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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후계자 교육

엄혹한 조기교육, 사도세자의 비극 낳고 신뢰와 눈높이 교육, 정조의 성공 낳다

노혜경 | 181호 (2015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영조의 사도세자 교육 특징

 

무리한 조기교육으로 부담 가중, 과도한 간섭, 간접 경험 위주의 교육, 인색한 칭찬

 

영조의 정조 교육 특징

 

체계적인 눈높이 조기교육, 자율권 인정, 풍부한 현장 경험 위주의 교육, 무한 신뢰와 격려

 

영조의 후계자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시사점

 

지나친 기대와 부담을 지우는 조기교육은 금물. 현장 경험과 이론의 균형, 신뢰에 기반한 온전한 권한위임이 중요

 

 

 

영조와 사도세자

 

1762(영조 38) 음력 윤5월 창덕궁 휘령전 앞, 영조 앞으로 불려나온 사도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제는 하라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도 잘 듣겠으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휘령전은 왕비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하필 이곳에서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것은 영조가 죽은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의 위패에 참배하러 왔을 때, 정성왕후의 혼령이 나타나 영조에게 이렇게 속삭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하, 변란이 가까이 닥쳤습니다!” 그리고 변란은 역모이고, 역모의 주모자가 사도세자라는 말까지 한 모양이다. 영조는 즉시 주변 신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대들도 지금 정성왕후의 혼령이 내게 말한 소리를 들었는가?” 영조는 칼로 땅을 두드리며 세자에게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세자는 살려달라고 빌며 울부짖다가 돌부리에 머리를 박아서 이마에 피가 흘렀다. 주위 신하들이 극력으로 막아서자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뒤주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세자는 뒤주에서 8일을 버티다가 결국 사망했다. 당시 세자의 나이는 28, 영조는 69세였다.

 

이런 비극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사도세자의 정신병 때문이다, 신하들의 이간질 때문이다, 당파 간의 이견으로 희생양이 됐다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러나 이런 해석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합리화하기 위한 사후의 변명이나 정치적 입장이 들어간 해석일 뿐이다. 오히려 사도세자, 정조에게까지 평생의 비극이 된 이 사건의 진짜 원인은 세자에 대한 영조의 잘못된 교육방침 때문이었다.

 

영조의 실수는 조선의 전통적 교육방식의 장점과 원칙을 무시한 데서 발생했다. 원래 조선의 전통적인 교육법은 지금처럼 학습능률을 올리거나 단기간에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데 맞춰져 있지 않았다. 조선의 교육은 지식교육 혹은 기능교육이 아니라 지식과 품성, 인성교육이 결합된 것이었다. 최종적으로는 인성에 맞춰진 교육방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세자 교육에서는 또 하나 중요한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부모의 간섭과 과잉교육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천천히 차분하게 통치술과 리더십을 배우고, 국왕으로서 필요한 품성을 가르치는 것이 세자 교육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과도한 문제의식과 성급함 때문에 기존 교육 전통을 지키지 않았고, 모든 장점과 방어 장치를 파괴했다.

 

1. 무리한 조기교육

 

1737(영조 13) 음력 8, 영조는 사도세자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태어난 지 15개월로, 겨우 걸음마를 떼는 아이를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보통 7∼9세는 돼야 세자로 책봉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할 관원도 임명했는데,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광좌와 좌의정 김재로였다. 마치 대학교수를 영아교육에 투입한 모양새였다. 거기다 두 사람은 소론과 노론을 대표하는 정치가였다. 왕의 명령도 잘 듣지 않을 정도로 칼날 같은 대립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절대로 편안하고 바람직한 교육환경은 아니었다.

 

이토록 무리한 환경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에는 영조의 포부와 자괴감, 초조함이 깔려 있었다. “내가 박복해서 즉위한 이후에도 백성들에게 혜택을 준 것이 별로 없지만 반드시 당파를 없애겠다는 목표는 끊임없이 추구해왔다. 그런데도 여러 신하들은 아직도 마음을 돌리지도 않고 벼슬도 꺼리고 있다. 그러나 내 자손들이 나의 뜻을 따르고 이어준다면 저 당파를 주장하는 자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영조는 즉위 초 당파의 분열구도를 탕평으로 쉽게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치의 고질병을 치료하기란 생각 외로 쉽지 않았다. 영조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것은 자신의 대에서뿐만 아니라 다음 대에도 계속 이어져야만 하는 왕실과 신하 간의 기나긴 싸움이라고 판단했다. 영조가 서둘러 조기교육을 진행한 이유다. 영조는 아들을 한 사람의 훌륭한 군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사명감과 문제의식, 능력을 모두 이어받아 대를 이어서 싸울 수 있는 분신으로 키우려 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했다.

 

노론과 소론의 대표를 세자의 스승으로 앉힌 것은 정치적 배려도 있지만 영조 자신이 처한 환경과 문제의식을 자신의 분신에게 그대로 조성해준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의욕이 과했다. 화합하는 정치적 환경을 만드는 일이란 다 큰 어른도 하기 힘든 일이다. 실제로 영조 역시 소론 영수 이광좌와 노론 영수 민진원을 화해시키려고 억지로 악수하게 하는 등 화합을 위한 제스처를 취해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영조는 두 살배기 어린 아이에게 막대한 부담을 지워가며 정작 자신도 못하는 일을 해보라고 내모는 꼴이었다. 학습 대상의 눈높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교육의 전형적 예다.

 

 

 

 

영조는 세자의 타고난 장점을

 

더욱 개발해 주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판단하기에

 

단점으로 보이는 부분을

 

없애는 데 집중했다.

 

2. 과도한 간섭

 

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은 원래 세자시강원에서 담당하게 돼 있었다. 담당하는 관원은 정1품의 사()와 부()를 비롯해 정7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18명이었다. 사는 영의정이, 부는 좌·우의정 중 한 사람이 맡았다. 왕세자의 교육은 서연(書筵)이라고 한다. 세자 책봉 후 바로 성균관에 입학하는 의식을 치르고, 실제로 서연관(書筵官)들이 세자에게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는 하루에 조강, 주강, 석강 등 3차례 이뤄졌고, 한 달에 1∼3차례 모든 당상관이 참여하는 회강(會講)이 열렸다. 교재는 <소학>

<효경> <논어> <맹자> <대학> <대학연의> <상서> <주역> <예기> <춘추좌전> <통감강목> 등이었다. 공부 방식은 교재를 암송하고, 문장의 의미를 익히며, 세자가 의문 나는 것을 스승이 풀어주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명망 있는 대신과 신뢰할 수 있는 문신을 교육관으로 임명하고 함께 공부함으로써 세자가 국왕으로서의 리더십과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평생 신뢰를 쌓을 수 있는 동료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조선시대 왕세자 교육제도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영조는 이런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 영조는 세자가 스승들과 함께 자유롭게 토론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커녕 교육 과정에 심하게 간여했다. 한 번은 세자시강원에 들러 사도세자에게 한나라 임금 중에 경계해야 될 사람이 누군가를 물었다. 그러면서스승들 가운데 누가 가장 간절하게 경계하는 말을 해줬는가라며 세자의 스승들이 가르치는 교육방식을 점검했다. 영조 자신이 생각하는정답을 세자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누구고, ‘오답을 유도하는 이들은 누구인가를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학습 분위기는 세자의 스승들이 서로 눈치를 보게 해 세자를 올바로 지도할 수 없게 만들었다.심지어 영조는 자신의 질문에 사도세자가 대답을 잘못하면 세자에게 그 스승을 자를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세자의 체면이 말이 아닐 거라며 은근히 위협하기까지 했다. 이는 사도세자에게 막대한 심적 압박감으로 작용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스승에 대한 평가를 하도록 함으로써 당파 간에 라이벌 싸움을 붙이는 꼴을 만들어서 세자가 교육과정 속에서 당쟁의 긴장감을 체험하도록 했다. 당쟁이 극도로 예민한 시대를 살아왔던 영조는 아마도 사도세자가 교육과정에서 당쟁의 긴장 속에 당파의 거물들을 다루는 방법과 그들에게 속지 않고 휘둘리지도 않는 방법을 배우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오히려 역효과만 낳았다. 순수하게 학문을 논해야 할 자리에서까지 정치적 당쟁 논리가 결합되면서 세자는 공부에 온전히 몰입할 수 없었고 스승들을 전적으로 믿지도 못하게 됐다. 왕세자 교육을 통해 평생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신하들을 만들어 간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구조였던 셈이다.

 

심지어 영조는 세자 스승들의 교육 방식에 시시콜콜 간여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자신이 직접 교육에 나서기까지 했다. 그는 <상훈(常訓)> <자성편(自省編)> <훈유(訓諭)> <심감(心鑑)> <정훈(政訓)> 등 자신이 손수 지은 지침서를 사도세자에게 암기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계획했던 방향으로 세자를 끌어가려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나라가 태평성대일 때 태어나 조금도 어렵고 고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자를 깨우쳐주기 위해 교재를 만들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상훈>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책을 위한 지침서이고, <자성편>은 경전에 수록된 임금들의 정치이념과 역사서에서 본받을 만한 제왕들의 업적을 영조가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훈유>는 사도세자에게 지어준 교훈과 경계의 글이고, <심감>은 마음을 성찰하는 책이며, <정훈>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훈계한 글이다. 이렇게 손수 지은 책을 가지고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러놓고 춘궁관에게 지침서를 읽게 한 다음 직접 자신의 경험과 함께 각 부분을 설명하고 훈계를 내리는 방식으로 교육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자신의 체험과 깨달음을 토대로 직접 만든 교재를 가지고 세자 교육에 나선 경우는 거의 없다. 어찌 보면 매우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조 스스로가처음에는 세자가 가르침을 받아들여 깨닫는 것이 많았는데 재작년에 이르러서는 아예 가르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토로했던 것처럼 영조의 노력은 한계를 드러냈다. 영조의 교육방식이 문제였다. 영조는 세자의 타고난 장점을 더욱 개발해 주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판단하기에 단점으로 보이는 부분을 없애는 데 집중했다. 더욱이 영조는 교활할 정도의 지략가였던 반면 사도세자는 고지식하고 우직한 성품으로, 두 사람의 스타일 자체가 너무 달랐다. 그런데도 영조는 사도세자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기는커녕 반드시 개조해야 할 성품이라고만 봤다. 이에 따라 영조는 자신이 손수 만든 교재로 사도세자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과 방식을 억지로 강요하며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후계자로 만들려고 했다. 그 결과 사도세자는 갈수록 아버지를 어렵게 여기며 대면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고 심지어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3. 간접 경험 위주의 교육

 

조선에서는 국왕이 직접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던 친경례(親耕禮)가 있었다. 영조는 벼를 심는 행사가 있던 날 세자를 데리고 나갔다. “오늘은 후원(後苑)에 벼를 심는 날이라 내가 세자에게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려 한다며 여러 신하들과 세자에게 농사에 관한 시를 짓게 했다. 또 이날 전국에 농사를 독려하는 권농교서를 내리고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영조가 주관하는 행사에 세자가 참여한 것이다. 명목은 세자에게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궁궐에서 이뤄지는 행사는 어디까지나 행사일 뿐이었다. 좀 심하게 말하면전시행정을 위한 쇼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왕을 비롯한 관료로서 궁궐에서 대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세자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부분은 영조가 시범으로 보이는 농사짓는 장면을 보고, 영조가 운을 내려준 시에 대응해 시를 짓고, 영조가 교서를 내리는 것을 보고, 사면령을 내리는 것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백성들을 대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었다.

 

사도세자가 영조를 모시고 서울을 벗어나 능에 제사하러 간 것은 약관의 나이도 훌쩍 넘긴 22세 때가 처음이었다. 조선에서는 세자가 아닌 왕자의 경우 일정 나이가 되면 궁 밖에서 생활하도록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궁궐 밖의 세상을 알게 되지만 사도세자의 경우 너무 어릴 때 세자가 돼 궁 밖 출입이 상대적으로 어려웠고, 경험해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14세 때부터 대리청정을 했고 선대 왕릉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영조의 명령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경기지역으로 나가는 게 더욱 늦어졌다. 그만큼 사도세자에겐 지역주민들과 접촉할 수 있는 현장 교육이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영조는 자신이 직접 쓴 교재의 내용을 사도세자가 암기하도록 했고,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주입식 교육에 몰두했다. 영조의 의도에 따라 계획되고 의도된 행사에 사도세자를 참여시켜 영조 자신이 처리하는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세자가 자신의 모습을 본받도록 했다. 이는 살아 있는 현장 교육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궁궐 내부에서 영조의 경험담과 주위 신하들, 세자의 스승들의 입을 통한 간접 경험이었고, 고전과 경전, 영조의 지침서 등의 책을 통한 교육이었다. 철저하게 이론 위주의 교육으로 현장을 경험할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영조의 지침서는 영조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이 반영돼 있긴 하지만 받아들이는 세자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간접 경험일 뿐이었다.

 

4. 인색한 칭찬

 

조선시대 국왕의 경연 기록이나 세자 관련 기록을 보면 대개 세자를 격려하고 자부심을 키우는 게 세자 교육의 방향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만큼 왕위 후계자에게는 엄청난 지식과 노력, 강한 자제심이 요구됐다. 그래서 엄하게 혼내며 질책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훌륭한 군주는 강한 자부심과 자기 통제력을 지녀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위해 격려하고 칭찬하는 방식을 택했다. 잘못을 시정하거나 고쳐야 할 경우에도 네가 잘못했다가 아니라 성군의 사례를 들어서 위대한 사람은 이렇게 했다는 식으로 충고했다. 보통사람은 이런 행동을 하지만 위대한 군주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자부심을 북돋워 이겨내게끔 했다.

 

그런데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늘 칭찬에 인색했다. 세자 본래의 성품과 기질이 자신의 기대와 달라서 그걸 바꾸고 개조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온전한 칭찬으로 끝나지 않고 꾸짖음과 쉬지 않는 질책, 더 강한 요구가 계속 덧붙여졌다. 올라온 상소에 대한 대답 문서를 내려줄 때에도 영조는네가 내려준 대답도 잘한 것이지만 엄숙하게 지켜서 잃는 것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칭찬으로 끝내지 않고 꼭 사족을 붙였다. 주위의 신하들도 영조가 너무 과하게 사도세자를 몰아붙이는 광경을 목격하고는전하께서 지나치게 엄하게 하기 때문에 동궁이 늘 두려움과 위축된 마음을 품고 있어서 전하를 대하는 데 머뭇거림이 심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심기를 편히 하시고 만일 동궁에게 잘못이 있으면 조용히 훈계해서 타이른다면 서서히 나아질 것입니다라고 조언했을 정도였다.

 

사도세자에 대한 불신은 바로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강요하는 데서 나타났다.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선위소동과 함께 왕의 업무를 대행하게 하는 대리청정을 들 수 있다. 영조가 첫 번째 선위소동을 일으킨 것은 1739(영조 15) 음력 1월이었다. 세자의 나이 겨우 5살 때였다. 탕평을 외쳤던 영조가 정국의 상황이 혼란에 빠지면 종종 내던진 카드였다. 세자의 상태와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그야말로 정국전환용 카드에 세자를 이용한 셈이다. 후계자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도세자는 영문도 모른 채 영조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서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가지게 됐다. 이런 부담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까지 4번이나 더 겪었다.

 

 

사도세자는 14살 때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이 또한 두 살에 세자로 책봉된 것처럼 영조의 조급함과 같은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아마도 영조는 세자를 변화시키려면 국왕의 자리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결과는 지금까지 하던 간섭과 꾸중에 과부하를 더한 꼴이었다.

 

사도세자가 정신병이 있었다는 설도 많다.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남편인 사도세자는 기본적으로 심성이 바르고 영특한 사람이지만 부모의 사랑, 특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성장 배경 때문에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사람을 죽인다거나 하는 각종 정신병에 시달려서 괴이한 행동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이 병은 과도한 부담에 의한 무기력 상태, 회피기제 발동, 스트레스 분출 등이 뒤범벅된 행동들이다.

 

교육에는 질책도 필요하고 과중한 책임과 부담감을 이겨내는 일도 필요하다. 그러나 강한 훈련을 할 때에는 항상 극복 가능한 부담에서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 영조는 대리청정을 시키면서 사도세자에게 감당할 수 없는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 이중삼중으로 점검했고, 꾸중으로 부담감을 더했다.

 

더욱이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놓고도 여전히 간섭을 일삼았다. 아마도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실망하고 걱정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영조는 대리하는 세자가 처리하도록 규정된 일을 재차 확인하곤 했다. 심지어 세자가 이미 내린 명령에도 전국 단위의 하교를 다시 내리곤 했을 정도다. 대리청정을 무색케 하는 상황이다. 결정적으로 영조는 균역법 같은 중요한 문제에서 세자를 완전히 배제했다. 이는 사도세자 역시 아버지인 영조에게 실망하는 계기가 됐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신하들은 나 몰라라 했다. 어떤 이들은 세자의 명령을 대놓고 거부하기도 했다. 한번은 영조가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맹자>를 강의하게 하는 자리에 세자를 참석하게 했는데, 그 자리에 세자가 찬선(시강원의 실질적 책임자) 민우수와 여러 서연관을 불렀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대리청정하는 세자가 상참(常參, 전체 조회)을 하려고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료들을 세 번씩이나 불렀는데도 아무도 참석하지 않아서 조회 자체가 무산되는 일도 벌어졌다. 처음에 세자에게 처리를 독려했던 신하들조차 이제는 영조에게 모든 걸 물어보고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할 정도였다.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영조는 세자에 대한 실망감이 갈수록 커져갔고, 동시에 자신의 실망이 세자에게 전해지면 세자가 오히려 음모를 꾸밀지 모른다고 걱정하게 됐다. 이것은 결국 사도세자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러면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과연 반성을 했을까?

 

영조와 정조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영조는 왕위 후계자 2세와 3세를 모두 교육시킨 임금이 됐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세자가 죄인의 몸으로 용서를 구하자 어린 세손도 세자 뒤에 꿇어앉았다가 영조의 명으로 신하에게 안겨 나갔다. 뒤주에 들어가던 순간, 쫓겨나 있던 세손이 다시 뛰어들어 울며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영조에게 빌었다. 세손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세손은 1762(영조 38) 사도세자가 죽고

2년 반이 지나서야 효장세자의 아들로 공식적인 후계자가 됐다. 사도세자 사후 곧바로 세자는사도세자’, 세자빈에게혜경궁이란 이름을 부여하고 세손에겐동궁이라 부르게 했지만 2년 반 동안 동궁은 방치된 상태였다. 아버지의 죽음과 당시 상황으로 인해 자신의 안위가 불안할 수밖에 없었고 심리적으로도 엄청난 타격이었을 것이다. 정조가 동궁시절 공부에만 몰두하고 책 읽기를 수백 번씩 반복했다고 회상하는 것도 이런 원인이었다.

 

 

반역죄로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서 영조의 후계자가 된 것은 정조에게 심리적인 안정을 가져다줬다. 이런 선포는 정조를 위한 제스처였을 뿐 아니라 사도세자를 반대했던 벽파에 대한 영조의 메시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도세자 때와는 다른 영조의 후계자 교육이 시작됐다.

 

1. 체계적인 눈높이 조기교육

 

영조는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 군주는 반드시 뛰어나야 되고 관료들과의 무수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갖은 계략과 지혜, 학문 등 모든 면에서 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이기 때문에 영조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일찍부터 철저하게 특별 교육을 시켰듯이 정조에게도 조기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조기교육의 방식에서 사도세자 때와는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정조가 태어난 1752(영조 28)은 정조의 형이었던 의소세손이 사망한 해였다. 정조의 경우 의소세손의 동생으로 태어나서 왕손이라 불러야 했지만 의소세손이 사망한 직후 태어났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원손이라고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기 전부터 정조에게도 조기교육방침을 적용했다. 정조가 5살이던 1756(영조 32) 영조는 원손의 체계적인 교육을 위해 원손의 스승을 지정하고 <동몽선습>

을 가르치도록 했다. 원래 왕실의 교육법에 왕의 자손이 어릴 때 공부를 돕는 보양관을 정하는 것이 법에 정해져 있었지만 영조는 이를 더욱 확대, 강화해 원손의 사부를 다시 만들고 직제를 정했으며 교육내용과 방법까지 새로 정비했다.

 

영조는 지나치게 조급증을 보였던 사도세자의 경우와 달리 <동몽선습>을 가르칠 때 주석은 빼고 원문만 가르치게 했고, 교육 일정도 3일에 한 번씩 교육하게 하는 등 완화된 자세를 보였다. 주석은 대개 원문에 비해 10배나 길고 어려운 글자도 많으며 복잡하다. 따라서 주석은 빼고 원문만 가르친다는 것은 너무 복잡하고 긴 주석은 가르치지 않고 한두 줄의 원문을 가르치고 글자 위주로 가르친다는 의미다. 반면 사도세자의 경우는 7살 때 <동몽선습>을 시강원에서 교육했지만 원문과 주석은 물론이고 암기해서 분석까지 하게 했다.

 

1756, 어린 정조는 이미 <소학초>를 끝내고

<동몽선습> 공부에 들어갈 정도로 영특했기 때문에 이 정도면 충분히 별 부담이 없는 교육과정이었을 것이다. 이때는 사도세자가 죽기 6년 전이었는데 이미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걸 보면 영조가 조기교육은 해야 하지만 너무 몰아 세워서는 안 된다는 반성을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비록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자신의 태도, 즉 과도한 질책과 부담을 주는 태도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본인도 인식하고 반성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조기교육의 방식에 있어서 정조를 대할 때는 사도세자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취했다.

 

정조는 8세였던 1759(영조 35)에 왕세손으로 책봉됐다. 이는 사도세자가 15개월 때 세자로 책봉된 것과는 달리 보편적인 시기의 책봉이었다. 이때부터 세손강서원에서 본격적으로 교육이 시작됐다. 영조는 자신이 세제가 됐을 때 <소학>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해 내고 세손에게도 <소학>부터 시작하도록 했다. 이는 정조도 자신과 같은 왕이 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교육방법에서는 상당히 변화된 자세를 보여준다.

 

영조는 세손강서원 관리를 사·부뿐만 아니라 좌·우유선(左右諭善)과 좌·우권독(左右勸讀)을 더 둬 확대했다. 1품인 사·부에 추가해 종2품에서 종4품의 좌·우유선, 5품의 좌·우권독을 실질적인 세손의 스승으로 삼았다. 1759(영조 35) 당시에는 유선으로 대제학 김양택(金陽澤)과 부제학 서지수(徐志修), 권독으로 김원행(金元行)과 송명흠(宋明欽)을 임명했다. 모두 학문이 뛰어난 인재와 지방에서 높은 학덕으로 이름난 사림들이었다. 사도세자 때에는 교육 환경에서조차 당쟁의 긴장을 더해준다는 목적하에 노·소론의 대표자를 스승으로 앉혔지만 세손 교육에 있어서는 정치적 목적을 접고 오로지 본연의 교육에만 집중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종의 연착륙을 시도한 영조의 개선된 방식은 사도세자 때와는 달리 확실히 효과를 봤다. 조기교육을 시도한 이유는 국왕으로서 확고한 사명감을 고취하는 것과 이 험한 세대에 왕 노릇을 하려면 모든 면에서 신하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이 목적을 확실히 전수받았다. 정조는 즉위 후에 줄곧군사(君師)’ 임금인 동시에 스승, 즉 국민의 스승으로까지 자처할 정도로 학문적인 성과와 군주로서의 자부심을 가졌다. 이런 자각은 정조를 정조로 만든 중요한 요인이자 개성이었는데, 이는 영조가 심어준 것이었고 영조 교육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자신의 태도,

 

즉 과도한 질책과 부담을 주는 태도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본인도 인식하고

 

반성했던 것 같다.

 

2. 자율적인 교육방식

 

영조는 정조의 후계자 교육에서 교육과정을 무시하지 않고 단계마다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교육을 시행했다. 신뢰하는 스승을 확보하는 데 노력했고, 세손의 교육을 믿고 맡김으로써 세손을 보필할 수 있는 인재를 넓히려고 힘썼다.

 

1768(영조 44) 필선 신광리가 영조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영조는세손이 지금 공부하고 있는 과정이 어디냐고 물었다. 신광리는서연에서 <시전(詩傳)>의 비궁장(閟宮章)을 공부했고, 소대(召對)에서는 <강목(綱目)>의 한원제권(漢元帝卷)을 학습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시전>

이 끝나면 어느 책을 공부하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질문했다. 신광리는사부가 <맹자>로 정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영조와 신광리의 대화는 교과과정에 관한 것이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대화지만 이 평범함이 변화였다. 영조는 더 이상 사도세자 때처럼 세손에게 스승들의 강습 방식을 확인하거나 선생의 학습방식을 의심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학식이 높고 연륜이 있는 관료들의 능력을 인정하고 세손을 성심껏 가르치도록 독려했다. 심지어 자신의 공부를 위해 사직을 청하는 시강원 관리에게그대는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시강원에 근무하며 열심히 공부해서 나의 세손을 도와주도록 하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원래 시강원의 관원은 세손(세자)이 왕이 되면 평생을 같이할 충성스럽고 양심적인 관원을 맺어 준다는 의미도 있었다. 영조는 비로소 조선의 이 전통으로 복귀했다. 세손을 도울 수 있는 신하들을 모두 세손의 편이 돼 보필할 수 있도록 할아버지 영조가 그 환경을 조성하기에 힘썼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교육을 위해 직접 만들었던 교재를 정조에게도 가르쳤다. 다만 이전처럼 직접 가르치려고 들지 않고, 시강원에 넘겨 세손의 스승들이 가르치도록 했다. “이제 너를 위해 <자성편>을 문답형식으로 다시 편집해 춘방(春坊)에 보낼 테니 너는 그것을 항상 옆에 두고 경계하며 반성하도록 해라라고 하면서 정조가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재편집까지 해서 줬다. <중용> <대학> 중 후세를 경계할 만한 내용을 정리한 <경세문답(警世問答)>을 추가로 만들고 <자성편>과 함께 시강원의 교재로 쓰도록 했다. 영조가 한 일은 그저 이 글을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는 정도였다. “너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둬야 한다. <자성편> <경세문답>을 읽어서 구절구절 깊이 유념한다면 이것이 곧 뜻을 계승하는 효도다.” 이 대화를 보면 사도세자에게도 이렇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3. 현장 교육

 

영조는 정조에게 경연에 참석해서 함께 토론하도록 했다. 이는 조선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경연이란 국왕이 주관하는 학습의 장인 동시에 국정 토론자리였다.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시행, 발전됐다. 세조와 연산군 때 잠시 폐지되기도 했지만 곧 부활돼 고종 때까지 존속한 제도였다. 영조는 정조를 일찌감치 경연에 참여시킴으로써 국왕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을 알게 하고 국왕의 위치를 체험하게 했다. 한편으로 정조가 경연에 참석한다는 사실은 정조의 불안정한 위치에 대한 보증이 되기도 했다.

 

영조는 세손 정조에게 서연을 통해 꾸준히 왕위 후계자로서의 이론교육과 영조 자신의 경험담, 지침서를 통한 간접교육을 시켰다. 동시에 경연을 통해 미리 실무를 눈으로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에도 갖지 못했던 경연 참석 기회였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자신이 주관했던 경연을 폐지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도세자 때와 가장 확연히 달라진 교육법은 현장실무를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이다. 영조는 정조를 정식 후계자로 책봉한 이후로 왕의 행차나 행사 대부분에 세손을 데리고 다녔다. 정조가 13살 정도부터 영조와 동행하기 시작했으니 사도세자가 22세 때 서울 밖 경기지역으로 처음 나갔던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영조가 선대 왕릉에 참배 갈 때나 효장묘, 선원전, 육상궁 등으로 참배 갈 때는 늘 세손이 영조를 모셨다. 때때로 영조가 세손에게 대신 참배를 맡기기도 했다.

 

 

궁 밖 행차는 궁궐 내 행사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궁궐 내 행사에는 제한된 인원이 참가한다. 그만큼 세손의 노출이 제한돼 있고 세손이 겪을 수 있는 경험의 폭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궁 밖 행차는 많은 주민들을 만나게 된다. 영조는 그 점을 노렸다. 첫째, 세손이 영조의 굳건한 후계자로 보일 수 있었고, 둘째, 세손이 영조와 함께 직접 주민들을 만나 그들의 얘기를 같이 들으면서 현장 경험을 늘릴 수 있었다. 영조가 늘 자신의 최대 치적이라고 여겼던 청계천 공사에도 직접 세손을 데리고 나가 공사현장을 돌아보게 했다. 생생한 현장이 아니라 궁궐에서 개최되는 행사에만 참여해 제한적이고 의도된 상황에만 노출됐던 사도세자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영조는 춘당대(春塘臺)에서 문무과를 볼 때나 숭현문(崇賢門) 밖에 나가 삼일제(三日製) 시험을 볼 때에도 세손을 데리고 나갔다. 세손을 옆에 앉혀놓고 영조는 직접 작은 가마를 타고 돌며 유생들과 대화했다. 삼일제의 경우 서울과 지방에서 각각 1등을 한 사람에게 직부전시(直赴殿試)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국왕이 직접 인재를 선발하는 광경을 세손이 모두 지켜보게 함으로써 후일 세손이 국왕이 될 때를 대비할 수 있도록 했다. 모화관에서 수어청과 총융청 군사들을 사열할 때도 세손이 영조를 모시고 수행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할 때조차 인사권과 군권을 철저하게 영조가 주관했던 것과는 판이하다. 영조는 과거시험장에 세손을 데리고 나감으로써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세손이 곁에 두고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인재를 미리 만나게 했고, 군사들이 사열하는 장소에도 세손을 데리고 나감으로써 군권 최고지휘관으로서의 자세를 배우도록 한 것이다. 모두 왕위 후계자로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할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하려는 영조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4. 무한 신뢰와 격려

 

영조가 정조를 경연장이나 현장에 자주 데려갔던 이유는 어려서부터 현장학습과 정치실습을 시키려고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과 정조의 특별한 관계와 섭리를 끊임없이 인식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1767(영조 43) 음력9, 영조는 문묘에 참배를 마치고 춘당대에 들러 선비들의 시험장에 들렀는데, 이때에도 세손을 데리고 나갔다. 영조는 하교를 내렸다. “오늘은 바로 내가 1722(경종 2)에 스물아홉 살로 (성균관에) 입학하던 날이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대성전에서 참배할 줄 꿈에라도 생각했던가! 마땅히 기쁨을 나타내는 도리가 있어야 한다며 행사를 준비한 관료들과 유생들에게 각각 상을 내렸다. 영조는 행사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고 정조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흐뭇한 광경을 연출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조는 정조를 칭찬하며 기를 살려주려고 노력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이하고 있음을 무수히 언급하면서 정조가 자신의 분신임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사도세자에게는 늘 자질이 부족하다며 기를 꺾어놓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했지만 정조에게는 정반대였다. 한번은 영조가 <서경>의 여러 문구에 대해 뜻을 묻고 우리나라에 그 사안을 적용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질문했다. 정조는자손이 선조의 뜻을 잘 이어받지 못하면 어떻게 그 덕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을 했다. 영조는오늘은 더 이상 공부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기뻐할 정도였다. 또 어떤 날은 영조 마음에 꼭 드는 대답을 하는 정조에게만약 이런 식으로 공부를 확충해 나간다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다. 오늘 같은 날은 기념할 만하다며 함께 있던 정조를 가르치는 스승들에게 선물을 내려주기도 했다. 이런 대화를 보면 칭찬에 인색하고 무슨 일을 해도 개선할 점을 지적하던 사도세자의 경우와는 확실히 달랐다. 물론 정조의 자질과 적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영조의 태도에 변화가 있었던 것 역시 분명하다.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때도 확실한 믿음을 줬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확실한 권한이양을 했다. 사도세자 때 있었던 여러 차례의 선위소동이나 세자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정국전환용 대리청정과는 확연히 달랐다. 영조는 정조를 후계자로 완전히 정한 후 정조에게 확실한 믿음을 줬다.

 

사실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때 몇몇 신하들로부터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다. 영조가 대리청정 명령서를 작성하는 자리에서 홍인한은 승지가 명령서를 쓰지 못하게 막고, 영조의 명령이 무엇인지 다른 신하들이 들을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영조는 웬만한 처리는 모두 정조에게 맡기겠다고 강력하게 명령했다. 이처럼 세손이 대리청정을 시작하게 된 시점에도 영조의 강력한 지지가 뒷받침됐다. 뿐만 아니라 영조는 궁궐 경비 문제까지 일체를 정조에게 위임하는 명령을 내릴 정도로 깊은 신뢰를 보였다. 특히 궁궐순찰군[巡監軍]을 임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궁궐 경비 문제 전체를 동궁에게 맡겼다. 이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할 때는 제외됐던 사안이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할 때는 국방문제와 인사권 등은 철저하게 영조가 맡았고, 사도세자가 처리하는 일조차 그 처리과정을 영조가 보고받음으로써 사도세자가 온전히 처리하는 일이 많지 않았던 것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이 밖에도 영조는 상소문에 대한 대답문서를 작성하는 것에서부터 형사사건에 대한 임금의 판결문 작성 등을 모두 세손이 담당하게 했고 인사권도 행사할 수 있게 했으며 결재 도장도 동궁에 보관토록 했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의 일부를 맡기는 것이라며 전례 운운했지만 실제로는 정조가 대리청정을 하고 영조의 권한 대부분을 위임했다.

 

21세기 경영자에게 주는 시사점

 

영조의 사도세자와 정조에 대한 교육 사례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첫째,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에 따른 조기교육은 득보다 실이 크다. 적당한 시기에 자녀의 적성과 품성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 둘째, 칭찬을 할 때에는 기를 세워줄 수 있는 온전한 칭찬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해야 자부심과 책임감을 키워갈 수 있다. 셋째, 말단에서부터 챙기는 현장경험과 이론을 겸비한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지막으로 권한을 위임할 때는 확실한 믿음을 바탕으로 온전하게 위임해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능력에 맞게 권한을 위임해주고 맡긴 일에 대해서는 믿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사도세자 때처럼 겉으로는 권한을 모두 준 듯하지만 매사를 다시 확인하고 처리하는 방식은 주위 사람들조차 위임받은 사람을 무능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영조가 사도세자와 정조에게 행한 교육방법의 차이는 기업 창업주의 경우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자수성가형 오너 1세대는 대개 문제의식이 강하다. 따라서 아들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며들들 볶는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자신이 가진 문제들을 2세가 모두 다 해결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과도한 기대가 되레 2세대의 기를 꺾어놓기 쉽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손자대로 가면 좀 여유가 생긴다. 손자에겐 격려를 하게 된다. 3세대가 성공하는 경우는 대개 이런 경우가 많다. 실패하는 경우는 2세대에 창업 때의 문제의식이 약화되고, 이것이 반복돼 3세대쯤 가게 되면 거의 바닥에 이르는 경우다. 기업뿐만이 아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집안의 교육은 정말 어렵다. 특히 자식대의 교육은 더욱 어렵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가르치는격대교육(隔代敎育)’이 바람직한 교육방법의 하나로 각광을 받았다.

 

격대교육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주들을 가르치면서 앞선 세대의 지혜와 경험을 대물림해 준다는 의미가 컸다. 격대교육의 모범 사례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예로 드는 이는 16세기 대표적인 관료이자 학자인 이문건이다. 그는 자신의 일기인 <묵재일기>를 통해 하나뿐인 자식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훈육을 너무 심하게 하는 등 미숙한 면이 많았다고 시인했다. 예를 들어 이문건은 아들이 시를 해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무가 부러지도록 매질을 하기도 했고, 뺨을 때리거나 머리카락을 한 움큼 뽑아 버린 적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이문건은 손자 교육에선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손자 이수봉은 커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인데, 조정에서 이수봉에게 상을 주려고 했을 때 남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며 사양할 정도로 겸양을 갖췄다. 이런 성품은 직접 손자를 키우며 육아일기 <양아록(養兒錄)>을 썼을 정도로 손자 교육에 공을 들였던 이문건의 가르침을 통해 형성된 것이었다. 18세기의 수학자, 천문학자로 알려진 황윤석도 어릴 때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할머니에게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박학다식한 그의 학습태도는 할머니로부터 교육받아 습관화된 것이었다. 이런 격대교육은 비단 조선시대뿐 아니라 현대의 기업이나 일반 가정에서도 충분히 적용해 볼 수 있는 교육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격대교육과 함께 주목해볼 만한 조선시대의 자녀 교육 방식으로 개성상인, 이른바송상의 훈육 방식을 들 수 있다. 송상들은 자식을 훌륭한 상인으로 키우기 위해 자녀를 다른 상인의 가게에 점원으로 보내고, 그곳에서 능력 있는 점원으로 인정받기까지 열심히 노력해서 다른 가게의 운영방식과 노하우를 경험하도록 했다. 이후 아버지의 가게로 와서 자신의 다양한 경험을 폭넓게 응용해 더 발전된 가게를 만들기에 힘쓰도록 했다. 이렇게 서로 자녀를 바꿔서 교육하는 방식은 현대 경영자들에게도 좋은 시사점을 준다. , 처음부터 ‘2라는 후광을 등에 업고 아버지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하기보다는 본인의 독자적 능력으로 다른 회사에 취직해 그곳에서 축적한 경험과 역량을 바탕으로 훗날 아버지 회사에 돌아와 기여하도록 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업 환경은 늘 변한다. 오너 1세대가 기업을 만드는 데 주안점을 뒀다면, 2세대는 기업을 본 궤도에 올려놓고, 3세대는 유지·발전시켜야 하는 과제가 있다.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는 책임자는 제대로 된 후계자 교육에서부터 시작된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가정과 기업은 어떤지 묻고 싶다. 진정한 교육의 의미, 혹은 바람직한 교육방식은 무엇인지에 대해 새로 한번 검토해 봐야 할 시점이다.

 

노혜경 덕성여대 연구교수 hkroh68@hotmail.com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한국사학)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을 지냈고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로 활동했다. 저서로 <영조어제해제6>가 있다.

  • 노혜경 | - (현)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 덕성여대 연구교수
    - <영조어제해제6> 저자
    hkroh6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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