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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4.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건 ‘따뜻한 손’.. 부(富)는 편리함 이상의 번거로움을 준다

김근배 | 244호 (2018년 3월 Issue 1호)
Article at a Glance
애덤 스미스는 이윤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꿈꾸지 않았다. 이는 그의 대표 저서 『국부론』을 오해하고 있는 탓이다. 스미스가 국부론에 앞서 발표한 윤리학서 『도덕감정론』 곳곳에는 국부론의 대전제들이 숨어 있다. 그는 『도덕감정론』에서 사람의 이기심이 아닌 타인과 ‘동감’하는 능력을 강조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남을 불행하게 해선 안 된다는 게 골자다. 소수 기득권자에게만 주어진 특혜와 독점 체제를 타파하고 신뢰와 정의의 범위 내에서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제시했다. 이 기본 철학을 토대로 모두가 기회를 차별받지 않고 함께 잘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정리한 것이 바로 『국부론』이다. 여기에는 기업의 이익과 함께 고객과 직원의 이익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도덕감정론』은 애덤 스미스의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이자 올바른 경영철학을 세우기 위한 필독서다.
 

자본주의의 실체는 무엇인가

1978년 여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식료품을 운영하던 한 사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매장을 바라보고 있다. 대홍수가 일어나 매장 내부가 초토화됐기 때문이다. 그는 사업을 포기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그의 절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단골손님들이 매장 복구에 자발적으로 나섰다. 그들은 ‘힘을 내 영업을 재개해야 한다’며 그를 북돋웠다. 그는 그때 기업의 목적이 이윤이 아니라 고객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그는 고객 중심의 서비스를 펼쳐 나갔다. 2006년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스저널에서 시행한 기업 명성도 조사 중 사회적 책임 부문에서 1위에 선정됐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매년 100%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 ‘오감을 자극하는 식품점’으로 유명한 존 매키의 홀푸드사(Whole Foods Markets) 이야기다.

회사 창업 3년째 되던 해인 1962년,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회장은 3일째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 그를 찾아온 직원들과 연일 입씨름을 벌였다. 젊은 직원들이 가즈오 회장을 찾아와 매년 임금 인상과 성과급을 보장하라고 거세게 요구했다. 난감했던 가즈오 회장은 이들은 집으로 데려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해 나갔다. 그를 믿고 따르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며 믿음을 심어줬다. 결국 이들은 가즈오의 말에 감동받았고, 그를 신뢰했다. 이는 교세라 직원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그때 가즈오는 경영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 종업원과 그 가족의 미래를 위한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경영 철학을 세웠다.

매키와 가즈오는 각각 미국과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힌다. 하지만 이 두 CEO의 경영방침은 ‘기업은 이윤추구 극대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자본주의의 대전제를 위배한다. 매키는 고객에게 방점을 뒀고, 가즈오는 직원들의 행복이 궁극적 목표라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들이 자본주의 체제가 야기한 부작용이나 단점을 극복해 성공한 경영인이라고 평가
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두 CEO는 애덤 스미스(1723∼1790)의 자본주의 철학을 제대로 구현하고 실천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평가에 의아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미스가 ‘각각의 개인이 이기심을 발휘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의 질서와 번영이 바람직하게 이뤄진다’는 주장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지금껏 우리가 스미스의 대표 저서인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1776)』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탓이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할 때 오늘날처럼 모든 국민 대다수가 경제적 자유가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국부론』을 읽게 되면 이 책에 담긴 위대한 시대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당시는 중세의 길드 시스템이 유지돼 동업조합원들만이 경제적 자유를 누리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 소수의 기득권자에게 허용된 특혜와 독점을 철폐하고 국민 대다수에게 경제적 자유를 허용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주장한 것이다.

우선 스미스는 당시 기득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1707년 대영제국에 막 편입된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다.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제적 격차가 커 스코틀랜드 출신은 소수자 취급을 받았다. 스미스도 능력 있고 뛰어난 지식인이었지만 직간접적인 차별을 피하진 못했다. 『애덤 스미스전(Life of Adam Smith)』의 저자 존 레이에 따르면 옥스퍼드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학생들은 외국인 침입자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애덤 스미스가 6년간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다 돌연 스코틀랜드로 되돌아간 것도 비슷한 이유였으리라 짐작된다.

또한 스미스는 중상주의 사회체제에서 국민 대다수가 기득권의 장벽에 가로막혀 경제적 자유를 갖지 못한 것에도 분노했다. 노동자들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아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잘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이 모든 원칙이 『국부론』에 녹아 있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채 그가 『국부론』에서 단 한 번 언급한 ‘보이지 않는 손’에 집착했다.

왜 우리는 『국부론』이 무자비한 자본가의 탄생을 지지하는 냉철한 경영경제 지침서라고 오해하게 됐을까? 필자는 스미스의 『국부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인 그의 저서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을 소개한다. 『도덕감정론』은 스미스가 36세 되던 1759년 발표한 윤리학서다. 『국부론』보다 17년 앞선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심리와 사회의 지향점에 대해 논했다. 『도덕감정론』 안에는 『국부론』의 대전제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 질서와 그 안에서 추구해야 하는 경영철학을 고민해 보고자 하는 이유다.

『도덕감정론』 들여다보기

1. 이기심 아닌 이타심을 강조한 『도덕감정론』

스미스는 애초에 묘비명에 ‘도덕감정론의 저자, 여기에 잠들다’라고 쓰길 원했다. 실제로 그의 묘비명은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의 저자, 여기에 잠들다’라고 적혀 있지만 그가 얼마나 『도덕감정론』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만큼 그의 철학의 기본이 되는 내용들이 담겨 있는 저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덕감정론』은 다름이 아닌 인간의 본성을 다루고 있다. 『국부론』은 그 토대 위에서 사회질서와 번영을 가져올 수 있는 방안을 다룬 것이다.

그렇다면 스미스가 주장하는 ‘도덕감정’은 뭘까. 당대 사람들은 흔히 도덕을 규율과 동일시했고, 그렇기에 사람의 이성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미스의 스승이자 스코틀랜드 대표 계몽주의자인 프랜시스 허치슨은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감각, 즉 감정이라고 봤다. 이를 도덕 감각(moral sense)이라고도 칭했다. 즉, 인간은 본래 타인을 사랑하는 자비심이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스승의 이론을 계승해 인간은 타인과 ‘동감’할 수 있다고 봤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거나 상상할 때 함께 고통을 느끼고, 타인의 슬픔에서 슬픔을 느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다’고 언급했다. 『도덕감정론』에 따르면 느슨한 밧줄 위에 서서 묘기를 펼치는 사람을 보고 함께 손에 땀을 쥐고 몸을 꼬는 현상이 일어난다. 성격이 섬세한 사람들은 거리의 걸인들의 상처를 보고 자신도 가려움이나 불쾌감을 느낀다. 이것이 인간이 타고난 동감이고 바로 『도덕감정론』의 출발점이다.

현대 과학에서도 동감 능력의 근거를 볼 수 있다. 1992년 이탈리아 신경과학자 지코모 리촐라티 교수와 동료들은 원숭이 뇌에서 특별한 뉴런을 발견했는데 자신이 행동할 때나, 동료 원숭이가 행동하는 것을 볼 때나 똑같은 신경세포가 활성화됐다. 영국 런던에서도 비슷한 실험이 진행됐다. 16쌍의 부부에게 배우자의 손에 바늘을 찌르고 이를 지켜보라고 하자 부부의 뇌에서 비슷한 뇌 fMRI(기능적 자기 공명현상)가 관찰됐다. 이런 신경세포를 ‘거울 뉴런’이라고 한다.

인간이 동감 능력을 바탕으로 항상 이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인간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서로 간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서로 간 침해를 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양면적인 존재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는 양극단에서 자신의 행동에서의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스미스는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공정한 관찰자는 내가 좋아서 한 행동이 남들에게도 좋은 것인지, 남에게 추앙받은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기에 옳은 것이었는지, 이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잣대다. 일종의 이성, 원칙으로 볼 수 있다. 스미스는 이 공정한 관찰자가 있어야만 ‘자기애(self-love)’에 빠지게 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이는 동양의 역지사지(易地思之)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대목은 『국부론』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단서다. 현대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을 과학으로 만들기 위해 물리학에서 균형이론을 도입하고 수학의 최적화를 이용한다. 신고전경제학에서는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기적이며,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하고, 소비자는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가정하에서 경제이론을 발전시켰다. 스미스가 강조한 인간의 동감 능력은 어디에도 반영되지 않았다. 이윤극대화는 경제학에 수학을 끌어들인 신고전경제학을 수립한 학자들이 세운 가정일 뿐이다.

2. 애덤 스미스는 소수의 부자를 위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했다. 사람들은 단순히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었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부자가 부를 자랑하는 것은 그 부로 얻은 이익이 선사하는 모든 유쾌한 감정들에 의해 인간들이 쉽게 공감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벅차오르고 자랑스러움을 느낀다”고 언급했다. 즉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부자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최소한의 부 이상은 큰 효용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부를 축적해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평생 동안 부를 축적하는 데 전력을 다한 부자들은 죽음의 순간에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그 이후에 부와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부자들은 행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부를 추구하지만 최후의 순간이 되면 부와 권세는 사소한 효용에 불과하고, 부는 편리함 이상의 번거로움을 더 많이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서술한 부분과 일맥상통한다. 이른바 부의 ‘기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스미스는 이 부의 기만이 사회를 번영하게 하는 순기능을 한다고 봤다. 사람들이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기업을 확장하면,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이들에게 임금을 줘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때 스미스의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 최초로 등장한다. 그는 『도덕감정론』에서 부자들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부를 축적했을지라도 ‘보이지 않은 손’에 이끌려 모든 사람에게 생활필수품을 분배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인지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사회의 이익이 증진하고 인류 번식의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같은 원리는 ‘신의 섭리(providence)’와 같다고 말한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손은 ‘자유롭게 놔두면 조정이 되는 시장’이 아닌 신의 섭리의 비유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달리 해석하면 보이지 않는 손은 사회가 선순환하기 위한 사회 정의와 상호 신뢰에 더 가까운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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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론』으로 재해석 한 『국부론』

프랑스 소르본대 레이몽 부동(Raymond Boudon) 교수는 위기를 맞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론적 대안으로 『국부론』을 『도덕감정론』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은 별개의 책이 아니고 한 세트로 볼 수 있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의 말미에는 추후 별도의 책으로 정치와 경제를 다루겠다고 예고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말미에 입법과 정치체제의 논의에 대한 책 『정치학』을 예고한 것과 같다. 즉,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이 그의 윤리학책이었다면 『국부론』은 그의 정치경제학책이었다. 스미스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경제학 혹은 정치학은 윤리학의 응용 분야였다.

『국부론』을 읽고 『도덕감정론』을 읽은 독자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스미스가 분명 『국부론』에선 이기심을 강조했는데, 『도덕감정론』에선 이타심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을 ‘애덤 스미스의 문제’라고 일컫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스미스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도 『도덕감정론』과 같은 전제에서 출발했다. 인간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만 동감을 통해 타인을 고려하는 본성을 타고났다고 봤다. 『도덕감정론』이 인간의 동감 본성에 맞췄다면 『국부론』은 인간의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본성에 맞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둘의 균형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국부론』의 ‘자기 이익(Self-interest)’은 ‘이기심(Selfish)’과는 차원이 다르다. 자기 이익 추구의 관점에서는 타인이 분명 존재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반면 이기심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 『도덕감정론』에서 언급한 ‘자신의 작은 불행을 막기 위해, 자신의 파멸을 막기 위해 이웃을 파멸시켜선 안 된다’는 스미스 생각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국부론』 그 어디에서도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자기 이익 추구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나온다. 재산 증식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노력과 희망 때문에 인간은 활기차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 개인이 더 나은 삶을 원하는 것은 사회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다. 결코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손해를 입히는 행위로는 설명하지 않는다.

서로 가지고 있는 자원이나 서비스를 교환하는 것도 단순한 이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교환을 하기 위해선 남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서로 믿을 만한 재화를 가지고 있는지 신뢰관계도 구축해야 한다.

예컨대, 자신이 단골로 거래하던 정육점이 있는데 다른 가게의 고기 가격이 더 싸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다른 정육점으로 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단골 정육점과 거래하면서 그 과정에서 상호신뢰를 형성한다. 정육점 주인은 내가 좋아하는 고기의 종류, 선호하는 형태를 항상 추천할 것이다. 나는 정육점 주인이 질 좋은 고기를 줄 것이라고 신뢰할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스미스가 강조한 인간의 ‘동감’하는 능력과 같은 맥락이다. 이렇듯 단순히 이익만을 추구해 오로지 가격만을 보고 거래하진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손과 함께 스미스가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자유방임(laissez-faire)’을 한번 살펴보자. 사실 자유방임은 동시대 경제학자였던 케네의 주장이다. 그는 『경제표(Tableau economique)』라는 책을 통해 경제가 번성하기 위해선 완전한 자유가 필요하고, 이 자유가 침해될 때 국가의 부는 감소한다고 했다.

이는 스미스는 케네의 자유주의 입장을 일부 수용했지만 스미스의 자유는 경제에서 갑의 자유가 아닌 을의 자유였다. 완전한 자유를 주장한 케네에 대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역사적으로 자유방임주의로 번영한 나라는 없다’고 비판한다. 스미스를 자유방임주의자로 오해하는 것은 자연적 자유주의라는 조건을 생략한 채로 ‘완전한 자유’만을 부각했기 때문이다.

자연적 자유주의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기득권의 독점과 특혜가 우선적으로 철폐돼야 하고, 모두가 정의의 법을 어기지 않는 조건이다. 이 조건하에서 누구나 자신의 노동과 자본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이다. 스미스가 자연적 자유주의에서 내세운 두 개의 조건을 생략한 채로 마지막 문구인 누구나 완전한 자유를 갖는다고 해석함으로써 많은 사람은 스미스가 케네처럼 자유방임주의자인 것으로 오해했다. 이런 왜곡된 해석과 이를 받아들인 통념이 사실상 자본주의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자유방임주의를 비판한 스미스는 기득권의 경제독점을 강력히 비판했을 뿐 아니라 자유가 제한돼야 할 여러 상황을 나열했다. 동시에 타인을 해치는 불의를 밀어내는 힘과 폭력을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가 경제적 강자가 경제적 약자를 착취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갑이 을을 착취하도록 방임하는 자유는 스미스가 생각하는 국가를 번영으로 이끄는 자유가 아니었다. 정부의 감시하에 정의롭고 공정하게 돌아가는 시장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자유주의였다. 즉 자신의 이익 추구와 사회적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자유인 셈이다.

그렇기에 스미스는 자본가의 편에만 서 있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립하는 상황에선 자본가가 항상 유리하다고 말하며 노동자의 편에 섰다. 『국부론』에서 ‘고용주들은 수적으로 적기 때문에 쉽게 연합할 수 있는 반면 임금을 올리기 위해 노동자들이 단합하는 것을 금지하는 의회의 법률이 많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이 버틸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고용주도 노동자가 필요하고, 노동자도 고용주가 필요하지만, 그 영향은 노동자에게 더욱 직접적이다’고 말한다.

스미스는 국민의 대다수인 노동자가 잘살아야 국가가 번영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어느 사회라도 그 구성원의 대다수가 가난하고 비참하다면 번영하는 행복한 사회일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의 노동 생산물 중 자신의 몫으로 그런대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어야 공평한 일이다. 또한 전반적으로 노동임금이 상승하는 현상은 부유한 나라가 됐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그래서 노동의 후한 보수를 불평하는 것은 그 나라 번영의 필연적 인과관계에 대해 한탄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스미스는 성과급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예상했듯이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성을 높이는 무기로 사용되는 성과급제에도 반대했다. 그는 『국부론』에서 “노동자들은 성과급제 임금에 의해 후한 보수를 받을 때 과로하기 쉽고, 수년 안에 자신의 건강을 망치기 쉽다”고 단언했다. 정신적인 노동이든, 육체적인 노동이든 간에 계속해서 며칠간 많은 노동을 하고 난 후에는 휴식에 대한 커다란 욕구가 자연히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욕구는 강제나 어떤 필요성에 의해 저지되지 않는 한 거의 억제할 수 없다고도 했다. 이 휴식에 대한 욕구는 본성의 요구이므로 때로는 편히 쉬는 것에 의해, 때로는 편안하게 쉼으로써, 때로는 유흥과 오락에 의해 충족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고용주는 다수의 노동자들에게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도록 고무하기보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지나친 열정을 누그러뜨리고 휴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스미스가 마르크스처럼 극단적으로 노동자의 편에 선 것은 아니지만 자본가의 혁신과 노동자의 기여를 인정하고 상생해야 국가의 부를 증대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그의 『도덕감정론』에서 주창한 인간의 본성과 인간관계에 대한 설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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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는 ‘따뜻한 손’을 주장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불합리성과 위험성에 대해서 논하기 시작했다. 최대 이윤만 남기면 된다는 기업의 경영 원리에는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의문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사회공동체와 소비자, 노동자의 권리로 눈을 돌렸다. 최근 세계 최대 경제포럼인 ‘다보스포럼’에서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과 세계 빈곤 문제를 주요 안건으로 다루고 있는 것도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론이라고 볼 수 없다. 애초에 자본주의의 뿌리인 스미스의 기본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주의에 바탕을 둔 이윤 극대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인간과 사회의 조화 속에서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기본 틀을 고민했다. 즉, 스미스는 경제적 약자도 포용하는 따뜻한 손을 꿈꿨다. 결국 현재 겪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수정하기 위해선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스미스의 근본 철학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생각을 토대로 기업의 목적이 무엇이 돼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그는 인간을 이기적이면서 동시에 이타적으로 보았고 인간관계에서 동감을 강조했다. 또한 고용주는 노동자들을 잘 대우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생각을 경영 현장에 적용해보자. 결국 인간관계는 경영에서 고객과 회사 내 직원으로 치환할 수 있다. 기업은 고객과 동감함으로써 기업과 고객의 행복을 동시에 증진시킨다. 회사의 직원들이 자신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궁극적으로 회사의 발전에 기여한다. 이 두 과정을 통해 기업은 지속가능한 성장이 가능한 생존역량을 확보할 수 있다.

윤석철 한양대 경영학과 석좌교수는 저서 『경영학의 진리체계』에서 기업의 생존에 필요한 조건을 아래와 같은 부등식으로 표현했다.

가치 > 가격 > 원가

(가치-가격) > 0, (가격-원가) > 0

여기에 지금껏 우리가 논한 애덤 스미스의 생각을 더해 다시 부등식을 만들어 본다면 고객의 이익이 기업의 이익보다 더 커야 할 것이다.

고객이익(가치-가격) > 기업이익(가격-원가)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통해 고객 이익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멈추고 기업 이익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의 이익은 결과다. 원인인 고객의 이익을 좇아야 얻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객의 이익을 우선하다 보면 기업의 이익이 늘어날 것이고, 기업의 생존 역량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앞서 소개한 홀푸드 CEO 매키는 이 같은 자본주의의 이윤 극대화 원칙에 정면으로 반발하며 『돈, 착하게 벌 수 없을까(Conscious Capitalism)』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최근 많은 기업이 사회적 공헌활동 등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평가하는 소비자들도 늘었다. 기업의 공유가치 창출(Corporate Shared Value)이 경영 활동의 필수요소로도 거론된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 둬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행동들은 스미스가 주장했던 자본주의 철학을 보완하는 것이 아닌, 그 자체였다는 것을 말이다.   
 
김근배 숭실대 경영학과 교수 kbkim@ssu.ac.kr 

필자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사우스캐롤라이나대에서 경영학 석사,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마케팅 전공으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저서로는 『애덤 스미스의 따뜻한 손』 『끌리는 컨셉의 법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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