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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당 27시간만 일하고 세금도 많은데 작은 나라 네덜란드, 잘사는 비결은

한근태 | 227호 (2017년 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어쩌다 네덜란드에 살게 된 영국인 필자는 네덜란드가 영국보다 행복하고, 프랑스보다 효율적이며, 미국보다 관용적이고, 노르웨이보다 현대적이며, 독일보다 재미있는 나라라고 말한다. 역사적 배경 때문에 개방적이고 각종 터부에 대해서도 관용적이지만 어느 나라보다도 엄격한 구성원들 간의 규칙이 존재한다. 또한 지리적 배경은 남다른 경쟁력을 빚었다. 산도 없고, 동굴도 없는 환경은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을 만들었으며, 홍수와 싸우며 관용의 전통을 강화했다. 한편 늘 외세의 침입에 시달렸기에 과도한 권위에 저항하는 성향도 갖게 됐다.



가장 작은 나라지만 가장 잘 사는 나라는 어디일까? 또 가장 적게 일하면서 삶의 질이 가장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자연환경은 척박하지만 이를 오히려 자산으로 활용한 나라는?

바로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4분의 1이 평균 해수면보다 낮고 자원도 부족하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됐다. 이번 호에서는 이런 위대한 국가에 대한 책 <네덜란드 이야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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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간척을 통해 나라를 만들었고 언제나 자연의 위협을 느끼며 살 수밖에 없었다. 협조하지 않으면 너도, 나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런 환경은 사람들의 생각과 정치 시스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건설부와 수방유지 보수부는 반드시 협력해야만 했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고집을 피우는 순간, 땅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모두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은 정치에도 영향을 미쳐 정당 간에도 긴밀한 타협과 협의가 필요했다.

노사관계도 남다르다. 네덜란드식 노사 모델은 노조가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는 대신 사용자는 노조의 부분적 경영 참여 등을 보장하는 상호협력적 노사관계를 만들어냈다. 이를 ‘폴더(Polder) 모델’이라고 부르는데 이상적인 노사정 합의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폴더란 바다를 메워 만든 간척지를 뜻한다. 바다의 위협에 직면해 살아온 네덜란드인들이 서로 타협하고 협력해 위기를 극복한 것처럼 노사정이 협력해야만 발전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는 1980년대 초반 바세나르협약에 의해 폴더 모델을 만들었다. 노조는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정부는 기업들의 비용 감축을 위해 세금을 낮추며, 사용자 측에선 고용을 확대하고 기업의 주요 현안을 노조와 협의하기로 3자가 합의한 것이다. 이 합의로 네덜란드 기업들은 세금 및 임금 부담이 크게 줄어들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게 됐다. 1990년대 네덜란드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3%를 넘어 2.5% 수준에 머물렀던 유럽의 다른 국가들을 앞질렀으며 실업률은 거의 제로를 유지해 저성장 고실업에 신음하던 다른 유럽 국가들의 부러움을 샀다.

네덜란드 하면 풍차, 자전거, 우유, 튤립, 덩치가 큰 사람이 연상되는데 모두 환경의 결과물이다. 풍차는 땅에서 물을 퍼내는 도구다. 풍차가 물을 퍼낸 후 흙으로 땅을 메우게 되는데, 자전거는 이런 평평한 땅을 쉽게 오갈 수 있는 좋은 교통수단이다. 연약한 지반 위에는 벽돌을 깔아 도로를 만들었다. 튤립은 개간지 침적토에서 잘 자라는 꽃이다. 소는 초원의 물을 머금은 풀을 마음껏 먹고 살이 올랐다. 식수가 부족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물 대신 우유와 맥주를 많이 마셨다. 덕분에 키가 훌쩍 컸다. 19세기 중반 네덜란드인의 평균 신장은 164.5㎝로 미국인보다 7.6㎝나 작았다. 군대에 지원한 네 명 중 한 명은 신장 미달로 입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엄청난 양의 우유와 치즈를 먹은 지 150년이 지난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큰 키를 가진 국민이 됐다. 20세기 말 기준 평균 신장은 남성이 183㎝, 여성이 173㎝다. 최단신 국가에서 최장신 국가로 변신한 것이다. 덕분에 문틀과 천장 높이 등 건축 법규를 주기적으로 수정했다. 호텔 침대 길이도 세계 평균보다 20㎝ 길게 제작했다. KLM 네덜란드항공은 장신클럽과의 협의를 통해 키가 큰 승객들에게 상대적으로 넓은 공간의 좌석을 제공하기로 했다.



종교분쟁

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한다. 네덜란드는 종교 때문에 갈등이 심했다. 샤를마뉴 대제가 세상을 떠난 후 후계자들은 제국을 저지대 땅, 프랑스, 독일의 세 구역으로 나눠서 다스렸다. 1506년 저지대 땅의 통치권이 카를 5세에게 넘겨졌고 10년 후 스페인 왕 페르디난드가 세상을 떠나자 카를 5세는 카를로스 1세의 호칭을 받고 스페인 왕까지 겸하게 된다. 그는 가톨릭 신도였지만 그가 통치했던 저지대지방에는 신교도가 많았다. 1520년 그는 루터교가 심각한 위험 요소라고 선언했고 3년 뒤 브뤼셀에서 개신교도를 화형에 처했다. 개신교의 첫 순교 사례다. 성경을 가지고만 있어도 처형을 당했다. 1556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왕위를 넘겨줄 때까지도 박해를 멈추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어도, 프랑스어도 하지 못했고 자비심도 없었다. 급기야 1566년 스페인의 박해와 기근에 시달리던 칼뱅파가 봉기해 성상(聖像) 수천 점의 얼굴을 부쉈다. 분노한 펠리페 2세는 알바 공 장군과 수천 명의 군대를 저지대에 보내 이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개신교도들은 암스테르담, 독일, 영국 동부 등으로 피신했다. 스페인의 진압이 거세지자 반란군도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때 추후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독이 된 오라녜 공 빌럼이란 리더가 등장한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 독일 지지자들이 보낸 자금을 토대로 반란군을 모집해 1568년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80년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시작이다. 처음엔 스페인이 유리했지만 서서히 전세가 역전된다. 1572년 빌럼은 개신교회의 전 수녀를 신부로 맞이하면서 개신교로 개종하고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종교 자유를 선언했다. 3년 뒤 월급을 받지 못한 수천 명의 스페인 군인이 나흘간 앤프워프를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들은 도시의 3분의 1을 초토화시켰고 수많은 여성을 강간했고 7000명을 죽였다. 이 사건이 반스페인 세력을 더욱 뭉치게 했다. 네덜란드 북부의 7개 수장들이 위트레흐트에서 만나 네덜란드 독립에 중요한 주춧돌이 된 연합주를 만드는 데 동의했고 2년 뒤 독립을 선언한다. 더 이상 스페인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1585년 영국은 스페인에 맞서는 공동 전선을 구축할 것을 맹세하는 조약에 사인하며 정식으로 네덜란드 반군과 연합했다. 이에 펠리페는 영국 침공 계획을 세운다. 2년간 준비를 끝내고 1588년 5월 무적함대 130척이 영국을 침범하기 위해 리스본에서 출항한다. 그런데 결국 대패하고 만다. 1만5000명이 죽고 60척의 배만 귀환한다. 이러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전쟁은 30년 전쟁으로 흡수된다. 네덜란드 반란군은 오렌지 공을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며 연달아 스페인을 물리치고 네덜란드 주요 남부도시를 손에 넣는다.

1648년이 되자 스페인은 북부 주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30년 종교전쟁을 끝낸 이들은 뮌스터조약과 베스트팔렌조약을 체결했다. 7개 주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남부지역은 여전히 스페인 관할에 있게 됐다. 전쟁의 부담에서 벗어난 연합주는 번창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상인과 탐험가는 먼 바다로 나가 제국의 영토 확장을 도왔다. 국내에선 해협공사를 하고 풍차를 세웠으며 습지의 물을 퍼내고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들었다. 유럽 최대항 앤트워프가 스페인에 넘어가자 많은 개신교도이 앤트워프를 탈출해 암스테르담 같은 좀 더 관용적인 지역으로 옮긴다. 예술가와 숙련된 장인들이 몰려오자 도시는 번창하기 시작한다. 스페인과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 최고의 해양국가로 발돋음하고 있었다.



무역 강국의 기틀

조선업자, 지도제작자, 항해사들은 기량이 뛰어났고 이들의 지식을 바탕으로 무역강국으로 올라섰다. 도해서, 지구본, 삼각측량법은 모두 저지대에서 태어났다. 네덜란드는 영국과 독일 사이에 위치하고, 주요 항로가 교차하는 긴 해안선을 가졌다. 북유럽에서는 와인을, 남쪽에서는 곡물을 수송해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 그러던 네덜란드가 미국 독립전쟁에서 독립군을 암암리에 지원했다는 것을 영국이 알게 됐고, 이를 계기로 1780년 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했다.

‘010=1.’

우리는 하나라는 슬로건이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스페인에서 네덜란드로 피신한 개신교도부터 황금시대 네덜란드에서 피난처와 보상을 찾았던 반란군 및 혁신자까지 네덜란드는 이민자의 나라다. 작은 나라 안에 이렇게 다양한 언어와 인종, 요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큰 변화는 60∼70년대 일어났다. 네덜란드는 노동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저소득국가의 방문노동자 고용을 장려했다. 모로코와 터키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다. 터키인과 모로코인들이 25만 명 이상이다. 80년대, 90년대는 유고슬라비아와 이라크, 소말리아 등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난민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90년대에는 셍겐조약으로 비자 없이 유럽에 들어올 수 있게 됐다. 현재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이민자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다. 로테르담은 46%가 이민자 출신이다.

이민 인구의 급속한 증가는 긴장감을 불러왔다. 문화적 차이가 긴장감을 더 높였다. 네덜란드 국가 정체성의 기반이 된 동성애자 권리와 양성평등을 증오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 이곳에 정착한 무슬림은 아직도 여성들은 공공장소에서 머리카락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에 따라 집단을 구분해왔고 각 종파는 정부로부터 학교 등 다양한 기관을 후원할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슬람 집단 역시 국가가 지원한 이 같은 후원금을 활용해 이슬람의 예배지도자인 이맘을 모셔왔다. 그 과정에서 온건파가 아닌 급진파 이맘이 네덜란드에 오게 됐다.

이런 급진파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이슬람인들은 현지인과 종종 충돌을 빚었다. 특히 모로코 사람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키고 있다. 이들의 실직 확률은 현지인에 비해 4배가 높다. 실제 네덜란드인들은 이들에 대한 반감이 높다.

핌 포르트완 같은 정치인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네덜란드에 거주 중인 1600만 명으로 충분하다. 그들이 전통적인 자유를 유지하고 싶다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는 공격적인 언어로 이슬람을 공격했다. 반대한 사람도 많지만 그 이상으로 매료된 사람들이 많았다. 인기는 엄청났다. 이민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위협을 받기도 했다. 때로는 성난 군중이 던진 파이에 맞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편협한 외국인을 쫓아내야만 네덜란드가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총리 1순위에 꼽혔다. 그러다 2002년 5월6일 총을 맞는다. 3세기 전 빌럼 오렌지 공 이후 암살당한 첫 정치인이 됐다. 석 달 동안 15만 명이 그의 무덤을 찾았다.

네덜란드 정부의 생각은 이렇다. “통합은 정부의 책임이 아닌 네덜란드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이들의 것이다. 이민자들은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네덜란드 사회에 대해 배울 책임이 있다.”

네덜란드에는 산이 없다. 탁 트인 땅뿐이다. 산도 없고, 동굴도 없다. 숨을 곳도 없고, 영혼의 어두운 이면도 없다. 그래서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늘 홍수와 싸운 것도 관용의 전통을 강화시켰다. 한 사람이 제방을 지키지 못하면 모두가 죽는다. 의사결정은 단독이 아닌 협의를 거쳐야 한다. 종교와 정치도 일조했다.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 외세의 침입에 시달렸던 네덜란드는 과도한 권위에 저항하는 성향을 갖게 됐다. 특히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투쟁하던 중 유럽 곳곳에서 박해받던 비주류를 품어주며 이들의 피난처가 됐다. 로크, 볼테르, 갈릴레오 같은 반체제 인사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네덜란드는 계몽사상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열린 사고의 국민

네덜란드 사람들은 복작거리는 걸 좋아한다. 도가 지나칠 정도로 사교적이다. 탁 트인 식당보다는 작은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을 좋아한다. 사람이 없는 카페보다는 사람들로 넘치는 카페를 좋아한다. 이렇게 지나치게 복잡한 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관용을 베풀거나, 미치거나 둘 중 하나다. 쉽게 말을 걸고 친해지는 게 네덜란드 문화이다. 그래서 네덜란드인은 사생활이나 고독을 존중하지 않는다. 공공장소에서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네덜란드는 복지천국이다. 실직한 네덜란드 남자가 정부에서 나온 수당을 갖고 정기적으로 매춘부를 찾았다는 보도까지 있다. 1주일에 27시간 미만으로 근무한다. 성인 중 반은 풀타임이 아닌 알바 형식으로 근무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일주일에 32시간을 정규직으로 일하는데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라곤 한다. 그럼 취미생활은 언제 하느냐는 것이다. 네덜란드인에게 정부는 주기적으로 용돈을 주고 자녀를 돌봐주는 다정한 삼촌 같은 존재다. 한결같이 정부를 좋아한다. 월급의 절반 정도를 세금으로 내고 상당 부분은 건강보험료로 낸다. 세금을 내고 나면 월급의 3분의 1 정도만 남는다.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낸다. 세금으로 많은 돈을 가져가지만 그만큼 많은 것들을 내 통장에 다시 돌려주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는 살인, 이혼, 혼외자식 출생이 적다. 대부분 부유하고, 건강하고, 자기 집을 갖고 있다. 일을 적게 하고 수명도 길다. 아이를 키우기에 가장 좋은 나라로 선정되기도 했다. 노숙자도 거의 없다. 도시는 안전하고, 사람들은 관대하고 예의 바르다.

마약을 파는 커피숍이 있지만 마약을 광고하지는 않는다. 청소년에게 판매하지 않고, 대량 판매도 하지 않는다. 또 강한 마약은 판매하지 않는다는 가이드라인을 엄수한다. 마약의 복용 여부는 정부가 아닌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기에 마약을 허용하는 것이다. 마약 복용 자체를 금지하는 대신 마약 오남용으로 인한 폐해를 줄이는 게 정부의 목표다. 대마초를 구하기는 쉽지만 남용이 적다. 흡입 경험이 있는 인구비율은 마약을 금지하는 미국이나 영국보다도 낮다. 무척 자유로워 보이지만 이 나라는 사소한 규칙을 중시한다. 속도와 신호등은 무조건 지킨다. 경찰을 무서워하며 정부를 존중한다.

안락사는 처벌받지 않지만 왕을 경멸하는 말을 하면 감옥에 갈 수 있다. 매춘부는 자유롭게 성을 팔지만 자기 집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는 것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 회사에 병가를 신청하면 그가 정말 아픈지 확인하는 검사관이 발 빠르게 그 집을 방문한다. 청어 파는 사람이 공식적인 청어철 전에 장사를 개시하면 벌금형에 처해진다. 또 애완견도 기차를 타려면 표를 사야 한다.

검문 등이 많기에 신분증 역시 반드시 소지하고 다녀야 한다. 태평하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상당히 보수적이고 체제 순응적인 셈이다. 명령과 협조, 규율이 필수적이다. 또 이에 대해 의무감도 강하다. 문제점도 있다. 마약 관광객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들 때문에 심각한 교통체증까지 일어난다. 암스테르담을 찾는 500만 관광객 중 3분의 1은 커피숍을 방문하기 위해 이 나라를 찾는다. 이곳에서 수출하는 마약은 화훼 수출량을 앞지른다.

네덜란드는 자유의 나라다. 매춘부마저 병가를 낼 수 있고 포주는 정부에 근로소득세를 감면해달라고 로비도 한다. 매춘금지법은 이미 모두 폐지됐다. 최초로 성인의 자발적 매춘을 일반 직업으로 인정한 나라이기도 하다. 포주들은 노동법을 준수해야 하고 대신 세금을 낸다. 이러한 양성화 정책에 따라 암스테르담에만 2만5000여 명의 매춘부가 있다.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과 입양이 합법화된 것은 10년이 넘었고 전 국민의 95%가 총리가 동성애자라도 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전체 경찰 숫자는 뉴욕의 경찰 숫자보다 적고, 수감자가 너무 적어 교도소 몇 군데를 폐쇄할 예정이다. 군인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다.

이들은 죽을 권리를 중요시한다. 2001년 다른 합리적인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서 환자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끝내주는 의사를 처벌하지 않도록 형법을 개정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살, 즉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2013년 한 해 동안 5000명 정도가 안락사했다. 환자의 요청에 따라 생명을 종료하는 행위는 바람직한 고통 완화 처치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네덜란드에 2차 세계대전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나치는 작은 나라 네덜란드를 침공해 점령했다. 네덜란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 후 나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전쟁이 네덜란드에 가져온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전체 인구 대비 전쟁으로 사망한 네덜란드 인구 비율은 유럽 다른 나라보다 훨씬 높았다.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 유대인보다 훨씬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래서 네덜란드인은 독일인을 싫어한다. 언론에는 이런 기사까지 실릴 정도다. “우리가 생각하는 독일은 1945년 4월 이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외국인을 차별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 관대한 네덜란드인이지만 독일인에게는 그렇게 해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죠.” 네덜란드인들은 과시적 소비에 얼굴을 찡그린다. 레스토랑에서 팁을 주는 행동을 퇴폐적인 행위로 여기고, 현금인출기에서 찾을 수 있는 금액은 엄격히 제한된다. 네덜란드어로 빚이란 뜻의 슐드(schuld)는 ‘죄’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릇에 묻어 있는 머스터드나 마요네즈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쓸어 담는 데 쓰이는 긴 손잡이의 플라스틱 주걱이 탄생한 곳도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역사적으로 독일, 프랑스, 영국 등 강대국 사이에 껴서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 또한 독립을 위해 오랫동안 투쟁을 해야만 했다. 환경적으로도 최악이다. 저지대 국가이기 때문에 자연과도 투쟁을 해야 했다. 이들은 이를 승화시켜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었다.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신뢰성이 높아 다른 어느 나라보다 잘 성장하고 삶의 질이 높다. 우리가 벤치마킹할 부분에 대해 곱씹어 볼 만할 것 같다.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kthan@assist.ac.kr

필자는 서울대 섬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크론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핀란드 헬싱키경제경영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대우자동차 이사, IBS컨설팅그룹 상무,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 교수 등을 역임했다.
  • 한근태 한근태 | - (현) 한스컨설팅 대표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 교수
    - 대우자동차 이사 IBS 컨설팅 그룹 상무
    -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kthan@ass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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