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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Philosophy

천진난만함이 아닌 비애, 그것이 모차르트의 음악을 만들었다

박영욱 | 221호 (2017년 3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에서 주인공은 심심풀이로 말놀이를 한다. 명사를 비극 명사와 희극 명사로 나누는 놀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희극 명사란 무엇인가. 한 치의 화성적 균열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희극 명사’일 것 같은 모차르트의 음악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완전체 속에도 순간적인 덧없음의 조짐이 나타나 있다. 바니타스와 비애극은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삶 자체도 공허하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현실에서 모든 장식을 걷어내 버리면 모든 명사는 결국 ‘비극 명사’가 될지도 모른다.


편집자주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공유점을 포착해 철학사상을 감각적인 예술적 형상으로 풀어내온 박영욱 교수가 DBR에 ‘Art & Philosophy’ 코너를 연재합니다. 철학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코미 명사’란 존재하는가?

대부분 유럽의 언어에는 명사가 성으로 나뉜다. 독일어처럼 여성, 남성, 중성 명사로 나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 여성 명사와 남성 명사로 구분된다. 우리말에 이런 구분이 없어서인지 우리에게는 명사를 성으로 구분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 구분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심지어 같은 의미의 단어라 하더라도 언어에 따라서 명사의 성이 다른 경우도 허다하다. 가령 프랑스어에서 태양은 ‘soleil’로 남성 명사인데 독일어로는 ‘Sonne’로 여성 명사이다. 이렇게 같은 뜻을 지닌 단어조차 성이 제각기 다르니 여성 명사와 남성 명사를 구분할 명확한 기준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어떤 관습적 계기에 의해서 임의로 구분됐다고 추측할 따름이다.

여기서 한번 엉뚱한 상상을 발휘해보자. 명사를 성에 의해서 구분하지 않고 다른 식으로 구분해보면 어떨까?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의 자전적 소설인 <인간실격>에서 주인공 요조는 선배 호리키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심심풀이로 자신들만의 말놀이를 한다. 그들은 유럽 언어가 명사를 여성과 남성 명사로 나누는 것으로부터 착안해 명사를 ‘코미 명사’와 ‘트라 명사’로 나눈다. 여기서 코미란 희극을 뜻하는 코미디(comedy)에서 따온 것이며, 트라는 그 반대인 비극을 뜻하는 트래지디(tragedy)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명사를 희극 명사와 비극 명사로 나누는 말놀이를 한다. 한 사람이 먼저 단어를 제시하면 다른 사람이 그 단어가 코미 명사인지, 트라 명사인지를 맞추는 것이다. 출제자는 상대방의 답이 틀렸을 경우 왜 그런지에 대한 답을 해줘야 한다. 자신이 제시한 단어의 성이 왜 트라 명사인지, 혹은 코미 명사인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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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와 호리키처럼 우리도 말놀이를 해보자. 소풍은 트라 명사일까, 코미 명사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미 명사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난이도를 높여보자. 시계는 트라 명사일까, 아니면 코미 명사일까? 지금 필자에게 시계는 코미 명사이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 시계를 들여다본다. 시계의 분침이 몇 바퀴를 돌고 시침이 90도 각도를 움직이면 글쓰기의 업무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맥주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당수는 필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시계는 우리를 늙음과 죽음의 순간으로 이끄는 잔인한 세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더 어려운 문제를 내보자. 사랑은? 그것을 막 시작한 사람에겐 환희와 기쁨일 수도 있고, 심지어 아픔마저도 달콤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겪고 난 사람에게 하나의 덧없는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사랑은 코미 명사에서 트라 명사가 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풀어보자. 코미디(희극)는 코미 명사일까, 아니면 트라 명사일까? 만약 코미디가 코미 명사가 아닌 트라 명사라면 그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일이 아닐까? 이 세상에 희극은 존재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야말로 코미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차르트 음악을 관통하는 것은

천진난만함이 아닌 비애

빈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인 모차르트하우스는 모차르트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집은 아니다. 1784년부터 1787년까지 3년도 채 살지 않았지만 이 집에 거주하던 때 그는 삶에서나, 음악에서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빈 시내의 한복판에 있는 이 집은 당시 부유한 여느 귀족 집안 못지않게 화려하며, 지금까지 보존된 당시의 가구나 장식은 모차르트의 풍족한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생에서 가장 부유하고 행복한 시기를 보내던 모차르트는 이곳에서 그 유명한 ‘피가로의 결혼’을 비롯해 그에게 명성을 안긴 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집 안에는 모차르트가 음악 다음으로 애착을 지녔던 당구대도 놓여 있다. 이 당시 모차르트는 항상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유복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집 안 전체의 화려하고도 활기찬 분위기와 달리 작업실은 한적하고도 고요한 느낌을 준다. 그의 작업 공간에는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있었는데 그는 작업을 할 때면 항상 창밖을 내다봤다.

그가 내다 본 창밖의 풍경은 다소 의외의 모습이다. 창밖으로는 주택가의 좁은 골목길이 일직선으로 쭉 이어진다. 빼곡히 들어선 집들 사이로 난 그저 텅 빈 골목의 풍경이 전부다. 골목의 풍경은 화려한 모차르트의 집안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외롭고도 쓸쓸함을 자아낸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내면은 떠들썩하고 축제와도 같은 집안 내부의 모습과 닮아 있을까, 아니면 자신의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텅 빈 골목과도 같은 쓸쓸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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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개 모차르트 음악을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하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음악으로 간주한다. 요조의 말놀이에 따르면 모차르트의 음악은 코미 명사인 셈이다. 반면 베토벤의 음악은 이와 정반대 극에 있는 고뇌와 슬픔, 비탄을 대변하는 트라 명사다.

그러나 모차르트 음악과 베토벤 음악에 대한 코미와 트라 명사라는 이 단순한 이분법적 적용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는 모차르트가 바로 이 집에서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4번(K.457)은 몇 안 되는 단조 소나타 중 하나다.1 모차르트가 가장 화려하고 행복한 시기에 작곡한 C단조의 이 곡 앞부분은 흥미롭게도 베토벤의 잘 알려진 소나타 중 한 부분을 연상시킨다. (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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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두 곡이 구조적으로 유사함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둘 다 같은 C단조이며, 왼손은 팔분음표가 한 옥타브의 간격으로 계속 반복되고 있다. 오른손의 멜로디 역시 점진적인 상승과 하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매우 흡사하다. 실제로 듣기에도 분명한 유사성이 느껴진다. 참고로 모차르트에게 C단조는 이 곡이나 미사곡 정도에만 쓰일 정도로 예외적인 것이지만 베토벤의 경우엔 C단조가 ‘가장 베토벤스러운 조’라고 불릴 만큼 베토벤의 음악적 분위기를 대변했다.

물론 모차르트의 이 피아노 소나타에는 모차르트만의 천진난만하고 자유분방하면서도 낙관적인 아름다움이 여전히 배어 있다. 조금 전문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살짝 꺼내보자. 악보에 나타난 오른손 멜로디를 보면 모차르트의 반음 진행이 잘 드러난다. 가령 멜로디 성부(상단 부분)의 두 번째 마디 중 밑에 음이 F#, F, E, Eb으로 반음씩 하강하는 것이나, 셋째 마디 마지막 음부터 다섯째 마디 첫 음까지 G, F#, F, E, Eb, D로 반음씩 하강하는 것은 모두 모차르트 특유의 반음 진행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반음 진행 자체가 모차르트다운 것은 아니다. 반음 전개의 경우 화음이나 조성으로부터 일탈하기 쉬운데 모차르트의 경우 이러한 반음 진행 가운데서도 조성이나 화음이 항상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자유분방한 듯하면서도 항상 안정감과 조화,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전망을 준다.



동시에 이 곡은 모차르트스러운 낙관이 사실상 베토벤의 비애와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음을 보여준다. <그림 1>의 다섯 번째 마디(실제로 이 곡의 13마디에 해당) 멜로디 성부의 경우 G에서 반음씩 내려온 진행은 형식적으로 보면 C음에서 멈춘다. 왜냐하면 C음은 C단조의 으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멜로디는 C음에서 일시적으로도 종지되지 않고 더 나아가 반음 아래인 B음으로 미끄러지며 불안감을 계속 유지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이루는 부분적인 완전체들이 언젠가는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 일시적 신기루에 불과한 것임을 읽어낼 수 있다.

어쩌면 이 부분적인 하나 사례만 가지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판단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베토벤의 비애스러운 음악이 모차르트 음악에 내재한 낙관성을 끊임없이 내몰고 간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모차르트 음악의 낙관주의 속에는 이미 비애와 절망이 근원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일지 모른다. 어떠한 화성적 균열도 보이지 않는 그의 음악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완전체 속에도 이미 순간적인 덧없음의 조짐이 나타나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아무 근심 없는 그 천진난만한 순간이 인생에서 얼마나 짧고 덧없는 것인지도 보여준다. 그의 음악은 알고 보면 ‘코미 명사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바니타스(Vanitas),

죽음의 경구가 아닌 현실 자체의 이미지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팽창하던 17세기 유럽에서는 흥미롭게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그림이 유행했다.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발생한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가 바로 그것이다. 바니타스란 라틴어로 헛됨, 허무함을 나타내는 명사로서 오늘날 영어의 ‘vanity’에 해당하는 단어다. 일반적인 정물화가 꽃이나 과일 등 정물이 지닌 아름다움과 영속성에 관심을 뒀다면 바니타스 정물화는 정반대의 양상을 표현했다. 바니타스의 대표적인 주제는 시든 꽃이나 썩은 과일, 해골 등으로 보통의 정물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정물의 아름다움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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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니타스 정물화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하르멘 스텐비크(Harmen Steenwyck)의 그림은 그 같은 특징을 잘 드러낸다. 이 그림에 나타난 탁자 위의 정물들이 지닌 의미는 매우 대조적이다. 책은 눈부신 세계를 창조한 인간의 지식을 나타내며, 항아리는 고대 문명을, 소라는 해상무역을 통한 부를 나타내며, 피리나 나팔과 같은 악기는 세속적인 즐거움을 상징한다. 그러나 시계나 램프는 순간의 덧없음을 나타내며 해골은 인생의 무상함을 나타낸다. 바니타스의 이러한 대조는 일종의 교훈을 위한 것으로 이해됐다. 실제로 당시 유럽 최고의 부를 누리던 네덜란드 해상들은 전통적인 정물화뿐만 아니라 바니타스 정물화를 많이들 수집했다. 그들이 이 끔찍한 그림을 집에다가 걸어둔 것은 그림이 주는 미적 쾌감이나 변태적 취향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이 돈에 눈이 먼 속물 부르주아가 아닌 세속적 부가 지닌 허망함을 잘 알고 있는 경건한 인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그림을 집에 걸어 둔 것이다.

그러나 바니타스는 부르주아들의 탐욕을 감추기 위한 교훈적 알리바이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니타스는 교훈적 메시지가 아닌 현실 자체를 보여준다. 바니타스에 흥미를 느끼고 그것에 눈이 가는 이유는 우리가 현실에서 잊지 말아야 할 뜨끔한 교훈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바니타스 그림에 펼쳐진 모습 자체가 우리가 다소 감당하기 어렵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현실 자체의 모습을 보는 데 익숙하지 않다. 현실은 매우 낯설고 이질적이다. 셰프가 정성껏 만든 음식은 그 자체로 예술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위와 창자를 통과한 모습은 드라마 ‘CSI’에서 부검의가 몸속에서 꺼내 보여주는 것처럼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배설물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바니타스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현실의 덧없음 앞에서 경건해지라는 문구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덧없다는 것 자체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바니타스의 해골은 우리가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삶에 경건해야 한다는 교훈이 아닌 우리 자신의 실상이 해골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바니타스의 끔찍한 장면에 눈이 머무는 것은 그러한 비극이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바니타스는 우리가 현실에서 꾸며낸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제거해 버린 적나라한 현실 자체를 보여준다.



현실은 비극이 아닌 비애극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비극(Tragödie)’과 ‘비애극(Trauerspiel)’을 구별했다. 비극이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희곡의 한 장르로서 희극(comedy)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비극’이라는 개념과 자신이 생각하는 비극이라는 개념을 구분 짓기 위해서 ‘비애극’이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했다. 영어권에서는 벤야민의 ‘비애극’을 ‘tragic drama’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비애극은 말 그대로 비극적인 드라마를 뜻한다. 벤야민은 1924년 자신의 교수자격 논문으로 쓴 ‘독일 비애극의 원천(Ursprung des Deutchen Trauerspiels)’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비애극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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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비애극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 우선 비애극을 전통적인 비극의 개념과 구분했다. 비극은 교훈적인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비극 하면 떠오르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만 보더라도 이러한 특징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가령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만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는 인간은 신과 운명 앞에 복종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혹은 프로이트식 관점에서 보자면 근친상간 금지라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규범을 어길 경우 끔찍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기본적인 도덕적 규율을 준수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 비극이란 인간의 교만이 초래한 형벌인 것이다.

벤야민은 이런 교훈적인 훈시를 담은 전통적인 비극과 다른 비극의 모습을 독일의 바로크 드라마에서 찾아낸다. 독일의 바로크 드라마는 우리식으로 하자면 마치 막장 드라마처럼 등장인물들이 복수와 치정관계로 얽혀 있다. 그러니 당시의 지적 풍토로 볼 때 당연히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전통적인 문학적 기준에서 볼 때 얼토당토않은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뒤섞여 도대체 희극인지, 비극인지조차 구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독창적이고도 천재적인 사상가들이 늘 그러하듯이 벤야민은 바로 이 싸구려 막장 드라마에서 새로운 진리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가 이 막장 대중물의 성격을 지닌 바로크 드라마에서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삶의 덧없음 자체다. 진지하지만 어리석기 그지없는 인물의 비일관적인 태도, 예상치 못한 사건들의 연속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들이야말로 삶과 현실이 보여주는 덧없음이었다.

벤야민은 이러한 독일 바로크 드라마를 전통적인 의미에서 비극이라고 부를 수 없었기 때문에 ‘비애극’이라고 불렀다. 비극과 비애극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이것이다. 비극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나 자연적 섭리를 어겼을 경우 발생하는 처벌을 담고 있다면 비애극은 현실에서 도리나 자연적 섭리 따위란 아무런 기능을 하지도 못할뿐더러 그 자체로 공허함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현실이란 공허하며 인간의 삶은 일관적이지도 못하다. 바로크 비애극의 주인공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우유부단하며 일관성도 결여돼 있다. 심지어 드라마 ‘헤롯’의 경우에는 그가 일관되게 악인으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자면 헤롯은 악인이지만 예수를 유대민족의 반역자로 봤던 유대인들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는 유대교를 위해서 예수를 처형하는 결단을 내리지도 못했다. 그의 모든 행동은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인간의 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벤야민의 비애극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덧없음 혹은 비일관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교훈적인 비극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점에서 그의 비애극은 바니타스가 보여주는 것과 흡사하다. 바니타스의 의미가 죽음을 상기함으로써 삶에 대해서 더 진지해져야 한다는 교훈에 있는 것이 아니듯이 비애극의 의미 또한 삶을 허무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교훈의 메시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삶 자체도 공허하고 무의미하며 덧없다. 바로 이러한 현실을 현실로서 드러내는 예술이 바니타스이자 비애극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면 바니타스와 비애극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코미 명사와 트라 명사의 구분이 불가능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명사는 근본적으로 트라 명사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imago1031@hanmail.net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현대음악과 미술, 미디어아트, 건축디자인 등 구체화된 예술 형식에 주목해 철학 사상을 풀어내는 데 주력해왔다. 저서로는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등이 있다.
  • 박영욱 박영욱 | - (현)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저서
    -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저서
    imago103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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