 더 나아진 것 아닐까?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망각과 자유: 장자 읽기의 즐거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장자 철학을 조명하고,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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