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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평가된 최무선의 공적

임용한 | 31호 (2009년 4월 Issue 2)
인간의 지식과 기술은 경이로운 수준으로 발달했지만, 인간의 지성은 예나 지금이나 감정에 휘둘리고 불완전하다. 역사에서도 업적에 비해 과대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고, 수백 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후자의 인물에도 두 종류가 있다. 자신의 공적을 아예 평가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역사에 이름을 충분히 남기고는 있지만 그가 남긴 업적과 진정으로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 잘못되거나 빠진 사례도 있다. 최무선(?∼1395)은 후자에 해당한다.
 
최무선을 역사적 인물로 만든 소재는 화약이다. 고려 말인 14세기에 왜구의 침공이 극에 달하자 고려는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이때까지 수백 년 동안 고려는 주로 중국과 만주, 몽골 군대와 싸워왔기 때문에 대규모 해전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물론 본래의 왜구, 즉 소규모 해적 소탕에야 풍부한 경험이 있었지만, 14세기에 고려를 침공한 왜구는 단순한 해적이 아니었다. 때때로 그들은 정규군의 편제를 갖춘 군대를 배에 싣고 쳐들어오기도 했고, 고려 수군이 보유한 함선 전체보다 많은 전함을 끌고 습격해오기도 했다.
 
전술, 해전 경험, 병력 모두에서 열세에 몰린 고려는 난국을 타개할 방법을 애타게 찾게 된다. 그때 떠오른 신무기가 화약이었다. 고려군이 화약 무기의 위력을 체험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화약 무기는 중국 송나라 때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원나라 때 크게 발전했다. 1273년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이 삼별초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제주도의 항파두리 성을 공격할 때, 원나라 군대는 화기를 가져와 사용했다. 다음 해 이 연합 부대는 일본 원정을 떠났는데, 이때도 원나라 군대는 화약 무기를 사용했다. 그중 하나가 도기에 화약과 쇳조각을 넣고 던져서 폭발시키는 진천뢰였다. 오늘날로 치면 수류탄과 클레이모어를 합한 셈인데, 이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일본에서 그려진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에도 남아 있다.
 
화약의 위력을 체험한 고려 정부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게 사신을 보내 화약 제공을 요청했으나, 주원장은 거부했다. 상심한 고려는 화약에 대한 미련을 접었지만, 최무선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고려를 방문하는 중국 상인들을 수소문한 끝에 화약 제조법을 아는 이원(李元)이라는 인물을 찾아낸 후, 극진히 대접하고 설득해 화약 제조법을 알아냈다. 하지만 최무선이 화약을 직접 제조한 것은 아니고, 노비 몇 명을 시켜 기술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최고 의정기구였던 도평의사사로 찾아가 화약 제조술을 알아냈다고 알렸지만 다들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최무선은 몇 년을 헛되이 보내야 했는데, 당시 화약 제조는 원료 조달이 너무 어려워 개인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화약을 제조하는 사람들도 화약의 성분을 정확히 몰랐다. 단지 이 신비한 화약의 원료가 다락이나 대들보에 오랫동안 쌓인 먼지나 아궁이에서 타다 남은 재에 들어 있다는 사실만 알았다. 그래서 전국의 민가에서 이런 재와 먼지를 긁어모아 화약의 재료인 염초를 제조했다. 이 염초에 유황과 목탄을 섞어 화약을 만들었다. 이런 방식이니 염초를 제조할 때는 원료 소비량이 엄청났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 재와 먼지는 매년 군현에서 바쳐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공물 중 하나였다.
 
1377년(우왕 3년)에야 국가에서 화통도감을 세웠는데, 이곳에서는 화약 제조만이 아니라 각종 화약 무기의 제작 및 화기를 탑재할 전함의 건조와 개량 사업까지 추진했다. 이 사업은 놀랄 정도로 신속하게 진행돼 최무선은 짧은 기간에 18종이 넘는 다양한 화기를 개발해냈다. 이 무기들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명칭으로 추정해보면 화포와 같은 공격 무기, 신호용 무기, 화공용 무기 등인 듯하다. 단, 이때의 화포는 지금처럼 폭발하는 포탄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화살을 날리는 포였다. 폭발하는 무기는 앞서 말한 진천뢰인데, 나무통이나 단지에 화약을 담아 던져서 폭발시키기도 하기 때문에 화통이라고도 불렀다.
 

1380
년 나세와 최무선은 화기를 이용해 진포에 상륙한 왜선 300척(또는 500척)을 불태운다. 이 함대는 왜구 침공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함대로, 그들이 수송해온 육상 부대 역시 고려의 남단을 정복하고 분할하겠다고 큰소리칠 정도로 다수의 병력으로 구성된 최정예 군단이었다. 그러나 최무선의 화기 덕분에 고려는 겨우 100척의 전함으로 이 함대를 격멸할 수 있었다. 주력군은 상륙해 이미 내륙으로 진격했고, 포구에는 선박을 지키기 위한 수비대만이 남아 있었다. 고려군이 화약 무기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왜구 수비대는 고려 함대가 다가오자 항구에 정박시킨 배를 묶어 해상 방벽을 구축했다. 자신들의 장기인 백병전으로 승부를 내려는 의도였는데, 삼국지의 적벽대전처럼 오히려 치명적인 함정이 되고 말았다.
 
이후 고려 수군은 해상에서 왜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승리가 오직 화기 덕분만은 아니다. 장수부터 이름 없는 병사까지 왜구에 대항할 전술을 개발하고 노력한 총체적 결과였다. 하지만 화약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컸던 것도 사실이다. 진포 해전을 통해 최무선은 화기의 가치를 증명했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최무선에 의해 시작된 화약 제조와 화기 발달의 파급 효과는 군사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조선 건국 후 화약 무기는 육지 전투에도 응용되기 시작했는데, 그 노력으로 탄생한 대표적 무기가 화차다. 화기의 위력에 매료된 조선의 군략가들은 사무라이와 같은 전문 무사 계층과 돌격대를 문관과 선비로 전환하고, 전쟁터에서는 화포에 그 역할을 맡기는 과감한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이들은 전쟁터에서는 유용했지만, 평소에는 사회불안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화기가 없었다면 과연 조선이 전통적인 무사 세력을 그렇게 과감하게 해체할 용기를 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이처럼 화약 무기의 발달은 조선의 사회와 문화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추가적 공적 외에 최무선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서 또 하나 잊혀진 사실이 있다. 그가 화약 제조법을 그토록 애타게 찾은 이유다. 최무선은 중국어를 알았고, 젊은 시절에 원나라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그때 원나라에서 화포를 보고 그 위력에 주목했으며, 왜구를 물리칠 수 있는 무기는 화포뿐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됐다. 그가 왜 원나라에 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당시는 고려의 왕족부터 관원, 상인, 유학생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원나라를 드나들었다. 원나라에 상주하는 고려인도 최소한 몇만 명을 훌쩍 넘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원나라에 있었는데, 화약 무기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최무선뿐이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아니,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원나라에 가지 않아도 화약 무기를 볼 수 있었고, 명나라에 화약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 국가의 고위 관리나 국정 책임자들도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최무선만이 화약 제조법도 모르는 상태에서 끈질기게 화약 무기 개발에 매달렸다. 사실 화약 제조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 화기 개발과 그것을 이용한 전술 개발이다. 최무선은 화통도감 설립 후 단기간에 다양한 화기를 만들어냈고, 3년 만에 실전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그가 화약 제조법을 탐문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화기와 전술에 대해 조사, 연구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것이 우리가 최무선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쉬운 이야기 같지만,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도전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을 탓하곤 한다. ‘이런저런 조건이 성립된다면’ ‘그것을 내가 갖고 있다면’ 등의 말로 자신의 행동과 미래에 대한 대비를 늦추고, 현재의 게으름을 변호한다. 진정한 도전과 자기계발의 승자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준비하는 사람, 조건을 요구하기 전에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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