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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유혹, 혁신+관능

유진상 | 28호 (2009년 3월 Issue 1)
찬란한 빛깔의 섬세한 문양으로 가득한 배경 앞에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 관능적인 표정의 아름다운 여인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뇌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렇다. 클림트의 가장 화려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 이른바 ‘황금시대’(19071908)에 그려진 ‘키스’나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1’ 같은 작품들은 그런 인상을 더욱 강하게 심어준다.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그의 화풍은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지식인과 예술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클림트는 비잔틴과 동양의 영향을 드러내는 기하학적 디자인과 오스트리아·독일의 낭만주의, 당대 서유럽에서 풍미하던 상징주의에 뿌리를 둔 사실주의 화풍을 동시에 추구했다. 이는 당시 새롭지만 받아들여지기는 힘들었다. 이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는 오스트리아 문화사의 중요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분리파 운동’(1897)을 주도해야 했다. 그것은 ‘역사주의’라고 불리는 확고하게 자리 잡은 기존의 예술과 결별하고 완전히 새로운 예술적 비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가장 아름답고 장식적인 스타일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클림트의 작품 세계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격변기에 나타난 혁명적인 문화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토털 디자이너로 예술 인생 시작
클림트는 1862년에 가난한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는 예술가 지망생들이 다니는 명문 ‘빈 미술 아카데미’ 대신 공예가를 양성하는 ‘빈 응용미술학교(Kunstgewerbeschule)’를 다녔다. 이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동생인 에른스트, 동창인 프란츠 마츠와 함께 예술가들의 회사를 뜻하는 ‘쿤스틀러 콤파니’를 세워 벽화나 실내장식 디자인 수주를 받았다.
 
클림트의 예술 경력의 전반부는 화가나 예술가라기보다 공공기관이나 기업의 요청에 의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토털 디자이너’로서의 일들로 채워져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19세기 말의 예술적 맥락 속에서 ‘공예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당시 유럽 문화를 주도하던 런던과 파리의 예술적 지형에서 공예가는 문화 전체에 형태를 부여하는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이들은 건축·제품·그래픽·벽화·가구에 이르기까지 부유층과 귀족계층의 모든 라이프스타일에 자신들의 서명을 새겨 넣고 있었다.
 
당시 건축가·공예가와 화가들의 협업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단지 이런 현상이 하나의 통일된 스타일로 예술적 경지에까지 승화되는 일만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분리파 운동은 전통 예술이 가로막고 있던 장애를 제거해 예술가를 중심으로 한 ‘라이프스타일 전체의 업그레이드 프로젝트’를 보편적 예술로 선포하는 것이었다. 작곡가인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오페라에 대한 에세이들을 통해 처음으로 ‘토털 아트(총체 예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빈의 환상도로(Ringstrasse)를 따라 이뤄진 도시계획 역시 이런 비전 위에서 이루어졌다.
 
벽화 프로젝트 통해 마스터로 자리매김
클림트가 마스터로서 자리매김한 것은 유화가 아닌 건축물의 벽화 프로젝트를 통해서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3개의 작품을 꼽을 수 있다. 1900년부터 마츠와 진행한 빈 대학을 위한 벽화시리즈와 1902년에 제작한 베토벤 프리즈, 1906년에 브뤼셀의 스토클레 저택을 위해 제작한 벽화가 그것이다.
 
빈 대학으로부터 철학·의학·법학을 상징하는 벽화 제작을 의뢰받은 클림트는 각 분야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극히 주관적인 구성을 통해 캔버스 위에 그려냈다.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에로틱하고 우의적인 이 그림에 대해 큰 논란이 빚어졌다. 결국 이 가운데 ‘철학’만이 천장에 설치될 수 있었다. 이는 클림트가 공공기관을 위해 진행한 마지막 프로젝트였다.
 
베토벤 프리즈는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을 중심으로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설치되기 위한 벽화로서 프레스코 위에 그려졌다. 이 작품은 클림트가 분리파 운동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한, 예술과 디자인이 조화롭게 결합된 총체예술의 결정판으로 불린다. 서로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은 여기서 각각 창의성과 개성을 드러내면서 전체의 의도를 위해 함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줬다.
 
1903년에 클림트는 요제프 호프만, 콜로만 모저와 함께 ‘빈 공방(Wiener Werkstatt)’을 창립했다. 빈 공방은 건축에서 사소한 물건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하나의 예술적 형식 안에 담아내려는 노력을 했다. 빈 공방이 짓는 벨기에 사업가 아돌프 스토클레의 저택 식당벽화를 위해 클림트는 대규모 모자이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작업 이후로 클림트는 건축 프로젝트에서 캔버스를 사용하는 유화로 완전히 전환한다. 스토클레 식당 벽화는 클림트가 총체예술로부터 좀 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예술세계로 접어드는 계기가 됐다. 미술사가인 제인 캘리어는 그 이유가 클림트의 주된 관심사인 초월적 ‘환상’과 객관적 ‘현실’을 하나의 작품 속에서 녹여내는 일에 진정성을 갖고 관심을 보인 계층은 관료나 시민들이 아닌 미적 감수성을 지닌 부르주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구스타프 말러나 요하네스 브람스와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던 칼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탁월한 사업가들이 포함된다. 

예술에는 자유를…
클림트의 아이러니는 그가 처음부터 선호했던 공공 프로젝트에서 예술적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분리파 운동을 시작한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보수적인 관료 취향에서 벗어나 장래의 관객들인 대다수 시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던 예술가들에게 결국 힘이 되어준 것은 이들의 취향과 역량을 알아보고 수용해 준 부유한 개인들이었다. 클림트는 1907년 이후 자신의 주관적 비전을 더욱 극한으로 추구하기 위해 캔버스 유화를 선택한다. 1912년에 그는 오스트리아 미술가 연맹의 회장이 되고 1917년에는 빈과 뮌헨의 예술원 명예회원으로 추대된다. 1918년 56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마지막 몇 년 동안 클림트는 수많은 풍경화와 인물화를 남겼다. 공교롭게도 이 기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마치 ‘총체예술’이라는 담대한 포부를 시대적 사명으로 삼고 실현하고자 했던 한 예술가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오늘날 그는 1000년을 이어온 합스부르크 제국의 예술적 성취와 창의성으로 충만한 20세기 모더니즘 사이에 가교를 놓은 최후이자 최고의 예술가로 추앙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세계 속에는 세기적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그가 고민하던 문제들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클림트는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인정할 정도로 스캔들과 관능, 비현실적 환상과 우의(寓意)로 점철된 예술가였지만 예술의 대중화와 혁신, 더 나은 라이프스타일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 및 제도 개혁을 위해 헌신한 문화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한편으로는 폴 고갱이나 에드바르드 뭉크, 페르디낭 호들러와 같은 상징주의 계열 화가로 분류되지만 빈 공방을 통해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에서 바우하우스로 이어지는 디자인-공예운동의 역사적 계보 속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클림트가 21세기 초 문화·예술적 지형 속에서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새로운 디자인 혁신과 라이프스타일의 창출, 예술적 상상력 및 감수성의 확산과 통섭. 이 모든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많은 문제를 헤치고 나가는 역량 있는 예술가와 그 예술가들을 알아보고 수용하는 제도 및 계층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분리파 운동가들은 ‘시대에는 시대의 예술을, 그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클림트의 예술은 당대 대중의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문화 속에서 클림트가 차지하는 위치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클림트는 디자인 혁신과 예술적 관능 이 둘을 하나의 스타일 안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통합해 낸 예술가다. 그가 우리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고민을 했을까. 그의 전시를 보면서 사로잡히게 되는 질문이다.

편집자주 오스트리아의 '국보'로 추앙받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전시회가 한국에서 개최되면서 클림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토털 디자이너'를 추구한 클림트의 예술 세계는 '통섭'이 화두가 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통찰을 줍니다. 작가이자 비평가인 유진상 교수가 클림트의 예술 세계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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