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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천민출신의 모친 콘플렉스 영조, 보편적 해결로 신분문제 풀었다.

노혜경 | 208호 (2016년 9월 lssue 1)

Article at a Glance

조선시대에 어머니가 후궁 출신인 왕이 꽤 있지만 영조처럼 모친이 미천한 경우는 드물었다. 이것은 영조에게 심한 콤플렉스가 됐다. 하지만 영조는 이런 콤플렉스를 자신만이 겪는 고통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후궁 대우 개선책을 법제화했다. 자신의 모친인 숙빈 최씨처럼 후궁의 신분에서 왕을 배출한 경우, 그에 대한 예우로 사당과 무덤을 격상시키고 그 제사를 국가의례로 공식화한 것이다. 후궁 대우 개선책을 세우고 법으로 만든 것이 정치적인 결단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조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들의 고통을 자신이 해결하는 데에서 왕으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려 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심리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감정적 관념, 욕망, 기억 등이 현실에서의 행동이나 지각에 나타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유명 인물들의 콤플렉스 때문에 여러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그 여파가 역사를 바꿀 정도로 파급 효과가 큰 경우도 볼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만큼 부모의 신분, 특히 어머니의 신분이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했고, 이것이 크나큰 콤플렉스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왕실 친척과 의정부 사이의 분쟁

1733(영조 9) 115일의 일이다. 영조와 대신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왕실 친척과 의정부 사이의 분쟁 때문이었다. 사건은 왕실 친척인 해흥군(海興君) 이강(李?)이 고관들의 회의 장소였던 빈청(賓廳)에 난데없이 들어와 대신의 좌석에 자리를 잡자, 의정부에서는아랫사람이 윗전을 잘못 인도했다며 종친부 서리를 잡아가둔 데서 시작됐다. 이강의 동생은 형의 복수를 하겠다며 오히려 의정부의 서리를 잡아가뒀다.

 

원래 빈청은 대신들만의 회의실이었기 때문에 종친이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왕실 친척을 직접 처벌하지 않고 대신 종친부 서리를 가둔 것인데, 오히려 의정부 서리를 다시 가두는 것으로 보복하는 것은 엄연히 종친의 권력 남용이라고 볼 수 있다. 삼정승들은 모두이강이 의정부를 모욕했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영조는 용서하자고 했다. 영조는 이강의 종을 가두는 것 정도는 괜찮지만 종친부 서리를 바로 가두는 것이 문제가 있었다며 서로 양보해서 덮자고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영조는 늘 자신이 신임하고 있던 박문수를 쳐다보며 자신을 좀 도와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박문수는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의정부 편을 들면서 종친들의 행태를 비난했다. 순간 영조가 폭발해 버렸다. “너희들이 내가 왕자로 들어와서 이 자리를 차지했다고 종친까지 멸시하느냐며 영조는 책상을 마구 두드리며 부들부들 떨더니 당장 박문수를 유배 보내라고 소리쳤다. 정승들은 너무 놀라 말 한마디 못하고 허둥지둥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실제로 대신들의 행동이 너무한 것도 아니었다. 사고를 친 종친을 두고 왕과 대신이 티격태격하는 것은 조선시대에 수백 번도 더 벌어진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내가 세자가 아닌 왕자 츨신 왕이라서 나를 무시하느냐는 말도 이상하다. 왕자 신분에서 세자로 선택되고, 그 이후 세자가 왕이 되는 것은 정상적인 순서다. 영조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다른 뜻이 있었다. 왕자인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떤 어머니의 아들이었느냐가 문제였던 것이다.

 

천민 출신 숙빈 최씨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었다고 해서 흔히최 무수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무수리는 궁궐에서 필요한 물을 떠다주고 허드렛일을 하는 천인을 말한다. 그러나 최씨가 무수리 출신이었다는 증거는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한중록>을 보면 최씨가 침선방에서 일했다는 기록이 있다. 침선방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의복을 바느질하는 곳인데, 영조가 침선방에서 일했던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해서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무수리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침선방에서 바느질하는 일에 직접 종사했던 궁녀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무수리들은 천인 출신이 많았는데, 궁녀라고 다 천인 출신은 아니었다. 그래서 최씨가 노비 출신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최소한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숙빈 최씨는 서학동 여경방에 살았는데 이곳은 지금의 태평로 주변이다. 1761(영조 37)에 영조는 숙빈 최씨가 살았던 집을 찾아서 국가 유적으로 보존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자신이 직접 쓴 현판을 들고 집을 방문했는데, 당시 그 집에는 백모라는 천민이 살고 있었다. 영조는 그 사람을 면천시켜줬고, 그 집에다 현판을 걸었다. 천민이 다 가난한 것은 아니지만 천민이 살고 있었다는 내용을 보면 이 집이 작고 천민에 가까운 가난한 사람이 살던 집이었다고 추정할 수는 있다.

 

 

조선시대에 어머니가 후궁 출신인 왕이 꽤 있지만 영조처럼 모친이 미천한 경우는 드물었다.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도 사대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유하고 유명한 역관집안 출신이었다. 최씨와는 확실히 격이 달랐다. 이것이 영조에게 심한 콤플렉스가 돼 이런 식으로 갑자기 튀어 나오곤 했던 것이다. 이런 콤플렉스는 비단 영조의 자격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조 뒤에서 많이들 비아냥거렸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영조의 며느리였던 혜경궁 홍씨도 남편인 사도세자와 부부 싸움을 하다가 우리 아버지는 과거급제자 출신인데, 당신 외가에는 급제자도 없지 않으냐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모친 영빈(英嬪) 이씨도 하필 궁녀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는 정치적으로도 큰 핸디캡이 됐다.

 

영조는 즉위 과정에서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경종의 이복 동생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치싸움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거기다가 경종의 독살설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서 집권 내내 언제라도 반란과 정변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늘 가지고 살아야 했다.

 

참다못한 영조는 돌아가신 모친의 사당과 무덤의 격을 높이는 작업을 단행했다. 숙빈 최씨의 사당을 육상궁(毓祥宮)으로, 무덤은 소녕원(昭寧園)으로 승격시켰다. 당연히 여기에 따르는 제사의 격도 높아져서 국가 제사로 올렸다. 그래서 왕인 영조가 공식적으로 직접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조의 콤플렉스 해결 방식

일반적으로 이런 영조의 행동이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이었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도움이 됐던 걸까? 신하들이 보기에는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다. 그리고 이 시대는 신하들이 왕이라고 봐주는 것도 없다. 숙빈 최씨의 사당과 무덤의 격을 높인 뒤에도 영조는 모친을 더 추존하려고, 책봉이나 시호를 추증할 때 쓰는 죽책문(竹冊文)을 대제학 조관빈에게 쓰게 했다. 그러나 조관빈은죽책은 옥책(玉冊)에 비해 격은 떨어지지만 책문이란 자체가 정식 비빈(妃嬪)이 아니면 불가합니다라며 책문 짓기를 거부했다. 화가 난 영조는 조관빈을 파면시켜버렸지만 그런다고 없던 존경심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콤플렉스는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왕도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콤플렉스를 자신의 특수한 문제라고 생각할 때 터지기 쉽다. 리더도 이런 콤플렉스를 겪는다. 일반인들은 왕이나 리더를 부러워하고 콤플렉스라는 것 자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더 크다. 콤플렉스 때문에 더 많은 고통을 받고, 자신의 문제를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탓을 하게 된다. 바로 자신만이 특수하고 특별한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리더는 더 큰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감정적으로 자신을 격리시키면 이성과 판단도 독선으로 빠지기 마련이다. 그럼 영조는 이 콤플렉스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영조는 이런 콤플렉스를 자신만이 겪는 고통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물론 실제로는 유일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무수리 어머니 밑에서 왕이 된 유일한 왕이었으니 특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고통은 아니라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바로 후궁 대우 개선책을 법제화한 것이다. 숙빈 최씨처럼 후궁의 신분에서 왕을 배출한 생모에 대한 예우로 사당과 무덤을 격상시키고 그 제사를 국가 의례로 공식화한 것이다.

 

영조 정도의 위치라면 자신의 어머니를 예우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단행한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쉽게 토를 달 수 없다. 마음만 먹으면 그야말로 자신의 권력으로 누를 수 있는 위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자기 혼자만의 콤플렉스 해결이 아닌 오히려 자신의 콤플렉스를 드러내놓고 보편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후궁 대우 개선책을 세우고 법으로 만든 것이 정치적인 결단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조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들의 고통을 자신이 해결하는 데에서 왕으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다했다.

 

후궁 대우 개선책은궁원(宮園)제도라는 독특한 왕실 문화를 만들었다. 원래 사친(私親·후궁의 서자나 방계에서 올라온 왕의 생부와 생모)은 공식적으로 종묘와 능에 모시지 못했지만, 영조가 만든 궁원제도를 통해 생부와 생모의 품계를 높이고 혼을 별궁(別宮)에 모시는 것은 물로 묘()를 원()으로 격상시킬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숙빈 최씨 외에도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元宗)의 생모였던 인빈(仁嬪) 김씨, 영조의 후궁이자 정조의 법적 아버지 효장세자의 생모였던 정빈(靖嬪) 이씨, 순조의 생모였던 수빈(綏嬪) 박씨, 영친왕의 생모 순비(淳妃) 엄씨(嚴氏) 등이 격상됐다. 특히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 또한 이 제도의 영향으로 무덤을 현륭원(顯隆園·고종 대 융릉으로 승격됨)으로 올리고, 더불어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英嬪) 이씨도 격상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영조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개인의 문제이고 특수한 사례라고 변명하거나 탓하지 않고 보편화시켜 법제화로 해결했다. 홀로 고통받고 있는 특별한 사람에서 고통받는 여러 사람 중의 하나로 확대했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포용했다. 또 영조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정의내리고 증명했다. 영조가 보여준 콤플렉스 해결 방식 속에서 우리는 리더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노혜경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hkroh68@hotmail.com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한국사학)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을 지냈고 덕성여대 연구교수로 활동했다. 저서로 <영조어제해제6>이 있다.

 

  • 노혜경 | - (현)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 덕성여대 연구교수
    - <영조어제해제6> 저자
    hkroh6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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