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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승진인사 만드는 '역량의 덫'

신동엽 | 53호 (2010년 3월 Issue 2)

기업은 수많은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필자는 이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의사결정 중 하나로 주저 없이 승진을 꼽는다. 특히 불확실성이 극도로 높은 21세기 초경쟁 환경에서 최고경영자(CEO)가 누가 되느냐는 기업 생존과 직결된다. 잘못된 선택이 기업의 급속한 몰락을 초래할 수 있다. CEO가 되기 원하는 수많은 후보 중 누구를 선발하느냐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상당수 의사결정권자들은 과거 업무 성과를 중시한다. 이는 언뜻 합리적인 것 같지만 실은 심각한 한계가 있다. 과거에 기반해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과거 성과에 기반해 승진 대상자를 결정하는 인사 제도는 CEO뿐 아니라 모든 직급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결과는 좋지 않다. 1978년에 발표한 ‘거의 무작위적 경력 발전(Almost Random Career)’이라는 연구에서 조직 이론의 거장인 스탠퍼드대 제임스 마치 교수는 실제 경영 관리자들의 경력 발전 과정을 40여 년간에 걸쳐 추적했다. 엄밀한 실증 분석 결과,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성과나 인사 고과 결과가 승진 의사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승진 시점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이전까지의 과거 성과와 승진 이후 미래 성과 사이에는 통계적으로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었다.
 
이렇게 봤을 때, 이미 창출한 성과로 미래 조직 성과의 기반이 될 승진을 결정한다는 것은 일반적 생각과 달리 매우 위험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이런 결과가 발생하는 것일까? 이런 현상은 이미 오래전에 조직 이론의 거장인 로버트 머튼 교수가 ‘훈련된 무능(Trained Incapacity)’ 이론에서 명쾌하게 설명했다.
 
상향 승진의 기반과 훈련된 무능
대부분의 현대 조직은 평사원에서 CEO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의 수직적 구조로 이뤄져 있다. 승진은 대개 단계별로 각 직책에서 담당했던 과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높은 성과를 창출한 사람을 상위 직책으로 발탁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머튼 교수는 이처럼 지극히 상식적이고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승진 제도가 승진자의 역량과 새로 맡겨진 직책 사이에 예상치 못한 불일치라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바로 조직 내 분업 구조의 특성 때문이다.
 
어떤 조직이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과업들은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예외 없이 조직 내 여러 부서나 구성원들에게 다양한 업무가 할당되는 분업 구조가 일반화돼 있다. 가장 대표적인 분업 구조는 기능 부서들 간 분업이다. 즉 연구개발(R&A), 생산, 마케팅, 인사, 재무 등 다양한 기능 부서들은 조직 과업을 가치 사슬(value chain) 흐름에 따라 단계별로 나누어서 분업한다. 또 다른 유형의 분업 구조는 사업부 간 관계다. 서로 이질적인 특성을 가진 다양한 사업들을 동시에 수행하기 위한 사업부 구조를 가진 기업들에서는 조직 내 과업들을 각 사업 단위별로 나누어서 수행한다. 기능부서나 사업부들 간 분업은 조직 전체 과업을 수평적으로 나누어 수행하는 분업으로 누구나 알고 있다. 문제는 말단 사원에서 CEO에 이르기까지 조직 내 각 계층 사이에서도 분업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수직적 분업은 분업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잘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계층적 수직 구조가 출현한 근본 이유는 이들 계층 간 과업을 나눠 맡기기 위해서다. 순수하게 기술적이고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최하층 계층의 일반 사원들과 최고위 계층 CEO 간 본질적 차이는 중요성이나 높낮이 문제가 아니라 수행하는 과업 성격과 내용이 서로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경영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구분으로 나누어보면 조직의 수직적 분업은 상위 계층으로 갈수록 운영적(operational) 역할에서, 관리적(managerial) 역할, 전략적(strategic) 역할로 그 과업이 전혀 다른 성격으로 바뀌게 된다.
 
운영적 역할은 조직의 과업이 정해진 타이밍에 정해진 절차와 방법 및 속도에 따라 정해진 정도로 정확하게 수행되도록 확실하게 보장하는 역할로 주로 하위 계층에 배당된다. 운영적 역할을 잘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질은 작은 디테일에 대한 민감성과 정확성, 그리고 정해진 규칙과 절차를 어떤 상황에서도 철저하게 지키는 고지식한 태도다. 이에 비해 관리적 역할은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실제 과업 수행 상황의 특성에 맞게 실행 타이밍이나 속도, 정도, 양 등을 주어진 전략이나 구조의 큰 틀 안에서 재량권을 발휘해 조정하는 역할을 말한다. 따라서 관리적 역할은 주로 중간 관리자들에게 배당된다. 관리적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원칙 그 자체에 고지식하게 매달리기보다는, 이를 각 상황 요구에 맞게 적절하게 수정해 적용하는 유연성이 필수적이다. 또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과 환경 간 복잡한 인과관계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력, 그리고 조직 전체 수준에서 결정한 전략이나 구조의 큰 틀을 넘지 않는 ‘적정성(appropriateness)’을 추구하는 태도 등이 중요하다.
이에 비해 CEO를 비롯한 최고 경영진에게 부여되는 전략적 역할은 조직 전체의 영속적 생존과 발전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기능이다. 비전이나 전략, 구조 등과 같은 조직 경영의 틀 자체를 결정하고 변화시키며 조직 전체가 거시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나아가야 할 미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 해당된다. 사업 분야를 결정하고 각 사업 분야에서 경쟁 우위를 추구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일도 필수다. 또 조직이 운영되는 큰 틀인 구조와 시스템을 설계해 조직 과업을 조직 내 다양한 부서와 집단, 구성원들에게 할당하고, 각 집단들마다 특수한 목적과 이해관계들이 전사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시너지를 이루도록 하는 기능 역시 포함된다. 전략적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특정 부서나 기능 분야의 관점이 아닌 전사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균형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환경 변화의 본질을 역사적 메가 트렌드 관점에서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거시적 통찰력도 반드시 필요하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현재 환경에 적응하려 급급하기보다 먼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도록 장기적 시각을 길러야 한다. 조직 전체의 틀 자체를 바꾸어야 할 필요성과 타이밍을 결정해야 하므로 극도로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가 요구된다. 또 현재 존재하는 가치를 실현시키는 것보다는 새로운 미래 가치를 창조해야 하므로 수준 높은 창조성과 혁신성이 필요하다.
 
이렇게 볼 때, 운영적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축적한 역량은 관리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관리적 역할에 필요한 역량들 중 전략적 역할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 계층적 조직 내부의 수직적 분업 구조는 각 계층별로 전혀 다른 역할과 역량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직책에서 높은 성과를 창출하는 데 필요한 역량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상위 직책으로 승진되어서도 여전히 높은 성과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역량의 덫
하위 직책에서 훈련한 역량이 상위 직책에 크게 도움이 안 된다 해도, 적어도 방해가 되거나 무능함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나 실제 사례들을 보면 현재까지 훈련해 쌓아온 역량이 미래의 성과 창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흔히 발생하곤 한다. 환경이 변하더라도 현재까지 훈련하고 습득한 역량을 계속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학자들은 기존 지식과 역량을 환경이나 상황 변화에 상관없이 계속 반복 활용하려는 성향은 오랜 진화의 결과라고 추정한다. 이에 따라 어떤 역량을 강하게 가지고 있을수록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됐을 때 변화된 상황에서 요구되는 신규 역량을 개발해 훈련하기보다는 기존 역량을 계속 고수하다 새로운 직책과 보유 역량 간 불일치가 발생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이런 현상이 바로 마치 교수가 말하는 ‘역량의 덫(competency trap)’이다. ‘역량의 덫’과 ‘훈련된 무능’은 조직 전체 입장에서 수직적 분업 구조의 기반 원리를 붕괴시킴으로써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CEO가 운영적 역할이나 관리적 역할에 필요한 역량만 가지고 있는 조직은 CEO가 수행하기로 되어 있는 전략적 역할의 공백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
 
디테일에 강한 CEO를 생각해보자. 대기업 CEO나 정부 고위 관직에 오른 리더들을 소개하는 언론 기사를 읽다 보면 그 사람의 출중한 역량을 강조하기 위해 초인적인 기억력을 종종 예로 들곤 한다. 실제 거대 기업 CEO들 중 일선 관리자들도 외우기 힘든 세부 숫자까지 소수점 이하로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가 갑자기 담당자에게 질문을 던져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곤 한다. 일부 CEO들은 이를 철저한 조직 장악력의 상징으로 믿고 있다. CEO가 일선 세부 숫자들을 줄줄이 꿰고 있으면 당연히 그 조직 구성원들은 CEO가 언제 무엇을 물어볼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한두 가지가 아닌 업무 관련 디테일들을 모두 외우느라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것도 자명하다.
 
언뜻 볼 때 이런 CEO들은 구성원들이 자기 업무를 철저하게 수행하도록 만드는 출중한 리더로 보인다. 그러나 일선 담당자들도 잘 모르는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기억하고 챙기는 CEO는 그가 수행해야 할 본연의 업무를 간과할 공산이 크다. CEO로서 필요한 역량과 태도를 가지지 못한 최악의 CEO일 수도 있다. 디테일을 잘 기억하고 챙기는 것은 운영적 역할을 맡은 평사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역량이며 태도이다. 그러나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써도 모자랄 만큼 바쁜 21세기 초경쟁 환경에서 CEO가 자신의 제한된 시간과 관심을 평사원이 담당하는 디테일을 챙기는 데 투자한다면, 당연히 자신이 맡은 전략적 역할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또 조직 전체가 언제 깐깐한 CEO에게 지적을 받을까 전전긍긍하면 디테일 외우느라 전체 구성원들이 운영적 역할만 하는 기형적 현상이 나타난다. 따라서 CEO에게 이런 디테일에 관한 역량과 관심은 오히려 CEO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심각한 장애 요인이 된다. 즉 CEO가 수행해야 할 일의 성격과 그에 필요한 역량은 임원이나 중간관리자, 또는 일선 사원의 역할이나 요건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과주의 인사 제도의 한계
연봉제와 같은 성과주의 인사 제도는 실제 창출한 업적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므로 무임승차(free riding)를 막을 수 있어서 공정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 동기부여 효과도 있으며 조직 전체의 성과주의 규율을 강화하는 장점 또한 갖고 있다. 따라서 성과주의 인사 제도가 연봉제와 같은 형태로 이미 창출한 성과에 대한 보상으로 사용될 때는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상당한 논리적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과거에서 현재까지 창출한 성과에 기반해서 미래에 수행할 직책을 결정하는 성과 기반 승진 제도는 심각한 논리적 오류가 있다. 현 직책에서의 높은 성과 창출을 위해 훈련한 역량과 유능함이 상위 직책으로의 승진을 가능케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상위 직책에서 무능함을 동시에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진 의사결정은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에 그 사람이 수행해야 할 역할에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역량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로 판단해야 한다. 사업부장이나 기능부서장으로 아무리 출중한 성과를 창출하고 뛰어난 역량을 과시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CEO직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CEO뿐 아니라 모든 인사 의사결정도 마찬가지이다. 과거 역량과 미래 역량 사이의 불일치 가능성에서 발생하는 성과 기반 승진 제도의 한계를 항상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훈련된 무능과 역량의 덫을 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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