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 전 장자 사상에 담긴 ‘팹랩 혁명’

249호 (2018년 5월 Issu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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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at a Glance

크기만 한 박, 줄기가 울퉁불퉁한 나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여 버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장자가 일침을 놓는다. 박으로는 커다란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우고 나무는 너른 들판에 심어 느긋한 쉼터로 삼는다. 색다른 접근, 독창적 산물이다. 틀에 박힌 시선으로 재료를 바라보면 만들 수 있는 제품이 한정적이다. 좀 더 자유롭고 열린 사고방식에서 보다 주도적이고 활용도 높은 물건들이 탄생한다. 오늘날 기업이 염두에 둬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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팹랩(fablab)은 제조를 뜻하는 fabrication과 실험실, 연구실을 뜻하는 laboratory의 합성어로,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내 설치된 비트-아톰 센터(Center for Bits and Atoms)의 프로젝트 이름에서 유래된 용어다. 센터장을 맡고 있는 닐 거쉰펠드 교수는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방법’이라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개인 컴퓨팅과 개인 제조 사이의 유사성을 깨닫고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목표는 수업 내용과 동일한데 기존 소프트웨어에 연결된 모든 장비를 참여자들이 직접 제조하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다. 팹랩의 앞글자 팹에 ‘제조’라는 뜻 외에 ‘굉장하다(fabulous)’는 뜻도 담겨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팹랩의 원리는 크게 복잡하지 않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물건의 아이디어를 디지털화해서 컴퓨터에 입력한 후 컴퓨터로 제어되는 레이저와 밀링머신, 3D프린터의 도움을 받아 물건을 뽑아내는 것이 기본 원리다. 팹랩에 상주하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최신 장비들에 대한 사용방법만 익히면 누구나 직접 해볼 수 있다. 물건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도 팹랩에 모두 비치돼 있다.

팹랩의 가장 큰 매력은 재료의 쓰임새와 제품의 모양, 용도 등을 참여자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만든다는 데 있다. 최첨단 DIY(do-it-yourself) 제품 혹은 디저털화한 이케아가구쯤으로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실제로 MIT가 보스턴 시내의 사우스엔드기술센터에 처음 문을 연 팹랩에는 인근 지역의 소녀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팹랩에 찾아와 연구실에 비치된 첨단 장비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구상한 공예품을 직접 만들어 길거리에 내다 팔기도 했다. 취향에 맞는 제품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자존감도 높아지고, 최첨단 기술 습득과 함께 경제적인 수익까지 얻게 되자 팹랩은 입소문을 타고 세계 각국으로 확산됐다. 디트로이트를 비롯한 미국 주요 도시에, 아프리카 가나, 노르웨이, 인도 등 다양한 국가들에 수백 개의 팹랩이 개설됐다. 한국에도 서울, 수원, 부산 등 주요 도시에 팹랩이 문을 열었으며 그 수는 계속 확산되고 있다. 청계천 세운상가는 팹랩을 통해 3차 산업혁명 시대의 화려했던 명성을 재현할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으로 거듭나고 있다.

고전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인물 가운데 팹랩의 선구자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 장자다. 『장자』 ‘소요유’ 편에 나오는 혜시와 장자의 다음 대화를 통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고 있는 신기술 팹랩에 대한 영감(靈感) 하나를 건져 올려 보자. 혜시는 장자의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사상적으로는 앙숙이었다. 어느 날 혜시가 장자에게 말했다. “일전에 위나라 왕으로부터 큰 박씨를 하나 얻었는데 그걸 심었더니 엄청난 크기의 박이 열렸다네. 그런데 너무 커서 바가지로 만들어 쓸 수가 없어서 망치로 부숴버렸다네.” 일견 화려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쓸모가 없는 장자의 사상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혜시가 장자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장자는 손을 트지 않게 하는 약의 비유를 들어 혜시의 생각이 옹졸하다며 반박했다. “자네는 큰 걸 쓰는 데 서툴군 그래. 내 예를 하나 들어주지. 송나라 사람 중에 대대로 솜을 표백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었다네. 이 사람은 직업상 손이 자주 터서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약을 하나 개발했다네. 이 약은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데 아주 잘 들어 명약으로 소문이 났어. 어느 날 나그네 한 사람이 와서 백금의 돈을 주고 이 약을 만드는 비방을 사 갔다네. 이 나그네가 오나라 왕에게 가서 비방을 말했더니 오나라 왕은 나그네를 장수로 삼아 월나라와 전쟁을 치르게 했다네. 추운 겨울 수전(水戰)에서 오나라는 월나라를 대파했고, 나그네는 왕으로부터 큰 봉지(封地)를 얻었다네. 같은 비방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평생 솜을 표백하는 일을 했지만 어떤 사람은 장수가 되고 큰 봉지도 얻었듯 같은 것이라도 쓰기 나름 아니겠나? 큰 박으로 큰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우면 근사할 텐데 뭐 하러 박이 크다고 걱정하는가? 何不慮(하불려) 以爲大樽(이위대준) 而浮乎江湖 (이부호강호) 而憂其瓠(이우기호) 落無所用(락무소용)”

- 『장자』 ‘소요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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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박의 크기를 탓하면서 부숴버릴 것이 아니라 크기에 맞춰 적절하게 박의 쓰임새를 정하면 된다면서 혜시의 이야기를 반박하고 있다. 작은 박이면 바가지를 만들어 쓰면 되고, 큰 박이면 요트를 만들어 바다에 띄울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타이타닉호와 같은 초호화 유람선이나 크루즈를 만들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장자의 말이 백번 옳다. 혜시는 장자로부터 한 방 얻어맞았지만 기죽지 않고 큰 나무의 비유를 들어 재차 장자를 공격했다. “나한테 큰 가죽나무가 하나 있다네. 그런데 줄기는 울퉁불퉁하고 가지는 구불구불해서 도무지 쓸모가 없지. 그래서 목수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네. 자네 말은 제법 거창하지만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라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번에도 장자는 너구리와 족제비, 이우(斄牛)라는 큰 소의 비유를 들면서 혜시의 논리를 반박했다. “어허, 자네 참 딱하네. 자네는 너구리와 족제비도 보지 못했는가? 그놈들은 먹이를 낚아채려고 이리저리 뛰다가 결국 덫에 걸려 죽고 말지. 이우라는 검은 소는 하늘의 구름같이 덩치가 크지만 정작 쥐새끼는 잘 잡지 못한다네. 나무가 커서 걱정이라고? 발상의 전환을 하면 되지 않는가? 아무도 없는 넓은 들판에 그 나무를 심어놓고 그 곁에 누워 휘파람이나 불면서 느긋하게 쉬면 그곳이 곧 낙원이 아니겠는가? 누가 와서 도끼질을 할 염려도 없고 해코지할 사람도 없을 테니 이보다 더 안전하고 행복한 곳이 어디 있겠나? 何不樹之於(하불수지어) 无何有之鄕(무하유지향) 廣莫之野(광막지야) 彷徨乎(방황호) 无爲其側(무위기측) 逍遙乎(소요호) 寢臥其下(침와기하)”

- 『장자』 ‘소요유’편

『장자』 서른세 편의 들머리를 장식하는 ‘소요유’편은 위의 우화에 나오는 ‘소요호(逍遙乎) 침와기하(寢臥其下)’라는 구절에서 그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우화의 핵심 메시지는 외형의 크고 작음에 있지 않다. 장자에게 대소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날갯짓 한 번에 구만리를 나르는 대붕이나 폴짝 뛰어서 나뭇가지에 간신히 안착하는 쓰르라미나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게 장자의 생각이다. 여기서 혜시와 장자의 차이는 재료나 사물의 쓰임새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다. 혜시는 사물의 쓰임새를 기성적인 관점에서만 봤다. 큰 박과 큰 나무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며 부숴버리거나 외면했다. 장자는 틀에서 벗어나 큰 박과 큰 나무의 쓰임새를 주체적으로 결정해 새로운 상품으로 탄생시켰다.

3차 산업혁명 시대의 시장은 생산과 소비가 명확하게 분리돼 있었지만 4차 산업혁명의 새로운 흐름은 이들의 경계를 옅게 만들거나 허물어뜨리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소비자는 기업이 만들어서 시장에 공급하는 제품을 단순하게 구매하는 수동적 행위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제품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만드는 능동적 행위자다. 팹랩은 이러한 소비 트렌드의 변화를 선도하는 기술 혁명이다. 닐 거쉰펠드 교수는 컴퓨터가 점점 진화하고 소형화해서 마침내 우리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듯이 디지털 제조기인 팹랩도 개인용 컴퓨터에 필적할 만한 수준으로 소형화, 지능화할 것으로 예측한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거의 모든 것을 개인이 스스로 만드는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우화에 나오는 큰 박이나 큰 나무는 기업에서 만들어 내놓는 공급자 주도의 상품이다. 이 상품은 개별 소비자의 취향을 정밀하게 반영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제품은 더 이상 소비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샤넬이나 구찌와 같은 빅브랜드 상품보다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 자신의 이름을 붙여 파는 미메이커(me-maker) 제품이 인기를 끄는 현상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우화 속 혜시는 공급자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큰 박과 큰 나무를 용도 폐기했다. 반면 장자는 공급자 중심의 사고를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해 큰 박과 큰 나무를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으로 만들었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만든 물건의 가치를 극대화한 장자는 그를 통해 지극히 자유롭고, 안전하고, 여유로운 삶을 누렸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소비자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장자는 2500년 전에 이미 실현하고 있었던 셈이다.

편집자주

몇 세대를 거치며 꾸준히 읽혀 온 고전에는 강렬한 통찰과 풍성한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지만 최첨단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 삶에 적용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인문학자 박영규 교수가 고전에서 길어 올린 옹골진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박영규 인문학자 chamnet21@hanmail.net

필자는 서울대 사회교육학과와 동 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중앙대에서 정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승강기대 총장과 한서대 대우교수, 중부대 초빙교수 등을 지냈다. 동서양의 고전을 현대적 감각과 트렌드에 맞게 재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에 『다시, 논어』 『욕심이 차오를 때 노자를 만나다』 『존재의 제자리 찾기; 청춘을 위한 현상학 강의』 『그리스, 인문학의 옴파로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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