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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6.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반복하다 보니 차이를 깨닫는다? 그것이 4차 산업혁명을 움직이는 메커니즘

박영옥 | 244호 (2018년 3월 Issue 1호)
Article at a Glance
프랑스 대표 철학자 질 들뢰즈는 너와 나의 다름을 구분하기 위한 ‘차이’를 논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차이는 사람과 사물이 존재하는 그 자체로 지닌 고유성을 일컫는다. 반복적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경험을 해야 그 고유성을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의 철학은 차별화를 통한 생산과 소비를 주창하는 포스트 포드주의의 차원도 뛰어넘었다. 그는 기계의 반복성 자체에서 새로운 의미와 창조성을 발견하고, 개개인마다 지닌 개성과 취향 등은 어떠한 분류로도 그룹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계의 학습을 통한 창조, 빅데이터를 통해 개인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움직이는 메커니즘과 흡사하다.

개념이 아닌 무개념의 철학, 차이의 철학을 지향하다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많은 미술애호가에게 사랑받는다. 하지만 인상주의 작가들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상황은 정반대였다. 그들의 작품은 화단에서 혹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시를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작품이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문제작이라고 불렸던 작품들도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적인 관행을 따르고 있었다. 마네(Eduard Manet)는 도덕적인 스캔들을 일으켰던 그의 작품 ‘풀밭 위의 식사’라는 작품의 모티브를 지오르지네의 고전적인 누드 작품에서 따왔으므로 스캔들이 생기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인상주의 작가들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는 제도권 학교인 아카데미 중심의 기성 화가들이 주도했다. 이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비도덕이 아닌 미술에 대한 ‘개념 없는 태도’였다. 기성 화가들은 미술은 체계적인 과정에 의해서 오랜 기간 숙련 기간의 산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 원칙을 무시했다. 밑그림 작업인 데생을 거치지 않은 즉흥적인 형태와 불분명한 실루엣, 거친 붓 터치는 마치 아마추어 화가의 그림 혹은 미완성의 그림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이들에게 인상주의 예술이란 미술이라는 개념을 무시한 개념 없는 사람들의 조잡한 예술에 불과한 것이다. ‘인상주의(impressionism)’에서 ‘인상(impression)’이라는 말도 그것이 비록 모네의 ‘해돋이, 인상’이라는 작품에서 나온 것이기는 했지만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그저 눈에 보이는 주관적인 인상을 담은 그림이라는 경멸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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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인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현실의 주관적인 인상이 아닌 진정한 현실을 그리고 있다고 믿었다. 인상주의자들이 보기에 기성 회화는 진정한 현실의 묘사가 아니다. 아카데미의 전통의 관점에서는 누가 보더라도 그 사물이 무엇인지를 인지할 수 있는 사물의 항구불변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화가의 미덕이다. 가령 사과를 그린다면 어느 누가 보더라도 분명하게 사과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명확한 묘사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에 대한 정확한 데생이 가장 중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사물이 지닌 고유한 색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인상주의자은 이러한 아카데미즘의 전통이야말로 허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 속에 불변하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과만 하더라도 시시각각 변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사물의 시각 정보는 오로지 빛의 반사에 불과하다. 시각적으로 항구적이며 불변하는 사과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떠올리는 사과라는 개념일 뿐이다. 이에 반해서 인상주의자들은 매 순간 시시각각 변하는 찰나의 사과를 표현하고자 한다. 그들이 데생을 거부하고 매우 짧은 시간에 사물의 모습을 묘사하려는 이유다.

말하자면 인상주의 화가들이 사과를 묘사하기 위해서 포기한 것은 사과라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을 포기하고 얻는 대가는 매 순간 고유한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 세계, 즉 차이로서의 세계다. 모네가 루앙성당의 건너편 카페에 앉아 시시각각 변하는 성당의 모습을 반복해서 그리는 것은 바로 루앙성당의 진정한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불변하는 루앙성당, 즉 루앙성당의 추상적인 개념을 그리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매 순간 드러나는 ‘차이’로서의 현실 자체를 그림에 담았다.

이렇듯 현실은 ‘차이’의 세계이며 개념은 추상일 뿐이다. 이전에는 예술을 비롯해 철학이나 종교, 정치, 심지어 교육에서마저도 불변하는 어떤 것, 즉 추상적인 개념의 중요성만을 강조했다. 차이란 바로 개념의 폭력에 의해서 감춰진 현실 세계의 모습이다. 프랑스 현대철학자 질 들뢰즈가 1968년 펴낸 저서 『차이와 반복(Difference et Repetition)』은 추상적인 개념에 의해서 억압된 차이의 논리를 회복함으로써 우리가 현실에 한 발짝 더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지평을 열고자 하는 철학적 시도다.

반복은 같음이 아닌 차이의 생산이라는 것이 핵심

『차이와 반복』의 제목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이 책에서 핵심이 되는 두 개의 개념은 ‘차이’와 ‘반복’이다. 아마도 차이와 반복이라는 개념을 사전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을 듯하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을 뒤집는다. 그의 독특한 시각은 차이와 반복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들뢰즈는 “차이란 반복의 결과”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반복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제라는 뜻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이는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두 용어의 사전적 정의와 어긋날 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상황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서는 반복을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으로, 또한 차이를 ‘같지 않은 다른 것이나 상태’로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에 따르자면 반복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일도 아니며 차이가 반복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도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반복은 같은 일을 되풀이함으로써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일로 생각된다.

가령 물이 끓는 온도를 반복적으로 관찰해서 모든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는 법칙을 발견한다. 이 법칙은 어떤 물에도 적용됨으로써 물은 모두 섭씨 100도에서 끓는 ‘같은’ 성질을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복은 차이를 만들어내기는커녕 차이를 배제하고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기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포드주의’의 핵심은 반복을 같은 것의 대량 생산체제라는 점에서 반복과 같음(철학에서는 ‘동일성’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경향이 있음)의 연결고리를 가장 확실하게 구현하는 현실적 사례 중 하나다. 주지하다시피 포드주의는 컨베이어 시스템을 통해서 대량 생산을 구현한 경영관리 체계를 나타낸다. 포드주의의 핵심은 사무자동화를 통해서 생산과 업무능력을 제고시키는 것인데, 이러한 효율성은 전적으로 같은 것의 반복적인 대량 생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갖는 기계에 대한 이미지 역시 포드주의와 관련이 있다. 기계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미리 설계된 방식으로 같은 제품을 생산하는 장치다. 만약 오차 범위를 벗어난 제품이 생산된다면 그 제품은 불량이다. 매우 간헐적인 불량의 발생은 예외적인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불량제품이 반복된다면 기계 자체가 결함을 지닌 것이다. 왜냐하면 기계란 같음을 반복적으로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포드주의는 이렇게 반복과 같음이 하나의 완벽한 쌍임을 구체화하고 있다.

과연 반복과 같음은 완벽한 한 쌍일까? 이것은 포드주의의 신화가 아닐까?1  같음을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포드주의의 모델을 예술로 상징화한 작업은 너무나 잘 알려진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일련의 작업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전통적인 예술가의 작업실을 의미하는 ‘아틀리에’가 아닌 ‘공장’으로 불렀으며, 자신의 작업을 제작 혹은 생산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작품을 생산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의 작업은 포드주의의 획일성과 반복성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해다. 그의 작품은 거꾸로 포드주의가 지닌 모순과 한계를 지적한다.

워홀을 대표하는 캠벨수프나 코카콜라 등 당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의 이미지나 마릴린 먼로나 마오쩌둥 같은 유명 인사의 이미지는 모두 전통적인 예술품처럼 수작업이 아닌 실크스크린이라는 대량 인쇄 작업을 거친 것이다. 마치 컨베이어 과정을 거친 포드의 자동차처럼 같은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워홀의 작업은 미국 자본주의의 대량 생산을 예술의 공정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워홀의 작업은 같음을 생산하는 반복의 과정을 재현함으로써 이 과정의 아이러니를 의도적으로 함축했다. 실크 스크린으로 표현된 그의 작업은 얼핏 같음의 반복적 생산으로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색상이 다르거나 마치 인쇄가 잘못된 것처럼 모두 제각기 실루엣 선이 조금씩 번지거나 초점이 맞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모두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이다.

워홀이 완전히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차이에 집중하는 것은 바로 반복을 통한 같음의 생산이 지닌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량 생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같음의 소비에 익숙하지만 결코 그것에 만족할 수 없다. 워홀의 작품 역시 진짜로 똑같은 것을 엄청난 양으로 제작했다면 그의 작품에 대한 소비의 욕구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반복과 같음의 결합이 포드주의의 환상일 뿐 결코 절대적이지 않음을 이미 깨달았던 것이다. 반복과 같음의 쌍은 그 용어들의 정의에서 보편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관련성 자체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들뢰즈는 바로 반복을 같음이 아닌 차이를 낳는 기제로 봄으로써 기존 신화에 도전한다. 그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같음의 반복이란 불가능하다. 사실상 알고 보면 완전하게 같다는 것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1년 전, 일주일 전, 그리고 바로 어저께도 오늘과 같은 차를 타고, 같은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길을, 같은 시간에, 같은 속도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구가 자전하는 궤도도 완벽하게 같을 수는 없으며, 어제의 특정한 시간이 오늘의 특정한 시간과 같을 수도 없다. 컨베이어 벨트를 통과한 같은 부품과 같은 공정을 거친 포드의 자동차들 역시 똑같을 수 없다.

같음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다름의 요소들을 제거한 추상에 불과하다. 같음이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일 뿐이며 현실은 다름, 즉 차이의 세계다. 이렇게 우리들 자신을 포함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나아가 모든 현상들마저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현실의 원래 모습, 즉 애초에 어떤 다른 것과도 같을 수 없는 이러한 존재의 양상을 ‘차이 자체(la différence elle-même)’라고 부른다. 세상에 모든 것은 ‘차이 자체’이다.

그러나 자신이 지닌 고유한 차이가 불쑥 드러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기제가 바로 반복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이라는 두 기초 개념의 마주침은 결코 처음부터 설정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며, 이 마주침을 간섭하는 모습들을 잘 들여다보고 이를 제거해야만 나타나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위해서 매우 어려운 철학적 용어와 기존의 사상을 검토하지만 우리의 일상 경험을 통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와 반복의 마주침은 의식하고 있지 못할 뿐 누구나 일상적으로 항상 경험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를 들어보자. 몇 년 전 우연한 기회에 평양냉면을 먹어보게 됐다. 당시에 평양냉면이 무엇인지도 몰랐을뿐더러 내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간 자리였는데, 다시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후에도 거의 억지로 따라가서 몇 번 더 먹었다. 물론 메뉴가 한정돼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 없이 평양냉면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평양냉면의 맛이 떠오르고 자발적으로 먹고 싶은 생각이 들어 자발적으로 먹었다. 이윽고 평양냉면이 지닌 고유의 맛을 알게 된 것이다. 반복된 경험이 없었더라면 결코 그 맛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먹을 때는 평양냉면을 메밀우동이나 보통의 냉면과는 다른, 이상한 맛 정도로 생각했다. 반복적으로 먹으면서 그 맛을 달리 느끼기 시작했다. 이윽고는 평양냉면이 지닌 고유한 맛을 알게 됐다. 주변의 일부 냉면 마니아들은 집집마다의 고유한 차이뿐만 아니라 같은 집이라도 갈 때마다 다른 차이를 경험한다고 한다.

이렇듯 반복이 차이를 만든다는 것은 어렵고 심오한 명제가 아닌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평범한 사실이다. 이 평범한 사실을 이해했다면 들뢰즈가 『차이의 반복』을 통해서 어렵게 철학적으로 늘어놓은 이야기의 핵심을 매우 간단하게 이해한 셈이다.

차이의 두 가지 형태, 분화와 미분화
- 수학의 ‘미분’ 개념에서 배울 수 있는 차이의 전략

들뢰즈의 경우에는 ‘차이’라는 개념을 철학사적으로 천착해 들어가서 해부한다. 그는 기존의 ‘차이’의 논리가 실상은 같음(동일성)의 논리의 변형에 불과했음을 개념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당연히 과거의 철학에서도 차이를 중요하게 내세웠다. 헤겔은 다른 것과의 모순 혹은 차이야말로 한 사물의 온전함을 드러낼 수 있는 변증법의 기본 원리로 간주했다. 그러나 들뢰즈의 눈에 그것은 외관상의 차이를 표방한 동일성의 논리에 불과할 뿐이다.

들뢰즈가 왜 이러한 주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두 가지 차이의 논리를 살펴보면 이해 가능하다. 들뢰즈는 차이의 논리를 ‘분화(分化)’와 ‘미분화(微分化)’로 구분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미분화’라는 용어다. 미분화는 구분되지 않음을 뜻하는 미분화(未分化)가 아닌 수학적 개념인 ‘미분’을 뜻한다.

들뢰즈는 불어에서 ‘차이(différence)’의 형용사와 그 형용사의 명사적 형태에 주목한다. 불어로 일반적인 의미에서 구분함(분화)을 뜻하는 ‘différenciation’이며 다른 하나는 미분화를 뜻하는 ‘différentiation’이다. 철자로 보자면
c와 t 한 글자 차이가 날 뿐이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이 하나의 알파벳 차이는 차이에 대한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논리를 함축한다.

우선 ‘분화’의 논리부터 살펴보자. 분화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른바 종차적 차이에 의한 구분을 뜻한다. 가령 어떤 공 모양의 식물을 보고 이것이 과일인지 채소인지, 그리고 과일이라면 사과인지 배인지, 사과라면 아오리 사과인지 홍옥인지를 구분해내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고 그것의 차이를 결정할 때 종차적으로 구분하는데 바로 이것이 ‘분화’의 논리다.

헤겔의 논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헤겔은 어떤 것(존재)의 모습을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닌 고유한 차이를 발견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차이는 당연히 다른 것과의 구분을 뜻한다. 가령 나를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박영욱’이라는 고유명사를 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이러한 규정은 박영욱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추상적이고 텅 빈 규정일 뿐이다.

박영욱이라는 존재를 더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 박영욱은 ‘남자’ ‘대한민국의 사람’ ‘대학교수’ ‘내성적인’ 등의 규정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이외에도 더 많은 규정을 나열할수록 나라는 존재가 가진 구체적이고도 고유한 모습이 훨씬 더 잘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생각이 헤겔 변증법의 핵심이다.

헤겔은 여기서 규정을 변증법적 부정(negation)의 논리와 연결한다. 가령 “박영욱은 남자다”라고 규정할 때 이 말은 곧 여자가 아니라는 말을 함축한다. 내성적이라는 규정 역시 외향적이 아니라는 부정의 논리를 함축하며, 한국인이라는 규정은 일본인, 미국인, 중국인 등이 아니라는 부정의 논리를 함축한다. 남성이라는 규정 역시 여성이라는 규정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남성은 여성의 부정으로 존재하며 여성은 남성의 부정으로서 존재한다.

헤겔이 변증법적 모순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여성이라는 존재 없이 남성은 존재할 수 없다. 즉 남성은 여성이 아닌 여성의 부정으로서 존재한다. 남성은 남성 자체로 존재해야 하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여성이 없이 남성이라는 존재는 모순적이다. 얼핏 보면 이 말장난 같은 사태가 바로 변증법의 핵심이다.

물론 헤겔에게 이러한 모순의 사태는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성이나 여성의 이 모순적인 사태는 남성이나 여성이 하나의 동질적인 인간이라는 보다 깊은 성찰을 이끌어내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다. 남성과 여성의 모순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자식의 번성도 없었을 것이며, 고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숭고한 예술적 업적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통해서 남성과 여성 모두 서로 상보적인 동질적인 존재라고 결론짓는다.

헤겔의 변증법은 남성과 여성의 구분, 즉 모순적 관계를 통해서 이들이 하나의 인류라는 동일성, 같음을 자각하는 논리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헤겔의 변증법이 왜 타자 혹은 차이의 논리가 아니라 동일성의 논리일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들뢰즈가 보기에 헤겔의 변증법적 구분은 한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구분의 기준이 되는 남성, 한국인, 내성적인 등의 규정들은 그것 자체가 보편적인 개념이다. 남성은 인류의 절반에, 5000만 한국인에게 해당되는 규정이다.

가령 앞서 든 평양냉면의 경우 그것을 메밀의 맛, 함흥냉면보다는 고소함, 진한 육수, 메밀국수와 다름, 함흥냉면의 전분가루 맛과 다름 등의 수많은 규정을 갖다 붙여서 종합해도 정작 평양냉면 고유의 맛을 드러낼 수는 없다. 오로지 먹어봐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다. 존재의 차이 자체, 즉 고유한 차이는 개념적 구분, 즉 분화의 논리로서는 온전히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이다.

화폐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는 오로지 다른 것과의 관계, 즉 1만 원이면 사과 몇 개를 살 수 있는지, 혹은 볼펜 몇 자루를 살 수 있는지 등 다른 상품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1만 원과 2만 원의 차이는 다른 상품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그 내재적 가치는 없다. 그런데 만약 이 화폐가 다른 상품과 거래될 수 없다고, 즉 다른 것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됐다고 치자. 이 화폐의 실체는 사라진다. 화폐의 고유한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변증법적 분화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정의된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는 이러한 변증법적 구분의 논리가 사실상 다른 존재와 구분되는 자신의 고유한 차이를 드러내는 ‘긍정의 논리’가 아닌 오로지 다른 존재에 의해서만 의존함으로써 사실상 자신의 고유한 차이를 포기하는 ‘부정의 논리’라고 봤다.

들뢰즈가 말하는 ‘미분화’, 혹은 미분적 차이는 분화의 논리와 구분된다. 들뢰즈가 미분화의 개념에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내재됐다. 우선 미분이라는 말이 거시적인 종차적 구분, 혹은 개념적 차이와는 다른 미세하고 세밀한 구분이라는 의미를 암시한다. 또 한편으로 미분은 수학의 개념이기도 하다.

수학적인 개념으로서 미분은 사실상 측정 불가능한 것을 측정하는 역설적인 개념이다. 미분이란 한 지점에서 가장 인접하는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 변화를 측정하는 것이다. 한 지점의 속도나 한 점의 기울기를 측정하는 것이다.

사실 미분은 논리적으로 역설적인 개념이다. 한 지점의 속도라든지 한 점의 기울기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기울기란 적어도 두 점을 이은 직선의 형태로만 가능하며, 속도 또한 어느 구간을 통과하는 시간상의 빠르기이므로 두 지점의 시간적 편차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지점의 속도를 정확하게 구하기 위해서 그것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점과의 시간적 편차를 구해야 한다. 여기서 ‘무한소’의 개념이 탄생한다. 이렇게 미분해 얻어진 속도의 값을 다시 미분하면 한 지점이 지닌 속도의 변화, 즉 가속도가 얻어진다. 여기서 속도든 가속도든 모두 무한소를 바탕으로 미분화한 값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들뢰즈는 속도와 같은 미분값이 단순히 한 구간의 평균값을 나타내는 정량화된 외연량이 아닌 하나의 지점이 지닌 고유한 크기, 즉 ‘강도(intensité)’라는 점을 말했다. 이러한 사실은 야구의 경우에 잘 나타난다. 산술적으로 투수 공의 속도가 빠르면 볼을 치기 어려운 경향이 있다. 그런데 타자의 배트와 공이 서로 부딪치는 홈 플레이트에서 공의 속도는 평균 구속과 다르다. 또한 산술적으로 같은 속도를 나타낸다고 하더라도 타자가 느끼는 강도는 그때마다 다르다. 더군다나 한순간의 속도 혹은 가속도, 또는 온도와 같은 내포량은 산술적으로 그 차이를 측정할 수 없다. 가령 영하 10도가 영하 5도보다 두 배 더 춥다고 할 수는 없다. 들뢰즈는 바로 이렇게 미분화해 얻어지는 차이를 개념적·산술적 규정이 아닌 ‘강도’라고 봤다.

강도란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없는 경험을 의미한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느끼는 특별한 호감이나 매력은 ‘매너가 좋아서’ ‘키가 커서’ ‘목소리가 좋아서’ 등으로 규정할 수 없다. 이는 분화의 논리이며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규정들일 뿐 그 대상이 지닌 고유함이 아니다. 우리가 그에게 느끼는 특별한 호감은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것과 다른 ‘강도’일 뿐이다. 강도란 대상이 지닌 고유한 차이의 논리인 것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반복이야말로 이러한 고유한 차이로서의 강도를 지각하는 기제라고 봤다. 지금 내가 느끼는 평양냉면의 맛은 다른 맛과 비교할 수 없는 강도를 지니며, 심지어 어제 먹은 평양냉면의 맛과도 다른 강도를 지닌다. 이러한 강도를 느낄 수 있는 것이 반복의 힘이다.

들뢰즈의 눈으로 들여다본 4차 산업혁명 시대

1. 기계도 획일적이지 않다

들뢰즈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추구하는 포드주의적 사고를 전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획일화된 대량 생산의 체계와 소비의 강요는 사람들로 하여금 꾸준한 소비의 동기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바로 포스트 포드주의의 등장이다. 사람들은 똑같은 차나 의복을 소비하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다른 것을 소비하거나 소유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차이의 전략이 바로 포스트 포드주의의 핵심이다.2

흥미롭게도 포스트 포드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절이론에 따르면 포드주의 축적 체제는 획일적인 생산과 소비, 이른바 ‘동일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과 유사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획일성을 거부하고, 물질적인 기반인 자본주의의 변화된 현실을 강조한다. 결국 ‘차이’를 강조하는 들뢰즈 철학의 물질적 토대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를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포스트 포드주의를 넘어선다. 들뢰즈가 기계를 분석하는 관점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그는 기계를 단순히 같은 것을 획일적으로 생산하는 포드주의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기계 또한 차이를 생산하는 기제로 이해했다. 여기서 차이의 생산은 더 많은 소비를 위해서 변형을 가하는 포스트 포드주의적인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 포드주의는 기계가 같은 것을 획일적으로 생산하는 장치라는 전통적인 기계론을 거부하지 않으며, 기계의 획일적 공정에 일정한 조작을 가해 다품종 생산을 가능하게 변형할 뿐이다. 기계는 인간의 통제 범위에 놓여 있으며, 인간이 의도한 바대로 항상 똑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에 반해서 들뢰즈는 기계야말로 인간의 통제를 넘어서며 지금껏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지각의 가능성을 창출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고 봤다. 그것은 기계가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지각의 질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카메라는 인간이 셔터를 누르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 수동적인 기계에 불과하지만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다. 카메라에 담긴 세계는 인간이 회화로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와 완전히 다르다. 화가가 그린 그림은 화가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지만, 사진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의 시각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제한돼 있지만 사진은 그러한 제한을 벗어난다. 사진을 통해서 사람들은 결코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봤다. 그것은 사람들이 볼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질서였다.

현미경은 미생물의 세계라는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였으며, 이로써 사람들은 질병이나 위생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됐다. 기계는 인간의 통제하에 있는 획일적인 결과물을 생산하는 장치가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에게 감춰져 있던 사물의 고유한 특성, 즉 그것의 독특한 차이를 드러내는 기제다. 들뢰즈는 기계가 지닌 미덕을 인간의 통제하에 놓인 엄격한 획일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획일적인 기성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우발성에서 찾았다. 기계란 곧 틀에 박힌 인간의 진부하고도 획일적인 시각으로부터 벗어나 지금까지 감춰진 사물의 고유한 내재성, 즉 차이를 드러내는 장치다. 기계에 대한 들뢰즈의 이러한 시각이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을 대변하는 새로운 기계 환경에 더 적합하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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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계된 데이터’는 개인의 고유성을 파악할 수 없다

포스트 포드주의 사회가 분화가 아닌 미분화의 논리를 함축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사회의 형태가 들뢰즈가 말하는 미분화의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오늘날의 사회를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완전히 소멸한 사회로 보는 것은 다소 현실성이 떨어질 수 있다. 가령 여전히 세일을 하지 않고 일반 매장에서 물건을 팔지 않는 샤넬의 판매 전략도, 폐쇄적인 환경이나 경제적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뭔지 모를 사회적 우월감과 결합된 아이폰의 전략도 유효하다. 이렇듯 계급과 계층, 엘리트와 대중의 구분이 존재하는 한 분화의 논리가 사라지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계급사회로서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화의 논리가 완전히 미분화의 논리로 대체될 것이라는 믿음은 현실성 없는 공상일지도 모
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사회에서 분화의 논리가 지닌 기존의 지배적 권위는 점차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 틈새를 미분화의 논리가 매울 수 있으며, 그렇게 돼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등 디지털 기술이 등장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변화와 맞물려서 우리의 소비환경 자체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사례를 들어보자. 자동차 산업의 경우 가장 큰 변화는 자율주행과 더불어 발생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자율주행의 경우 기술적 핵심은 자동차의 가능 자체가 아닌 도로 전반의 상황을 원격으로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환경의 창출이다. 중앙관리시스템으로서의 프로그램이 자율주행의 핵심이며 자동차는 그것을 실행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로써 자동차 자체의 위상은 급격히 낮아질 것이다. 순간 가속도나 출발 속도가 오늘날처럼 중요하지 않을 것이며 운전자의 편의를 위한 서스펜션이나 보디감, 심지어 화려한 장식도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휴대폰이 처음 나왔을 당시 특정한 상품이나 모델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지만 오늘날 스마트폰은 하나의 필수품일 뿐 구분화를 위한 소비대상은 아니다. 자동차 또한 소프트웨어의 비중이 커지면서 구분 짓기의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스마트폰의 경우 무수한 앱을 통해 개인이 자신의 특성에 맞게 소비를 하는 대상이 됐다. 신분적 구분의 소비대상이 아닌 개인의 특성화를 위한 개인의 플랫폼이 된 것이다. 운전의 노동에서 해방된 자동차의 경우에도 그것은 탑승시간 동안 그 공간을 소비자 개인의 특성에 따라 최적화하는 플랫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개인화 서비스 역시 새로운 환경에 따라 바뀌고 있는 소비 양식과 관련이 있다. 개인화 서비스란 말 그대로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분석해 이에 맞춘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 전략이다. 이러한 서비스 전략은 대량 생산과 소비사회에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획일적으로 생산된 상품의 일시적이고도 폭발적인 소비를 필요로 한 경제구조와 맞지도 않았을뿐더러 개인화 서비스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도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화 서비스는 오늘날 빅데이터의 환경에서 탄생한 새로운 산물이다. 빅데이터를 통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취향, 선호도 등을 분석해낼 수 있고, 그 개인만을 위한 최적화된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다.

개인이 고유한 개성을 발휘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자신도 몰랐던 잠재력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는 이미 정해진 도식이나 방법론에 의해 발견될 수 없다. 영화 ‘빌리 엘리엇’에서 주인공인 빌리가 발레리노가 된 것은 처음부터 자신이 발레리노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권투도장에 가다가 우연히 발레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미리 정해진 길로만 가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개성은 우발적인 만남에 의해서 우발적인 계기로 발견된다.

빅데이터 시대 이전의 정보와 이후의 정보가 지닌 근본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디지털 매체 이전의 정보는 항상 그 의미가 이미 정해져 있고 정보의 생산자에 의해서 가공된 정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를 소비한다는 것은 미리 주어진 정보를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무수히 많은 빅데이터의 정보는 이와 정반대로 변형이 용이하며, 그 의미가 일방적으로 결정돼 있지 않다. 어느 면에서 보자면 빅데이터의 정보는 정보라기보다는 정보의 원천이 되는 말 그대로의 (빅)데이터일 뿐이다. 무수한 데이터를 어떠한 방식으로 연결하느냐에 따라서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정보가 발생한다. 여기서 사용자는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용자가 아니라 정보의 생산자가 된다. 이런 배경에서 개인화 서비스의 전략은 개인을 예측하고 미리 가공된 정보를 개인에게 수용하도록 전달하는 것이 돼서는 안 된다. 개인화 서비스는 주어진 데이터를 통해서 소비자 자신도 예상치 못한 정보의 생산자가 될 수 있는 우발적인 창조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돼야 한다.

그러나 현재 진행 중인 개인화 서비스는 이러한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포털의 원론적인 기능은 기존의 언론과 달리 특정한 뉴스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뉴스에 접근할 수 있는 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뉴스나 정보의 선택은 전적으로 소비자의 몫이다. 그러나 실제로 포털의 독특한 배치 구조나 검색어, 연관 검색어 등의 알고리즘은 기존의 언론 환경처럼 자발적인 선택과 우발적 발견이라는 소비자의 권리를 은근슬쩍 박탈하고 있다.

개인화 서비스의 경우에도 명목상으로는 개인의 특성에 최적화된 상품을 서비스하는 것이지만 실상은 정반대의 역할을 한다. 가령 개인이 나이나 지역, 직업, 과거의 구매이력 등을 고려해 서비스 상품의 카테고리를 일반화하고 이를 개인화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개인에게 추천한다. 이것은 개인을 여전히 하나의 집단에 동질화하려는 분화의 전략이지 결코 개인 자체의 특성을 발견하게 하는 미분화의 전략과 상관이 없다.

아마존에서는 기존의 개인화 서비스가 지닌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협업 필터링 시스템을 만들었다. 협업 필터링 시스템이란 어떤 상품을 소비한 사람들이 구매한 상품들을 분석하고 유사한 상품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추천하며, 다시 이들의 구매 상품을 분석해 계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성별이나 나이 혹은 같은 분야나 주제 등의 미리 정해진 도식적인 분류에 의한 상품의 추천이 아닌 실제로 특정 상품을 소비한 사람들의 구매이력을 통해서 상품 서비스를 추천하는 것이다.

넷플릭스 역시 이와 비슷한 전략을 채택하고 있는데 영업적으로 그러한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들의 전략이 분화가 아닌 미분화의 논리를 수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물론 분화의 논리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으며 그것이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경형 환경 변화에 따른 소비 패러다임의 변화는 불가피하게 미분화의 전략을 요구할 것이다. 난해한 철학서인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일독을 경영인들에게 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imago1031@hanmail.net

필자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현대 음악과 미술, 미디어아트, 건축디자인 등 구체화된 예술 형식에 주목해 철학 사상을 풀어내는 데 주력해왔다. 저서로는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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