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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 朝鮮 : 공법개혁

여론조사+레드팀+커뮤니케이션 세종, 소통의 리더십으로 토지稅 개혁

김준태 | 207호 (2016년 8월 lssue 2)

‘여론조사 + 레드팀 + 커뮤니케이션

세종, 소통의 리더십으로 토지 개혁

 

Article at a Glance

답험손실법 문제점과 공법의 도입 필요성

- 답험손실법은 농사가 평년작 미만일 경우 그손실의 정도를 10단계로 구분해 1단계마다 세금을 10분의 1씩 감면하는 제도. 좋은 취지와 달리 실무자의 지나친 재량권으로 인해 부정부패가 생기고,고의로 손실을 축소시켜 소작료를 더 받는 등의 폐해가 발생.

- 공법은 경작된 토지의 10분의 1에서 나온 소출을 세금으로 내게 하는 제도. 여러 해의 수확을 평균내서 세액을 산정. 편리하고 조작과 부정부패 여지가 적으나 풍년인지, 흉년인지에 따라 유연하게 세액을 조정하기 어려워지는 문제가 있음.

리더(세종)의 선택

- 여론조사, 토론과 학습을 통해 공법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장치 마련.

- 황희가 이끄는레드팀의 비판의견 적극 수용.

- 테스트베드를 엄밀하게 선정해실험에 들어간 뒤 이를 기반으로 정책 적용.

 

 

 

 

편집자주

조선에서 왕이 한 말과 행동은 거의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여러 가지 기록 중 비즈니스 리더들이 특히 주목해봐야 할 것은 바로 어떤 정책이 발의되고 토론돼 결정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왕과 마찬가지로 기업을 이끄는 리더들 역시 고민하고 판단하며 결정을 내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해당 정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알 수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면밀히 성공과 실패의 요인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정통한 연구자인 김준태 작가가 연재하는 ‘Case Study 朝鮮에서 현대 비즈니스에 주는 교훈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찬성하는 사람은 98657명이며 반대하는 사람은 74149

입니다.”

 

세종 12 810, 호조(戶曹)는 전국적으로 실시한 공법(貢法) 찬반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총 응답자는 172806. 당시 인구가 약 6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만큼 전 국민의 3% 가까이가 참여한 셈이다. 더욱이 각 도와 군현별로 조사대상자 수를 일정하게 배분했고 고을 수령에서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천민을 제외한 전 계층을 참여시켰다. 오늘날의 여론조사와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대체공법이 무엇이기에 세종은 이처럼 광범위한 작업을 진행시켰을까? 조정에서 그냥 결정하고 시행하면 될 일을 왜 굳이 번거롭게 백성들로부터 일일이 의견을 청취한 것일까?

 

공법이란 토지조세제도로서 소유한 토지 11 당 세금을 얼마나, 또 어떻게 부과할 것이냐를 담고 있다. 토지가 유일한 생산수단이나 다름없었던 전통사회에서 토지조세는 개인이 부담하는 재산세이자 소득세의 모든 것이었고 국가로서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세원(稅源)이었다.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1. 문제인식

 

이 공법이 등장하게 된 것은 그때까지의 토지조세제도였던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이 가진 문제점 때문이었다. 답험손실법은 농사가 평년작 미만일 경우 그손실의 정도를 10단계로 구분해 1단계마다 세금을 10분의 1씩 감면해준다. 매년 백성의 실제 농사 소출 실적에 따라 세금을 부과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이지만 손실을 파악하기 위한 농지실지조사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 현장에 나가 답험을 담당하는 실무자에게 지나친 재량권을 주다보니 부정이 개입될 소지가 컸다. 담당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둘째, 사전(私田, 민간소유 토지)의 답험을 토지소유자에게 자율로 맡기다 보니 그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들이 피해를 입었다. 흉년이 들었어도 소작료를 비싸게 받기 위해 고의로 손실을 축소시키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이에 세종은공전과 사전 모두 나라의 땅이니 수확 실태를 현장 조사함에 있어 그 방법이 달라서는 안 될 것이다2 라며 사전도 관청에서 답험하라고 지시한다. 답험 담당자의 재량권 일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관리들이 밭머리에서 답험할 때, 경작자에게 종이 한 장에다 실제 수확을 기록한 부본을 내어주어 확인하게 하고 만일 부과되는 전세가 이와 차이가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가지고 수령에게 고하여 바로잡게 하도록 하자3 는 호조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조세징수절차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징세자의 사적인 개입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답험손실법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조세의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는 새로운 제도 도입을 모색하는데, 그것이 바로 고대 중국의 토지조세제도였던공법이다.

 

 

 

2. 해결 방안의 대립

 

<맹자>에 따르면 이 공법은 백성에게 분배된 토지 중 10분의 1에 해당하는 면적에서 나오는 소출을 세금으로 징수하는 제도다.4 그런데 매년 실제 소출을 확인해서 세금을 무는 것이 아니고 여러 해의 수확을 평균을 내어 결정한다. 내야 할 세액이 고정돼 있다는 점에서 납세자와 징세자 모두에게 편리한 점이 있지만, 가령 흉년이 드는 해에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맹자는()은 몇 년의 중간치를 비교하여 일정한 수를 내게 하는 것이다. 풍년에는 곡식이 넘쳐나서 많이 취하여도 포악함이 되지 않는 데도 적게 취하고, 흉년에는 토지의 곡식이 씨앗을 뿌려 가꾸기에도 부족한데 반드시 일정액을 채운다5 용자(龍子)’의 말을 인용, 공법의 단점을 지적한 바 있다. 백성의 담세능력을 반영하지 못하고 탄력적인 조세운용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종도 이러한 문제를 인지했지만 정액세를 시행하고자 하는 기조를 바꾸지는 않았다. 공법의 장점이 단점을 상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법을 반대하는 쪽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에게는 조세의 확실성보다 조세평등과 실질 과세의 원칙이 더 중요했다. 답험손실법의 장점이 단점보다 크다고 본 것이다. 황희는 매년 추수 때마다 농사의 풍작과 흉작 여부를 살펴 3등급으로 구분하고 여기에 맞춰 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주관부처 장관인 호조판서 안순도 여기에 동의하는데 사실상 답험손실법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3. 리더의 결단과 찬반의견 수렴

 

이처럼 서로 다른 대안이 대립하는 가운데 세종은 공법 시행을 결단한다. 더 이상의 논쟁은 소모적이라고 판단하고, 찬반의견을 수렴해 공법의 보완을 모색했다. 이에 세종의 지시에 따라 호조는 전답 1결마다 10, 땅이 척박한 평안도와 함길도는 7두를 세금으로 내며, 태풍이나 서리, 수해, 가뭄으로 농사를 그르친 사람에게는 조세를 면제하도록 하는 초안을 올려왔다.6 세종은 이 안을 가지고의정부·육조,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직 관리,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의 가난한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서7 보고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후 5개월이 지난 1430(세종12) 8, 호조에서는 전국적으로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고했다.8 서두에서 소개한 바로 그 수치다. 중앙의 경우에는 고위급을 제외한 3품 이하의 관리 기준, 찬성자는 현직 259명과 전직 443명이었고, 반대자는 현직 393명과 전직 171명이었다. 실록의 기록에 따라 고위 관료 및 주요 정부기관의 찬반론을 정리하면 < 1>과 같다.

 

< 1>에서 눈에 뜨이는 점은 주로 집현전과 사간원의 관리들이 찬성 입장, 의정부 대신들이 반대 입장을 보였다는 것이다. 집현전과 사간원이라는 두 기관의 특성과 개혁에 대한 젊은 관료와 중진 관료들의 관점 차이, 이해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아울러 찬성이든, 반대든 문제 인식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양측 모두 현재 상태의 공법 초안이 부자에게 유리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불리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다만 찬성파는 세액을 명확히 정해놓음으로써 징세과정에 있어서 사적 개입을 방지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줄인다는 공법의 도입취지에 공감하고, 공법의 단점에 대해서는 척박한 토지와 비옥한 토지를 상세히 구분해 세액을 차등화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다. 토지를 9등급으로 세분화하고 재해 정도에 따라 추가로 세금을 감면해주자는 의견이 그것이다. 반면에 반대파는 공법이 가진 단점에 무게를 두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매년 답험을 하는 기존 제도가 더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반대파는 공법이 부자에게 유리한 데다가 특히 흉년이 오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게 되는 등 담세 능력을 반영하지 않은 제도이므로 실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양측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다보니 세종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공법 개혁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여론조사 결과도 영향을 미쳤는데, 애초에 세종은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통해 백성의 지지를 확인함으로써 개혁의 돌파구로 삼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가 않았다. < 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비옥한 토지가 많은 경상도와 전라도 등에서는 찬성이 압도적이었고 척박한 토지가 많은 평안도, 함길도 등에서는 반대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 이는 비옥한 토지를 가진 부자는 찬성했을 것이고, 척박한 토지를 가진 가난한 이들은 반대했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법이 실시되면 형평성을 잃을 소지가 다분하니 도저히 이 상태로는 법을 시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세종은 공법 도입을 잠정 연기하게 된다.

 

 

4. 변수의 발생과 개선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세종이 다시 공법을 진행시키자 이번에는 재해가 닥쳤다. 1434(세종 16)에는 대규모 수재가 일어나황해도는 1170결이고 평안도는 6800, 함길도는 1500, 강원도는 700결이 유실됐다.”9 경기, 황해, 충청도의 해안고을에도 바닷물이 넘쳐 벼가 침수되었는데, 손실이 3320결이었으며 노인들의 말에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조수였다고 한다.”10

공법을 반대했던 지역들이 대거 피해를 입은 것이다. 1437(세종 19)에는 전국적으로 흉작이 발생하면서 역시 공법을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했는데, 평안도 백성들은 공법의 폐지를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고11 , “인심이 흉흉하여 공법이 싫다고 신문고를 치며 상언하는 자들이12 자주 나타났다. 공법을 찬성했던 신하들 중에서도 시행을 연기하자는 주장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영원토록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강경론도 등장했다. 세종도 어쩔 수 없이각 도의 조세는 공법을 버리고 예전대로 손실법을 따름으로써 민생에 이바지하라13 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5. 토론과 학습을 통한 개선

 

그러나 공법을 시행하겠다는 세종의 집념은 중단되지 않았다. 그는 공법의 취지를 손상시키지 않는 선에서 법의 단점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세종은 공법을 처음 제안했을 때부터 최종 확정될 때까지 15년간 조정 내 다양한 협의와 찬반 토론을 직접 이끌었는데, 매우 지루하고 고단한 과정이었음에도 절대로 대충 넘어간 적이 없었다.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거나 반대파에게 언짢은 내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 과정에서 황희(黃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공법 반대론을 주도하며 공법의 허점을 지적하고 세종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세종은 이러한 황희를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황희의 의논대로 하라14 며 반대파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황희 또한 비록 논의과정에서는 강하게 반대했더라도 집행과정에서는 수석 재상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세종이 공론의 장을 열어 건강한 논쟁을 유발시킴으로써 대립되는 신념 간의 타협과 합의를 이끌어내고자 했다면 황희는 일종의 레드팀을 이끌면서 임금의 편향을 막고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보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어 세종은 역사적 사례와 고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공법을 보완할 방안을 찾아보라고도 지시했다. 그 결과 하연(河演) <서경> <맹자>의 세주(細註), <주례> 등 고문헌을 분석해 맹자가 인용한용자의 우려는 후세의 제후들이 공법을 잘못 운용했기 때문에 나온 것임을 규명했고, 우임금이 처음 공법을 만든 정신에 따르면 토지등급에 따른 정액세와 농사의 작황에 따른 세율 변동을 병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15 공법을 유지하면서도 답험손실법의 장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와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6. 테스트베드 운영

 

세종은 공법의 시범 실시에도 많은 공을 들였는데, 당초 조정은 지역별 공법찬반여론과 토지의 비옥도를 감안해 경상·전라·충청 세 도를 상등으로 삼고, 경기·강원·황해 세 도를 중등, 함길·평안 두 도를 하등으로 삼아 전세를 차등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각 도별도 테스트베드 역할을 할 고을을 선택해 공법을 시범적으로 실시해 본 결과, 같은 도라도 고을마다 토지의 품질이 현격히 다르고 같은 고을 안에서도 토지마다 비옥도가 각기 다름을 확인한다.16

 

이후에도 유형별, 지역별로 공법을 꾸준히 시험함으로써 하등급 토지는 더욱 세분화해서 나눌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수확의 결손에 영향을 주는 것은 토지의 품질보다는 수재나 한재, 바람이나 서리, 황충(메뚜기) 때문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연간 농사상황에 대한 등급평가를 3단계에서 9단계로 정밀하게 수정한 것은 이 때문이다.17  1444(세종 26) 전제상정소에서 확정한 전품을 6등급으로 나누고 연분을 9등급으로 나눈 조세법, 우리에게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으로 알려진 제도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18

 

요컨대 세종의 공법은 토지소유주로부터 답험권을 회수하고, 세금 징수과정에서의 사적 개입을 차단하며, 불필요한 징세비용을 줄이는 등조세 확실의 원칙을 구현하고자 한 개혁이었다. 또한 토지 등급에 따른 정액세를 백성들의 농사작황과 담세능력을 고려해 가감하도록 한 선진적인 정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러한 법안이 마련됐던 것은 아니다. 각기 조세의확실성평등성을 중시한 공법 찬성파와 공법 반대파가 만들어낸 토론과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이들이 서로의 견해를 좁힐 수 있었던 것은 양쪽 모두 가치의 기준을 정책수요자인 백성에게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이 만족할 정책은 무엇인가라는 점에서 합의도출이 가능했던 것이다. 오늘날 기업에서도무엇이 고객을 위한 것인가’ ‘고객이 만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에 초점을 맞춘다면 유사한 갈등이 일어났을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국가경영의 CEO로서 세종의 역할도 빼놓을 수가 없다. 혁신을 주도하고 대립되는 집단 간의 협력을 이끌어내며, 수요자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리더십과 커뮤니케이션이 요구된다. 리더십과 커뮤니케이션이 모든 단계에서 그 조직이 끊임없이 학습하고 개선하도록 하는 촉매제가 되려면 리더는 무엇보다 구성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어야 한다. 확고한 전략과 목적 아래 이것이 왜 필요한지 구성원을 납득시켜야 하고, 때론 자신을 굽혀서라도 더 좋은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피드백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 세종은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개선을 시도했다. 윌리엄 에드워드 데밍(William Edwards Deming)에 따르면 품질관리를 위해서는계획-실행-점검-조치’(PDCA) 사이클이 반복돼야 한다. 목표를 수립했으면 그에 따른 계획을 실행하고 성과를 측정한다. 그리고 그 성과를 분석해 애초 설계했던 계획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무엇을 보완해야 할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수정된 계획을 도출하고 다시 실행하는 반복 사이클을 거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시행착오가 쌓이면서 점차 정답에 가까워질 수가 있다.

 

테스트베드(Test Bed)의 운영도 같은 맥락이다. 무릇 처음부터 완벽한 계획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계획을 집행하기 전에 일정한 공간에서 이를 시범적으로 운영해봄으로써 적은 비용으로 불확실성을 낮추고 실패의 위험을 예방하는 것이다. 현장의 다양한 상황과 변수들을 반영하고, 과연 이 계획이 기술적으로 실현이 가능한지를 검증하며, 구성원들이 이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세종은 특히 테스트베드의 장소 선정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테스트베드는 계획의 타당성을 시험하기에 가장 적절한 공간이어야 하며, 산출된 결과를 그대로 확산할 수 있는 대표성을 가진 곳이어야 한다. 가령 경상도에서 공법을 시범실시하기 위해 먼저 테스트베드를 운영한다면 경상도의 지역적 특색과 자연환경, 인구비례의 평균치를 가진 지역이 선정돼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테스트베드 지역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과 유사해야 그 결과를 수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되 모든 역량을 도모하여 일을 성사시켜라.” 세종이 즐겨 인용했던 공자의 말이다. 여기서 두려워하라는 것은 일을 시행하는 것을 주저하라는 말이 아니다. 과연 이 일이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하라는 것도 아니다. 섣부르게 결론을 내거나 무작정 밀어붙이지 말고 빈틈없이, 조심스럽게 추진해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고, 예상되는 리스크에 철저히 대비하며 끊임없는 개선을 통해 일을 완성시켜가라는 의미이다. 세종의 공법은 이러한 메시지를 충실히 실천한 것으로, 오늘날 비즈니스에도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김준태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 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도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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