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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의 기술전략

"진실한 사랑은 저마다의 色이 있다" 까르띠에, 그 사랑을 디자인하다

허두영 | 174호 (2015년 4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혁신, 전략

 

 

 

1850년대에는 화려한 금과 은이 큰 인기를 모았다. 경쟁사인 티파니가 세밀한 은 세공기술로 유럽시장을 공략하자 까르띠에는 새로운 소재인 백금으로 맞서기로 했다. 백금은 금이나 은보다 넓게 펴지고 가늘게 뽑히는 성질이 있어 가공이나 디자인에 대한 제약이 적었다. 백금 세공기술을 앞세운 까르띠에는 유럽 왕족과 귀족을 대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 같은 기술력에 더해 상류사회 여성들의 목소리에도 기민하게 반응함으로써 까르띠에는 하이주얼리 패션을 주도할 수 있었다.

 

1866년 남아프리카 오렌지 강 주변의 킴벌리 지방에서 15세 소년 에라스무스 야콥스(Erasmus Jacobs)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돌을 주워 누이에게 줬다. 소년의 부모는 이것을 여행객에게 무심코 줘버리는데 이 돌이 세계에서 처음 발견된 다이아몬드유레카(Eureka)’. 5년 뒤 드비어(De Beer) 형제의 농장에서 요리사 에사우 데이먼(Esau Damon) 83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 소문을 듣고 1914년까지 5만 명이 이곳을 찾아와 136만 캐럿(2722) 상당의 다이아몬드를 캐갔다. 그 결과 작은 언덕에 있던 드비어 형제의 농장에 깊이 215m, 둘레 1.6㎞의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1899년 발발한 보어 전쟁도 이 지역의 다이아몬드에 관한 이권을 두고 벌어진 사건이었다.

 

다이아몬드 광풍(Diamond Rush)을 따라 남아프리카에 온 영국의 세실 로즈(Cecil Rhodes)는 광산에 고인 물을 뽑는 증기펌프로 큰돈을 벌어 드비어 형제에게서 농장을 사들이고 광산까지 잇달아 인수하며 1888년 드비어스(De Beers)를 설립했다. 드비어스가 새로운 채광 기술로 품질좋은 다이아몬드를 대량 공급하면서 다이아몬드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프랑스 파리의아름다운 시절(Belle Epoque, 1890∼1914)’을 장식하는 대표적인 보석이 됐다.

 

다이아몬드와 백금 세공기술을 혁신하다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Louis-Franois Cartier)는 같은 이름을 가진 할아버지처럼 귀금속 세공에 재주가 많았다. 어릴 때부터 귀금속에 관심을 갖던 그는 파리에서 작은 보석상을 운영하던 아돌프 피카르(Adolphe Picard)의 공방에서 오랫동안 일을 배웠다. 1847년 스승이 죽자 공방을 인수해 간판을까르띠에로 바꿨다. 까르띠에는 특히 다른 종류의 귀금속과 보석을 조합해서 맵시를 내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기술력이 알려지면서 가게는 날로 번창했다. 1856년 나폴레옹 3세의 사촌인 마틸드(Mathilde) 공주가 카메오(Cameo)와 브로치(Broach)를 구입한 데 이어 4년 뒤 외제니(Eugünie) 황후가 거북 등껍데기로 만든 머리빗과 자수정과 금을 조합한 파뤼르(Parure, 보석 세트)를 주문하면서 까르띠에가 만든 스타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까르띠에는 여러 가지 선도적인 기술을 선보였는데 그중 가장 위대한 것이 장신구에 백금을 도입한 것이다. 1880년대까지는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같은 보석을 앉히는 재료로 주로 은()이나 금()을 사용했다. 당시 은 세공기술이 뛰어났던 티파니는 이를 강조하며 본진인 미국 시장을 넘어 적극적으로 유럽 시장을 공략했다. 유럽 시장을 지키고 있는 경쟁사인 티파니를 이기려면 혁신적인 재료와 기술이 필요했다. 경쟁 기업들이 모두 화려한 금과 은에만 관심을 기울일 때 까르띠에는 새로운 소재인 백금을 생각해냈다.

 

과거 주로 쓰이던 은이나 금은 넓게 펴지고(전성·展性) 가늘게 뽑히는(연성·延性) 성질이 있어 가공하기 쉽지만 보석을 고정하기에는 약간 무르다. 반면 백금은 전성과 연성이 뛰어나 섬세하게 가공할 수 있으며, 열팽창률이 낮고, 상대적으로 단단한 편이어서 보석을 안전하게 물고 있을 수 있다. 또 보석의 고유한 빛을 은은하게 반사해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장점도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해 열렬히 탐구하고 이를 제품에 적용했던 까르띠에는 남들보다 먼저 백금의 가치를 알아차렸다. 하마터면 보통 금속으로 남을 뻔했던 백금을 귀금속 반열에 올려 놓았다. 다이아몬드와 백금을 도입해 더 섬세하고 화려해진 까르띠에 스타일은 하이주얼리(High Jewelry)로 패션을 주도했다.

 

 

 

프랑스에서 벨 에포크(Belle Epoque, 1890∼1914) 시대는 몰락하는 왕족과 떠오르는 신흥 부자가 경쟁적으로 가문과 부()를 뽐내는 시기였다. 백금을 기본 소재로 꽃, , 가지 모양으로 보석을 화환처럼 엮은갈란드 스타일(Garland Style)’이 특히 인기였다. 당시는 여성의 목과 어깨와 가슴을 훤히 드러내는 데콜테(dëcolletëe) 양식의 칵테일 드레스나 이브닝 드레스가 유행했다. 상류사회 여성들은 정숙함을 표시하기 위해 갈란드 스타일의 화려한 목걸이로 드러난 맨살을 가렸다. 까르띠에는 주얼리를 주문한 여성의 피부 색깔은 물론 가슴의 넓이와 굴곡을 고려해서 목걸이를 설계하는 등 주요 고객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또 당시 여왕이나 왕족 여인의 머리를 장식하는 장신구로 인기를 모은 티아라(Tiara)에서도 기술력을 뽐냈다. 백금 세공기술을 앞세운 까르띠에는 경쟁사보다 훨씬 유연하고 자유롭게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었다. 백금의 전성과 연성 덕분에 다른 회사들보다 다양하고 섬세한 디자인을 만드는 데 기술적인 한계가 적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까르띠에의 티아라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1902년 영국 알렉산드리아 왕비는 까르띠에에게 왕관과 티아라 27개를 주문하기도 했다. 영국 외의 유럽의 주요 왕실에도 두루 보석을 납품했다. 에드워드 7세는 까르띠에를왕의 보석상이요, 보석상의 왕(Jeweler to Kings, King of Jewelers)’이라고 칭찬했다.

 

 

새로운 재료와 문화로 스타일을 창조하다

당시 왕족의 장신구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최고 전문가는 중세부터 이어온 세 부류의 길드(guild)에서 배출됐다.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을 녹여 주물을 뜨는 길드, 루비나 사파이어 같은 보석을 깎고 세팅하는 길드, 에나멜(칠보, 七寶)을 칠하고 불에 구워 고운 빛을 내는 길드다. 까르띠에는 서로 다른 기술을 융합해 새로운 스타일의 장신구를 창조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뿌리가 다른 이 세 길드에서 최고의 재료와 기술을 도입해 섬세하고 화려한까르띠에 스타일’을 창안해냈다. 1850년대에 금과 에나멜을 위주로 하는 세공술을 다이아몬드와 다른 보석으로 확장한 데 이어 1890년대에는 새로운 귀금속인 백금을 사용하면서 까르띠에 스타일의 토대를 굳혔다. 새로운 재료와 기술에 대한 식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타일이 기술로만 가능한 건 아니다. 까르띠에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듯 새로운 문화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해석하면서 고유한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교통의 발달로 교류가 늘어나기 시작한 아프리카, 이슬람, 인도, 중국, 일본 지역의 새로운 문화와 기술을 앞장 서서 도입한 것이다. 이집트에서 평면적인 도형(파라오, 스핑크스, 피라미드), 그리스에서는 메두사나 키메라 같은 신화의 괴물을, 이슬람에서 세밀한 꽃무늬를, 인도에서 불교나 힌두교의 상징(연꽃, 코끼리), 중국에서는 용()과 태극(太極) 같은 도교(道敎)의 문양을, 일본에서는 국화나 기모노 같은 모티프를 받아들였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보석 세공기술 위에 이 같은 다양한 시도가 더해지자 소비자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루이 까르띠에의 손자인 루이조세프(Louis-Joseph)는 예술이나 문화는 물론 과학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두루 관심을 갖고 까르띠에 스타일을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새로운 재료와 기술을 토대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인 까르띠에는 장신구를 몸매와 의상에 맞춰 디자인하는 패션의 시대를 열었다. 하이주얼리(High Jewelry)로 하이패션(High Fashion)을 이끌어낸 것이다. 루이 까르띠에는 오트쿠튀르(haute couture·고급 의상실)로 하이패션을 선도한 찰스 워스(Charles Worth)와 친분을 다지면서 패션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새로운 재료와 기술을 토대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인

까르띠에는 장신구를

몸매와 의상에 맞춰 디자인하는

패션의 시대를 열었다.

 

 

 

보석을 사랑의 스토리텔링으로 디자인하다

까르띠에의 핵심가치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하이패션을 선도하는 것 등이 해당되겠지만 진정한 가치는 오랫동안 가꿔온 스토리텔링에서 탄생했다. 까르띠에와 관련한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창업자의 손자 루이조세프와 까르띠에 디자이너였던 장 투생의 러브스토리다.

 

장 투생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명문가 자제들과 교제하면서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를 일궈낸 코코 샤넬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1930∼1940년대에 샤넬이 하이패션을 주도했다면 투생은 하이주얼리를 선도했다. 루이조세프는 샤넬에게서 투생을 소개받고 오랫동안 연인으로 지냈지만 신분의 차이로 온 가족이 반대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투생에게 주얼리 디자인을 가르치고 까르띠에의 수석디자이너로 채용했다. 투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꽃, , , 키메라 같은 소재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곁들여 까르띠에가 자랑하는 명품 컬렉션을 하나하나 늘려 나갔다. 루이조세프에게 투생은 부부의 인연 대신 예술적인 영감을 나누는 연인으로 남았다.

 

그들의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는 모티프가 바로 팬더(panther·아프리카 표범). 아프리카를 여행하다가 표범(팬더)을 본 루이조세프는 투생에게팬더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투생은 팬더를 보자마자오닉스, 다이아몬드, 에메랄드브로치!”라고 외쳤다. 팬더를 보고 기발한 보석디자인을 떠올린 것이다.

 

팬더 가죽으로 된 모피를 입고 이것으로 거실을 장식할 만큼 팬더에 빠진 투생은 팬더컬렉션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영국 윈저공과 윈저 공작부인을 비롯해 레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 리처드 버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의 귀족과 유명 인사들은 모두 결혼식 등 특별한 날 까르띠에를 사용했다. 창업자 가문에서부터 이어지는 까르띠에의 러브 스토리텔링은단 한 사람만을 위한 고결한 사랑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다.

 

까르띠에는 두근거리는 고백을 앞두고 망설이는 연인들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인다. ‘진실한 사랑은 저마다 색깔과 이름이 있다(True love has a colour and a name·까르띠에의 광고문구)’. 내가 생각하는 진실한 사랑의 색깔과 이름이 ‘Cartier’의 색깔과 이름을 닮은 것 같아 깜짝 놀라게 된다.

 

 

허두영 테크업 대표이사 huhh20@techup.co.kr

필자는 서울대에서 재료공학을, 방송통신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전자신문과 서울경제신문 기자를 거쳐 <과학동아> 편집장을 지냈다. CNET Korea를 창간하고 소프트뱅크미디어 대표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과학 수필가로 등단해 <사랑하면 보이는 나무> <신화에서 첨단까지>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재료를 고르고 다듬는 역량에서 명품이 탄생한다는 걸 깨닫고 이번 칼럼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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