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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무사고 DJ 배철수

“대중 무시나 추종 모두 오래 못가”

하정민 | 36호 (2009년 7월 Issue 1)
매일 생방송을 하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친구를 만나기도 힘들고, 가족 여행이나 지인들과의 편안한 술자리도 희생해야 할 때가 많다. 사고가 나거나 몸이 아파도 마이크 앞에 서야 한다는 중압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MBC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 진행자 배철수 씨는 20년째 마이크 앞에 서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이 생겨나는 방송가에서 ‘음악캠프’는 팝 음악 전문 프로그램으로는 유일하게 20년을 살아남았다. 1990년 3월 19 첫 방송을 시작한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5월 17일 방송 7000회를 넘겼다. 청취자의 기호와 취향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지만, 내일모레 예순을 바라보는 그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MBC 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났다.
 
얼마 전 방송 7000회를 넘겼습니다. 20년째 단 한 번의 지각이나 펑크도 없었고, 방송을 위해 술 약속도 안 잡는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자기 관리가 철저하셨나요?
제가 서른아홉에 결혼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20년간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산 편이죠. 특히 군대 가기 전에는 정말 히피처럼 살았어요. 눈 떠지면 일어나고, 졸리면 자고, 수업 듣다 날씨 좋으면 그냥 밖으로 나가고.(웃음) 사실 1990년 DJ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저도 제가 이렇게 규칙적인 생활을 오래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 자신이 ‘자유로운 영혼’이고, 어떤 것에도 길들여지지 않으며, 구속받기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굉장히 소심하고, 체제 순응적이고, 현실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더군요, 제가.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답이 나오더군요. 제가 달라진 게 아니라, 제가 제 자신을 잘 몰랐던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잘 모르면서 부모님한테 들은 대로, 학교에서 교육받은 대로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살잖아요. 사실 다를 때가 더 많은데도 말이죠. 괜히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겠어요.
 
사람들이 젊은 시절에 더욱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굉장히 어렵거든요. 젊었을 때 이것저것 해보다가 ‘나한테 이 일이 딱 맞네. 내가 이런 걸 좋아했네’라고 느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결국 저도 여러 일을 하다가 음악보다는 DJ가 제 적성에 맞는다는 걸 안 셈이죠. DJ 하기 전에 전문 음악인으로 10년 넘게 일했는데, 마지막 5년 동안은 음악 하는 일이 행복하지 않았어요.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할 때면 호구지책으로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싶어 괴로웠고요. DJ를 시작하고 나니 하루에 두 시간 동안 남의 음악을 듣는 일 자체가 너무 즐거웠습니다. 원래 사람들하고 커피숍이나 벤치에서 얘기하기를 좋아했거든요. 전국에 있는 청취자들과 얘기하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일이 이렇게 좋을 줄 몰랐습니다.”

작가들이 ‘아저씨’라고 부르던데, 젊은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호칭의 격식도 없애신 건가요?
연예계는 군기가 세고, 위계질서도 꽤 엄격합니다. 제가 1953년생인데, 이제는 어디를 가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아요. 저는 그 호칭이 너무 싫습니다. 같이 일하는 스태프가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동료가 아니라 그 친구가 저를 모시는 상황이 되잖아요. 그게 싫어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오빠’가 좋지만 그건 그 친구들이 너무 어색해할 거고.(웃음)
 
방송하다 보면 프로듀서, 작가 등과 의견이 다를 때가 많죠. 그래서 저는 제가 젊은 친구들의 의견을 더 많이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우리 방송의 주 청취자들에게 맞추기 위해서만이 아니에요. 사실 라디오국 전체에서 저보다 나이 많은 분이 딱 한 명뿐입니다. 젊은 친구들에게는 제가 좀 어렵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제 주장만 내세우면 그 친구들이 ‘그건 아닌데요’라고 얘기하기가 어려워지죠. 그러다 보면 방송이 독선적으로 흐를 수 있어요. 모두에게 나쁜 결과죠.”
 
젊은 층의 행동 중 마음에 안 드는 점도 분명히 있을 텐데…
세대 차이를 거의 못 느낍니다. 마음에 안 드는 행동도 별로 없고요. 제가 라디오를 20년째 합니다만, 제 방송의 주 청취 층은 언제나 2030대예요. 2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점심을 먹어도 주로 젊은 친구들과 먹고, TV도 젊은 친구들이 많이 보는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봅니다. 굉장히 재미있어요.
 
가끔 제 또래들과 만나면, 친구들이 ‘요즘 TV 프로그램이 왜 그러냐. 애들이 나와서 밥 짓고 노는 게 뭐가 재미있다고. 그런 걸 왜 보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해요. 저는 너무 답답하죠. 그 프로그램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얼핏 보고 나서 그런 말 하는 게 뻔히 보이니까요. 자세히 보면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그 안에 인간관계의 역학이 다 담겨 있잖아요.
 
나이 드신 분들은 대체로 젊은 친구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요. 자신들도 분명히 젊은 시절이 있었을 텐데 말이죠. ‘요즘 애들 버릇없다’고 하지만 언제는 안 그랬나요. 오죽하면 그 옛날에도 벽에 그런 말을 써놨겠어요. 젊음의 본질은 똑같아요. 연애 방식만 해도 과거에는 편지를 썼고, 지금은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내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동일하잖습니까. 주변 환경만 좀 변했을 뿐이지, 사람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방식은 똑같아요. 나이 드신 분들이 하는 말도 똑같잖아요. 옛날 노인이나, 지금 노인이나.
 
문제는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거죠. 젊은 친구들하고 제대로 얘기해보면, 왜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저는 이해가 되던데요. 우리처럼 나이 먹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에게 다가가야지, 저희가 가만히 있는데 그 친구들이 오겠어요?”
 

예술성과 상업성의 경계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화두입니다. 방송 제작 과정에서 대중성과 예술성에 관한 갈등은 없었나요?
대중이 들어주지 않는 방송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교육 방송도 아니고요. 대중이 절대적으로 옳은 존재는 아니지만 대중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대중과 유리되어 있다면 방송, 음악, 예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큰 의미가 없다고 봐요. 물론 예술성과 상업성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매우 어렵죠. 제가 음악 할 때 항상 느꼈던 건데, 수학 공식으로 그 균형점을 찾을 수는 없어요. 그 균형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면 모든 뮤지션이 다 성공했겠지요. 대중을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나, 무조건 대중에게 맞추려고만 하는 예술가 모두 오래가지 못합니다.
 
어딘가에 둘을 모두 만족시키는 경계선이 분명히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여기가 바로 그 지점이야’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술이 어려운 거죠. 대충 어렴풋이 ‘여기가 그 지점이 아닐까’ 생각하며 그 근처를 배회하는 게 저희 임무예요. 저는 운이 좋아 그 근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방송을 20년 했겠죠.(웃음)”
 
세계적 뮤지션들이 방송에 많이 출연했는데, 게스트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초창기에도 섭외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방송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방송사의 팝 프로그램이 거의 사라졌어요. 유명 뮤지션이 한국에 와봤자, 그 친구들도 어디 출연해 노래를 들려줄 데가 없었어요. 서로 잘 맞아떨어진 거죠.
 
가장 중요한 건 저희가 그들을 ‘아티스트’로 대우해줬다는 겁니다. 솔직히 요즘 연예 프로그램들을 보면 가끔 낯 뜨거울 때가 있어요. 세계적인 배우, 영화감독, 음악가가 나왔는데 한국 말로 ‘사랑해요’를 말하라고 시키죠. 어떤 한국 음식 좋아하냐, 한국에 대해서는 뭘 알고 있냐, 이런 거나 물어보고요. 그게 뭐가 궁금합니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풍부한 예술적 재능과 철학에는 관심도 없고, 한국 음식 운운하다니… 사진작가에게 음식 얘기를 물어보면 뭐가 나오겠어요. 기껏해야 된장찌개, 김치찌개 좋아한다는 정도죠. 지금 사용하는 플래시의 밝기는 어느 정도인지, 배터리는 얼마나 가는지 최소한 그 정도는 물어봐야죠.
 
저는 어떤 분이 나오든 그 사람의 전문 분야에 관한 질문을 최대한 많이 준비합니다. 그 얘기를 들으려고 초대한 거고, 그 사람이 자신의 식견을 펼쳐 보여야 의미가 있죠. 어떤 분야에서든 일가를 이룬 사람은 확실한 자기 주관과 철학이 있어요. 일가를 이뤄 철학이 생겼는지, 그런 천성을 타고나 일가를 이뤘는지는 모르지만, 게스트를 통해 배울 때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청취자들은 유명인의 신변잡기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합니다. 유명 여배우랑 사귀다 깨진 뮤지션이 내한했다고 치죠. 저도 사람이니까 왜 헤어졌냐고 묻고 싶어요. 하지만 댓바람에 ‘그 여자와 왜 헤어졌냐’고 물어볼 순 없잖아요. 얼마나 불쾌하겠어요. 그러니까 전문적인 음악 얘기를 하는 게 더 중요해요. ‘당신 음악이 진짜 마음에 드네요’ 이렇게 시작해 한참 음악 얘기를 합니다. 그러다 중간에 슬그머니 ‘그 여배우도 당신 음악을 좋아해 만나게 된 건가요?’라고 물어보면, 다들 화 안 내고 잘 대답해줍니다.
 
예전에 제가 음악을 할 때 저도 비슷한 일 많이 겪었습니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을 던지면 진짜 불쾌해요. 결국 ‘네’ ‘그렇죠’ ‘생각 안 해봤는데요’ 이런 답변만 했죠. 최소한 게스트에게 ‘나는 이 정도 얘기가 통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준 다음에, 제가 묻고 싶은 걸 물어봐야 합니다. 일단 게스트를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인정해주면 게스트도 매우 기뻐합니다. 농담은 그 다음에 해야죠.”
 
잘 되는 방송과 잘 안 되는 방송의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라디오는 진행자의 인간적인 매력이 프로그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포맷, 어떤 게스트, 어떤 음악을 가져와도 진행자의 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프로그램은 성공할 수 없어요. 요즘 TV 프로그램은 집단 MC 체제가 대세지만, 라디오 DJ는 대부분 혼자잖아요. 한 사람이 못해도 그 옆에서 보완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진행자의 매력과 인성이 중요합니다.
 
어떤 미디어도 100% 날것일 순 없습니다. 하지만 TV는 분명 라디오보다는 꾸며지는 부분이 많아요. 나갈 때부터 분장을 한다는 자체가 그 증거죠. 외모뿐 아니라 내면도 꾸밀 수 있어요. 리얼리티 TV 프로그램도 대본이 있잖아요. 하지만 라디오를 꾸며서 하면 청취자들이 금방 눈치챕니다. 완벽한 대본이 없기 때문에 DJ가 자기 얘기를 많이 할 수밖에 없거든요. ‘이 사람이 자기 얘기를 하고 있구나, 혹은 아니구나’ 정도는 누구라도 알 수 있어요.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방송을 한 시간 앞둔 오후 5시 이후부터는 맑고, 차분하고, 기분 좋은 상태로 앉아 있으려고 노력해요. 일단 제가 기분이 좋아야 방송도 잘 되고, 듣는 분도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제 머릿속이 복잡하고 짜증이 나 있으면 그걸 감추고 방송하기가 어렵습니다. 제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를 들려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송골매라는 그룹사운드에서 음악을 시작하셨고, 방송도 여러 사람과 협업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의견을 조율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텐데요…
“10년 이상 밴드 생활을 한 경험이 제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우리 때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거의 내놓은 이들이었죠. 부모님 말도 안 듣고 집을 뛰쳐나온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기가 센 사람들이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가 있겠어요? 처음에는 말도 못하게 문제가 많았습니다. 저도 굉장히 고집이 세고 성격도 별로였어요.
 
그런데 너무 문제가 많으니까 오히려 ‘내 주장만 내세우다간 팀이 깨지겠구나’라는 사실을 일찍 깨우쳤어요. 저도 그렇고, 다른 멤버들도 그렇고 이미 몇 번 팀이 깨져본 친구들끼리 모였거든요. ‘이쯤에서 물러서야 팀이 안 깨지겠구나’라고 깨달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송골매가 좋은 성과를 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양보 안 하는 팀은 결국 깨지는 거구요.
 
축구 할 때 누구나 골을 넣겠다고 나서면 안 되잖아요. 수비수도, 골키퍼도 각자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해야 이길 수 있죠. 음악은 이런 정신이 더 필요합니다. 요즘도 구창모 씨랑 만나면 서로 ‘내가 더 많이 양보했다’고 주장합니다.(웃음)”
 
수십 년 음악을 하셨는데, 향후 음악 업계나 방송 전반이 어떻게 변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방식의 차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지만요. 음악을 LP, CD, MP3 플레이어 중 어떤 걸로 듣느냐는 문제가 그렇게 민감한지 모르겠어요. 이 업계에 오래 있으면서 제가 느낀 결론은 딱 하나입니다.
 
미디어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지만 언제나 방송하는 사람은 있을 테고, 듣는 사람 또한 있을 거라는 사실이죠. 좋은 콘텐츠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콘텐츠를 전달하는 방식까지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제가 할 일은 콘텐츠를 얼마나 충실하게, 재미있게 만드느냐를 고민하는 거죠. 전달 방식은 기술자나 사업가가 고민할 몫이고요.”
 
경기가 별로 안 좋은데, 청취율이나 광고와 관련한 압박은 없습니까?
소설가 나림(那林) 이병주 선생의 작품 중에 이런 부분이 나와요. 갑자기 전쟁이 터져 모두가 우왕좌왕하는데, 소설 속의 이 사장이라는 인물은 태연하게 낮잠을 잡니다. 누가 ‘아니,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낮잠을 주무실 수가 있냐’고 하자 이렇게 답해요. ‘혼자 겪는 난리가 진짜 난리지, 다 같이 겪는 난리는 난리가 아니다.’”

편집자주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35호(6월 15일자) 스페셜 리포트로 ‘장수 제품의 혁신 전략’을 다뤘습니다. 이 과정에서 방송 7000회를 넘기며 장수 프로그램의 대명사로 등극한 ‘배철수의 음악캠프’ 성공 비결이 궁금해졌습니다. 배철수 씨는 숱한 개편 속에서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단 한 번도 방송에 빠진 적이 없을 만큼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해왔습니다. 그를 만나 항상 젊은 층을 청취자로 유지하는 비결을 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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